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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뭐어?”
리브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며 글씨 크기를 키웠다. 그러나 엄지손톱만큼 커진 글자도 여전히 내용은 같았다.
불현듯 용돈을 끊기 전에 얌전히 말을 들으라던 메리의 경고가 떠올랐다. 리브는 그 말을 단 한 차례도 귀담아들은 적 없었다. 메리가 고작 돈 몇 푼 가지고 쪼잔하게 굴 리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리는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 또한 아니었다. 리브는 그것을 기억했어야만 했다.
“지금 나한테 들이는 돈 몇 푼이 아깝다는 거야?”
아니, 내가 쓰면 얼마나 쓴다고!
리브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녀는 대부호의 하나뿐인 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검소한 편이었고, 메리가 준 카드로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반쪽에 10달러 하는 샌드위치를 사 먹는 것밖에 없었다.
리브가 고향을 떠날 적, 메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끼니를 거르고 다니지는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이제는 리브가 식사를 하든 못 하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무나도 극악무도하고 쩨쩨하고 치사했다. 서러워진 리브는 메리에게 항의하기 위해 다시금 휴대폰을 들었다.
때마침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메리에게서 온 문자였다.
“말 안 듣는 애는 엄마 딸이 아니야. 반성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 ……뭐라고?”
내가 지금 뭘 본 거람? 리브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조금 속을 썩였다고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한다니. 아무리 화가 났을지언정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메리를 향한 반항심이 끝도 없이 샘솟았다. 리브는 입술을 꾹 깨물며 전투적으로 메리의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메리는 아예 휴대폰을 꺼 놓은 상태였다. 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메리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라는 건 안 봐도 훤했다.
‘그래, 뭐! 알아서들 해! 나도 알아서 할 거야!’
리브가 투우장의 황소처럼 성난 콧김을 뿜어 대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뚤어질 거야! 반항할 거야! 메리가 하지 말라고 했던 건 뭐든지 다 할 거야!
치졸한 결심이 온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리브의 다짐을 응원하듯 학교 시계탑의 종이 뎅뎅 울렸다.
메리에 대한 반발심이 극에 달한 리브는 이제부터 비행 청소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년 생일에 열여덟이 된 리브는 이제 법적인 성인이었지만, 그래 봤자 여전히 치기 어린 10대일 뿐이었다. 그리고 원래 10대란 멋모르고 철도 씹어 먹는 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리브는 어떻게 해야 비행 청소년이 되는지 알지 못했다. 리브는 궁전 같은 저택에서 공주님 소리를 들어 가며 고이고이 자라 왔고, 비행 청소년의 ‘비’ 자도 알지 못했다.
도대체 비행 청소년이란 어떻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리브는 고민에 빠졌다.
리브는 비행 청소년 같은 딴 세상 사람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그 대신 다년간 TV 시리즈를 통해 쌓은 간접적인 경험이 있었다.
‘음, 술을 한다든가…….’
왕국법상 음주가 가능한 건 스물한 살부터였다. 리브에게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스쿠터를 타고 도심을 가로지른다든가…….’
면허는 열여섯 살 때부터 딸 수 있었지만, 리브에겐 아직 면허가 없었다. 직접 운전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면허 운전은 엄연한 범죄였다.
‘아니면 약을……. 아니야, 이건 패스.’
마약 역시 고민할 필요도 없는 선택지였다. 수도 청년들 사이에 불법 약물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지만, 리브는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비행 청소년의 바이블은 가출이긴 한데…….’
이미 집을 나온 상태에서도 가출이라는 말이 성립하나?
리브는 현재 대학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고, 기숙사에서 가출한 비행 청소년이라는 말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브에게는 기숙사 외에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녀의 고향은 학교가 있는 대학 도시에서 비행기로 네 시간을 날아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고, 이 때문에 학교 근방에는 잠시 신세를 질 만한 지인조차 없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벗어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은 두근두근 세차게 뜀박질을 했다. 리브는 당장 학교를 떠나지 않으면 심장이 펑 터져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잠깐 호텔에라도 묵으면 되지 않을까?’
