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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화보 촬영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이화는 유신을 뒤따라가다가 짧은 사진기 소리를 들었다. 빠르게 뒤를 돌아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뭔가 불길한 마음이 들었지만, 하루 종일 사진기 소리를 들어서 후유증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차에 올랐다. 유신은 가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화는 싸늘한 분위기를 만회해 보려고 몇 번 농담도 시도해 보았지만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도형이 백미러로 자제하라는 눈치를 보냈다. 유신이 극도로 조용할 때에는 그만큼 예민하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도형은 진작부터 입에 지퍼를 달고 단단히 잠그고 있었다. 이런 때 잘못 건드렸다가는 직장은 물론 생명까지 날아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가 멈추었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도형은 심지어 도착했다는 말까지 하지 않았다. 유신은 알아서 차에서 내렸고 도형과 이화도 뒤이어 내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형님.”
유신은 도형의 인사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문으로 발걸음 했다. 도형은 이화에게도 짧게 인사를 하고 다시 차로 돌아갔다. 도형이 돌아가고, 유신이 막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찰칵. 다시 한 번 사진기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이화뿐 아니라 유신도 들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유신이 물었다. 이화는 대답 대신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때마침 누군가 달아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화는 무작정 그쪽으로 달려갔다. 이화의 갑작스런 행동에 유신도 긴장한 얼굴로 숨을 죽였다.
소리로만 들리던 움직임이 마침내 검은 실루엣으로 나타났다. 범인은 도둑고양이처럼 날쌔게 뛰었지만 이화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이화는 실루엣이 보이자마자 달려가 서너 걸음 만에 그를 붙잡고 급소를 쳐서 쓰러뜨렸다.
이화의 민첩함과 짧고 정확한 공격에, 보고 있던 유신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아무리 경호원이라지만 범인이 남자일 경우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발이 움찔했었는데, 이화는 그가 달려 나갈 새도 없이 범인을 처리해 버렸다. 새삼 이화가 최상위 엘리트 경호원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너 뭐야?”
이화가 범인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어붙인 뒤 무섭게 쏘아붙였다. 유신도 그쪽으로 다가갔다.
“사, 살려 주세요. 저 그냥 팬이에요. 진짜예요.”
벌벌 떨며 말하는 범인은 아직 앳된 얼굴의 남학생이었다. 여학생이라면 모를까, 남학생이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은 단순한 팬의 행동이라고만 보기엔 조금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유신의 경우 워낙 톱스타인 데다 남성 팬들이 여성 팬들만큼이나 많아서 이런 일이 다분히 있어 왔다. 그는 학생의 순진한 얼굴을 보자 긴장이 풀렸는지 픽 웃고 말았다. 하지만 이화는 시종일관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내놔.”
이화는 학생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빼앗았다. 그리고 찍힌 사진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신을 제대로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오늘 찍은 사진은 단 두 장이었고, 두 장 모두 유신이 건물을 나오고, 또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의미 없는 사진뿐이었다. 그 마저도 흔들려서 잘 나오지 않았다.
“죄송해요. 전 그냥 유신 형님 직접 찍은 사진 하나만 갖고 싶어서 그랬어요. 진짜예요. 한 번만 봐주세요.”
학생은 애절한 어조로 말했다. 유신은 기본적으로 팬에게 약한 사람이었다. 거기다 학생이 두 손을 모아 비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 유신과는 다르게, 이화는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어디 사는 누구야? 경찰서 가기 싫음 민증이나 학생증 내놓고 가. 네가 누군지, 어떤 놈인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놔줄 순 없어.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그 사람 사진을 몰래 찍는 건 초상권 침해고 사생활 침해야. 너 같은 놈들이 몰래 찍은 사진들이 얼마나 악용되고 치명적으로 작용하는지, 그래서 너의 우상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고통 받는지, 그 나이 먹고도 모르진 않을 거 아니야?”
“죄송해요. 진짜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경찰서만은 안 돼요. 저 진짜 집에서 맞아 죽어요. 한 번만 봐주심 안 될까요?”
유신이 이화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하고 놔주자는 뜻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화는 굳건했다.
“미쳤어요? 이걸 그냥 놔두게? 파파라치가 얼굴에 난 파파라치다 글씨 쓰고 다니는 줄 알아요? 이렇게 놔줬다가 조만간 또 이런 일 벌어지고, 이 자식이 일 크게 벌려 난리 나면 그 책임은 누가 다 무는데요? 다 내 잘못 되는 거라구요. 유신 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이화가 하는 말은 모두 일리가 있고 맞는 말이었다. 학생의 절박한 표정이 안쓰러워 그냥 놓아주고 싶던 유신은, 하는 수 없이 타협을 하기로 했다.
