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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이화는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 기분이 좋았다. 삭막하고 숨 막히는 1층으로 도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마침 얼핏 내려다본 결과 유신이 몸을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형의 문자를 받고 지퍼를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화는 마음이 안정됐다. 어차피 식이 진행되는 동안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 따위는 있을 리 만무했다. 이화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며 SP 팀에 섞여 1부까지만 2층에서 구경하기로 했다.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기 전에 이화는 1층으로 갔다. 어차피 유신은 제 주변에 그녀가 있나 없나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제자리에 꼭 붙어 앉아 옆 자리에 앉은 여배우와 얘기하기 바빴다.
‘쳇. 여자관계 깨끗하다고 유명하더니. 저도 남자라고 어쩔 수 없나 보지?’
이화는 유신이 여배우와 이야기하는 모습이 괜스레 아니꼬워 보였다. 여배우가 유독 수다가 많고 유신은 별말 없이 간혹 미소 지어 주는 정도인데도 그랬다.
“고생이 많아요.”
그때, 주원이 이화의 옆을 지나치며 말했다.
“어? 안녕하세요.”
“유신인 좋겠어요. 이렇게 든든한 경호원이 있어서.”
“아니에요.”
이화의 목소리에 유신이 여배우와 얘기를 하다 말고 슬쩍 고개를 돌려 보았다. 이화가 주원과 얘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신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주원의 자리는 유신보다 한 칸 뒷줄이었다.
“오늘 남우주연상 누구 응원할 거예요?”
주원이 약간 장난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요, 그건 아무래도…….”
“나였으면 좋겠는데.”
“네?”
“유신이가 나보다 팬이 좀 더 많거든요. 요만큼.”
주원이 능청스레 말하자 이화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럼 수고해요.”
주원이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유신은 이화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그녀가 자기 쪽을 쳐다보자 시선을 홱 돌려 버렸다. 옆자리에 앉았던 여배우는 벌써 세 마디째 무시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곧이어 2부가 시작되었다.
이화는 이번에는 유신의 라인이 이어진 벽에 자리를 잡고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무 이상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유신의 바지를 쳐다보았다.
‘헉……!’
그러나 아무 이상이 없을 리 없었다. 때마침 유신은 한쪽 다리를 들어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열린 가운데 부분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화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에는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장난 하냐? 백만 년 만에 연락해서 이게 무슨 개똥 갈아먹는 소리야.]
이화는 그제야 자신이 문자를 잘못 보냈음을 깨달았다. 이미 2부가 시작된 뒤라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완벽주의 유신이 시상식 중에 문자를 보려고 핸드폰을 꺼낼 리도 없었다. 어쩌면 진작 꺼 놨을 수도 있었다.
‘어떡하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은 앉아 있는 데다 아무도 눈치를 못 챘으니 다행이지만 만일 남우주연상에 호명되기라도 한다면 유신은 대한민국 영화배우 최초로 남대문이 열린 채로 수상을 하는 영예를 안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분명 사전에 유모에게 친히 부탁까지 받았던 이화가 떠안게 될 것이었다.
이화는 일단 ‘유신 씨 바지 지퍼 열렸어요. 얼른 올려요.’라고 문자를 보내 놓긴 했지만 예상대로 유신은 아무리 기다려도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화는 점점 손에 땀까지 차기 시작했다. 유신이 제일 가장 자리에 앉았으면 모를까, 하필 정 가운데에 앉아 있어서 귓속말로 전해 주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도 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남녀 조연상이 발표되었다. 이제 곧 있으면 남우주연상 발표였다. 그나마 유신이 인기상이나 작품상 등을 타지 않아 제자리에만 못 박히듯 앉아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순간 이화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 스치고 지났다. 쪽지. 그래 문자가 안 된다면 직접 쓴 쪽지라도 보내야 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항상 작은 메모지와 펜을 지니고 다녔다.
“자 다음은 영화제의 꽃이죠. 여우주연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여우주연상이 끝나면 바로 다음이 남우주연상이었다. 이화는 서둘러 메모지와 펜을 꺼내 유신에게 건넬 쪽지를 쓰기 시작했다.
유신 씨 바지 지퍼.
더 길게 쓸 여유가 없었다. 이화는 유신이 대충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쪽지를 잘 접어 손에 꼭 쥐었다. 이화는 심호흡을 깊게 한 번 한 뒤, 마음을 다잡고 쪽지를 맨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배우에게 전해 주었다. 쪽지 겉에는 ‘유신 씨에게 전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라고 공손히 써 놓았다.
