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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 방의 가구나 배경으로 봐서, 일단 여기는 외국인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나는 앞으로 외국에서 혈혈단신으로 살아가야 하나?’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다 보니 ‘부모님은 어떻게 되셨을까’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던 차에, 방문이 달칵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흠칫한 혜서가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내리고, 태연한 척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빗으며 문 쪽을 보았다.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서 시녀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쟁반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아가! 괜찮니? 왜 일어나 있어. 계속 누워 있지 않고.”
혜서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금발 여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 여인이 하는 말은 아무 무리 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정작 혜서는 상황을 파악하기 바빠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열은 많이 내렸구나. 다행이다.”
“엘레노아 아가씨, 깨어나셨네요. 백작님과 마님께서 많이 걱정하셨어요.”
시녀복을 입은 여자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라니. 그러면 이 여자는 나를 모시는 시녀인 건가?’
금발의 여성은 시녀인 듯 보이는 그녀에게 닥터를 불러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혜서의 앞에 앉아서 쟁반에 있던 수프 그릇을 보여 주며 말했다.
“엘렌. 엄마가 직접 만든 거란다. 일단 이것부터 먹자. 금방 닥터가 올 거야.”
‘엘레노아’라는 이름을 잊지 않으려 속으로 되뇌던 혜서는 귀에 꽂힌 여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엄마란다.
이 사람이 엄마란다.
혜서 자신의 엄마는 사고로 돌아가셨는지 어쨌는지 생사도 모르는데, 이 사람이 이 몸의 엄마란다.
전생의 엄마에 대한 기억과 죄책감이 머리와 마음을 괴롭게 했다. 게다가 눈앞의 이 여인에 대한 죄책감까지 느껴졌다.
낯설음과 두려움, 막막함…….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눈물이 이불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엄마……. 엄마가 보고 싶다. 금발이 아닌 검은 머리의 우리 엄마.
“엘렌! 어머, 아직 많이 아픈 거니? 그렇게 울면 다시 열이 난단다. 엘렌, 뚝. 약 먹으면 금방 나을 거야.”
여인이 당황한 듯 서둘러 그녀를 안아서 눈물을 닦아 주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미안해요, 아줌마. 저는 엘렌이 아니에요. 아줌마 진짜 딸은…… 어떻게 된 건지 저도 모르겠어요.’
등을 두드려 주는 손길이 서러워 그녀가 더욱 크게 울었다.
딸의 몸에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달래 주는 여인의 손길이 슬펐고, 모르는 사람에게 안겨 울고 있는 자신의 처지도 슬펐다.
한참을 울다 겨우 그친 혜서는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수프를 먹고 나니 외알 안경을 쓴 닥터라는 사람이 왔고, 그는 그녀의 몸을 꼼꼼히 진찰해 주었다.
닥터가 떠난 뒤, 그가 처방해 준 대로 약을 먹고 누웠다.
“조금 더 자렴.”
여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곱게 쓰다듬어 주며 이마에 입을 맞춰 주고 나갔다.
혜서는 이미 이 상황 자체에 지쳐 버렸다. 다 잊고 자 버리고 싶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 밤새 뒤척여야 했다.
‘진짜 내 몸이라면 어떻게든 한국으로 가서 가족을 찾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어른이 되어서 가족을 찾아가는 것도, 이 얼굴로 가족을 찾아서 자신이 혜서라고 밝히는 것도 너무 멀고 비현실적인 일이라고만 느껴졌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한테 왜 이래, 진짜……!”
운명이 있다면 운명을, 신이 있다면 신을.
그게 누구든, 누구에게라도 이 현실을 원망하고 싶었다.
***
아픈 어린애라서 그런지 아무도 혜서를 깨우지 않아, 새벽에 잠든 그녀는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막상 일어나긴 했지만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그녀는 그냥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열은 다 내린 것 같고……. 일단 정보부터 모아야겠네. 내 이름, 가족 이름, 여기가 어딘지. 다행히 어린애라 잘 몰라도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긴 하다만……. 이걸 어떻게 다 알아내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어제 나 별말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냥 기억상실증으로 나가면 안 되나? 여기 인터넷은 되겠지?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으니까 한국 포털 사이트에 기사 한두 개쯤은 뜨지 않았을까?’
