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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도시 중심가에 위치한 알칸 M&A(Merger and Acquisition:기업 인수, 합병)한국 지사.
깔끔하고 고급스런 회의실에서는 벌써 몇 시간째 차분한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만큼 몇몇 외국인도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상석에 앉은 남자, 최준환.
그는 발언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유난히 빛난다. 잘 가꾼 외향은 보통의 한국 남자와는 차별되었다. 너른 어깨, 손목까지 접어 올린 셔츠,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손등의 푸른 힘줄은 선명했다.
당혹스러울 만큼 남성미가 느껴졌다. 그의 손짓만으로도 뭔가를 연상하며 상상하게 되는…….
준환을 힐끔거리던 여직원은 갈증을 느꼈다. 그가 발언을 할 때마다 여직원의 눈길은 어김없이 그를 향했다.
「그렇기에 노른자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이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공중분해 되기 직전인 세권에서 암암리 진행 중인 프로젝트임에 분명합니다.」
「드러내지 않았었다?」
「차압 중임에도 주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돌려받기 위해 모든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던 세권을 조각조각 팔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권이 태관 자동차 협력업체의 마지막 순위라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합니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준환은 몸을 뒤로 한 채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 그의 행동은 잠시 재고해 보겠다는 표현이었다.
임원진들은 뒤로 물러나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직원은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숨을 멈췄다.
준환은 계산에 들어갔다. 최대의 이익, 회생 불가한 기업을 최고의 가격으로 매각하여 최대의 이윤을 남기는 것, 그것이 그가 한국에서 할 일이다.
「해외에 팔리게 된다면 현재 상태로서는 합병이 될 수 없을 텐데.」
「만일 된다면 세권은 해외 기업의 국내 법인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투자자의 돈은 그대로 유지되는 되는 걸로 한다면. 해외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충분히 가능성 있는 기업을 되살릴 수 있게끔 만든다면 어떻지?」
「그럼 국내 기업에서 더 비싼 값으로 사려고 안달하겠지요.」
「그렇지. 그걸 노리자고. 해외 기업에 조각내 팔았다가 국내에 되팔기.」
준비만 몇 달, 그리고 릴레이처럼 이어진 회의는 이렇게 만족스럽게 귀결되나 싶었다. 그러나 준환은 모두의 행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세권그룹에 관계된 자들 전부 조사해서 내일까지 보고서 올리도록 해 주게.」
「네에? 임원진과 직원들의 자료는 이미 보고를 끝냈…….」
「빠진 게 있던데.」
준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릴레이 회의로 인해 다들 지친 기색이 완연한 가운데 그만은 생생한 눈빛으로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세권그룹 신 회장의 비서실장 김기웅. 황세연, 신송임.」
「그, 그들이 누구…….」
「그건 보고하는 사람이 더 잘 알아야 할 텐데? 그리고 오늘 회의한 내용은 기밀이니 누구라도 발설할 시 계약서상에 사인한 대로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 잊지 말도록.」
준환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가 보이는 눈빛은 무시무시했다. 그의 서늘한 미소와 함께 엄중함을 내보였다.
도대체 세권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와해될 기업에 무척이나 공을 들일 수는 있을 테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른 이도 아니고 인수 합병의 신이라고 불리는 최준환이었으로.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수고 많았습니다. 모두들.」
준환은 간단한 인사를 전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
금요일 밤.
시내에 위치한 한 호텔 앞에 값비싼 외제차들이 한가득 서 있었다. 대부분 호텔에서 운영하는 회원제 클럽에 들어가려는 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묵직한 세단에서 내린 남자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보기 드문 장신에다 조각 같은 외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꽤나 다져진 몸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했다.
“금요일이라, 사람이 많군.”
조용히 읊조린 준환은 주변을 살펴보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차임벨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올라타 자신이 가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층에 도착했는지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천천히 걸음은 옮기던 준환은 이윽고 왼쪽, 조용한 재즈가 라이브로 들려오는 바의 문을 열었다. 그가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이 안내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준환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는 소파 석으로 안내되었다.
“최준환입니다.”
그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았다. 세권그룹의 박 변호사였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 바쁜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값비싼 곳이라 내가 횡재했지.”
박 변호사는 사람 좋게 웃었다. 준환은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차 가져오셨습니까?”
“알면 권하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저만 해야겠군요. 늘 마시던 것으로.”
준환의 주문에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황금빛으로 빛나는 브랜디 한 병이 잔과 얼음이 담긴 그릇과 함께 놓여졌다. 직원이 따르려 하자 준환은 만류했다.