다행히도 배우들은 재미있다는 듯 쪽지를 유신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평소 장난기 많기로 유명한 남자 배우 하나가 그것을 열어 보는 시늉을 해서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열지 않고 넘겨주었다. 분위기가 이상하자 유신이 옆을 흘긋 보았다. 배우들이 작게 숙덕거리거나 웃고 있었다. 유신은 쪽지가 전달되고 있는 상황을 보고는 급격히 표정이 안 좋아졌다. 어딘가 매우 불안하고 좋지 않은 직감이 들었다.
‘설마 저게 나한테 오는 쪽지는 아니겠지.’
그러나 불안한 추측은 늘 현실로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여우주연상이 발표되고 눈물겨운 수상 소감이 끝난 뒤 바로 이어서 남우주연상 후보가 영상과 함께 발표되었다.
“제 50회 대종상 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입니다. <최종병기 칼>의 박해삼, <추격>의 하정운, <만득이>의 유아민, <파더>의 유신, 마지막으로 <친형제>의 강주원입니다.”
팬들의 함성소리는 역시 유신과 강주원이 호명되는 순간에 가장 컸다. 쪽지는 후보 발표가 끝난 직후 유신에게 전해졌다. 유신은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겉의 글귀를 보더니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그는 이화를 한 번 날카롭게 째려보고는 쪽지를 펼칠지 말지 망설였다.
이미 그 라인에 있는 모든 배우들의 시선이 유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다들 그 쪽지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때는 하필 남우주연상 발표 직전이었다. 유신은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고작 쪽지 하나를 펼쳐 읽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유신의 성격에 그 쪽지를 열어 보지 않고 집어넣을 수도 없었다. 그는 닫혀 있는 것은 무엇이든 열어 보아야 했고 섞여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맞춰 보아야 했으며 어질러져 있는 것은 무엇이든 정리해 놓아야 했다.
“남우주연상 발표는 작년 남우주연상 수상자이신 조지성 씨가 해 주시겠습니다.”
유신은 마침내 그 쪽지를 재빨리 열어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자 그럼 남우주연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화면에는 유신을 비롯한 후보자들의 얼굴이 찍혔다. 유신은 여유로운 척 시선은 정면을 유지하며 손은 밑으로 내린 채 쪽지를 열었다. 그리고 잠시 시선을 내려 쪽지를 확인하였다.
유신 씨 바지 지퍼
3초 후, 유신의 얼굴에 창백한 기운이 빠르게 솟아올랐다. 유신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쪽지를 단번에 구겨 접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한 배우들이 잠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침이 꿀떡 넘어갔다.
“제50회 대종상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자는…….”
다섯 명의 남자 배우들의 얼굴이 공동으로 화면에 잡혔다. 모두 가지각색의 표정들을 짓고 있는데 유신만 석상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올려야 한다. 올려야 한다. 아무도 모르게 올려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티 내지 않고 올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유신은 금방이라도 미칠 것 같았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토록 기다리고 바랐던 남우주연상이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사람이 받았으면 했다. 차라리 강주원이라도 괜찮으니 자신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수상자는…….”
그는, 살아생전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기도’라는 것을 그 순간 처음으로 해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도 낯을 가리는 모양이었다.
“축하드립니다. <파더>의 유신 씨입니다.”
그 순간, 매정하게도 신은 그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7.
한여름 밤의 파티


발표와 동시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유신에게 집중되었다. 카메라 역시 유신을 단독으로 잡았다. 유신은 어쩔 줄을 몰라 그저 빙긋 웃었다.
“유신 씨는 영화 <파더>에서 그간의 이미지를 버리고 정신 지체 아들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냄으로써 많은 관객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영화 흥행에 크게 일조하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유신 씨. 나오셔서 상 받으시고 수상 소감 부탁드릴게요.”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유신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냥 일어날 수도, 그렇다고 계속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유신은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얼마나 흘렀으면 셔츠가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유신은 그대로 손을 내려서 올려 볼까 했지만 불가능이었다. 모두가 보고 있었다. 몸을 숙여 최대한 가리며 올린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시상식장 밖에서 핵폭탄이 터진다면 모를까, 이 위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안 돼!”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유신의 귓전을 울렸다. 아니, 유신의 귓전뿐 아니라 시상식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무언가 아주 빠르고 거무죽죽한 것이 유신의 눈앞을 휙 덮쳐 왔다.