혜서가 이곳 사정, 저곳 사정 모두 알아볼 방법을 한참 고민하던 중,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아가씨. 마샤예요. 일어나셨어요?”
“들어와.”
반말하는 것 맞겠지?
옛날 귀족을 생각해 보면 반말을 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대뜸 반말부터 하고 슬쩍 눈치를 봤다. 마샤라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걸 보니 이게 맞는 것 같다.
마샤라는 여인은 선해 보이는 인상에, 어제 본 시녀와는 또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시녀장? 유모? 전속 시녀?
혜서가 머릿속으로 어디서 들어 본 건 다 떠올려 보고 있는데, 마샤가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제 완전히 나으신 것 같네요. 큰일 치르셨어요, 아가씨. 롤란다병은 한 번 걸리면 더 이상 걸리지 않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그 나이 대 아이들은 한 번씩 다 거치는 병이랍니다.”
볼거리 같은 건가? 어쨌든 한 번 걸리면 다시는 안 걸린다니 다행이다.
안심하는 그녀에게 마샤가 약그릇을 내밀었다.
“아가씨, 이제 간단하게 식사하시고 약 드셔야 해요.”
전날에는 정신이 없어서 그냥 주는 대로 먹었지만, 다시 보니 냄새만으로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쓴 약 냄새가 올라왔다. 딱 보기에도 사약같이 생겼다.
“다 나았다며? 약 안 먹어도 되는 거 아니야?”
“기력을 보하는 약이에요. 며칠 동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많이 아프셨으니 약 조금만 더 드세요.”
이때다 싶어 혜서가 냉큼 물었다.
“며칠 동안? 그럼 오늘 날짜가…….”
“제국력 1258년 가을 일곱 번째 날이에요.”
제국력? 제국이 어디 있어?
혜서가 아는 제국은 로마 제국, 대영 제국, 이런 까마득한 옛날 것밖에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그녀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마샤를 멀뚱멀뚱 바라볼 때였다.
“엘렌.”
혜서가 달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문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노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들어온 사람은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근육질의 남자였다.
“백작님.”
마샤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비켜섰다.
‘백작? 그러니까 어제 그 아줌마가 백작 부인이고, 이 아저씨가 백작이란 말이지. 그러면 이 애의 아빠?’
갑자기 등장한 ‘엘레노아의 아빠’라는 존재에 혜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볍게 마샤의 인사를 받은 백작이 침대 곁에 앉아 혜서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정말 열은 다 내린 것 같네. 다행이다, 내 딸.”
이마가 뜨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백작이 혜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빠가 많이 걱정했어요. 더 아픈 데는 없고?”
“네.”
백작의 말에 혜서가 조그맣게 대답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기운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네. 마샤, 아직 약 더 챙겨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잖아도 지금 드실 시간입니다.”
마샤가 아직 손에 들고 있던 약그릇을 내밀었다. 그 그릇을 받아 든 백작이 약을 혜서에게 내밀었다.
“약 잘 먹으면 아빠가 로어노크에서 네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사 오마.”
로어노크? 로어노크가 뭔데?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말을 아끼고 싶은 혜서는 질문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릇을 다 비우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백작이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는 지금 출발해야 해요. 계속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다녀오마.”
“……안녕히 다녀오세요.”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듯 쓰다듬어 주는 백작에게 혜서가 작게 인사했다.
백작이 빈 약그릇을 마샤에게 넘기고 방을 나갔다. 그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혜서가 마샤를 보았다.
“마샤. 나, 지도 보고 싶어.”
아프다가 일어난 아이가 하기에 너무 뜬금없는 말인 줄은 알지만, 혜서는 도저히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혜서는 마샤가 방에서 나가고 나서도 계속 멍한 상태였다.