“내가 하지.”
직원은 정중하게 대답한 뒤 물러났다. 준환은 손잡이 없이 물의 형태로 깎인 크리스털 잔에 브랜디를 따랐다. 회의실에서도 놓여 있었던 값비싼 빈티지 잔이었다.
잔은 진홍빛 액체를 머금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광택이 감돌았다. 준환은 잔을 빙빙 돌린 후 향기를 음미하다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잘나가는군, 여기도. 자네의 탁월한 안목으로 이렇게 비싼 클럽의 회원권이 날개 돋친 듯 나가니 세상이 참 변했어. 이곳 하루 매상이 중소기업의 한 달 매출이라 했던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박 변호사는 이름난 호텔과 연계해 사교 클럽을 연 준환의 놀라운 능력에 연신 혀를 내둘렀다.
“과찬입니다. 이곳은 호텔과 반반 투자했을 뿐입니다. 따로 영업 사장이 있습니다.”
“그 반이 어딘가 그래. 자네는 참 놀라운 인재야. 회장님이 탐낼 만했지, 암.”
놀라운 칭찬에도 준환은 담담했다.
“앞으로 어찌할 겐가.”
말없이 브랜디의 끝 맛을 음미하던 준환은 잔을 내려놓았다.
“일단 받아들일 것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일세.”
“성인이니 이해할 테지요. 그리고 당사자는 중요치 않습니다. 마지막 부탁을 이행할 뿐이니까.”
“그것 참.”
박 변호사는 뒤로 몸을 기댔다.
“황세연이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거야 대비하면 되죠. 그리고 그쪽에서도 회장님과의 계약이 있을 텐데요.”
“그게, 그쪽에서는 이행치 않을 것처럼 군단 말이지.”
“시치미 떼고 살아가시겠다?”
순간, 준환의 눈빛이 거칠게 변했다.
“그거겠지, 아무래도. 세권에서는 황세연 측에서 빌린 남은 부채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네. 합병이 되더라도 해결할지는 미지수니 채권을 빌미로 그렇게 하겠다는 거지.”
“법을 뭣같이 알다니, 정말이지…… 답이 없군요.”
준환이 질린다는 표정을 하자 박 변호사는 크게 웃었다. 동의한다는 듯이 자신의 물 잔을 그의 술잔에 부딪쳤다.
“그렇지 답이 없어. 그렇기에 회장님께서는 신율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네.”
잔을 든 준환의 손이 멈췄다.
“그럼 내 명함은 왜 줬습니까?”
비웃음이 담긴 표정이었다. 박 변호사는 난감한 듯 또다시 인상 좋게 웃었다.
“그러게 말일세. 자네가 어찌 받아들일지 알고 말이야. 내가 뭐라 말할 수가 없구먼.”
“회장님의 고집 모르는 바 아니나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박 변호사는 준환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럼 율은 정말 갈 곳이 없게 된다네. 완벽하게 혼자야.”
“그런데 말이죠. 참 우습게도 운명인지 신찬 선배와 누님에게 빚이 있습니다.”
“누님? 아! 자네가 율의 모친과…….”
준환은 잠시 아스라한 시선을 던졌다. 잔잔했던 재즈의 선율이 색소폰을 메인으로 활기차게 바뀌었다. 준환은 두 번째 잔도 말끔히 비웠다.
“그렇기에 이행합니다. 그쪽이 거부하거나 말거나.”
단호했다. 그에 박 변호사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만 믿네. 나도, 회장님도.”
***
토요일 오전. 율은 비서실장인 기중의 차를 차고 조부의 저택 앞에 와 있었다.
이번 주는 기숙사 전원의 귀가 주간이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던 율은 오래 알고 지낸 기중의 집에 머물렀다.
또한 기중과의 진지한 대화 끝에 부친이 남긴 유산과 대출을 활용해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물색하고 남은 금액으로는 대학 등록금을 충당하는 계획까지 세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손길이 남아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도착한 저택은 놀랍게도 정원의 철거가 진행 중에 있었다.
“지금, 저게 뭐죠?”
율은 부들부들 떨었다. 저택 한편의 담벼락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것뿐 아니었다. 이미 정원 한편에 심어 있던 나무들까지 파헤쳐지고 있는 상황에 할 말을 잃은 율은 무작정 차에서 내렸다.
“율아!”
기중의 만류도 들리지 않을 만큼 눈앞에 그려진 상황이 충격적이었다. 율의 안색은 몹시도 창백했다. 휘청거리며 달려 나가는 모습은 꼭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다시 한번 저택의 정원을 보고 싶었던 것인데……. 아버지.
