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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율의 미간이 살짝 금갔다.
아파트 입구에서 또 현관 입구까지.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고작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부터 몇 개의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몰랐다.
잠시 후, 삐- 하는 연결음과 동시에 번호기에 파란불이 들어오자 유리문이 활짝 열렸다. 이제 겨우 엘리베이터를 탈 자격을 얻은 셈이었다.
“올라가자.”
그런데 기중이 발을 들이미는 순간, 그의 호주머니에서 들리는 진동음이 무척이나 요란했다.
“잠시만.”
기중은 급히 몸을 틀어 폰을 꺼냈다.
“그 건은 전부 마친 것으로 아네만.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철저하게 해 둬야지. 기다려, 내 곧 갈게. 그때까지 아무도 퇴근하지 말고.”
당황한 것이 역력한 기중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여기가 강변이니 막히지 않는다면 30분 안에 도착해. 가서 확인해 볼 테니 전부 모아두게.”
기중이 조급하게 폰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율이 누르고 있던 엘리베이터에서 비명을 질렀다. 어서 문을 닫으라는 소리였다. 율은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치우려 했다. 그러자 기중이 재빨리 열림 버튼을 눌렀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율아, 2001호야. 또 언제 여력이 있을지 모르니 꼭 보고 가거라. 언제고 봐야 될 사람이야.”
그건 그렇다. 율은 자신의 괜한 고집에 바쁜 중에도 이곳까지 와 준 기중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할 수 없이 율은 끄덕였다.
“그래, 연락해 둘 테니 올라가렴. 끝나고 다시 나에게 전화하고. 알겠지?”
“네.”
다시 기중의 폰이 진동했다. 그에 율은 어서 가 보라는 듯 스스로 20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 사이 기중이 통화를 하며 급히 걸어가는 모습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에 사라졌다.
고요한 엘리베이터 안. 율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유려한 무늬가 꽤나 현란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띵, 하는 소리와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초고속으로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율은 자연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복도도 잘 꾸며진 호텔 로비 같았다. 길게 심호흡했다. 그다음 차분한 걸음으로 2001호를 찾았다. 아니, 찾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율이 내린 20층에는 딱 하나의 문만 있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펜트하우스인가 보다.
하지만 더 움직이지 못했다. 문 앞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우아하고 화사하기까지 한 그녀는 현관문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날 함부로 대하죠? 꼭 이래야만 하냔 말이에요. 신사는커녕 무뢰한이군요!”
여자는 드라마 대사 읊듯이 꾹 닫힌 문 앞에서 절절했다. 율은 자신이 혹시나 잘못 내렸나 싶어 층과 호수를 다시금 확인했다.
엘리베이터 옆 안내판은 정확히 20층을 말하고 있었다. 가까이 보이는 현관 옆, 황금빛 현판에도 ‘2001호’라 뚜렷하게 보였다.
“준환 씨! 당신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것,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 줄 거야! 당신이 뭔데!”
이제 여자는 눈물까지 뚝뚝 흘렸다. 율은 다시 한 번 여자를 자세히 관찰했다. ‘준환’이라는 이름에 놀랐다.
대체 저 여자는 누굴까.
“준환 씨!”
여자의 울음은 처절했다. 그리고 곧 문 앞에서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율의 인상은 있는 대로 찡그려졌다.
정신 차려. 이건 영화도 소설도 아니야. 현실이라고.
조부가 남긴 명함 속의 주인공, 최준환.
할아버지는 그의 사주가 적힌 한지를 남겼으면서도 그자가 어떤 작자인지 살펴볼 겨를도 없었나보다. 만일 그가 저렇듯 아름다운 여자를 찬 게 확실하다면 그 작자는 대체 얼마나 눈이 높은 거야…….
“나쁜 남자.”
저도 모르게 이를 부득 갈았다. 기막혔다. 조부가 남긴 얇은 봉투를 열 때도 기막혔고 그 자가 자신의 상대일 수도 있다는 것에도 기막혔다.
그리고 지금 사랑하는 연인이 매달리며 울고 있다는 것에는 기막힘을 떠나 순수한 분노가 일었다.
“나쁜 사람이야, 아주.”
율은 오열하는 여자에 집중하다 보니 자신의 뒤로 닫혀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나빴어.”
“뭐가.”
“연인을 울리는 남……. 엄마야!”