그녀가 본 지도는…… 지명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전혀 본 적 없는 꼬부랑글씨였기 때문이다.
커다란 종이 위에는 위쪽에 세계 지도, 아래쪽에 이 나라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 나라의 지도는 당연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고, 세계지도는…… 그녀가 익히 보아 온 지구본의 그림과 전혀 달랐다.
기껏해야 별로 알려지지 않은 아주 작은 나라의, 전통을 중시하는 어느 귀족 가문이 아닐까. 나중에 다 크면 한국에 가 볼 수 있지 않을까. 줄곧 이어져 온 혜서의 막연한 생각이나 계획들이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났다.
지구도 아니면 대체 이건 어느 행성이야?
혜서는 이곳이 지구조차 아니라는 사실에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이게 뭐야? 교통사고를 당했을 뿐인데 이런 비현실적인 현실까지 닥쳐오다니.
‘그러니까 여기는 지구가 아닌 어떤 곳이고, 나는 엘레노아라는 여자아이 몸에 들어와 있단 말이지? 이거 현실 맞나? 꿈인가?’
저승의 사후 서비스 같은 웃기지도 않은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때야 인터넷으로 검색이라도 해 본다거나, 한국에 전화라도 해 본다거나, 하다못해 다 자란 뒤에 한국을 찾아가 본다거나 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기가 찼다.
‘차가 우그러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으니 진짜 내 몸은 죽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 의식이 이쪽에 있으니까 그냥 의식 불명 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는 걸까? 그러면 여기서 죽으면 다시 내 몸으로 돌아갈 수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죽는다는 선택지 외에는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말로 한번 죽어 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덜컥 죽었다가 이번엔 진짜 의식까지 죽어 버리면 어떡해? 아니면 원래 몸이 아니라 또 다른 이상한 몸으로 들어가 버리면 어떡하냐고!
아. 다시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아빠도 보고 싶고, 혜림이도 보고 싶다.
엄마, 아빠, 아줌마, 아저씨, 은호…….
다들 살아 있을까? 전부 나 때문이야…….
‘나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 방의 가구나 배경으로 봐서, 일단 여기는 외국인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나는 앞으로 외국에서 혈혈단신으로 살아가야 하나?’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다 보니 ‘부모님은 어떻게 되셨을까’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던 차에, 방문이 달칵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흠칫한 혜서가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내리고, 태연한 척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빗으며 문 쪽을 보았다.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서 시녀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쟁반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아가! 괜찮니? 왜 일어나 있어. 계속 누워 있지 않고.”
혜서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금발 여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 여인이 하는 말은 아무 무리 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정작 혜서는 상황을 파악하기 바빠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열은 많이 내렸구나. 다행이다.”
“엘레노아 아가씨, 깨어나셨네요. 백작님과 마님께서 많이 걱정하셨어요.”
시녀복을 입은 여자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라니. 그러면 이 여자는 나를 모시는 시녀인 건가?’
금발의 여성은 시녀인 듯 보이는 그녀에게 닥터를 불러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혜서의 앞에 앉아서 쟁반에 있던 수프 그릇을 보여 주며 말했다.
“엘렌. 엄마가 직접 만든 거란다. 일단 이것부터 먹자. 금방 닥터가 올 거야.”
‘엘레노아’라는 이름을 잊지 않으려 속으로 되뇌던 혜서는 귀에 꽂힌 여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엄마란다.
이 사람이 엄마란다.
혜서 자신의 엄마는 사고로 돌아가셨는지 어쨌는지 생사도 모르는데, 이 사람이 이 몸의 엄마란다.
전생의 엄마에 대한 기억과 죄책감이 머리와 마음을 괴롭게 했다. 게다가 눈앞의 이 여인에 대한 죄책감까지 느껴졌다.
낯설음과 두려움, 막막함…….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눈물이 이불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엄마……. 엄마가 보고 싶다. 금발이 아닌 검은 머리의 우리 엄마.
“엘렌! 어머, 아직 많이 아픈 거니? 그렇게 울면 다시 열이 난단다. 엘렌, 뚝. 약 먹으면 금방 나을 거야.”