카드 한 장 없어졌다고 해서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관광 도시의 딸인 리브가 비렁뱅이가 될 리 없었다. 고향의 금고에선 돈이 썩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리브는 잠시 옆에 내려 두었던 가방을 들어 거꾸로 뒤집었다. 각종 집기의 틈에서 앙증맞은 당근 모양의 동전 지갑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곳곳에 손때가 묻어 있는 이 동전 지갑은 어릴 적 어느 축제의 노점상에서 찰스에게 선물 받은 것으로, 왠지 모르게 애착이 가 여태껏 소중히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리브는 낡은 지갑에 달린 지퍼를 조심스레 내렸다. 학교에선 카드 한 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기에 이 지갑의 배를 가르는 것도 퍽 오랜만의 일이었다.
리브의 사랑스러운 동전 지갑에는 정확히 금색 동전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어어?”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나 왜 10달러밖에 없지?
열심히 동전 지갑의 배 속을 헤집어 봐도 더 나오는 것은 없었다.
리브는 곰곰이 생각에 젖었다. 그러다 곧, 자신에게 현금이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퍼주고 다녔던 것이 문제였다.
고향과 달리 수도에는 곳곳마다 구걸하는 사람이 있었다. 걸인을 처음 본 리브는 그들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 때마다 순진하게 지폐를 건네곤 했다. 이제는 그들 중 절반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뒤늦게 지나간 일을 후회한들 소용없었다.
2달러 동전에 새겨진 공주님은 애타는 리브의 마음도 모르고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좋아하던 초상화가 괜히 야속해진 리브는 쓸모없는 동전 다섯 개를 다시금 지갑 안에 집어넣었다.
“이제 어떡하지.”
학교의 시계탑에서 또다시 종이 울렸다. 리브가 고민을 시작한 뒤로 벌써 한 시간이 넘게 흘렀다는 의미였다.
이대로 한 번 더 종이 울리면 그때는 정말 기숙사에 돌아가야만 했다. 대학 도시에는 밤이 일찍 찾아왔고, 오후 8시만 되어도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았다.
뭔가 신통한 방법이 필요했다. 돈이 없고 친구가 없어도 가출을 할 수 있는 방법이.
그때, 불현듯 리브의 머리 위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리브는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저어 머리 위로 쏟아진 나뭇잎을 떨어뜨린 후, 의아한 눈빛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입 안 가득 도토리를 채워 넣은 다람쥐 한 마리가 제집을 향해 분주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어쩐지 리브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리브의 삶은 다람쥐의 삶보다도 못했다. 다람쥐는 집도 있고 먹이도 있는데 리브는 집도 먹을 것도 없었다.
‘나도 차라리 다람쥐가 되면 좋을 텐데.’
저 멀리로 빠르게 사라져 가는 다람쥐를 바라보던 리브의 머릿속에 문득 번개같이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그래, 이거야!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만약 리브가 목욕을 하고 있었더라면, 맨몸으로 목욕물에서 뛰쳐나간 아르키메데스가 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번뜩이는 아이디어였다.
‘좋아! 난 이제부터 다람쥐처럼 살 거야!’
물론 인간으로 태어난 리브가 갑자기 다람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리브에게는 다람쥐처럼 양 뺨에 음식을 가득 집어넣고, 넓은 정원을 빨빨대며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리브는 수인이다. 반은 인간이지만, 반은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간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었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동물의 삶이란 꽤 안락할 듯싶었다. 동물의 고민이라고는 오늘 저녁 메뉴 정도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동물로 산다는 생각은 생각할수록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 우선 가장 급한 문제인 주거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됐다. 동물들은 마음에 드는 곳이면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얼간이라 하여도 야생 동물을 향해 “이곳은 대대손손 우리 가문의 땅이었으니, 앞으로도 이곳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싶다면 집세 차원으로 다달이 도토리 열 개, 밤 스무 개를 내십시오.”라고 말할 리 없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바라 마지않던 그런 삶일 것이다!
리브는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실 변신하는 모습을 들킨다 해도 별반 상관은 없었지만,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울창한 나무 밑에 숨어든 리브는 두 눈을 꼭 감고 양 주먹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그 상태로 숨을 크게 훅 들이켜자 ‘뿅’ 하고 만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깜찍한 소리가 났다.
