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5화



씻고 나온 것인지 가운 차림의 유신이 이화를 보며 물었다. 이화는 채 돌아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들린 유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사진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앗! 안 돼!’
순간 책상 뒤로 떨어지는 사진을 잡기 위해 이화는 무작정 책상 위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몸과 함께 덩달아 무언가가 쭉 미끄러지는 느낌이 났다. 아차 하는 순간, 이미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책상 뒤로 퍼즐 조각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툭, 툭, 툭, 투둑……. 막 태어나고 있던 퍼즐이 순식간에 생명을 잃고 저 세상으로 낙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그렇게 웅장하고 잔인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책상 위에는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게 쭉 뻗어 있는 이화의 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유신이 뜨악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돌처럼 굳었다.
“죄, 죄송해요. 사진을 잡으려다가 그만…….”
“…….”
“이를 어째.”
이화는 유신의 눈치를 보며 허둥지둥 퍼즐이 분해된 곳으로 갔다. 유신은 입까지 얼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로 그가 퍼즐이라는 것에 가지고 있는 애착은 엄청났다. 그것은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과 정리병, 고독함 등 그의 성격을 총집합한 결정체였다. 유신은 한 조각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몇 번이고 고심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는 완전한 패닉에 빠졌다.
그때였다. 매니저 도형이 급히 유신을 찾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형님! 유신 형…….”
도형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유신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도형을 돌아보았다.
“뭐야.”
“아, 그게…… 급한 일인데 형님이 전화를 안 받으셔서…….”
“누가 함부로 2층에 올라오라고 했지?”
이화는 뜨끔했다.
“죄송합니다. 근데 정말 급한 일…….”
“대체 그 급한 일이라는 게 뭔데! 그게 대체 뭐길래 감히 내 공간까지 쳐들어와서 말을 하는 거야! 여기가 네 집 안방이야? 내가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로 하고 2층에는 웬만하면 올라오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2층도 아니고! 내 방도 아니고! 내 방 안 깊숙이 있는 이 퍼즐방까지 들어오면서까지 해야 하는 그 말이라는 게 뭐냐고 대체!”
그것은 마치 도형을 이용해 이화에게 하는 말 같았다. 이화는 처음으로 유신의 말투에서 살기를 느껴 그 자리 그 자세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게 형님, 내일모레 잡힌 화보 촬영 파트너가 강주원이라고…….”
“근데 뭐!”
유신은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 된 퍼즐로 가득 차 있는 바람에 도형의 말을 듣지 못하고 소리쳤다. 유신의 시선은 다시 바닥에 흐트러진 천 피스의 퍼즐과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이화에게 꽂혀 있었다. 때문에, 도형은 분명 ‘강주원’이라는 이름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유신의 뇌에까지 전달되지 못했다.
“네? 형님 괜찮으세요? 화보 촬영 취소…… 안 하세요?”
“취소를 왜 해! 그게 얼마짜린데!”
얼결에 그는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도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그까짓 일을 가지고 아주 급한 일이라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도형은 유신을 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형님 진짜…… 이게 아닌데…….”
“시끄러! 볼일 다 봤으면 당장 나가. 당장!”
결국 도형은 유신의 불같은 호통에 못 이겨 쫓겨나듯 2층을 나갔다. 퍼즐방에는 다시 유신과 이화 둘만 남게 되었다. 이화는 계속 이 상태로 있다가는 다리가 마비될 것 같아서 슬그머니 일어나 유신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 그게…… 실은 하루 종일 아무 말씀이 없으시기에 무슨 할 일이 없을까 해서 여쭤 보려고…….”
유신은 이화의 말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오늘 내로 이 퍼즐 다 원상 복귀 해 놓으세요.”
“네……. 네?”
“오늘 내로 이 퍼즐 아까처럼 다 맞춰 놓으라구요. 안 그러면 황이화 씨가 지금 이 퍼즐 꼴이 될 테니까.”