자연스레 혼잣말하던 율은 기겁할 듯 몸을 움츠렸다. 곧 누군가의 손이 움츠린 율의 어깨를 바로 세웠다. 무척이나 큰 손이었다.
“정신 차리지.”
나지막한 채근까지. 남자였다. 귓가로 떨어지는 음성은 낮으면서도 보드라웠다. 게다가 찰나로 머물다 물러난 그의 체취까지 코끝에 은은히 잠겼다.
그윽하면서도 상쾌한, 청량한 풀 내음.
율은 그 남자가 자신을 지나쳐 문 앞의 여자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치 슬로 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너른 어깨, 긴 다리. 완벽한 성인 남자란 저런 남자를 말함인가. 율은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남자는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자신의 어깨를 짚었던 커다란 손이 연약한 여자의 팔뚝을 잡는 모양새는 꼭 절절한 연인의 해후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숨을 멈췄다.
그제야 율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람. 돌아가야 해.
이성이 다그쳤다. 그러나 몸은 쉽사리 움직일 생각을 안했다.
어서 돌아가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난감한 율은 스스로를 채찍질 후에야 겨우겨우 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율은 멈칫했다. 제 귀를 의심해야 했다. 너무도 냉정한 어조였다.
“준환 씨! 우린, 우리는…….”
“이세나. 당신 스토커인가?”
율의 눈은 커졌다. 상상과는 전혀 반대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지겹군.”
그의 차디찬 냉소에 사방은 정적에 휩싸였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움직이는 엘리베이터의 낮은 기계 소리뿐이었다. 연인 사이가 아니야. 그럼 대체…….
“그. 그게……. 준환 씨!”
세나는 즉시 손을 뻗쳤다. 준환은 가볍게 그녀를 피하며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두세 명의 정복을 입은 사내들이 율의 앞을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사내들은 일제히 그에게 고개 숙였다. 그러자 여자, 세나의 표정이 돌변했다.
“왜 준환 씨 말을 듣는 건데! 당신들은 날 위해 고용되었잖아!”
여자는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율은 이 상황이 어이없어 노인네처럼 허허 거려야 했다.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파파라치라도 붙으면 곤란한 쪽은 세나 씨입니다. 계약된 광고들은 어쩌려고요. 더는 기획사에서 도와줄 수가 없으니 제발 자중하라는 사장님의 전갈입니다. 가택 침입죄는 불법입니다.”
“당신들 월급이 어디서 나오는데 감히 나한테 이래? 난 준환 씨 집에서 지낼 거야, 준환 씨! 뭐라 말 좀 해 줘요!”
남자들이 세나를 에워싸자 그녀는 준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미동도 없었다. 아니 서늘하다 못해 냉정 그 자체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보인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율은 비로소 그를 보고 알게 되었다.
“당신 집을 알았으니 다음에는 성공할 거야! 두고 보라고. 당신! 곧 날 원한다며 무릎 꿇고 빌게 될 테니!”
놀라운 장면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나 앙칼지게 소리치는지 여자의 눈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완전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했다.
더는 들어 줄 수가 없는지 준환은 지겨운 듯 손짓했다. 사내들은 세나의 뒤와 옆에 도열했다. 그녀는 억지로 끌려가며 준환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 눈길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그는 피식 웃었다. 아니 웃는 게 아닌 조소라 할까.
“우리가 무슨 사이지?”
준환이 물었다. 그러나 그 물음조차도 냉기가 뚝뚝 흐르니 세나를 비롯하여 사내들도 당황했다.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동의하에 관계를 맺은 사이지. 그 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관계.”
세나는 입을 달싹거렸다. 그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다만 얼음송곳 같은 그의 눈초리와 어조는 못마땅했다. 그럼에도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아닌가.”
다시금 그의 눈길이 닿았다. 너무도 시렸다. 아니 당장이라도 울음보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랬다. 호텔 클럽에서 그를 보고 첫눈에 반해 스스로 유혹했다. 단 하룻밤의 뜨거운 관계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그녀는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그를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성인으로서 남부끄럽군. 실망이야, 이세나. 난 감정을 흘린 적이 없는데, 그 누구에게도.”
준환은 독이 발라진 날카로운 가시 그 자체였다. 즐긴 사이, 더도 덜도 아닌 관계라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다신 볼 이유가 없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나.”
그녀의 눈물 따위에는 아랑곳없었다. 냉정함 그대로 서릿발이었다.