여인이 당황한 듯 서둘러 그녀를 안아서 눈물을 닦아 주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미안해요, 아줌마. 저는 엘렌이 아니에요. 아줌마 진짜 딸은…… 어떻게 된 건지 저도 모르겠어요.’
등을 두드려 주는 손길이 서러워 그녀가 더욱 크게 울었다.
딸의 몸에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달래 주는 여인의 손길이 슬펐고, 모르는 사람에게 안겨 울고 있는 자신의 처지도 슬펐다.
한참을 울다 겨우 그친 혜서는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수프를 먹고 나니 외알 안경을 쓴 닥터라는 사람이 왔고, 그는 그녀의 몸을 꼼꼼히 진찰해 주었다.
닥터가 떠난 뒤, 그가 처방해 준 대로 약을 먹고 누웠다.
“조금 더 자렴.”
여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곱게 쓰다듬어 주며 이마에 입을 맞춰 주고 나갔다.
혜서는 이미 이 상황 자체에 지쳐 버렸다. 다 잊고 자 버리고 싶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 밤새 뒤척여야 했다.
‘진짜 내 몸이라면 어떻게든 한국으로 가서 가족을 찾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어른이 되어서 가족을 찾아가는 것도, 이 얼굴로 가족을 찾아서 자신이 혜서라고 밝히는 것도 너무 멀고 비현실적인 일이라고만 느껴졌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한테 왜 이래, 진짜……!”
운명이 있다면 운명을, 신이 있다면 신을.
그게 누구든, 누구에게라도 이 현실을 원망하고 싶었다.
***
아픈 어린애라서 그런지 아무도 혜서를 깨우지 않아, 새벽에 잠든 그녀는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막상 일어나긴 했지만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그녀는 그냥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열은 다 내린 것 같고……. 일단 정보부터 모아야겠네. 내 이름, 가족 이름, 여기가 어딘지. 다행히 어린애라 잘 몰라도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긴 하다만……. 이걸 어떻게 다 알아내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어제 나 별말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냥 기억상실증으로 나가면 안 되나? 여기 인터넷은 되겠지?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으니까 한국 포털 사이트에 기사 한두 개쯤은 뜨지 않았을까?’
혜서가 이곳 사정, 저곳 사정 모두 알아볼 방법을 한참 고민하던 중,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아가씨. 마샤예요. 일어나셨어요?”
“들어와.”
반말하는 것 맞겠지?
옛날 귀족을 생각해 보면 반말을 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대뜸 반말부터 하고 슬쩍 눈치를 봤다. 마샤라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걸 보니 이게 맞는 것 같다.
마샤라는 여인은 선해 보이는 인상에, 어제 본 시녀와는 또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시녀장? 유모? 전속 시녀?
혜서가 머릿속으로 어디서 들어 본 건 다 떠올려 보고 있는데, 마샤가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제 완전히 나으신 것 같네요. 큰일 치르셨어요, 아가씨. 롤란다병은 한 번 걸리면 더 이상 걸리지 않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그 나이 대 아이들은 한 번씩 다 거치는 병이랍니다.”
볼거리 같은 건가? 어쨌든 한 번 걸리면 다시는 안 걸린다니 다행이다.
안심하는 그녀에게 마샤가 약그릇을 내밀었다.
“아가씨, 이제 간단하게 식사하시고 약 드셔야 해요.”
전날에는 정신이 없어서 그냥 주는 대로 먹었지만, 다시 보니 냄새만으로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쓴 약 냄새가 올라왔다. 딱 보기에도 사약같이 생겼다.
“다 나았다며? 약 안 먹어도 되는 거 아니야?”
“기력을 보하는 약이에요. 며칠 동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많이 아프셨으니 약 조금만 더 드세요.”
이때다 싶어 혜서가 냉큼 물었다.
“며칠 동안? 그럼 오늘 날짜가…….”
“제국력 1258년 가을 일곱 번째 날이에요.”
