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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2:00PM
아아, 정말로. 다 때려치우고 싶다.
진료실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지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재수에 옴 붙은 나날도 없었다. 요 며칠 사이에 10년은 늙은 거 같았다.
지오는 이 일대에서 꽤나 큰 산부인과에서 페이 닥터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일하는 보통은 환자에게 접수처에서 남자 의사라고 사전에 이야기를 해 주기 때문에 지오가 받는 손님은 대부분 세 종류 중 하나였다. 남자 의사를 신경 쓰지 않는 손님이든가, 지오의 진료를 다시 찾은 손님이든가, 아니면 병원이 붐빌 때 일정이 바쁜 손님.
지금이야 그나마 그를 주치의로 하는 손님들이 늘었으니 겨우 돈 받는 값은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만, 초창기에는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월급 받고 자리에 앉아있다는 게, 정말 그보다 더 한 가시방석이 없었다. 그가 대학에서 나오던 시기에 하필 산부인과 관련 뉴스가 터졌기에 더했다. 첫 일주일 동안은 받은 환자가 손에 꼽힐 지경이었다. 곧 괜찮아질 것이라는 자기최면이나, 개업의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자기위로도 한두 번이었다.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그의 환자가 늘었고, 조금씩 보람도 느끼는 요즘이었기에 일은 대체로 즐거웠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이번에 이런 일이 연달아 터지는 건 정신적으로 타격이 컸다. 일이고 나발이고. 일을 시작하고서부터 한 번도 안 썼던 휴가를 몰아서라도 쓰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면 일을 때려치우든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생각의 시작은 며칠 전의 술자리였다. 고등학교 동창 모임을 한다며 연락이 왔기에 나갔었다. 10여 년 만에 만났음에도 느껴지는 친근함과 반가움에 들뜨고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을 즈음, 그의 직업을 들은 친구가 외설스러운 농담을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야 남자가 산부인과 의사를 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특이해 보이기도 하고(산부인과 의사 중에 남성 비율이 꽤 많다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남자 고등학교였으니 그런 농담이 하나둘 쯤 나올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확실히 유쾌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흘려 넘겼더니 분위기가 이상해졌고, 그래서 부정했더니 그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탓에, 정말로 간만에 직업을 이유로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왔었다.
바로 그다음 날. 진료를 받으러 온 여자 환자가 그를 보며 질색하는 티를 내는 바람에 또 한 번 제대로 기분이 상했다. 게다가 이 날은 무슨 일인지 그를 보고 탐탁지 않아 하는 환자가 세 명이나 연달아 들어왔다.
그리고 또다시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받은 환자가 그를 보더니 뒷걸음질을 치고 나갔다. 간호사는 미안한 표정으로 환자가 마음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전했다.
“생각보다 선생님이 젊으시다고…….”
살다 살다 나이 어린 것도 죄라니. 멋쩍게 웃으며 무안해하던 간호사의 얼굴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세상만사, 열심히 하면 다 통할 거라고? 엿이나 먹으라 그래.
지오는 책상에 턱을 올려놓고는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망할. 딱 한 명만 더 보고. 만약 이 다음에 새로 환자가 왔는데, 또 질겁하면 때려치우자. 그러니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동네 점심은 뭐가 좋을까나.
애써 생각을 돌린 지오는 다가오는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시계를 확인하며 기지개를 켰다. 블라인드를 재껴서 창밖을 보니, 빌딩 숲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어쩐지 자기만 홀랑 내버려 두고, 바깥세상만 봄이 온 것 같았다.
있죠…… 결심을 실행했다가는 후회하겠죠?
***
12:30PM
“안녕, 자기.”
약속 시간에 딱 맞춰 장소에 도착한 은하는,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던 남자의 앞으로 가서 생긋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인사법에 민규는 순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미소로 답했다.
“아, 왔어? 갑자기 뭐야, 놀랐잖아.”
“왜? 다른 여잔 줄 알고?”
“어?”
평소였다면 별 생각 없이 넘겼겠지만, 오늘은 그의 반응이 아주 색달라보였다. 은하는 남자의 앞자리에 앉으며, ‘선물’이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옆에 있는 의자에 올려놓았다.
“농담이야. 그냥 우리의 관계를 오늘부터 새롭게 해 볼까 해서.”
은하의 미소에 민규가 헤벌쭉하게 웃었다. 상황 파악도 안 되는구나 생각하며, 은하가 한층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여행은 잘 다녀왔고? 아, 일단 뭐 좀 시키고 얘기하자.”
