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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



“두 가문의 후계자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있어.”

로일레트는 눈앞에 선 소녀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서로의 집안이 원수 사이였던 거야. 두 사람은 고뇌하고 괴로워하다가, 가문을 버리고 함께 도망가기로 해. 하지만 일이 틀어져서 결국엔 두 사람 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어 버려.”

그의 말을 듣던 엘레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주먹을 꼭 쥐었다.

“남자 주인공 이름이 로미오라면, 여자 주인공 이름은 뭐가 좋을 것 같아?”

그의 물음에 그녀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줄리엣.”

대답을 듣자마자 로일레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레노아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이번엔 오빠가 내 말을 듣고 생각나는 단어를 말해 봐.”

엘레노아가 숨을 들이쉬고 말을 내뱉었다.

“김 첨지.”

그가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보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설렁탕.”

이 세계 사람이 설렁탕을 안다고? 이럴 수가.

누구냐, 넌.



***



“고속도로 주행은 언제 연습했어?”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서고, 열 시트의 따뜻함을 느끼던 혜서가 말했다.

“나 맨날 운전 연습 하고 오는 거 두 번 중에 한 번은 고속도로였는데?”

“엥?”

“드라이브 겸 연습하고 오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까 그런다고 들은 것도 같다.”

혜서가 운전대를 잡은 은호를 새삼 신기하게 보았다.

분명히 몇 년 전만 해도 씽씽이 가지고 같이 투닥거리던 유치원생 꼬꼬마였는데, 이제 씽씽이가 아니라 차를 운전하네.

해가 지나는 와중에도 자신이 크고 있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친구를 보니 알 것 같다. 그래. 수능도 쳤고, 어느새 10대 끝자락이긴 하다.

묘한 기분으로 은호를 보던 와중, 문득 편안하게 핸들을 잡은 그의 자세가 혜서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엄마가 어깨에 힘 좀 빼라고 말하던 게 생각났다.

“나도 고속도로 주행 연습 해야 하긴 하는데 무섭단 말이지.”

중얼거리던 그녀가 앞차를 보더니 말했다.

“어쩜, 엄마들은 우리가 뒤에서 잘 오고 있는지 어떻게 한 번도 안 돌아보시냐.”

혜서가 내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지를 다시 확인하며 투덜거렸다.

혜서네와 은호네, 두 가족은 지리산의 한 펜션으로 놀러 가는 중이었다. 혜서의 부모님과 은호의 부모님은 다른 차로 먼저 출발하고, 은호와 혜서는 이 차로 뒤따라가고 있었다.

은호와 혜서는 중간에 다른 곳에 들러서 혜서의 동생을 픽업해 갈 예정이었다. 동생 혜림은 전날 친구네 집에 놀러 갔던지라 함께 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는 길이라 큰 문제는 없었다.

은호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앞서 혜서가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말을 잘 듣지 못했다. 투덜거리는 소리만 겨우 알아듣고는 은호가 음악 소리를 조금 줄이며 대꾸했다.

“수다 떠느라 정신없으신가 보지. 우린 차에 뭐 먹을 거 없나?”

“귤 있어. 까 줄까?”

“응.”

혜서는 귤을 까서 작게 쪼갠 조각을 은호의 입에 넣고, 자기 입에는 더 큰 조각을 쏙 넣었다.

귤을 입에 넣자마자 혜서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 이 귤 되게 시네. 이거 너 다 먹어.”

은호가 입을 아 벌리자, 그녀는 주저 없이 귤 조각을 두세 개씩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난 괜찮은데.”

입에 들어온 귤이 톡 터지는 걸 느끼며 은호가 말했다.

“그래? 너도 신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응. 그런데 이건 괜찮은데?”

“그래. 너라도 괜찮아서 다행이다.”

혜서가 남은 귤 조각을 그의 입에 다 털어 넣었다. 은호의 볼이 불룩해진 걸 본 그녀가 웃으며 귤껍질을 봉지에 넣었다.

“혜림이 데리러 가려면 어차피 옆으로 빠져야 되잖아. 뭐 하러 아버지 차 뒤를 졸졸 따라가? 다른 차들은 다 앞질러 가는데 우리 너무 느린 거 아니야? 그냥 다른 차로로 넘어가자.”

혜서가 옆 차로에서 차들이 쌩하고 추월하는 걸 보다가 말했다.

“이게 규정 속도야. 바쁠 것도 없잖아. 그냥 뒤따라가면 되지 뭐. 원래 차선 이리저리 잘 안 바꾸고 쭉 가는 게 운전 잘하는 거래.”

“그래? 운전대 잡은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냥 안전 운전 해. 아, 저 앞에서 오른쪽으로 빠져야 된대.”

“응. 내비게이션 봤어. 그런데 뒤에 저 차는 뭐야? 왜 저렇게 달려와?”