지금 이 퍼즐 꼴이라면, 산산조각 나고 완벽히 분해돼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꼴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설마 해고? 이화는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참아야 했다. 유신은 앞으로 틈만 나면 이렇게 해고를 들먹이며 그녀를 골려 먹을 것 같았다. 의뢰인을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유신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천 조각의 퍼즐을 오늘 내로 다 맞추어 놓으라니, 이화는 눈앞을 덮쳐 오는 막막함에 화가 치밀었지만 오늘만큼은 본인의 잘못이 분명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닥친 상황을 고도의 인내심으로 버텨 내기로 하고 바닥에 떨어진 조각들을 그러모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오기와 승부욕이 발동했다.
‘그래. 이까짓 거 다 맞춰 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러나 끓어오르던 오기는 퍼즐 세 조각을 겨우 맞추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직도 텅 비어 있는 퍼즐판을 보는 순간 삼수에서 떨어진 뒤 갈피를 못 잡는 수험생처럼 막막한 심정이 들어 손에 쥔 퍼즐들을 다 구겨 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SP 경호의 A급 요원 황이화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나 싶어 울컥하기도 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신을 불러도 그는 코털 하나 비치지 않고 냉정한 목소리로 진정 책임감이란 게 있다면 이 사태를 돌려놓으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화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어 결국 다시 젖 먹던 힘까지 오기를 끌어내어 눈이 닳고 손이 닳도록 퍼즐을 맞추었다. 그렇게 이화는 이틀 밤을 꼬박 눈이 빠져라 퍼즐만 맞추며 보내야 했다.

* * *

이틀 뒤, 이화는 그토록 기다리던 유신의 야외 스케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이화와 유신은 매니저, 코디 등과 함께 밴을 타고 화보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이화는 그저 지옥 같은 마왕의 저택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예정과 다르게 이틀 동안이나 퍼즐방에서 퍼즐을 맞췄더니, 이전에는 귀찮고 덥게만 느껴지던 햇볕이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이화는 삭막한 차내 분위기도 띄워 볼 겸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날씨 진짜 좋네요. 이런 날은 도시락 싸서 피크닉 가면 최곤데.”
“황이화 씨.”
“네?”
“소풍 갑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죠.”
“경호원에겐 늘 긴장하는 태도와 묵직함, 책임감 등이 가장 중요한 거 몰라요? 왜 이리 매사에 촐싹거립니까? 애들처럼. 이래서 내가 어디 믿고 맡길 수 있겠어요?”
“촐싹거리다니요. 제가 언제요?”
“과하게 밝고 행동적이라는 말로 정정하도록 하죠.”
“이봐요!”
“다 왔는데요.”
두 사람 사이의 신경전에 도형이 끼어들며 말했다.
“내리셔야 돼요, 형님.”
“알아.”
“근데 형님.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전에 분명히…….”
“시끄러. 넌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유신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도형은 주먹을 꼭 쥐고 화를 참으며 말했다.
“아우, 저걸 그냥 진짜. 뒤통수에 침을 확 뱉어 버릴까 보다.”
이화는 처음으로 도형에게 강한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다.

화보 촬영장에 들어간 유신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주원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현장의 많은 스태프들과 사진작가, 감독이 유신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음에도 그는 강주원에게 정신과 시선이 모두 팔린 나머지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반면 이화는 강주원과 눈이 마주치자 어설프게 피해 버렸다. 주원은 그런 이화를 보더니 뜻 모를 미소를 짓고는 계속해서 이화를 주시했다.
이화는 주원이 자신을 기억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예전에 주원을 공항에서 만났을 때 이화의 의뢰인이 그녀의 이름과 직업을 말한 것은 물론,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메인으로 한 수많은 기사들이 터져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꽤 오래 된 일이었고 무엇보다 주원 같은 톱스타가 그런 한낱 해프닝을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주원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화만 쳐다보았다. 그의 날렵한 눈매며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는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도형을 따로 불러낸 유신이 무섭게 고함을 쳤다. 이화는 그 옆에 어정쩡하게 붙어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형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받아쳤다.