“아주 잘 다녀왔지. 밥은 그냥 먹고 싶은 거로 시켜.”
딱 잘라서 하는 말에, 남자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는 챈 모양이었지만, 여전히 이유에 대해선 감을 못 잡은 듯했다.
“간만에 만났는데 같이 고르지, 왜. 입맛 없어?”
네 얼굴 쳐다보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
은하는 그런 의미를 담아 또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오늘 오빠한테 여행 선물 준다고 나오라고 한 거거든.”
“에이, 밥 먹고 주면 되지.”
“아니, 밥은 혼자 먹어. 난 선물만 주고 갈 거니까.”
그제야 정말 사태가 이상하단 걸 깨달은 모양인지, 남자의 얼굴이 조금 심각하게 변했다.
“어쩜 타이밍도 그렇게 좋은지. 나 이번에 오사카 갔는데 아주 딱인 선물이 있더라고.”
은하는 가방에서 잘 포장된 물건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풀어 봐.”
포장을 푸는 남자의 손이 조금 떨렸고, 상자를 연 남자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아주 정성껏 포장된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남성을 위한 섹스토이였다.
“야, 너 이게 무슨……!”
남자가 큰 소리를 내자, 가게 안의 사람들이 그들을 주목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면, 혹시 이미 있는 거야?”
“뭐 하자는 거야?”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민규가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은하는 수군거리는 사람들과 당황한 그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표정이었다.
“뭐긴 뭐겠어. 내가 어디서 김민규 씨 성욕이 주체가 안 된다는 제보를 들은 거지. 내가 진짜 쪽팔리고 더러워 가지고.”
“……뭐?”
“하필 놀아도 좀 내 친구 동네에서 노냐? 어떻게 모텔 가는 곳까지 빼도 박도 못하게 걸려서는. 덕분에 내가 기분까지 제대로 잡친 거 있지.”
남자의 얼굴은 저러다 기절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 갔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꼴이 변명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근데 마침 딱 텐가숍 앞이었던 거 있지? 정말 운명이 따로 없더라.”
“아, 아니 그게…….”
“뭐? 운동 중? 지랄을 해요, 진짜. 그년인지 놈인지는 그 짓 하던 중에 전화까지 받게 냅두던? 뭐야, 그거? 그런 플레이? 사귀는 사람 있었다는 거 알고 있다는 거잖아? 어후, 드러워.”
은하는 한껏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내내 덜덜 떨던 민규는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으, 은하야. 내가 진짜 미안해. 그때 내가 미쳤었나 봐. 나한테 진짜 너뿐이야. 아, 알잖아. 그냥 진짜 한순간에……, 걔랑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마음이 통한 것도 아니고…….”
“야.”
은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닥쳐.”
“…….”
“그래서 결국 성욕이 주체가 안 된단 얘기잖아. 내가 그래서 네 성욕 해결에 보태라고 이별 선물까지 손수 준비했잖아. 아, 부족해서 그래? 더 줘?”
그렇게 말한 은하는, 옆에 있던 쇼핑백을 통째로 남자의 앞에 던져 줬다. 안에 들어 있는 건 생긴 것만 다를 뿐, 그 카테고리에 변화는 없었다.
“안 그래도 그런 소리 할 줄 알고 잔뜩 사 왔으니까, 종류별로 돌아가면서 하셔요. 요즘 그거 인터넷에 찾아도 잘 나오더라. 그리고 뭐, 나뿐?”
은하는 다시 미소를 활짝 지으며 말했다.
“응, 걱정 마. 네가 바람 안 피웠어도 너랑 더는 안 사귀어.”
충격을 받은 건지, 울고 싶어진 건지. 남자의 표정은 알기 힘들었지만 은하는 관심조차 없었다.
“내가 싫어하는 거 알잖아. 멍청한 거, 더러운 거, 못하는 거. 근데 넌 셋 다네?”
심각해졌던 장내에선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개중에는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 가급적 다신 보지 말았으면 해. 나 지금도 쏠리는 거 참고 있으니까. 그럼 잘 있어. 밥 맛있게 먹고.”
은하는 손을 흔들며 테이블을 떠났고,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매니저에게는 맛있는 식사였다며 ‘밥값’을 건넸다.
그리고 그게, 그녀가 말한 ‘교양 있는 이별’의 끝이었다.
