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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일주일 전. 은하.



미친 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은하는 ‘이 마주침은 운명이리라’하고 생각했다.

그건 낯선 땅 오사카를 여행하던 중의 우연한 맞닥뜨림으로, 도톤보리에서 전자기기의 성지라는 덴덴타운으로 가는 길을 조금 헤매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은하는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휴대폰을 다시 한번 보다가, 덴덴타운 방면을 보다가, 자기 앞에 놓인 건물을 보길 반복했다.

“후…….”

긴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뻐근해진 어깨를 문질렀다.



<이거 네 남친 아니야?>

<헐, 야. 모텔로 들어간다.>



이미 몇 번이고 본 사진을, 다시 한번 천천히 넘겨가며 마지막으로 확인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양쪽으로 까딱이며 생각했다. 그러고는 이내 휴대폰을 다시 들고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저쪽에서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 여보세요?

나름 숨을 고른다고는 하는 것 같았으나, 남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우웩.

“바빠?”

-어, 어? 은하야. 여행 중 아니야? 어쩐 일이야?

“그냥, 오빠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근데 오빠 왜 이렇게 목소리가 거칠어?”

-아, 나? 나 지금 잠깐 운동 중이라서…….

까고 있네.

은하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지만, 표정과는 다르게 한결같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무슨 운동? 오빠 원래 운동 안 하잖아.”

-아, 아니. 요즘 관리 좀 해야 될 거 같아서. 여행은 잘하고 있어요?

네 아랫도리나 관리해, 이 또라이 새끼야.

은하는 속으로 온갖 험한 욕을 늘어놓으면서도, 행여나 한마디라도 입 밖으로 새어 나갈까 싶어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최대한 활짝 웃음을 지었다.

“응, 완전 잘하고 있지. 나 지금 오빠 선물 고르러 왔거든. 내가 오빠 선물 많이 사 갈게, 기대해. 알았지?”

기대해라. 꼭.



***



일주일 후. 지오.



“아니, 근데 진짜 골 때리지 않아요? 자기가 사귀자고 매달릴 땐 언제고, 바람이라니.”

“……그러게요.”

지오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에서 처참하게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는 휴지 조각들이었지만.

“게다가 어떻게 그 짓을 하는 중에 전화를 받느냔 거예요. 더러워서 진짜.”

“그러게요. 나쁜 놈이네.”

이런 야경은 남산에서만 볼 수 있던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뷰. 은은한 불빛과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모던풍의 인테리어.

“그냥 나쁜 놈이에요? 쓰레기지.”

“예, 쓰레기네요.”

“천하의 개잡놈.”

“…….”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지 않은 저급한 토크. 아니. 고해성사인가.

지오는 가뜩이나 적응이 어려운 이 공간에서 오는 괴리감에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짓을 하는 중에’라는 말을 의도치 않게 상상을 해 버린 나머지, 일순간 입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 지오는 나름 맛있다고 생각하며 조금씩 먹고 있던 식전 빵을 슬쩍 내려놓았다. 하필 같이 나온 페이스트가 미색(米色)이라는 게 단단히 한몫했다.

아아, 분명 식전주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말하기 뭐하지만, 확실히 조금 전까지는 설렌다고 표현해도 좋을 기분이었다.



“맛있어요?”



가장 먼저 나온 식전주로 나온 칵테일을 마시려던 그때. 여자가 미소를 머금고 그렇게 물었고, 겨우 고개를 끄덕이던 지오의 얼굴은 조금 부끄럽기까지 했었다.



“칵테일 이름이 잘 어울려서 골라 봤어요.”



아도니스. 무얼 시키면 좋을지 몰라 고민하던 그에게 여자가 골라 줬던 칵테일이었다.

분명 아프로디테에게 사랑받았다던 미소년이었던가.

지오는 혀끝에서 느껴지는 단맛을 음미했다. 잘생겼다는 칭찬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더 부끄러움이 더해졌었다.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었다.