뭐 하나 따뜻한 구석이 없던 저택이었지만 아버지의 온기가 있었던 유일한 공간. 세상천지 자신을 품어 줄 단 하나의 집이었던 곳이다. 이대로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실장님. 공사를 막을 수는 없나요? 그대로 그냥 둘 수는 없나요?”
유언장에 적힌 것처럼 고스란히 황세연에게 상속된 저택이다. 기중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등기를 마쳤어. 있다면 다시 사는 길밖에는 없지만. 그쪽에서는 쉽사리 넘기지 않을 뿐더러 판다 하더라도 상당한 고액을 원할 텐데 현실적으로 어렵단다.”
기중의 말이 끝나자마자 율의 눈가는 벌겋게 물들었다. 안타까우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기중은 조용히 채근했다.
“가자꾸나.”
그와 함께 가면서도 율은 연신 무너진 저택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를 잃을 때처럼 지금, 가슴이 내려앉았다. 자신이 조부의 저택에 미련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기중은 운전대의 방향을 틀어 천천히 우회했다. 많은 차량으로 인해 점차 차의 속도는 느려졌다. 문득 율은 조부가 남긴 것에 대해 입을 열었다.
“알려 주세요. 그 명함에 대해.”
“네 후견인의 명함이지 아마.”
“……후견인이라니요?”
“율의 남편감. 회장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손녀의 상대자를 남긴 셈이지. 명함 외에 한지가 있었다고 했지? 그의 사주가 적혀 있는 거란다.”
율은 그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머릿속이 어지럽기까지 한 걸 보면 말뜻을 알아차린 것일 수도.
“그러니까 명함 속 알렉스, 최준환이라는 분이 나와?”
기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도 알아요, 이 사실을? 장례식에 왔었나요?”
“그것까지는 알지 못하겠구나. 다만 박 변호사님과 안면이 있는 분이니 그쪽에 확인해 보는 게 빠를 테지.”
율은 허탈했다. 차라리 박 변호사께 연락드릴 것을.
“기막힌 상대군요.”
괜한 억하심정마저 들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시대인데 정해진 상대라니…….
율은 옆으로 스치는 풍경을 후회의 눈으로 담았다. 또 다른 침묵 속에서 율은 고요히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사람 만날 수 있을까요?”
도시 중심가에 위치한 알칸 M&A(Merger and Acquisition:기업 인수, 합병)한국 지사.
깔끔하고 고급스런 회의실에서는 벌써 몇 시간째 차분한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만큼 몇몇 외국인도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상석에 앉은 남자, 최준환.
그는 발언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유난히 빛난다. 잘 가꾼 외향은 보통의 한국 남자와는 차별되었다. 너른 어깨, 손목까지 접어 올린 셔츠,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손등의 푸른 힘줄은 선명했다.
당혹스러울 만큼 남성미가 느껴졌다. 그의 손짓만으로도 뭔가를 연상하며 상상하게 되는…….
준환을 힐끔거리던 여직원은 갈증을 느꼈다. 그가 발언을 할 때마다 여직원의 눈길은 어김없이 그를 향했다.
「그렇기에 노른자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이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공중분해 되기 직전인 세권에서 암암리 진행 중인 프로젝트임에 분명합니다.」
「드러내지 않았었다?」
「차압 중임에도 주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돌려받기 위해 모든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던 세권을 조각조각 팔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권이 태관 자동차 협력업체의 마지막 순위라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합니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준환은 몸을 뒤로 한 채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 그의 행동은 잠시 재고해 보겠다는 표현이었다.
임원진들은 뒤로 물러나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직원은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숨을 멈췄다.
준환은 계산에 들어갔다. 최대의 이익, 회생 불가한 기업을 최고의 가격으로 매각하여 최대의 이윤을 남기는 것, 그것이 그가 한국에서 할 일이다.