12:00PM
아아, 정말로. 다 때려치우고 싶다.
진료실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지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재수에 옴 붙은 나날도 없었다. 요 며칠 사이에 10년은 늙은 거 같았다.
지오는 이 일대에서 꽤나 큰 산부인과에서 페이 닥터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일하는 보통은 환자에게 접수처에서 남자 의사라고 사전에 이야기를 해 주기 때문에 지오가 받는 손님은 대부분 세 종류 중 하나였다. 남자 의사를 신경 쓰지 않는 손님이든가, 지오의 진료를 다시 찾은 손님이든가, 아니면 병원이 붐빌 때 일정이 바쁜 손님.
지금이야 그나마 그를 주치의로 하는 손님들이 늘었으니 겨우 돈 받는 값은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만, 초창기에는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월급 받고 자리에 앉아있다는 게, 정말 그보다 더 한 가시방석이 없었다. 그가 대학에서 나오던 시기에 하필 산부인과 관련 뉴스가 터졌기에 더했다. 첫 일주일 동안은 받은 환자가 손에 꼽힐 지경이었다. 곧 괜찮아질 것이라는 자기최면이나, 개업의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자기위로도 한두 번이었다.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그의 환자가 늘었고, 조금씩 보람도 느끼는 요즘이었기에 일은 대체로 즐거웠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이번에 이런 일이 연달아 터지는 건 정신적으로 타격이 컸다. 일이고 나발이고. 일을 시작하고서부터 한 번도 안 썼던 휴가를 몰아서라도 쓰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면 일을 때려치우든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생각의 시작은 며칠 전의 술자리였다. 고등학교 동창 모임을 한다며 연락이 왔기에 나갔었다. 10여 년 만에 만났음에도 느껴지는 친근함과 반가움에 들뜨고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을 즈음, 그의 직업을 들은 친구가 외설스러운 농담을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야 남자가 산부인과 의사를 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특이해 보이기도 하고(산부인과 의사 중에 남성 비율이 꽤 많다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남자 고등학교였으니 그런 농담이 하나둘 쯤 나올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확실히 유쾌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흘려 넘겼더니 분위기가 이상해졌고, 그래서 부정했더니 그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탓에, 정말로 간만에 직업을 이유로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왔었다.
바로 그다음 날. 진료를 받으러 온 여자 환자가 그를 보며 질색하는 티를 내는 바람에 또 한 번 제대로 기분이 상했다. 게다가 이 날은 무슨 일인지 그를 보고 탐탁지 않아 하는 환자가 세 명이나 연달아 들어왔다.
그리고 또다시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받은 환자가 그를 보더니 뒷걸음질을 치고 나갔다. 간호사는 미안한 표정으로 환자가 마음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전했다.
“생각보다 선생님이 젊으시다고…….”
살다 살다 나이 어린 것도 죄라니. 멋쩍게 웃으며 무안해하던 간호사의 얼굴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세상만사, 열심히 하면 다 통할 거라고? 엿이나 먹으라 그래.
지오는 책상에 턱을 올려놓고는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망할. 딱 한 명만 더 보고. 만약 이 다음에 새로 환자가 왔는데, 또 질겁하면 때려치우자. 그러니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동네 점심은 뭐가 좋을까나.
애써 생각을 돌린 지오는 다가오는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시계를 확인하며 기지개를 켰다. 블라인드를 재껴서 창밖을 보니, 빌딩 숲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어쩐지 자기만 홀랑 내버려 두고, 바깥세상만 봄이 온 것 같았다.
있죠…… 결심을 실행했다가는 후회하겠죠?
***
12:30PM
“안녕, 자기.”
약속 시간에 딱 맞춰 장소에 도착한 은하는,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던 남자의 앞으로 가서 생긋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인사법에 민규는 순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미소로 답했다.
“아, 왔어? 갑자기 뭐야, 놀랐잖아.”
“왜? 다른 여잔 줄 알고?”
“어?”
평소였다면 별 생각 없이 넘겼겠지만, 오늘은 그의 반응이 아주 색달라보였다. 은하는 남자의 앞자리에 앉으며, ‘선물’이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옆에 있는 의자에 올려놓았다.
“농담이야. 그냥 우리의 관계를 오늘부터 새롭게 해 볼까 해서.”
은하의 미소에 민규가 헤벌쭉하게 웃었다. 상황 파악도 안 되는구나 생각하며, 은하가 한층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여행은 잘 다녀왔고? 아, 일단 뭐 좀 시키고 얘기하자.”