방금까지 리브가 두르고 있던 옷가지들이 한순간에 주인을 잃고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늘어진 옷 더미 사이로 아주 작고 사랑스러운 아기 여우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뽀송뽀송한 아기 여우의 털은 리브의 머리카락과 똑같은 금빛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아기 여우는 리브이니까!
“끼잉…….”
오랜만에 여우의 모습으로 변신한 리브는 가장 먼저 찌뿌둥한 몸을 파르르 털어 댔다. 곧이어 앞발 뒷발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자, 인간의 모습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가벼워졌다.
리브는 종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벤치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러고 엉망으로 늘어져 있는 소지품 사이에서 동전 지갑을 찾아내 입에 물었다.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이었다.
여우의 몸을 하고 가방을 들 수는 없었기 때문에 지갑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그대로 버리고 가기로 했다. 딱히 애착 가는 물건은 없었으므로 아쉬움 또한 없었다.
학교를 떠날 생각을 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리브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빠져나갔다.
학교가 위치한 대학 도시는 왕국의 수도인 르누스의 지척에 있었으므로 일단 수도로 갈 계획이었다. 수도의 지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설마 이 넓은 도시에 손바닥만 한 여우 하나 쉴 곳이 없겠는가!
……라고 희망적인 생각을 했던 게 어느덧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해는 완연하게 진 지 오래였고,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길을 헤맨 리브는 지친 다리를 아무렇게나 터덜터덜 움직였다.
한참을 가도 똑같은 풍경밖에 나오지 않았다. 르누스는 성냥갑 같은 네모난 건물과 네모난 도로, 네모난 자동차로 빼곡히 채워진 네모난 미로가 틀림없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야생 동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 너무나도 멍청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리브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어떡하지.
리브는 낙심하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 좋은 금빛 털에 흙먼지가 묻었지만, 고작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야옹.”
그때, 불현듯 어느 뚱뚱한 고양이 한 마리가 리브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자세히 살펴보니 교내 서점에서 기르는 게으름뱅이 고양이 샘이었다. 샘은 자기 영역이 무척 넓은 고양이인 모양이었다.
샘이 물고 있던 커다란 스테이크 한 덩이를 리브의 앞에 내려놓았다.
나 주는 거야?
“……뭐어?”
리브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며 글씨 크기를 키웠다. 그러나 엄지손톱만큼 커진 글자도 여전히 내용은 같았다.
불현듯 용돈을 끊기 전에 얌전히 말을 들으라던 메리의 경고가 떠올랐다. 리브는 그 말을 단 한 차례도 귀담아들은 적 없었다. 메리가 고작 돈 몇 푼 가지고 쪼잔하게 굴 리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리는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 또한 아니었다. 리브는 그것을 기억했어야만 했다.
“지금 나한테 들이는 돈 몇 푼이 아깝다는 거야?”
아니, 내가 쓰면 얼마나 쓴다고!
리브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녀는 대부호의 하나뿐인 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검소한 편이었고, 메리가 준 카드로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반쪽에 10달러 하는 샌드위치를 사 먹는 것밖에 없었다.
리브가 고향을 떠날 적, 메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끼니를 거르고 다니지는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이제는 리브가 식사를 하든 못 하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무나도 극악무도하고 쩨쩨하고 치사했다. 서러워진 리브는 메리에게 항의하기 위해 다시금 휴대폰을 들었다.
때마침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메리에게서 온 문자였다.
“말 안 듣는 애는 엄마 딸이 아니야. 반성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 ……뭐라고?”
내가 지금 뭘 본 거람? 리브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조금 속을 썩였다고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한다니. 아무리 화가 났을지언정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메리를 향한 반항심이 끝도 없이 샘솟았다. 리브는 입술을 꾹 깨물며 전투적으로 메리의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메리는 아예 휴대폰을 꺼 놓은 상태였다. 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메리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라는 건 안 봐도 훤했다.
‘그래, 뭐! 알아서들 해! 나도 알아서 할 거야!’
리브가 투우장의 황소처럼 성난 콧김을 뿜어 대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뚤어질 거야! 반항할 거야! 메리가 하지 말라고 했던 건 뭐든지 다 할 거야!
치졸한 결심이 온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리브의 다짐을 응원하듯 학교 시계탑의 종이 뎅뎅 울렸다.