거무죽죽하고 빠른 무언가의 정체는 이화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유신 앞으로 달려와 그를 감싸 안듯이 가리고서는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휙휙 빠르게 둘러보았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상식장이 단숨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화가 흘끔 유신을 쳐다보며 눈짓을 했다. 지금 빨리 올리라는 말이었다. 유신은 그제야 그녀의 의도를 캐치하고 재빨리 바지 지퍼를 올렸다. 그런데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 바지 지퍼가 중간에 걸려 더는 올라가지 않았다.
‘제발, 제발……!’
유신은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코디네이터를 쥐 잡듯이 잡아 버리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땀을 뻘뻘 흘리며 용을 썼다.
“무슨 일입니까?”
“누가 유신 씨를 기습 공격한 겁니까?”
다른 경호원들을 비롯한 영화제 관계자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왔다. 수많은 카메라의 초점이 이번엔 유신이 아닌 이화를 목표로 삼았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주원도 깜짝 놀란 얼굴로 일어나 이화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화는 유신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척하며 이어마이크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긴급상황. 2층 B번 출구에서 유신 씨를 저격하려던 누군가가 달아났습니다. 신속히 추적 부탁합니다! 유신 씨 괜찮아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2층의 경호원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다. 유신은 순간 그녀의 스케일 큰 시나리오에 혈압이 터질 뻔했다.
‘영화를 너무 본 거 아니야? 총이라니, 총이라니!’
그러나 지금은 이런 불만이야말로 더욱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올라가지 않는 바지 지퍼만이 유일한 불만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유신은 애써 이화의 이런 희생정신이라도 감사히 여기자며 스스로를 위로한 뒤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지퍼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직! 그것은 분명 무언가 강렬히 뜯어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바로 유신의 아랫도리에서 정확히 들린 것이다. 유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벽에 박힌 못처럼 중간 지점에서 꼼짝도 않고 붙어 있던 지퍼가 순식간에 맥이 풀린 듯 헐렁해졌다. 너무 세게 잡아 올린 바람에 바지 지퍼가 아예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유신 씨…….”
이화는 ‘파직’ 소리를 마지막으로 허무하게 손을 놓아야 했다. 스태프들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이화에게 그만 나와 달라는 부탁을 했기에 더는 유신을 가리고 붙어 있을 수도 없었다. 유신은 마지막까지 이화를 향해 원망인지 구원 요청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냈지만 이화는 조심스럽게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더는 이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회자가 현장을 정리하고 스태프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마침내 3분 만에 모든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유신 씨 괜찮으신가요?”
하는 수 없었다. 이제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유신은 이화가 주었던 마지막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청자 여러분들을 비롯해서 현장에 있는 많은 배우 분들, 관계자 분들, 팬 여러분들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유신 씨에게는 아무 일이 없다고 합니다. 조금 놀라셨는지 얼굴이 좀 창백해지신 것 같긴 한데요. 아무래도 생방송이다 보니 시상식 진행이 불가피한 관계로, 괜찮으시다면 나오셔서 수상하시고 짤막한 소감이라도 부탁드릴게요. 자, 모두 유신 씨에게 박수 한 번 보내 드릴까요?”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이제 일어나지 않고 버틴다면 이번 영화제는 역대 최고의 방송 사고를 낳은 영화제가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유신은 하는 수 없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를 떼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죽고 싶다 뿐이었다.
“네, 유신 씨. 이제 나오시네요. 너무 놀라셔서 몸이 안 떨어지셨나 본데요. 얼른 나오셔서 수상을…….”
그때였다.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졌고 시상식장 안이 한 번 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또한 엄청난 플래시 세례가 유신을 향했다. 사회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서서 유신을 기다렸다.
유신은 이 순간 생각나는 모든 이들이 원망스러웠다. 이화가 쪽지를 조금만 더 일찍 전해 주었다면, 아니 그전에 도형이 매니저답게 그에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아니 그전에 코디네이터가 옷부터 제대로 관리를 했으면……. 하는 모든 원망들이 그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순식간에 만개하는 중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었다. 유신은 터진 부분을 애써 가리며 스태프들을 부르고 수습하는 등의 구차한 모습 따위는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토록 기다려 왔던 남우주연상, 주시니 감사한 마음으로 받긴 받아야 했고 그 위대한 상 앞에서 주눅 든 모습은 보일 수 없었다. 그는 최대한 당당한 걸음으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와아!”
위안인지 축하인지 모를 환호 소리가 시상식장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우렁찬 박수 소리였다. 유신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꽃다발과 상을 전해 받고 마이크 앞에 섰다. 동정과 연민과 비웃음이 가득한 동료 영화인들의 환호가 그를 한껏 들뜨게 했다.