“아주 잘 다녀왔지. 밥은 그냥 먹고 싶은 거로 시켜.”
딱 잘라서 하는 말에, 남자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는 챈 모양이었지만, 여전히 이유에 대해선 감을 못 잡은 듯했다.
“간만에 만났는데 같이 고르지, 왜. 입맛 없어?”
네 얼굴 쳐다보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
은하는 그런 의미를 담아 또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오늘 오빠한테 여행 선물 준다고 나오라고 한 거거든.”
“에이, 밥 먹고 주면 되지.”
“아니, 밥은 혼자 먹어. 난 선물만 주고 갈 거니까.”
그제야 정말 사태가 이상하단 걸 깨달은 모양인지, 남자의 얼굴이 조금 심각하게 변했다.
“어쩜 타이밍도 그렇게 좋은지. 나 이번에 오사카 갔는데 아주 딱인 선물이 있더라고.”
은하는 가방에서 잘 포장된 물건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풀어 봐.”
포장을 푸는 남자의 손이 조금 떨렸고, 상자를 연 남자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아주 정성껏 포장된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남성을 위한 섹스토이였다.
“야, 너 이게 무슨……!”
남자가 큰 소리를 내자, 가게 안의 사람들이 그들을 주목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면, 혹시 이미 있는 거야?”
“뭐 하자는 거야?”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민규가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은하는 수군거리는 사람들과 당황한 그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표정이었다.
“뭐긴 뭐겠어. 내가 어디서 김민규 씨 성욕이 주체가 안 된다는 제보를 들은 거지. 내가 진짜 쪽팔리고 더러워 가지고.”
“……뭐?”
“하필 놀아도 좀 내 친구 동네에서 노냐? 어떻게 모텔 가는 곳까지 빼도 박도 못하게 걸려서는. 덕분에 내가 기분까지 제대로 잡친 거 있지.”
남자의 얼굴은 저러다 기절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 갔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꼴이 변명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근데 마침 딱 텐가숍 앞이었던 거 있지? 정말 운명이 따로 없더라.”
“아, 아니 그게…….”
“뭐? 운동 중? 지랄을 해요, 진짜. 그년인지 놈인지는 그 짓 하던 중에 전화까지 받게 냅두던? 뭐야, 그거? 그런 플레이? 사귀는 사람 있었다는 거 알고 있다는 거잖아? 어후, 드러워.”
은하는 한껏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내내 덜덜 떨던 민규는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으, 은하야. 내가 진짜 미안해. 그때 내가 미쳤었나 봐. 나한테 진짜 너뿐이야. 아, 알잖아. 그냥 진짜 한순간에……, 걔랑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마음이 통한 것도 아니고…….”
“야.”
은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닥쳐.”
“…….”
“그래서 결국 성욕이 주체가 안 된단 얘기잖아. 내가 그래서 네 성욕 해결에 보태라고 이별 선물까지 손수 준비했잖아. 아, 부족해서 그래? 더 줘?”
그렇게 말한 은하는, 옆에 있던 쇼핑백을 통째로 남자의 앞에 던져 줬다. 안에 들어 있는 건 생긴 것만 다를 뿐, 그 카테고리에 변화는 없었다.
“안 그래도 그런 소리 할 줄 알고 잔뜩 사 왔으니까, 종류별로 돌아가면서 하셔요. 요즘 그거 인터넷에 찾아도 잘 나오더라. 그리고 뭐, 나뿐?”
은하는 다시 미소를 활짝 지으며 말했다.
“응, 걱정 마. 네가 바람 안 피웠어도 너랑 더는 안 사귀어.”
충격을 받은 건지, 울고 싶어진 건지. 남자의 표정은 알기 힘들었지만 은하는 관심조차 없었다.
“내가 싫어하는 거 알잖아. 멍청한 거, 더러운 거, 못하는 거. 근데 넌 셋 다네?”
심각해졌던 장내에선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개중에는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 가급적 다신 보지 말았으면 해. 나 지금도 쏠리는 거 참고 있으니까. 그럼 잘 있어. 밥 맛있게 먹고.”
은하는 손을 흔들며 테이블을 떠났고,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매니저에게는 맛있는 식사였다며 ‘밥값’을 건넸다.
그리고 그게, 그녀가 말한 ‘교양 있는 이별’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