“그럼 신분증 하나만 받아 둬요.”
유신의 말에 학생의 얼굴이 잠시 환하게 폈다. 이화는 못마땅했지만 유신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학생은 흔쾌히 자신의 신분증을 건네주고 몇 번이나 꾸벅 인사를 한 뒤 쏜살같이 도망쳤다.
“에잇, 이게 뭐야 진짜. 힘들게 잡은 고기, 지느러미 하나만 떼서 돌려보내는 꼴이잖아요.”
“지느러미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
“장난해요, 지금?”
“악의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괜히 별거 아닌 사진으로 경찰서 들락날락거리면서 이미지 망칠 거 뭐 있습니까?”
“악의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요?”
“원래 그렇게 사람을 못 믿어요?”
“원래 그렇게 우유부단해요?”
“우유부단이라니. 내가?”
“그럼 누구겠어요?”
유신은 기막힌 듯 웃었다.
“실은 마음에 안 들어서 내일 아침 계약 파기하려고 했었는데.”
“뭐, 뭐요?”
“방금 경호원 역할을 한 번이라도 해서 봐주는 걸로 알아요.”
이화는 얼이 빠졌다. 그토록 거만한 태도로 자신을 무시하는 의뢰인은 처음이었다.
“이만 들어가죠.”
“이봐요!”
유신은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뚜벅뚜벅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분통이 터져 침대 위에서 잠 한숨 못 자고 뒤척이는 이화와는 다르게, 유신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누워 있었다. 주원과의 화보 촬영이라는 끔찍한 악몽이 있긴 했지만 막 잠이 들기 전 이 순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마지막에 황당한 표정의 이화를 생각하면 짧은 웃음도 샜다.
유신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무엇 때문인지 이유를 짚을 수도 없었다. 불쾌한 것 같으면서도 좋은 것 같기도 한 이상하고 애매한 기분이 유신을 둘러쌌다.
‘차분히 생각해 보자, 차분히.’
유신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이유를 잘 모를 때는 눈을 감고, 하나하나 되짚어 보며 차분히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면 어떻게든 그 감정에 대한 이유가 나오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주원과 이화의 얼굴이 뒤섞여 보였다. 불쾌한 기분은 주원 때문이라고 쳐도, 좋은 기분이 이화 때문일 리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이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도 방금 전 대문 앞에서 날렵한 모습으로 파파라치 학생을 잡던 모습만 연신 떠올랐다.
학생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어붙이던 이화의 카리스마 있는 모습. 흥분한 와중에도 조리 있게 말을 늘어놓던 모습. 정말 경호원 같던 박력 있는 모습. 그런 모습들이 계속 떠올랐다. 유신은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자신의 감정과, 그 감정을 해석해 주지 않는 머리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더 불쾌해지는군.’
유신은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자식이 일 크게 벌려 난리 나면 그 책임은 누가 다 무는데요? 다 내 잘못 되는 거라구요. 유신 씨 제대로 지키지 못한.”
그러나 머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유신은 잠들기 직전까지 이화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마침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나오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유신 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유신 씨 제대로 지키지 못한…….
그는 생전 처음, 누군가로부터 진정으로 보호받는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6.
영화제에서 생긴 일
정각 다섯 시. 알람이 울림과 동시에 시계에서 프로펠러가 뚝 떨어져 온 방 안을 시끄럽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얼마 전 유신이 정확한 시간 약속을 요구하며 선물해 준 알람 전용 시계였다. 흡사 부메랑처럼 생긴 그것은 잡아서 다시 끼우지 않으면 계속해서 알람이 울리는 방식이었다.
이화는 잠시 짜증 섞인 몸부림을 하다가 벌떡 일어나 손을 휘휘 저으며 날아다니는 프로펠러를 낚아챘다. 처음 며칠간은 곧 죽어도 적응이 안 되더니 이제는 새벽녘 일어나 모기를 잡듯 익숙하게 끌 수 있었다.
이화는 징그러운 알람 소리에 이골이 난 듯 귀를 파며 방을 나왔다. 그리고 마침 1층으로 내려오던 유신과 마주쳤다. 유신이 한 발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완벽하게 깔끔한 유신과는 다르게 이화는 그저 귀지를 파는 처녀 귀신이었다.