“먼저, 많이들 놀라셨을 텐데 저는 이렇듯 한 곳을 빼고는 모두 무사합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저 대신 몸을 날려 준 경호원 분께 감사한 마음이 앞서네요. 이 일에 대해서는 차후 다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전 위험했던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금세 정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단 말씀 드립니다. 연기를 시작하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받아 보는 영화 남우주연상입니다. 이토록 감격스러운 순간에 많은 분들의 시선과 카메라의 초점이 지금 제가 아닌 저의 신체 일부에 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속상하지만.”
유신의 뻔뻔한 재치에 사람들은 또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또한 제가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늘이 주신 과분한 선물로 알고.”
유신은 여유로운 척 농담을 던지고 있었지만 말하는 내내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연기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짧고도 간결한 수상 소감에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유신은 올라갈 때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내려가며 눈이 마주치는 배우들마다 죽을힘을 다해 방긋방긋 웃어 주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강주원과 눈이 마주쳤다. 주원은 다른 배우들과는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유신을 보고 있었다. 유신은 왠지 모르게 그게 더욱 자존심이 상해서 날카롭게 시선을 거둔 뒤 자리에 앉았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시상식이 끝나고 영화인들의 파티로 향하는 차 안에서 유신은 벼락같은 호통을 치며 전화를 하는 중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도형과, 뒷좌석에서 유신의 옆에 앉아 있던 이화는 서로 눈치만 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잘못? 잘못했다면 다야? 이게 잘못했다 한마디로 해결될 일이야? 잘못했다고만 하면 내가 받은 모든 모욕과 수치와 굴욕이 다 해결되는 거야? 그래? 감히 내 코디네이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해도 모자랄 판에 제정신이야? 머리 없니? 무뇌야? 어디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 실수도 한두 번이고 기회도 한두 번이야. 더 이상은 못 봐준다고! 넌 오늘부로 해고니까 당장 정리하고 나가! 그리고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길 가다가라도 내 눈에 띄면 그땐 내가 아주 작살을 내 버릴 테니까! 알았어?”
유신은 거칠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런 버러지 잡초 찌꺼기 같은! 누가 이런 돼먹지도 않은 애 뽑았어! 누구야?”
“형님이 직접 뽑으셨는데요…….”
“뭐?”
쓸데없이 솔직한 도형 덕분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화가 룸미러를 통해 슬쩍 눈치를 주었다. 그 짧은 순간을 포착한 유신은 이번엔 화살을 이화에게로 꽂아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휙 낚아채 갔다.
“어? 뭐 하는…….”
유신이 매섭게 째려보자 이화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는 이화가 하던 핸드폰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던 중이었다. 지금 실시간 검색어는 온통 유신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1위 유신 남대문. 2위 유신 총살 위협. 3위 유신 수상소감. 4위 유신 저격 사건 진위. 5위 유신 남우주연상. 6위 대종상 영화제. 7위 유신 표정 변화. 8위 유신 쪽지. 9위 유신 경호원……. 그뿐이 아니었다. 벌써 수십 개의 기사가 올라온 것은 물론 연예 뉴스 속보도 방송된 후였다.
<유신, 시상식 도중 총살 위협 & 남대문 오픈 봉변>
<유신 저격 사건 진위 여부 논란>
<이것도 하늘의 뜻이라…… 유신 재치 수상 소감 눈길>
<내가 바로 유신이다. 뜻밖의 사고에도 동요 없는 프로 정신>
<포토―남대문 열린 채 수상하는 해맑은 모습의 유신>
유신은 참다못해 핸드폰을 창밖으로 던져 버리려다가 이화의 것임을 떠올리고 간신히 참았다.
“황이화 씨.”
“……네.”
“지금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까?”
“아니요. 하지만 경호원은 의뢰인 보호 차원에서 항상 의뢰인의 현재 상황과 사회적 시선을 알아 둘 필요가…….”
“그래서, 황이화 씨는 항상 의뢰인의 현재 상황과 사회적 시선을 잘 알아 둬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
“상황 판단 능력이 그렇게 떨어지는데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죠? 그럴 땐 현장 스태프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나한테 바로 전하게 하든지 정 안 되면 황이화 씨라도 조용히 와서 직접 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정도 상식도 안 돼요? 쪽지라니! 세상에 쪽지라니! 아니 어떻게 그런 무모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그 급박한 상황에 그런 쪽지 쓸 시간은 있고 제대로 머리 굴릴 시간은 없어요? 그렇게 해서 쪽지를 돌린다 칩시다. 중간에 쪽지가 전달되지 않거나, 혹은 장난기 많은 배우가 열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대체 그런 일을 벌인 겁니까?”