메리에 대한 반발심이 극에 달한 리브는 이제부터 비행 청소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년 생일에 열여덟이 된 리브는 이제 법적인 성인이었지만, 그래 봤자 여전히 치기 어린 10대일 뿐이었다. 그리고 원래 10대란 멋모르고 철도 씹어 먹는 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리브는 어떻게 해야 비행 청소년이 되는지 알지 못했다. 리브는 궁전 같은 저택에서 공주님 소리를 들어 가며 고이고이 자라 왔고, 비행 청소년의 ‘비’ 자도 알지 못했다.
도대체 비행 청소년이란 어떻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리브는 고민에 빠졌다.
리브는 비행 청소년 같은 딴 세상 사람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그 대신 다년간 TV 시리즈를 통해 쌓은 간접적인 경험이 있었다.
‘음, 술을 한다든가…….’
왕국법상 음주가 가능한 건 스물한 살부터였다. 리브에게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스쿠터를 타고 도심을 가로지른다든가…….’
면허는 열여섯 살 때부터 딸 수 있었지만, 리브에겐 아직 면허가 없었다. 직접 운전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면허 운전은 엄연한 범죄였다.
‘아니면 약을……. 아니야, 이건 패스.’
마약 역시 고민할 필요도 없는 선택지였다. 수도 청년들 사이에 불법 약물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지만, 리브는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비행 청소년의 바이블은 가출이긴 한데…….’
이미 집을 나온 상태에서도 가출이라는 말이 성립하나?
리브는 현재 대학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고, 기숙사에서 가출한 비행 청소년이라는 말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브에게는 기숙사 외에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녀의 고향은 학교가 있는 대학 도시에서 비행기로 네 시간을 날아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고, 이 때문에 학교 근방에는 잠시 신세를 질 만한 지인조차 없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벗어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은 두근두근 세차게 뜀박질을 했다. 리브는 당장 학교를 떠나지 않으면 심장이 펑 터져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잠깐 호텔에라도 묵으면 되지 않을까?’
카드 한 장 없어졌다고 해서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관광 도시의 딸인 리브가 비렁뱅이가 될 리 없었다. 고향의 금고에선 돈이 썩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리브는 잠시 옆에 내려 두었던 가방을 들어 거꾸로 뒤집었다. 각종 집기의 틈에서 앙증맞은 당근 모양의 동전 지갑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곳곳에 손때가 묻어 있는 이 동전 지갑은 어릴 적 어느 축제의 노점상에서 찰스에게 선물 받은 것으로, 왠지 모르게 애착이 가 여태껏 소중히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리브는 낡은 지갑에 달린 지퍼를 조심스레 내렸다. 학교에선 카드 한 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기에 이 지갑의 배를 가르는 것도 퍽 오랜만의 일이었다.
리브의 사랑스러운 동전 지갑에는 정확히 금색 동전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어어?”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나 왜 10달러밖에 없지?
열심히 동전 지갑의 배 속을 헤집어 봐도 더 나오는 것은 없었다.
리브는 곰곰이 생각에 젖었다. 그러다 곧, 자신에게 현금이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퍼주고 다녔던 것이 문제였다.
고향과 달리 수도에는 곳곳마다 구걸하는 사람이 있었다. 걸인을 처음 본 리브는 그들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 때마다 순진하게 지폐를 건네곤 했다. 이제는 그들 중 절반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뒤늦게 지나간 일을 후회한들 소용없었다.
2달러 동전에 새겨진 공주님은 애타는 리브의 마음도 모르고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좋아하던 초상화가 괜히 야속해진 리브는 쓸모없는 동전 다섯 개를 다시금 지갑 안에 집어넣었다.
“이제 어떡하지.”
학교의 시계탑에서 또다시 종이 울렸다. 리브가 고민을 시작한 뒤로 벌써 한 시간이 넘게 흘렀다는 의미였다.
이대로 한 번 더 종이 울리면 그때는 정말 기숙사에 돌아가야만 했다. 대학 도시에는 밤이 일찍 찾아왔고, 오후 8시만 되어도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았다.
뭔가 신통한 방법이 필요했다. 돈이 없고 친구가 없어도 가출을 할 수 있는 방법이.