자존심까지 깨부수는 그에 세나는 어깨를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호위하듯 사내들이 에워쌌다. 그들이 엘리베이터로 다가오자 율은 그들이 지나갈 수 있게 벽에 딱 붙었다.
그제야 세나는 율을 흘낏 보았다. 그러나 준환의 말과 행동에 타격이 컸기에 눈에만 담을 뿐 뭐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그들을 태우고 문을 닫았다. 다시금 정적이 감돌았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진다. 그것은 율이 서 있는 곳까지 닿았다.
준환은 벽에 붙어 있는 율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율도 아무 말 못했다. 그저 그를 응시하며 멍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쪽은 준환이었다. 그는 지문과 번호를 사용해 문을 연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란 듯 현관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율의 머릿속이 재빨리 움직였다. 불편한 상황을 연결하고 또 연결해 보려 애써 보았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세나, 모델이자 배우.
우아함과 아름다움으로 손꼽는 그녀가 제 앞으로 지나가고서야 꿈이 너무나 많아 모델도 되고 싶다던 이복동생 송임이 동경하는 그녀임을 알아본 것이다.
최준환과 이세나. 최정상의 여배우이자 모델. 하룻밤 관계, 즐기는 사이…….
벽에서 힘없이 떨어진 율에게 허탈함이 묻어나왔다.
세상에, 할아버지.
율은 절로 조부를 불렀다. 괜히 천정을 올려다봐도 값비싸 보이는 등이 매달린 아파트 복도. 율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열린 현관을 보았다. 거대한 동굴 입구처럼 어두웠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 또한 현관을 저렇게 열어 두었다는 것은 분명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란다는 것. 그렇다면 저자는 조부의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과 같았다.
율은 길게 심호흡했다. 차라리 어떤 남자인지 알게 되었으니 신의 한 수라 할까.
“그래. 죽기야 하겠어.”
어린 치기, 잘난 어른의 세계, 뭐라 부르던 조부의 의도를 알고 싶었다. 몹쓸 호기심이라 해도 좋았다.
율은 열린 현관문을 조용히 닫은 뒤 신발을 벗고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해 둔 것 같은 실내화에 발을 들이밀었다.
내 목적은 분명해. 최준환, 그가 어떤 남자인지 알아보려는 것뿐이야.
정적은 이곳에도 존재했다.
율의 미간이 살짝 금갔다.
아파트 입구에서 또 현관 입구까지.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고작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부터 몇 개의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몰랐다.
잠시 후, 삐- 하는 연결음과 동시에 번호기에 파란불이 들어오자 유리문이 활짝 열렸다. 이제 겨우 엘리베이터를 탈 자격을 얻은 셈이었다.
“올라가자.”
그런데 기중이 발을 들이미는 순간, 그의 호주머니에서 들리는 진동음이 무척이나 요란했다.
“잠시만.”
기중은 급히 몸을 틀어 폰을 꺼냈다.
“그 건은 전부 마친 것으로 아네만.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철저하게 해 둬야지. 기다려, 내 곧 갈게. 그때까지 아무도 퇴근하지 말고.”
당황한 것이 역력한 기중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여기가 강변이니 막히지 않는다면 30분 안에 도착해. 가서 확인해 볼 테니 전부 모아두게.”
기중이 조급하게 폰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율이 누르고 있던 엘리베이터에서 비명을 질렀다. 어서 문을 닫으라는 소리였다. 율은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치우려 했다. 그러자 기중이 재빨리 열림 버튼을 눌렀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율아, 2001호야. 또 언제 여력이 있을지 모르니 꼭 보고 가거라. 언제고 봐야 될 사람이야.”
그건 그렇다. 율은 자신의 괜한 고집에 바쁜 중에도 이곳까지 와 준 기중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할 수 없이 율은 끄덕였다.
“그래, 연락해 둘 테니 올라가렴. 끝나고 다시 나에게 전화하고. 알겠지?”
“네.”
다시 기중의 폰이 진동했다. 그에 율은 어서 가 보라는 듯 스스로 20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 사이 기중이 통화를 하며 급히 걸어가는 모습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에 사라졌다.
고요한 엘리베이터 안. 율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유려한 무늬가 꽤나 현란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띵, 하는 소리와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초고속으로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율은 자연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복도도 잘 꾸며진 호텔 로비 같았다. 길게 심호흡했다. 그다음 차분한 걸음으로 2001호를 찾았다. 아니, 찾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율이 내린 20층에는 딱 하나의 문만 있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펜트하우스인가 보다.