유신은 고개를 숙이고 미동도 없는 이화를 향해서 거침없는 속사포를 쏟아 내었다.
“더군다나 총이라니!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일을 벌일 생각을 합니까? 여긴 총기 소지 안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거 몰라요? 그러니 벌써부터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고 저격수가 내 바지 지퍼에 총을 쏜 건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유머들이 도는 거 아닙니까! 거짓말을 할 거면 좀 그럴듯하게라도 해야지, 대체 이게 뭡니까?”
“죄송합니다.”
이화는 많이 화가 났지만, 방금 전 코디네이터의 목이 한순간에 댕강 날아간 것도 보았고 하니 일단은 굽히기로 했다.
“그놈의 죄송하다 소리! 다들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도대체가 지긋지긋해서!”
이화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참아야 했다.
“하…….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아. 여자 경호원을 뽑는 게 아니었는데.”
이화가 눈을 번뜩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뭐라구요?”
“미안하지만 황이화 씨도 안 되겠네요. 내일 안으로 짐 정리하고 돌아가요. 오늘까지 일한 보수는 내가 두 배로 쳐 줄 거고 위약금이나 기타 돈 문제도 내가 그쪽 회사랑 다 알아서 깔끔하게 처리를…….”
“이봐요. 지유신 씨.”
도형이 갑작스레 강하게 튀어나온 이화의 목소리에 긴장했는지, 신호 앞에서 차가 삐끗했다. 유신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 나 해고한다는 거예요?”
“귀에 문제 있어요? 두 번 말해야 알아듣나?”
“나 참, 황당해서.”
“뭐?”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진짜 귀에 문제 있어요? 황이화 씨는 경호원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히 부족합니다.”
“내 자질이 어디가 어떻게 부족한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봐요, 그럼.”
“지금 한 번 해보자는 겁니까?”
“네, 해고 되는 마당에 할 말은 다 하고 가야겠어서요. 내가 또 억울한 건 질색이라서요. 유신 씨 바지 지퍼 열린 거 보고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거요? 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알리려고 했어요. 유신 씨 핸드폰 켜 보시면 알겠지만 급한 마음에 민망함 무릅쓰고 문자도 보냈고요, 도형 씨한테 연락도 해 봤지만 그게 일이 꼬여서 잘 안 됐어요. 스태프한테 말하면 그 스태프가 아는 건 물론이고, 그 스태프가 유신 씨한테 직접 가서 전달하는 동안 유신 씨 라인뿐만 아니라 유신 씨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더 관심 가질 게 뻔하고, 그렇담 유신 씨는 아까보다 더 긴장했을 거고 결과는 똑같았을 거예요.”
유신이 멍한 얼굴로 이화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생방송 중에 감히 경호원이 왔다 갔다 하면서 전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구요. 총이 설득력이 있건 없건 나는 그 와중에 유신 씨 한 번 살려 보겠다고 심장 쪼그라들면서도 거기 뛰어들어 연기를 한 거라고요! 유신 씨가 그때 지퍼만 제대로 올렸어도 일이 이렇게까지는 안 됐어요! 사람들이 저격 사건의 진위 여부에 관심을 갖는 건 모두 유신 씨 남대문이 열렸기 때문이니까요! 내 말이 틀렸어요?”
도형은 속으로 이화의 깡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제가 가장 황당한 건요. 지금 지유신 씨가 보여 주는 이 어리숙하고 이기적이고 유치한 태도예요.”
어리숙? 이기적? 유치한? 유신은 그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유신 씨는 이 모든 일이 다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만 생각하세요? 아니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건 그쪽 책임이에요. 애초에 유신 씨가 볼일 보고 나서 뒤처리만 정확하게 잘했어도 이런 일 없었어요. 옷이 좀 불량이었다 쳐도 화장실 갔던 그때 발견했으면 충분히 수습할 수 있었어요. 내가 마지막 기회를 줬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지퍼가 망가진 것도 다른 사람들이 아닌 유신 씨의 잘못인데 지금 유신 씨는 무조건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들한테 전가하느라 정신이 없잖아요. 아니에요?”
숨도 안 쉬고 몰아붙인 이화 덕에, 유신은 머리에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래서 도저히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얼핏 웃음이 나왔다. 일종의 자기 보호적 비웃음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