그때, 불현듯 리브의 머리 위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리브는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저어 머리 위로 쏟아진 나뭇잎을 떨어뜨린 후, 의아한 눈빛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입 안 가득 도토리를 채워 넣은 다람쥐 한 마리가 제집을 향해 분주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어쩐지 리브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리브의 삶은 다람쥐의 삶보다도 못했다. 다람쥐는 집도 있고 먹이도 있는데 리브는 집도 먹을 것도 없었다.
‘나도 차라리 다람쥐가 되면 좋을 텐데.’
저 멀리로 빠르게 사라져 가는 다람쥐를 바라보던 리브의 머릿속에 문득 번개같이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그래, 이거야!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만약 리브가 목욕을 하고 있었더라면, 맨몸으로 목욕물에서 뛰쳐나간 아르키메데스가 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번뜩이는 아이디어였다.
‘좋아! 난 이제부터 다람쥐처럼 살 거야!’
물론 인간으로 태어난 리브가 갑자기 다람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리브에게는 다람쥐처럼 양 뺨에 음식을 가득 집어넣고, 넓은 정원을 빨빨대며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리브는 수인이다. 반은 인간이지만, 반은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간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었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동물의 삶이란 꽤 안락할 듯싶었다. 동물의 고민이라고는 오늘 저녁 메뉴 정도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동물로 산다는 생각은 생각할수록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 우선 가장 급한 문제인 주거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됐다. 동물들은 마음에 드는 곳이면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얼간이라 하여도 야생 동물을 향해 “이곳은 대대손손 우리 가문의 땅이었으니, 앞으로도 이곳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싶다면 집세 차원으로 다달이 도토리 열 개, 밤 스무 개를 내십시오.”라고 말할 리 없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바라 마지않던 그런 삶일 것이다!
리브는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실 변신하는 모습을 들킨다 해도 별반 상관은 없었지만,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울창한 나무 밑에 숨어든 리브는 두 눈을 꼭 감고 양 주먹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그 상태로 숨을 크게 훅 들이켜자 ‘뿅’ 하고 만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깜찍한 소리가 났다.
방금까지 리브가 두르고 있던 옷가지들이 한순간에 주인을 잃고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늘어진 옷 더미 사이로 아주 작고 사랑스러운 아기 여우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뽀송뽀송한 아기 여우의 털은 리브의 머리카락과 똑같은 금빛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아기 여우는 리브이니까!
“끼잉…….”
오랜만에 여우의 모습으로 변신한 리브는 가장 먼저 찌뿌둥한 몸을 파르르 털어 댔다. 곧이어 앞발 뒷발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자, 인간의 모습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가벼워졌다.
리브는 종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벤치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러고 엉망으로 늘어져 있는 소지품 사이에서 동전 지갑을 찾아내 입에 물었다.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이었다.
여우의 몸을 하고 가방을 들 수는 없었기 때문에 지갑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그대로 버리고 가기로 했다. 딱히 애착 가는 물건은 없었으므로 아쉬움 또한 없었다.
학교를 떠날 생각을 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리브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빠져나갔다.
학교가 위치한 대학 도시는 왕국의 수도인 르누스의 지척에 있었으므로 일단 수도로 갈 계획이었다. 수도의 지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설마 이 넓은 도시에 손바닥만 한 여우 하나 쉴 곳이 없겠는가!
……라고 희망적인 생각을 했던 게 어느덧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해는 완연하게 진 지 오래였고,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길을 헤맨 리브는 지친 다리를 아무렇게나 터덜터덜 움직였다.
한참을 가도 똑같은 풍경밖에 나오지 않았다. 르누스는 성냥갑 같은 네모난 건물과 네모난 도로, 네모난 자동차로 빼곡히 채워진 네모난 미로가 틀림없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야생 동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 너무나도 멍청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리브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어떡하지.
리브는 낙심하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 좋은 금빛 털에 흙먼지가 묻었지만, 고작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야옹.”
그때, 불현듯 어느 뚱뚱한 고양이 한 마리가 리브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자세히 살펴보니 교내 서점에서 기르는 게으름뱅이 고양이 샘이었다. 샘은 자기 영역이 무척 넓은 고양이인 모양이었다.
샘이 물고 있던 커다란 스테이크 한 덩이를 리브의 앞에 내려놓았다.
나 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