아까부터 뒤차가 신경 쓰여 룸미러를 힐끔거리던 은호가 기어코 생각을 입 밖에 내었다. 그 말에 혜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관광버스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빨리 달려오는지 저기서 당장 급브레이크를 밟아도 이 차를 박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친 거 아냐?”

그녀가 인상을 쓰며 작게 욕을 했다.

어느새 버스는 그들의 차 바로 뒤쪽까지 와 있었다.

은호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경적을 울리며 잠깐 차선을 옮기려는 순간.

쾅―!

혜서와 은호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앞으로 튕겨 나가는 몸을 붙잡으려 안전벨트가 콱 조이는 것을 느낄 겨를도 없이, 거의 동시에 앞쪽에서도 연이어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한 번 차가 부딪치는 충격이 느껴졌다.

번쩍.

정전되듯 갑자기 검어진 시야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의식이 뚝 끊겼다.



***



온몸이 뜨겁고 아팠다. 정신이 들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열감과 통증이 느껴진 후였다.

정신을 잃기 전에 당했던 사고와 그때 느낀 충격이 떠올랐다. 혜서는 당연히 자신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 죽었으면 죽은 걸로 끝이지 왜 계속 아프고 난리야. 죽어서도 이렇게 아파야겠어?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계속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건 아니겠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고 만사가 귀찮다. 저승인가 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는커녕 눈도 뜨기 싫은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버렸다.

‘어차피 죽었는데 좀 더 쉬다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자.’

그 순간 불현듯 그녀의 뺨에 시원한 것이 닿더니 곧이어 웬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병원인가? 나 아직 안 죽은 건가…….’

다행이네, 하는 생각을 끝으로 그녀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혜서가 잠에서 깼을 때는 몸 상태가 많이 나아져 있었다. 아까보다 가뿐해진 몸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아직 좀 더 자고 싶었다.

그러나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 올리려고 손을 뻗었을 때, 그녀는 낯선 촉감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내 이불도 아니고 병원 이불도 아닌 것 같은데, 이 이불은 대체 뭐지?’

혜서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녀가 있는 곳은 온 사방에서 부티가 줄줄 흐르는 방 안이었다. 단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낯선 곳이었다.

‘이 공주 방은 또 뭐야?’

놀라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현기증이 난 그녀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조금 움직인 것뿐인데 온몸이 아파 왔다.

그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불에 가려져 얼핏 보이는 실루엣에 깜짝 놀랐다. 어쩐지 다리가 짧아 보이는데…….

‘내 다리! 설마, 사고로?’

무서운 상상에 사색이 된 그녀는 서둘러 이불을 휙 들춰내다가 깨달았다. 짧은 건 다리만이 아니었다.

팔, 손가락, 발, 몸통. 그냥 다 짧았다. 이 몸에서 긴 건 오직 머리카락뿐.

뭐야, 이 어린애는?

어리둥절해진 그녀가 금색과 파스텔 톤의 향연이 펼쳐진 방을 둘러보았다.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방을 입을 벌린 채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둘러보다가, 한쪽에 금으로 장식된 거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곧바로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그 속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다.

금발에 초록색 눈을 가진, 어림잡아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거울 속의 아이는……

예뻤다. 놀라울 정도로 예쁘고, 귀엽고, 혼자 다 했다.

‘어린데 벌써부터 얼굴이 완성형이네.’

그리고 그보다 놀라운 건, 그 얼굴이 그녀의 것이란 사실이었다.

혜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거울에 비친 얼굴을 잡고 쭉쭉 당겨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서워져 다시 침대로 돌아와 이불을 푹 덮어썼다.

‘그러니까, 사고. 사고가 났어. 뒤에서 그 미친 버스가 들이받은 것 같아. 우리가 탄 차도, 부모님이 탄 차도 순식간에 사고가 났고……. 다들 어떻게 됐을까? 엄마, 아빠, 은호, 아줌마, 아저씨……. 살았을까?’

다들 다쳤겠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살아남기는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렇게 치부하기엔 차가 순식간에 우그러지는 느낌이 너무 선명했다.

사고 당시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하나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 참담한 결과를 생각하기 무서워진 혜서는 이불을 더욱 꼭 여몄다.

‘생각하기 싫어……. 나중에,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은 지금 닥친 일부터 생각하자.’

이불로 눈을 가린 그녀는 잠시 숨을 들이쉬고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도피였다.

사고의 기억을 되살려 낼수록, 부모님들과 은호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말 외에 다른 결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이 몸은 갓난아기가 아니라 꼬맹인데……. 그럼 완전히 환생한 것도 아니잖아?’

이거 현실인가?

그녀가 조막만 한 손을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사실적이었다.

분명 죽었는데 난데없이 다른 어린애 몸에서 깨어났다. 전생 체험 뭐 이런 건가? 저승에서 해 주는 사후 서비스?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여전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고 기분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지금은 혜서 자신이 이 여자애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