“형님이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내가 상대가 강주원이라는 걸 몰랐을 때 얘기고!”
“모르다니요? 그때 제가 분명히 말했는데…….”
“그때라니. 언제? 네가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그때요! 제가 형님 퍼즐방까지 급한 일 있다고 찾아갔을 때. 그때 분명히 상대가 강주원이라고 말씀드렸는데, 형님이 그게 뭐! 라고 하시면서 화보 촬영 한다고 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뭐?”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진 유신의 표정을 보며 이화가 끼어들었다.
“맞아요. 그때 저도 들었는데. 도형 씨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지유신 씨도 그렇게 대답했고요.”
“말도 안 돼…….”
유신은 이화가 퍼즐을 쏟았던 때의 충격과 비슷한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는 한참 동안 묵묵히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얼굴빛을 싸늘하게 바꾸고는 도형을 향해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내렸다.
“나 이거 못해. 네가 알아서 뒤처리 하고 와.”
“예? 형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유신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밴으로 향했다. 이화와 도형이 황급히 유신을 쫓아갔다. 이화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강주원과 지유신은 분명 시운의 절친한 친구였다. 이틀 전 봤던 퍼즐방의 사진도 세 사람이 사이좋게 어울려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유신은 주원을 보더니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하고 있었다.
‘대체 두 사람은 무슨 사이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런 궁금증도 잠시, 일은 터지고 말았다. 유신은 밴에 올라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주원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온 것이었다. 주원은 결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유신에게 다가왔다. 이화는 괜히 자신까지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주원에게서는, 어쩐지 이상하게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랜만이다.”
그가 유신을 향해 말했다. 유신은 싸늘하게 그를 응시하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원이 얼핏 웃으며 이화 쪽을 보았다. 이화는 눈이 마주치자 조금 당황해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주원이 이번엔 그런 이화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황이화 씨.”
“네……. 네?”
얼떨결에 대답을 한 이화는 깜짝 놀라 주원을 보았다. 놀라기는 유신도, 도형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는 분명 ‘황이화 씨’라는 말을 했다. 오늘은 명찰도 재킷 안쪽에 깊게 들어가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원은 분명, 이화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 고마웠어요.”
주원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은 물론 이화의 이름까지도. 이화는 그의 그런 섬세한 관심이 꽤 반갑게 느껴졌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다행이네요.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었거든요.”
두 사람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모르나 유신은 왠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다분히 유신을 의식한 듯한 주원의 말투가 거슬렸고, 오랜만에 보는 그의 미소가 거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미소. 화사하지만 차가워 보이기도 하는 미소. 금방이라도 사람을 홀릴 것만 같은 묘한 미소. 주원은 분명 그런 미소를 띤 채 이화를 보고 있었다.



5.
엘리트 경호원


찰칵, 찰칵, 찰칵.
유신은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 앞에서 프로다운 포즈를 잡고 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은 막 달궈진 화로처럼 뜨겁게 들끓고 있었다. 이화는 매니저 도형과 함께 그 모습을 촬영장 한구석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상대 배우가 강주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무작정 촬영을 펑크 내고 돌아가려 했던 유신이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는 단 하나, 주원의 말 때문이었다.
“설마 도망치려는 건 아니지?”
대놓고 정곡을 찌르며 심기를 건드리는 주원 때문에 유신은 오기가 발동했다. 여기서 가 버린다면 정말 도망치는 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유신은 벌써부터 진 기분이 들었지만 아닌 척하려고 몹시 애썼다.
하지만 유신은 그를 신경 쓰느라 연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개별 촬영 때는 그럭저럭 잘 넘어갔지만 두 사람이 함께 찍는 커플 촬영 때는 좀처럼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여유롭게 촬영하는 주원과는 달리 유신은 어딘가 긴장한 듯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신 씨 좀 더 부드럽게. 좀 더 편안한 미소 부탁해요.”