“왜 벌써 내려오셨어요? 아직 여섯 시 안 됐는데.”
이화가 머쓱해하며 물었다. 유신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이화를 훑어보더니 대답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잊었습니까?”
“잊긴요. 영화제랑 일찍 내려온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괜히 내려왔겠어요? 목마르니까 물 마시러 내려왔지.”
유신은 얼핏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화는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잠 덜 깼어요?”
“내가 괜히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목이 말랐겠어요? 황이화 씨는 신체 균형이 일정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모르겠지만, 이렇게 신체 리듬이 깨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화는 목마른 것 하나에 신체 리듬까지 갖다 붙이며 열을 올리는 유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오늘은 영화제가 있는 날이니까. 원래 중요한 날은 그만큼 더 긴장해야 하는 거 모릅니까? 그러니까 내가 자다가도 몇 번씩 깨고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목이 마르는 건 당연한 겁니다. 황이화 씨도 필히 그래야 하는 거고.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유신은 잠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평소보다 3분이나 더 늦은 시간에 일어나 이제야 씻으러 들어가는 이런 나태하고 해이해진 모습을 보여 주는 겁니까.”
이화는 어이가 없어 입이 얼었다.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뛸 거니까 빨리 준비하고 나오세요.”
유신은 이화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 않고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화는 그가 들어간 주방 쪽을 쳐다보더니 온몸을 진저리 치며 욕실로 들어갔다.
“하필 걸려도 어떻게 저런 인간을……. 똥 밟았네, 진짜.”
아침 운동이 끝나고부터 저택에는 본격적으로 많은 손님들이 몰렸다. 대한민국 제1의 톱 배우 유신은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한 사전 준비를 모두 집에서 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부터 헤어 디자이너, 코디네이터 등은 모두 유신의 집으로 직접 찾아왔다. 웬만하면 외부인들을 절대 2층에 들이지 않는 유신도 오늘만은 기꺼이 아량을 베풀어 출입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그 대상은 역시 극소수의 한정된 사람들이었다.
이화는 유신이 완벽한 변신을 하는 동안 1층에서 잠자코 기다려야 했다. 방에만 있기가 지겨워지던 찰나 옆방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났다. 옆방은 유모와 가정부, 혹은 간혹 오는 요리사들이 쓰는 레스트룸이었다. 오늘은 요리사는 없으니 가정부들과 유모가 모여 떠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이화는 슬그머니 방을 나와 레스트룸으로 갔다.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이화가 묻자 가정부 아주머니 둘이 연이어 대답했다.
“어머, 우리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나 보네.”
“아가씨도 이리 와 앉아. 도련님 준비 끝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텐데.”
“그래. 마침 유모님이 진짜 재미난 얘기를 해 주시고 있었어.”
“그래요?”
이화는 얼른 유모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진짜 재미난 얘기가 뭔데요? 저도 궁금해요.”
이화가 눈을 번뜩이며 묻자 가정부들이 또 생각이 났는지 배까지 잡고 웃어 젖혔다.
“너무 그러지들 말라니까.”
유모가 웃으며 다그쳤다. 그럴수록 이화의 궁금증은 더해 갔다.
“뭔데 그래요? 유신 씨 관련된 얘기예요?”
“이건 절대 비밀 얘기예요. 이화 양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해야 돼.”
“물론이죠.”
유모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가정부 하나가 나서며 말했다.
“글쎄, 우리 도련님이 특이한 버릇이 있대. 긴장하면 남대문 닫는 걸 깜박한다지 뭐야?”
“네에?”
이화가 놀라 묻자, 유모가 가정부의 말을 수습하듯 덧붙였다.
“요즘은 잘 안 그런데, 어릴 때 그런 버릇이 있었어요. 우리 도련님도 긴장을 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화장실을 자주 가는데, 갔다가 나올 때 바지 지퍼 올리는 걸 깜박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한두 번 실수가 아니라 좀 자주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습관인가? 버릇인가? 싶더라구요. 아무튼 그래서 몇 번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죠. 그런데 오늘 보니까 도련님답지 않게 유독 긴장을 했더라구요.”
이화는 유신의 그런 모습을 상상만 해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참으며 말했다.
“맞아요. 오늘 아침에도 되게 다른 사람 같던데.”