제국력? 제국이 어디 있어?
혜서가 아는 제국은 로마 제국, 대영 제국, 이런 까마득한 옛날 것밖에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그녀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마샤를 멀뚱멀뚱 바라볼 때였다.
“엘렌.”
혜서가 달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문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노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들어온 사람은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근육질의 남자였다.
“백작님.”
마샤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비켜섰다.
‘백작? 그러니까 어제 그 아줌마가 백작 부인이고, 이 아저씨가 백작이란 말이지. 그러면 이 애의 아빠?’
갑자기 등장한 ‘엘레노아의 아빠’라는 존재에 혜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볍게 마샤의 인사를 받은 백작이 침대 곁에 앉아 혜서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정말 열은 다 내린 것 같네. 다행이다, 내 딸.”
이마가 뜨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백작이 혜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빠가 많이 걱정했어요. 더 아픈 데는 없고?”
“네.”
백작의 말에 혜서가 조그맣게 대답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기운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네. 마샤, 아직 약 더 챙겨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잖아도 지금 드실 시간입니다.”
마샤가 아직 손에 들고 있던 약그릇을 내밀었다. 그 그릇을 받아 든 백작이 약을 혜서에게 내밀었다.
“약 잘 먹으면 아빠가 로어노크에서 네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사 오마.”
로어노크? 로어노크가 뭔데?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말을 아끼고 싶은 혜서는 질문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릇을 다 비우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백작이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는 지금 출발해야 해요. 계속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다녀오마.”
“……안녕히 다녀오세요.”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듯 쓰다듬어 주는 백작에게 혜서가 작게 인사했다.
백작이 빈 약그릇을 마샤에게 넘기고 방을 나갔다. 그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혜서가 마샤를 보았다.
“마샤. 나, 지도 보고 싶어.”
아프다가 일어난 아이가 하기에 너무 뜬금없는 말인 줄은 알지만, 혜서는 도저히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혜서는 마샤가 방에서 나가고 나서도 계속 멍한 상태였다.
그녀가 본 지도는…… 지명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전혀 본 적 없는 꼬부랑글씨였기 때문이다.
커다란 종이 위에는 위쪽에 세계 지도, 아래쪽에 이 나라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 나라의 지도는 당연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고, 세계지도는…… 그녀가 익히 보아 온 지구본의 그림과 전혀 달랐다.
기껏해야 별로 알려지지 않은 아주 작은 나라의, 전통을 중시하는 어느 귀족 가문이 아닐까. 나중에 다 크면 한국에 가 볼 수 있지 않을까. 줄곧 이어져 온 혜서의 막연한 생각이나 계획들이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났다.
지구도 아니면 대체 이건 어느 행성이야?
혜서는 이곳이 지구조차 아니라는 사실에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이게 뭐야? 교통사고를 당했을 뿐인데 이런 비현실적인 현실까지 닥쳐오다니.
‘그러니까 여기는 지구가 아닌 어떤 곳이고, 나는 엘레노아라는 여자아이 몸에 들어와 있단 말이지? 이거 현실 맞나? 꿈인가?’
저승의 사후 서비스 같은 웃기지도 않은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때야 인터넷으로 검색이라도 해 본다거나, 한국에 전화라도 해 본다거나, 하다못해 다 자란 뒤에 한국을 찾아가 본다거나 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기가 찼다.
‘차가 우그러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으니 진짜 내 몸은 죽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 의식이 이쪽에 있으니까 그냥 의식 불명 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는 걸까? 그러면 여기서 죽으면 다시 내 몸으로 돌아갈 수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죽는다는 선택지 외에는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말로 한번 죽어 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덜컥 죽었다가 이번엔 진짜 의식까지 죽어 버리면 어떡해? 아니면 원래 몸이 아니라 또 다른 이상한 몸으로 들어가 버리면 어떡하냐고!
아. 다시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아빠도 보고 싶고, 혜림이도 보고 싶다.
엄마, 아빠, 아줌마, 아저씨, 은호…….
다들 살아 있을까? 전부 나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