결국 감독에게까지 한 소리를 듣고서야 유신은 정신을 차렸다. 주원 때문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신인처럼 충고를 받은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 어디선가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유신이 그 웃음소리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재빨리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범인은 촬영장 한구석에서 도형을 보며 웃고 있는 이화였다.
‘저 여자가…….’
왠지 모르게 유신은 이화의 웃음이 거슬렸다. 순간 이쪽을 보던 이화와 눈이 마주쳤다. 험상궂은 유신의 표정에 기겁한 듯, 이화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원이 살짝 웃는 것이 보였다. 유신은 순간 이화의 웃음보다 그의 웃음이 더 거슬리게 느껴졌다.
아무튼 컨디션 최난조의 화보 촬영이었다.

촬영 중 잠시 쉬는 시간. 주원과 유신이 화보 촬영을 함께 한다는 소식에 유명한 연예 뉴스에서 인터뷰를 왔다. 유신은 굳이 인터뷰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소속사의 권유와 주원의 승낙으로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다.
“두 분이 함께 계신 모습 정말 오랜만에 봬요. 5년 전 드라마 <중독>을 같이 하신 이후로 거의 처음이시죠?”
유신은 가식적인 미소만 지을 뿐, 리포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공식적인 자리는 처음이죠.”
주원이 대신 답하며 위기를 모면했다.
“두 분이서 굉장히 절친한 사이로 유명하신데 왜 그동안 이렇게 함께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신 건지 궁금하네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글쎄요. 이유라기보단 그냥 스케줄이 안 겹쳤을 뿐인데……. 좋아해 주신 팬 분들께 죄송하네요. 하하.”
“항간에 두 분이 사귄다는 루머도 있었는데. 신주커플이라고 해서 화제였거든요. 그럼 그간의 불화설을 일축하시는 건가요?”
신주커플이라는 얘기에 유신의 눈썹이 잠시 들썩였다.
“유신 씨 게이라는 소문 있는데, 모르셨구나. 인터넷에 쳐 보시면 나와요. 왜 강주원 있잖아요. 그분이랑 둘이 신주커플이라고 팬 페이지까지 있는데 진짜 모르셨나 봐요. 요즘 네티즌들 장난 아니에요. 합성사진에 가상 뮤직비디오에 얼마나 열을 올리는데……. 어머, 진짜 모르셨구나.”
가당치 않은 루머라고만 생각했는데, 저번에 이화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하하하. 그렇게 봐주시면 되겠네요. 저흰 언제나 화목합니다.”
주원이 유신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억지로 미소만 짓고 있던 유신은 당황한 나머지 잠시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렇게까지 하며 여유롭게 연기하는 주원을 보니 또다시 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유신은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며 과장된 리액션을 해 보였다.
“그럼요. 아주 행복합니다. 하하하하하.”
두 사람의 사이를 아는 이화는 코웃음을 쳤다. 마주한 두 사람의 얼굴이 그토록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주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구만. 이중인격자.”
이화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유신이 잠시 이화 쪽을 흘긋거렸다. 이화는 딴청을 피우며 괜스레 도형을 보고 싱긋 웃었다.
“왜 날 봐요. 공범자로 만들지 마요.”
도형이 질겁하며 물러났다.
“비겁하긴 자기 연예인이랑 꼭 닮았네.”
인터뷰가 끝나자 유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주원에게서 떨어져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로 갔다. 메이크업을 고치면서 촬영 내내 그의 심기를 건드렸던 이화를 쳐다보았다. 집에 가서 한마디 제대로 해 주어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는데, 갑자기 주원이 이화에게 가는 것이 보였다. 유신은 두 사람에게 집중했다.
“힘들죠?”