하지만 더 움직이지 못했다. 문 앞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우아하고 화사하기까지 한 그녀는 현관문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날 함부로 대하죠? 꼭 이래야만 하냔 말이에요. 신사는커녕 무뢰한이군요!”
여자는 드라마 대사 읊듯이 꾹 닫힌 문 앞에서 절절했다. 율은 자신이 혹시나 잘못 내렸나 싶어 층과 호수를 다시금 확인했다.
엘리베이터 옆 안내판은 정확히 20층을 말하고 있었다. 가까이 보이는 현관 옆, 황금빛 현판에도 ‘2001호’라 뚜렷하게 보였다.
“준환 씨! 당신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것,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 줄 거야! 당신이 뭔데!”
이제 여자는 눈물까지 뚝뚝 흘렸다. 율은 다시 한 번 여자를 자세히 관찰했다. ‘준환’이라는 이름에 놀랐다.
대체 저 여자는 누굴까.
“준환 씨!”
여자의 울음은 처절했다. 그리고 곧 문 앞에서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율의 인상은 있는 대로 찡그려졌다.
정신 차려. 이건 영화도 소설도 아니야. 현실이라고.
조부가 남긴 명함 속의 주인공, 최준환.
할아버지는 그의 사주가 적힌 한지를 남겼으면서도 그자가 어떤 작자인지 살펴볼 겨를도 없었나보다. 만일 그가 저렇듯 아름다운 여자를 찬 게 확실하다면 그 작자는 대체 얼마나 눈이 높은 거야…….
“나쁜 남자.”
저도 모르게 이를 부득 갈았다. 기막혔다. 조부가 남긴 얇은 봉투를 열 때도 기막혔고 그 자가 자신의 상대일 수도 있다는 것에도 기막혔다.
그리고 지금 사랑하는 연인이 매달리며 울고 있다는 것에는 기막힘을 떠나 순수한 분노가 일었다.
“나쁜 사람이야, 아주.”
율은 오열하는 여자에 집중하다 보니 자신의 뒤로 닫혀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나빴어.”
“뭐가.”
“연인을 울리는 남……. 엄마야!”
자연스레 혼잣말하던 율은 기겁할 듯 몸을 움츠렸다. 곧 누군가의 손이 움츠린 율의 어깨를 바로 세웠다. 무척이나 큰 손이었다.
“정신 차리지.”
나지막한 채근까지. 남자였다. 귓가로 떨어지는 음성은 낮으면서도 보드라웠다. 게다가 찰나로 머물다 물러난 그의 체취까지 코끝에 은은히 잠겼다.
그윽하면서도 상쾌한, 청량한 풀 내음.
율은 그 남자가 자신을 지나쳐 문 앞의 여자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치 슬로 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너른 어깨, 긴 다리. 완벽한 성인 남자란 저런 남자를 말함인가. 율은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남자는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자신의 어깨를 짚었던 커다란 손이 연약한 여자의 팔뚝을 잡는 모양새는 꼭 절절한 연인의 해후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숨을 멈췄다.
그제야 율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람. 돌아가야 해.
이성이 다그쳤다. 그러나 몸은 쉽사리 움직일 생각을 안했다.
어서 돌아가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난감한 율은 스스로를 채찍질 후에야 겨우겨우 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율은 멈칫했다. 제 귀를 의심해야 했다. 너무도 냉정한 어조였다.
“준환 씨! 우린, 우리는…….”
“이세나. 당신 스토커인가?”
율의 눈은 커졌다. 상상과는 전혀 반대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지겹군.”
그의 차디찬 냉소에 사방은 정적에 휩싸였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움직이는 엘리베이터의 낮은 기계 소리뿐이었다. 연인 사이가 아니야. 그럼 대체…….
“그. 그게……. 준환 씨!”
세나는 즉시 손을 뻗쳤다. 준환은 가볍게 그녀를 피하며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두세 명의 정복을 입은 사내들이 율의 앞을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사내들은 일제히 그에게 고개 숙였다. 그러자 여자, 세나의 표정이 돌변했다.
“왜 준환 씨 말을 듣는 건데! 당신들은 날 위해 고용되었잖아!”
여자는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율은 이 상황이 어이없어 노인네처럼 허허 거려야 했다.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파파라치라도 붙으면 곤란한 쪽은 세나 씨입니다. 계약된 광고들은 어쩌려고요. 더는 기획사에서 도와줄 수가 없으니 제발 자중하라는 사장님의 전갈입니다. 가택 침입죄는 불법입니다.”
