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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늘 가자아. 응?”

혜서가 소파에 길게 쭉 엎드려서는 고개만 들고 엄마에게 말했다.

“아빠 피곤하셔. 오늘은 쉬게 해 드리자. 내일 오전에 출발해도 늦지 않잖니?”

“내일 오전에 출발하면 아무리 일러도 점심 넘어서야 도착하잖아. 지리산 엄청 멀던데. 그냥 오늘 가서 내일 아침부터 놀면 안 돼?”

“혜림이는 어쩌고? 혜림이는 친구 집에서 출발하면 오늘 저녁 다 돼서야 온다는데.”

아차, 혜림이 생각을 못 했다. 걔는 뭐 하러 친구 이사 간 집까지 쫓아간 거람…….

혜서는 재빨리 휴대폰으로 지도를 켜 보며 머리를 굴렸다.

“아, 맞다. 걔 기차 타고 오지 않아? 검색해 보니까 그쪽 기차역이랑 고속도로랑 별로 안 머네. 거기서 기차 타지 말라고 하고 그냥 지리산 가는 길에 픽업하자.”

혜서의 말이 길어질수록 엄마의 손이 허리로 올라가고 눈썹도 점점 치켜 올라갔다.

엄마는 안 되겠네.

혜서는 슬금슬금 엄마의 눈치를 보며 소파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쏙 들어갔다. 안방에서는 일이 많아 오늘 새벽에야 퇴근한 아빠가 침대에 누워서 쉬고 계셨다.

아빠가 깨어 있는 걸 본 그녀가 반색했다.

“아빠, 안 주무시네?”

“자다가 좀 전에 깼지.”

혜서가 들어오는 소리에 아빠가 고개만 들어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편히 누우며 대답했다.

“아빠아아.”

“콧소리 내지 마. 밖에서 하는 말 다 들었다.”

“헤헤. 안 돼?”

혜서가 헤실헤실 웃었다.

“펜션 예약 날짜는 내일부터야. 오늘은 산에서 노숙하려고?”

“그럼 내가 펜션에 전화해 볼게! 펜션 쪽에서 된다고 하면 되는 거지?”

아빠가 대답하기도 전에 혜서가 옆에 있던 아빠 휴대폰으로 펜션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럼 오늘 입실 되는 거죠?”

혜서가 펜션 주인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는지, 엄마도 안방으로 들어왔다.

“당신, 된다고 했어? 피곤하다며? 쟤 떼쓰는 거 다 받아 주지 말라니까.”

“허허. 나는 딸들 얼굴 볼 시간도 많이 없는데 투닥거릴 시간이 어디 있어. 펜션 쪽은 문제 없는 것 같은데, 당신이 은호 엄마한테 전화 좀 해 봐요. 혹시 오늘 출발 가능할지 어떨지.”

아빠가 허허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우리끼리도 아니고 은호네까지 다 같이 놀러 가는 건데 이게 무슨 변덕에 민폐야. 하여튼 애들 버릇은 당신이 다 망쳐.”

엄마가 투덜거리며 거실에 휴대폰을 가지러 나갔다.



은호네가 마음 너르게도 오케이를 해 줘서 두 가족은 한 시간 후에 출발하게 되었다.

혜서네는 원래 엄마가 운전을 하려고 했는데, 은호네에서 아서라 하며 차 두 대에 시동을 걸었다.

“아유, 이렇게 날짜 막 바꾼 것도 미안한데 그 집에서 차를 두 대 다 굴려서 어떡해, 은호 엄마.”

“괜찮아, 괜찮아. 우리도 오늘 한가해서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뭘. 혜서 아빠는 오늘 피곤해서 장시간 운전하기 힘들 거고. 애들은 또 자기네들끼리 오는 게 편하고 재밌겠지. 우리도 우리끼리 차에서 수다나 떨면서 가자고.”

어른들이 탄 차는 은호네 아빠가 운전하고, 다른 차는 은호가 운전해서 혜서랑 가기로 했다. 혜림이는 은호랑 혜서가 가면서 픽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은호 거기까지 운전할 수 있어? 내가 하는 게 낫지 않아?”

걱정을 떨쳐 버리지 못한 엄마가 은호네 엄마에게 물었다.

“걱정 마, 걱정 마. 쟤가 나보다 운전 더 잘해. 상황 판단도 빠르고. 자기 아빠 닮아서 운전은 아주 타고났더라니까. 며칠 전에는 산소까지 쟤가 운전해서 갔다 왔는데, 어찌나 잘하는지 난 쟤가 나 몰래 운전해서 학교 다녔나 했다니까?”

“그러면 다행이고…….”

엄마가 불안한 눈으로 뒤차를 힐끔 보더니 손가방을 뒤적였다.



혜서와 은호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데 엄마가 운전석으로 다가왔다. 은호가 창문을 내렸다.