주원이 먼저 다정하게 물었다. 이화는 그녀답지 않게 조금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아뇨. 하는 일도 없는데요, 뭐.”
촬영 전에 둘이 얘기하는 것을 살짝 엿들은 바로는, 주원이 귀국할 때 이화가 도와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귀국한 지 꽤 된 주원이 이화를 기억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스쳐 지나는 게 유신 같은 톱스타들이었다. 물론 이화가 가벼운 인상은 아니지만 유신은 아무래도 주원의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하는 일이 없으니까 더 힘들겠죠. 지루하고 귀찮고 피곤하고.”
이화는 주원의 다정한 태도가 싫지 않았다.
“실은 저번에 너무 고마워서 제가 개인 경호를 부탁하려고 했는데. 유신이가 먼저 선수를 쳤더라구요.”
“그러게요. 하하. 사람 볼 줄은 알아서.”
“유신이랑 많이 친한가 봐요?”
“어우, 아니요. 친하긴요. 유신 씨가 워낙 까다로워서 친해지기 힘든 타입이에요.”
유신의 미간이 좁혀졌다.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모습은 심히 보기 언짢았다. 게다가 이화가 주원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을 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난 어때요?”
“네?”
“나도 친해지기 힘든 타입인가?”
유신은 주원의 질문에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분명 얼핏 보기에도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수작을 거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무렴 유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상위급 연예인이 경호원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었다.
“글쎄요. 힘든 타입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쉬운 타입이라고 하기도……. 잘 모르겠는데요.”
이화가 어색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놀고들 있네.’
유신은 주원이 이화에게 대놓고 작업을 거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톱스타들의 권위마저도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을 보며 완전히 넋이 나가 있는 유신에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말했다.
“다 됐어요.”
유신은 듣지 못했다.
“저기, 오빠.”
“…….”
“유신 오빠.”
“어?”
“다 됐는데요.”
“어, 그래.”
“촬영 시작할 것 같아요. 얼른 가 보세요.”
유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촬영을 하러 발을 옮겼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또요?”
“그럴 것 같아서요.”
주원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촬영을 하러 갔다. 유신에게서는 냉랭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주원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좋아 보이는 컨디션으로 촬영에 임했다.
이화는 한구석에서 두 사람이 다시 촬영을 시작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원에게서는 어딘가 멋지고 훈훈한 ‘오빠 친구’의 환상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반면 유신에게서는 그저 사나운 고등학교 일진 같은 느낌만 풍겨져 나왔다. 그녀는 문득, 한 달간 개인 경호로 일하게 된 상대가 유신이 아니라 주원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그것은 엄청난 아쉬움과 근무 의욕 상실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탈의실에 들어간 유신은,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주원과 마주쳤다. 주원은 카메라와 사람들이 있는 밖에서와는 다르게 싸늘한 얼굴로 유신을 지나쳤다. 그대로 나가려는데, 유신이 문을 닫고 그를 붙잡았다.
“무슨 생각이야.”
주원이 돌아보았다.
“이번엔 하다하다 일개 경호원이야?”
“…….”
“너 여자 보는 눈 없는 건 진작부터 알았지만 이번엔 좀 심하단…….”
“신경 꺼.”
주원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서로 간섭할 만큼 가까운 사이 아니잖아, 우리.”
“부정은 안 하냐?”
“아니. 해. 그 여자 ‘일개’ 경호원 아니고 황이화 씨야. 직업 가지고 배경 가지고 사람 무시하는 버릇 그만 버려. 보기 거북하다.”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웠다고 편을 들어?”
“그만해.”
주원이 등을 돌리고 문고리를 잡았다.
“너만 나 싫은 거 아니고, 너만 나 끔찍한 거 아니고. 나도 똑같으니까.”
“…….”
“네 목소리 듣기 역겨워.”
주원은 그 말만 남기고 나가 버렸다. 유신은 그 자리에 남아 허탈한 웃음만 내뱉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