「해외에 팔리게 된다면 현재 상태로서는 합병이 될 수 없을 텐데.」
「만일 된다면 세권은 해외 기업의 국내 법인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투자자의 돈은 그대로 유지되는 되는 걸로 한다면. 해외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충분히 가능성 있는 기업을 되살릴 수 있게끔 만든다면 어떻지?」
「그럼 국내 기업에서 더 비싼 값으로 사려고 안달하겠지요.」
「그렇지. 그걸 노리자고. 해외 기업에 조각내 팔았다가 국내에 되팔기.」
준비만 몇 달, 그리고 릴레이처럼 이어진 회의는 이렇게 만족스럽게 귀결되나 싶었다. 그러나 준환은 모두의 행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세권그룹에 관계된 자들 전부 조사해서 내일까지 보고서 올리도록 해 주게.」
「네에? 임원진과 직원들의 자료는 이미 보고를 끝냈…….」
「빠진 게 있던데.」
준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릴레이 회의로 인해 다들 지친 기색이 완연한 가운데 그만은 생생한 눈빛으로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세권그룹 신 회장의 비서실장 김기웅. 황세연, 신송임.」
「그, 그들이 누구…….」
「그건 보고하는 사람이 더 잘 알아야 할 텐데? 그리고 오늘 회의한 내용은 기밀이니 누구라도 발설할 시 계약서상에 사인한 대로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 잊지 말도록.」
준환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가 보이는 눈빛은 무시무시했다. 그의 서늘한 미소와 함께 엄중함을 내보였다.
도대체 세권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와해될 기업에 무척이나 공을 들일 수는 있을 테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른 이도 아니고 인수 합병의 신이라고 불리는 최준환이었으로.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수고 많았습니다. 모두들.」
준환은 간단한 인사를 전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
금요일 밤.
시내에 위치한 한 호텔 앞에 값비싼 외제차들이 한가득 서 있었다. 대부분 호텔에서 운영하는 회원제 클럽에 들어가려는 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묵직한 세단에서 내린 남자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보기 드문 장신에다 조각 같은 외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꽤나 다져진 몸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했다.
“금요일이라, 사람이 많군.”
조용히 읊조린 준환은 주변을 살펴보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차임벨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올라타 자신이 가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층에 도착했는지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천천히 걸음은 옮기던 준환은 이윽고 왼쪽, 조용한 재즈가 라이브로 들려오는 바의 문을 열었다. 그가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이 안내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준환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는 소파 석으로 안내되었다.
“최준환입니다.”
그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았다. 세권그룹의 박 변호사였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 바쁜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값비싼 곳이라 내가 횡재했지.”
박 변호사는 사람 좋게 웃었다. 준환은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차 가져오셨습니까?”
“알면 권하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저만 해야겠군요. 늘 마시던 것으로.”
준환의 주문에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황금빛으로 빛나는 브랜디 한 병이 잔과 얼음이 담긴 그릇과 함께 놓여졌다. 직원이 따르려 하자 준환은 만류했다.
“내가 하지.”
직원은 정중하게 대답한 뒤 물러났다. 준환은 손잡이 없이 물의 형태로 깎인 크리스털 잔에 브랜디를 따랐다. 회의실에서도 놓여 있었던 값비싼 빈티지 잔이었다.
잔은 진홍빛 액체를 머금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광택이 감돌았다. 준환은 잔을 빙빙 돌린 후 향기를 음미하다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잘나가는군, 여기도. 자네의 탁월한 안목으로 이렇게 비싼 클럽의 회원권이 날개 돋친 듯 나가니 세상이 참 변했어. 이곳 하루 매상이 중소기업의 한 달 매출이라 했던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박 변호사는 이름난 호텔과 연계해 사교 클럽을 연 준환의 놀라운 능력에 연신 혀를 내둘렀다.
“과찬입니다. 이곳은 호텔과 반반 투자했을 뿐입니다. 따로 영업 사장이 있습니다.”
“그 반이 어딘가 그래. 자네는 참 놀라운 인재야. 회장님이 탐낼 만했지, 암.”
놀라운 칭찬에도 준환은 담담했다.
“앞으로 어찌할 겐가.”
말없이 브랜디의 끝 맛을 음미하던 준환은 잔을 내려놓았다.
“일단 받아들일 것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일세.”
“성인이니 이해할 테지요. 그리고 당사자는 중요치 않습니다. 마지막 부탁을 이행할 뿐이니까.”
“그것 참.”
박 변호사는 뒤로 몸을 기댔다.
“황세연이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거야 대비하면 되죠. 그리고 그쪽에서도 회장님과의 계약이 있을 텐데요.”
“그게, 그쪽에서는 이행치 않을 것처럼 군단 말이지.”
“시치미 떼고 살아가시겠다?”
순간, 준환의 눈빛이 거칠게 변했다.
“그거겠지, 아무래도. 세권에서는 황세연 측에서 빌린 남은 부채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네. 합병이 되더라도 해결할지는 미지수니 채권을 빌미로 그렇게 하겠다는 거지.”
“법을 뭣같이 알다니, 정말이지…… 답이 없군요.”
준환이 질린다는 표정을 하자 박 변호사는 크게 웃었다. 동의한다는 듯이 자신의 물 잔을 그의 술잔에 부딪쳤다.