“아무래도 지금까지 드라마 대상도 받아 보고 신인상 인기상 다 받아 봤지만 유일하게 못 받아 본 상이 영화 주연상이라서 그런가 봐요. 우리 도련님 어릴 때부터 제일 꿈이 영화 배우였는데. 정작 영화로는 한 번도 인정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아마 오늘 영화제가 도련님한테는 정말 큰 의미일 거예요. 그래서 괜히 엄마들 설레발 하는 맘으로 갑자기 희한하게 그 어릴 때 버릇이 생각나면서 걱정이 되지 뭐예요? 속 풀이 한답시고 늘어놨더니 다들 마냥 재미있다고 웃기만 하니…….”
“정말 그러네. 그러고 보니 유신 씨가 영화상은 한 번도 못 받았네요?”
“영화를 안 한 건 아니지만 했던 작품들이 다 흥행 실패였지, 아마?”
가정부가 끼어들었다.
“맞아. 도련님이 다른 건 다 좋은데 영화 운이 없었어. 그러다 요번에 될 만한 작품 하나 만나 크게 흥행했으니 얼마나 좋으시겠어? 내심 기대하고 계실 거야.”
“에휴, 그래도 몰라. 얘기 들어보니까 상대들이 만만치가 않던데? 그 뭐야, 우리 도련님 라이벌이라는 그 꽃미남 청년!”
“강주원?”
“그래! 강주원이도 요번에 남우주연상 후보라던데?”
이화는 저도 모르게 뜨끔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엄청난 앙숙인지 경험해 본 터라 그랬다. 주원은 몰라도 유신은 만약 남우주연상을 주원에게 내주게 된다면 분에 못 이겨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 그럴 리는 없고, 그렇다면 그 화는 분명 매니저 도형과 자신의 몫이 될 것이 뻔했다. 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오금이 저렸다.
“얘기가 딴 데로 새긴 했는데. 어쨌건 나는 주책없게 도련님 어릴 때 버릇이 걱정이 돼서……. 오늘처럼 긴장하신 날에는 이화 양이 잘 좀 봐 줘요.”
“네, 그럼요.”
유신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히 이화의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괜한 일을 떠맡게 된 듯한 부담감이 들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있으려고…….’
얼마 후, 모든 준비가 끝났는지 스타일리스트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모두 내려와 집을 나갔다. 이화는 1층 계단 아래서 도형과 함께 유신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이런 영화제는 누가 상 받는지 진짜 안 알려 줘요?”
이화가 물었다.
“뭐, 사정에 따라 알려 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소문이나 추측이죠. 이런 큰 영화제에서 그런 거 알려 줘 버리면 안 오는 스타들도 생기잖아요. 공석이 생기면 절대 안 되니까요.”
그때 계단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보았다. 이화는 그 상태로 잠시 목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2층에서는 그토록 기다렸던 유신이 완벽한 변신을 마치고 내려오고 있었다. 멋진 슈트를 차려입은 그는 그야말로 하나의 조각상 같았다.
유신이 차려입고 꾸민 모습을 지난번 장동권 팬미팅 이후로 처음 본 이화는, 눈앞에서 백마 탄 왕자님이라도 만난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유신의 이중적인 모습이나 실제 성격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멍해져 있던 이화의 정신을 번뜩 깨운 것은 유신의 목소리였다.
“반했어요?”
“……!”
쿵. 이화는 양은 냄비로 뒤통수를 크게 한 대 후려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유신은 얼빠진 이화의 표정을 보더니 알게 모르게 얼핏 웃고는 다시금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가죠.”
레드카펫은 한마디로 무기 없는 전쟁이었다. 스타들의 사진을 하나라도 더 찍기 위해서 용을 쓰는 기자들과, 한마디라도 더 얻어 내기 위해 대결하는 방송사 리포터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몸부림치는 팬들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리얼한 전쟁에 가장 뜨거운 불씨를 던져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유신이었다.
유신이 레드카펫을 밟는 순간의 열기는 실로 엄청났다. 이화는 차에서 먼저 내려 도형과 함께 유신을 양 사이드에서 보호하며 걸었다. 긴장 때문인지 차에서는 한마디 말도 없던 유신은, 내리자마자 금세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레드카펫을 걸었다. 그간 레드카펫 하면 여배우들만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이화는 유신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유신의 걸음걸이 하나하나는 마치 주상 전하의 행차를 연상케 하듯 묵직하고 고급스러웠다.