“당신들 월급이 어디서 나오는데 감히 나한테 이래? 난 준환 씨 집에서 지낼 거야, 준환 씨! 뭐라 말 좀 해 줘요!”
남자들이 세나를 에워싸자 그녀는 준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미동도 없었다. 아니 서늘하다 못해 냉정 그 자체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보인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율은 비로소 그를 보고 알게 되었다.
“당신 집을 알았으니 다음에는 성공할 거야! 두고 보라고. 당신! 곧 날 원한다며 무릎 꿇고 빌게 될 테니!”
놀라운 장면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나 앙칼지게 소리치는지 여자의 눈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완전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했다.
더는 들어 줄 수가 없는지 준환은 지겨운 듯 손짓했다. 사내들은 세나의 뒤와 옆에 도열했다. 그녀는 억지로 끌려가며 준환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 눈길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그는 피식 웃었다. 아니 웃는 게 아닌 조소라 할까.
“우리가 무슨 사이지?”
준환이 물었다. 그러나 그 물음조차도 냉기가 뚝뚝 흐르니 세나를 비롯하여 사내들도 당황했다.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동의하에 관계를 맺은 사이지. 그 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관계.”
세나는 입을 달싹거렸다. 그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다만 얼음송곳 같은 그의 눈초리와 어조는 못마땅했다. 그럼에도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아닌가.”
다시금 그의 눈길이 닿았다. 너무도 시렸다. 아니 당장이라도 울음보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랬다. 호텔 클럽에서 그를 보고 첫눈에 반해 스스로 유혹했다. 단 하룻밤의 뜨거운 관계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그녀는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그를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성인으로서 남부끄럽군. 실망이야, 이세나. 난 감정을 흘린 적이 없는데, 그 누구에게도.”
준환은 독이 발라진 날카로운 가시 그 자체였다. 즐긴 사이, 더도 덜도 아닌 관계라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다신 볼 이유가 없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나.”
그녀의 눈물 따위에는 아랑곳없었다. 냉정함 그대로 서릿발이었다.
자존심까지 깨부수는 그에 세나는 어깨를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호위하듯 사내들이 에워쌌다. 그들이 엘리베이터로 다가오자 율은 그들이 지나갈 수 있게 벽에 딱 붙었다.
그제야 세나는 율을 흘낏 보았다. 그러나 준환의 말과 행동에 타격이 컸기에 눈에만 담을 뿐 뭐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그들을 태우고 문을 닫았다. 다시금 정적이 감돌았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진다. 그것은 율이 서 있는 곳까지 닿았다.
준환은 벽에 붙어 있는 율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율도 아무 말 못했다. 그저 그를 응시하며 멍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쪽은 준환이었다. 그는 지문과 번호를 사용해 문을 연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란 듯 현관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율의 머릿속이 재빨리 움직였다. 불편한 상황을 연결하고 또 연결해 보려 애써 보았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세나, 모델이자 배우.
우아함과 아름다움으로 손꼽는 그녀가 제 앞으로 지나가고서야 꿈이 너무나 많아 모델도 되고 싶다던 이복동생 송임이 동경하는 그녀임을 알아본 것이다.
최준환과 이세나. 최정상의 여배우이자 모델. 하룻밤 관계, 즐기는 사이…….
벽에서 힘없이 떨어진 율에게 허탈함이 묻어나왔다.
세상에, 할아버지.
율은 절로 조부를 불렀다. 괜히 천정을 올려다봐도 값비싸 보이는 등이 매달린 아파트 복도. 율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열린 현관을 보았다. 거대한 동굴 입구처럼 어두웠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 또한 현관을 저렇게 열어 두었다는 것은 분명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란다는 것. 그렇다면 저자는 조부의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과 같았다.
율은 길게 심호흡했다. 차라리 어떤 남자인지 알게 되었으니 신의 한 수라 할까.
“그래. 죽기야 하겠어.”
어린 치기, 잘난 어른의 세계, 뭐라 부르던 조부의 의도를 알고 싶었다. 몹쓸 호기심이라 해도 좋았다.
율은 열린 현관문을 조용히 닫은 뒤 신발을 벗고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해 둔 것 같은 실내화에 발을 들이밀었다.
내 목적은 분명해. 최준환, 그가 어떤 남자인지 알아보려는 것뿐이야.
정적은 이곳에도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