“그렇지 답이 없어. 그렇기에 회장님께서는 신율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네.”
잔을 든 준환의 손이 멈췄다.
“그럼 내 명함은 왜 줬습니까?”
비웃음이 담긴 표정이었다. 박 변호사는 난감한 듯 또다시 인상 좋게 웃었다.
“그러게 말일세. 자네가 어찌 받아들일지 알고 말이야. 내가 뭐라 말할 수가 없구먼.”
“회장님의 고집 모르는 바 아니나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박 변호사는 준환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럼 율은 정말 갈 곳이 없게 된다네. 완벽하게 혼자야.”
“그런데 말이죠. 참 우습게도 운명인지 신찬 선배와 누님에게 빚이 있습니다.”
“누님? 아! 자네가 율의 모친과…….”
준환은 잠시 아스라한 시선을 던졌다. 잔잔했던 재즈의 선율이 색소폰을 메인으로 활기차게 바뀌었다. 준환은 두 번째 잔도 말끔히 비웠다.
“그렇기에 이행합니다. 그쪽이 거부하거나 말거나.”
단호했다. 그에 박 변호사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만 믿네. 나도, 회장님도.”
***
토요일 오전. 율은 비서실장인 기중의 차를 차고 조부의 저택 앞에 와 있었다.
이번 주는 기숙사 전원의 귀가 주간이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던 율은 오래 알고 지낸 기중의 집에 머물렀다.
또한 기중과의 진지한 대화 끝에 부친이 남긴 유산과 대출을 활용해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물색하고 남은 금액으로는 대학 등록금을 충당하는 계획까지 세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손길이 남아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도착한 저택은 놀랍게도 정원의 철거가 진행 중에 있었다.
“지금, 저게 뭐죠?”
율은 부들부들 떨었다. 저택 한편의 담벼락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것뿐 아니었다. 이미 정원 한편에 심어 있던 나무들까지 파헤쳐지고 있는 상황에 할 말을 잃은 율은 무작정 차에서 내렸다.
“율아!”
기중의 만류도 들리지 않을 만큼 눈앞에 그려진 상황이 충격적이었다. 율의 안색은 몹시도 창백했다. 휘청거리며 달려 나가는 모습은 꼭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다시 한번 저택의 정원을 보고 싶었던 것인데……. 아버지.
뭐 하나 따뜻한 구석이 없던 저택이었지만 아버지의 온기가 있었던 유일한 공간. 세상천지 자신을 품어 줄 단 하나의 집이었던 곳이다. 이대로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실장님. 공사를 막을 수는 없나요? 그대로 그냥 둘 수는 없나요?”
유언장에 적힌 것처럼 고스란히 황세연에게 상속된 저택이다. 기중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등기를 마쳤어. 있다면 다시 사는 길밖에는 없지만. 그쪽에서는 쉽사리 넘기지 않을 뿐더러 판다 하더라도 상당한 고액을 원할 텐데 현실적으로 어렵단다.”
기중의 말이 끝나자마자 율의 눈가는 벌겋게 물들었다. 안타까우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기중은 조용히 채근했다.
“가자꾸나.”
그와 함께 가면서도 율은 연신 무너진 저택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를 잃을 때처럼 지금, 가슴이 내려앉았다. 자신이 조부의 저택에 미련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기중은 운전대의 방향을 틀어 천천히 우회했다. 많은 차량으로 인해 점차 차의 속도는 느려졌다. 문득 율은 조부가 남긴 것에 대해 입을 열었다.
“알려 주세요. 그 명함에 대해.”
“네 후견인의 명함이지 아마.”
“……후견인이라니요?”
“율의 남편감. 회장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손녀의 상대자를 남긴 셈이지. 명함 외에 한지가 있었다고 했지? 그의 사주가 적혀 있는 거란다.”
율은 그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머릿속이 어지럽기까지 한 걸 보면 말뜻을 알아차린 것일 수도.
“그러니까 명함 속 알렉스, 최준환이라는 분이 나와?”
기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도 알아요, 이 사실을? 장례식에 왔었나요?”
“그것까지는 알지 못하겠구나. 다만 박 변호사님과 안면이 있는 분이니 그쪽에 확인해 보는 게 빠를 테지.”
율은 허탈했다. 차라리 박 변호사께 연락드릴 것을.
“기막힌 상대군요.”
괜한 억하심정마저 들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시대인데 정해진 상대라니…….
율은 옆으로 스치는 풍경을 후회의 눈으로 담았다. 또 다른 침묵 속에서 율은 고요히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사람 만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