그러나 일장춘몽이라. 덧없는 꿈에서 깨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아니. 그녀의 앞에 놓인 칵테일이 올드 팔(old pal)이라는 데서 눈치챘어야 했나?

오늘 처음만난 사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그녀의 칵테일이라든가, 자신에게 어울린 미소년이 하필이면 아도니스였다는 게 어쩌면 복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 봐요?”



아아, 그딴 건 묻는 게 아니었다.

왜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진 걸까.

왜 아도니스의 엔딩이 비극이라는 건 몰랐던 걸까.



“듣고 싶어요?”



아아, 신이시여. 저를 딱 10분 전으로만 돌려 주신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멍청한 짓은 두 번 다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는 일 따위는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고, 어느새 은하의 이야기는 ‘잘라 버릴까 했는데 말이죠’ 하는 부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11:30AM

“아, 진짜 말도 안 된다니까. 내가 그 새끼를 더 먼저 찼어야 됐는데.”

전화기에 대고 몇 번째의 ‘말도 안 된다니까’를 외쳐 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약속시간까지 얼마가 남았건 상관없다는 듯, 아직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침대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네가 찰 거라며.

“아니야. 그게 그거가 아니라고. 그놈 바람피우기 전에 차 버리든가, 최소한 그걸 알기 전에 차 버렸어야지. 내가 꼭 진 거 같단 말이야.”

통화를 하다가, 무의식중에 만지작대던 커다란 인형이 ‘예비 구남친’에게 받은 것임을 알아차린 은하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선 그 인형을 발로 뻥 차 버렸다.

아오!

-좋게 생각해. 헤어질 구실 생긴 거라고.

“그거는 그렇긴 하지만……. 아, 열 받아. 제까짓 게 뭐라고.”

-물 싸대기라도 날려 버려.

“어머, 물싸대기라니? 나만큼 교양 있고 젠틀한 사람이 또 어딨다고. 아-주 깔끔하게 헤어질 건데.”

수화기 저편에서 깔깔깔 웃음소리가 터졌다. 한참 웃음을 터뜨리던 주애는 기침을 하고 나서야 숨을 가다듬었다.

“야, 한주애. 너 너무 웃는다?”

-하하! 미안. 아, 죽겠다. 하……. 그치. 우리 은하가 한 교양 하지.

“그럼. 헤어지는 마당에 선물까지 준비하는 사람이 어디 흔하니.”

은하는 이번엔 곰 인형의 얼굴을 꾹꾹 눌러 밟고 있었다. 그러나 분이 안 풀리는 모양인지, 기어이 다시 한번 발로 차 버리고는 주방으로 나갔다.

“아무튼 나도 이제 슬슬 나갈 준비해야겠다.”

-그래, 잘 다녀와. 잘 헤어지고 오고.

“오야. 일 수고해라.”

전화를 끊자마자, 은하는 주방 가위와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꺼내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새끼라느니, 죽일 놈이라느니, 거지 같은 놈이라느니. 순한 욕부터 험한 욕까지 골고루 섞어 가며 인형을 갈가리 해체 후 봉투에 나눠 담았다.

그렇게 한바탕 해체 쇼를 벌이고 나니 금세 원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냥 솜뭉치를 담은 두 덩이의 쓰레기봉투들이 완성되었다. 은하는 그것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금 발로 걷어찼다.

어느새 머리를 감쌌던 수건이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은하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럼, 그럼. 난 교양 있는 사람이니까.

시계를 확인해 보니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예쁜 모습으로 나갈까 하다가, 이제 안 볼 놈을 위한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서 관두었다. 대신 그 녀석에게 줄 선물이 담긴 종이봉투를 꼼꼼히 확인했다.

문 밖을 나서니 봄바람이 살랑댔다.

좋은 날이었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은하는 나른한 기지개를 폈다.



안녕, 거기! 헤어지고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