레드카펫과 포토타임을 무사히 마치고 들어온 유신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배우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외부인들을 대하는 공인 유신은 한없이 친절하고 예의 발랐다. 그가 선후배 연기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이화는 주위를 살피다가 마침 옆을 지나가던 주원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시간, 주원은 이화를 알아보고 싱긋 웃더니 매니저와 함께 금방 자리를 떠 버렸다. 주원은 유신과는 다르게 캐주얼한 스타일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이화는 잠시지만 주원의 그런 태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순전히 스타를 만난 팬의 기분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만났지만 주원에게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느껴졌다.
“형님. 그만 입장하셔야겠는데요.”
로비를 오가던 배우들이 하나둘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화장실 좀.”
유신은 들어가기 전에 먼저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이화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글쎄, 우리 도련님이 특이한 버릇이 있대. 긴장하면 남대문 닫는 걸 깜박한다지 뭐야?”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이화는 도형과 함께 유신을 따라갔다.
“황이화 씨는 들어가 있어도 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여기 있을게요.”
유신이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지만 이화는 꿋꿋이 남자 화장실 앞을 막고 섰다. 유신은 더 상대하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유신은 들어갈 때와 다름없는 깔끔한 모습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이화는 슬쩍 눈치를 보며 시선을 밑으로 내려 보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뜨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럴 수가. 유신의 바지 지퍼는 정말 열려 있었다.
“들어가지.”
아무것도 모르는 유신이 먼저 발을 내디뎠다.
“아, 저기!”
이화는 성급히 그의 앞을 막고 섰다. 혹시 주변에 보는 이가 없나 빠르게 살폈지만 대부분 입장한 뒤라 로비는 한산했다.
“뭡니까.”
유신은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자, 잠깐만요!”
“……?”
“그, 그러니까 유신 씨…….”
그런데 생각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남대문이라는 저속한 표현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애매했고 그렇다고 바지 지퍼가 열렸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기는 더욱 곤란했다.
“시간 없습니다. 비켜요.”
유신이 다시 이화를 밀치고 지나가려 했을 때, 이화는 마침내 용기를 냈다. 말하기 곤란하다고 해서 묵혀 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앗 진짜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유신 씨 바…….”
그때였다. 무전기가 울렸다. 이화는 황급히 이어 마이크를 착용한 채 무전기를 받았다. 그날 영화제에 SP 경호팀이 몇몇 투입되었는데 그쪽에서 온 연락이었다. 지금 시상식장 안에서 팬들 입장을 받고 있는데 수가 모자라니 잠시 와서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유신에게 이화가 당장 필요한 상황도 아니어서 이화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이화가 무전을 하고 있는 사이 유신이 그녀를 지나쳐 도형과 함께 시상식장 안으로 걸어갔다.
“어? 저기요! 유신 씨! 잠시만요! 도형 씨 잠깐!”
너무 급한 마음에 하마터면 ‘유신 씨 남대문 열렸어요!’라고 큰 소리로 외칠 뻔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유신은 그새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조용히 자기 자리에 착석했다. 이화는 뒤늦게 따라갔지만 무전에서는 오늘따라 팬들이 말썽이니 당장 오라는 말을 남기고 끊어 버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은 아무도 유신의 남대문이 열린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유신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시상식은 팬들이 착석하는 대로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화는 급히 도형을 찾아보았다. 도형은 1층 연기자들 뒤편에 있는 일반석에 앉아 있었다.
이화는 일단은 연락받은 대로 2층으로 향했다. 가면서 도형에게 문자를 남겼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앉아 있는 유신에게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데 여자인 자신이 전하는 것보단 매니저인 도형이 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유신 씨 바지 지퍼 열렸어요. 도형 씨가 대신 알려 줘요. 얼른.]
그러나 도형은 이화의 문자를 보지 못했다. 애초에 이화는 도형의 번호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너무 급한 마음에 그의 번호가 없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동명이인의 동창에게 문자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이화는 멀리서나마 도형이 핸드폰을 보는 모습을 보면서 제대로 전달했구나, 안심을 하고는 2층의 일을 도우러 갔다.
2층에는 상우, 진기를 비롯한 SP 식구들이 꽤 많이 있었다. 이화의 도움으로 팬 입석도 무사히 끝나고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이야, 누나 진짜 오랜만이네요!”
“어때. 할 만하냐?”
“지유신 실제 성격 어때요? 완전 더럽다는 소리도 있는데.”
“그야 뭐. 그건 직접 겪어 봐야 알아. 사람 평가하는 게, 사람에 따라 다 다른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