“은호야. 운전 잘 할 수 있겠어? 그냥 아줌마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엄마의 걱정 어린 물음에 은호가 웃으며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진짜 엄청 조심해서 운전할게요. 가는 길에 혜림이도 잘 태워 가고요.”

“미안해. 저놈이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 철은 개미 오줌만큼도 안 들었어. 내일 가면 아저씨가 운전하는 건데……. 철 안 든 건 쟨데 고생은 네가 하네.”

엄마가 혜서를 흘겨봐서 그녀는 딴청을 피웠다.

“빨리 가면 더 놀고 좋죠, 뭐.”

은호가 정말 괜찮다며 웃자, 엄마가 자동차 계기판 있는 곳에 카드를 하나 올려놨다.

“그래. 가다가 이걸로 기름 넣고, 애들하고 휴게소에서 뭐 사 먹고 와. 운전하다가 힘들면 꼭 쉬엄쉬엄 천천히 오고.”

“네, 아줌마.”

“쟤 운전할 줄 안다고 까부는데, 고속도로는 택도 없으니까 절대 운전대 넘기면 안 돼. 알겠지?”

“네.”

“나도 고속도로에서는 운전대 달라고 안 해.”

뾰로통한 혜서의 말에 은호가 혜서를 보며 킥킥 웃었다.



***



밝은 얼굴로 차에 올라타던 두 가족을 떠올린 혜서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뭐 하러 그렇게 억지를 썼지. 어린애도 아니고. 그거 몇 시간 더 놀자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로 혜서가 몸을 웅크렸다.

‘여기서 평생 살아도 좋으니까, 저는 가족들이랑 은호네 평생 못 보고 살아도 좋으니까, 엄마, 아빠랑 아저씨, 아줌마, 은호…… 제발 살려만 주세요. 제발 다들 크게 안 다쳤기를, 아니, 다쳐도 살아날 수 있게만 해 주세요. 우리 혜림이 혼자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저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아야 되는 거면 그렇게 할게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살려 주기만 해 주세요.’

한참을 엎드려서 울다 보니 숨이 막히고 토할 것 같았다.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혜서의 시야에 또 한 번 침대 맞은편 벽에 있는 거울이 들어왔다. 거울 속에는 여전히 잠들기 전에 봤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혜서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꼭 주고 천천히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녀는 여전히 금발에 초록색 눈을 한 예쁜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거울 속 아이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일단은 살자. 여기서 적응해서 살아남자! 이게 꿈이든, 전생 체험이든, 가상 현실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어. 지금 나한텐 이게 현실인 거니까. 또 모르잖아. 여기가 새로운 세상이라면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혜서, 아니 엘렌이 마음을 다잡았다.



***



‘여기에서 적응하고 살기로 한 이상 정보부터 모아야겠지?’

그러나 엘렌은 비장하게 결심을 한 데에 비해, 쓸 만한 정보를 모으기까지 꽤나 진땀을 흘려야 했다. 자신이 진짜 엘레노아 퀸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이 집안 사람들에 대해 알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엘렌이 어린아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엉뚱한 질문을 해도 다들 귀엽게 봐 주고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이 퀸터가는 듀칼리온 제국의 백작가로, 북쪽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 가문이라고 했다.

엘렌의 아빠는 제럴드 퀸터. 어찌나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한지, 누구에게 물어봐도 ‘직업은 기사!’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전장에 나가 전공을 많이 세웠다는 아빠는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의 얼굴이 너무나 달랐다. 가족들에게 웃을 때는 세상 바보 아빠인데, 집사 앨버트나 보좌관 로츠에게 일을 지시할 때는 말을 듣지 않으면 도끼로 목을 찍어 버릴 것 같아 보였다.

저런 무서운 상사와 일하는 앨버트와 로츠에게 잠시 묵념.

엄마는 역시 엊그제 본 아름다운 금발 여인이었다. 글로리아 퀸터. 엄마는 현 황제의 딸이라고 했다.

엄마가 황녀님이라니! 이런 금탯줄이 있나. 엄마에게는 황태자를 포함해 오빠가 두 명 있단다.

듣고 말하기를 할 줄 아는 나이의 딸이 부모님의 이름을 모르는 건 이상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엘렌은 차마 엄마, 아빠의 이름까지는 물어보지 못하고 혼자 알아내기 위해 애써야 했다.

제일 알아내기 어려웠던 건 엄마의 이름이었다. 이 저택에서 엄마, 아빠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엄마, 아빠 서로뿐인데, 엄마는 아빠를 ‘제럴드’라고 불렀지만 아빠는 엄마를 ‘리아’라고 애칭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엄마 이름이 그냥 ‘리아’인 줄 알 뻔했지.’

그래도 일단 기본적인 인적 사항은 알아냈다!

그녀는 이 몸이 어려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



엘렌은 저녁부터 계속 들떠 있었다. 다음 날 엄마와 마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카르젤가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카르젤가 역시 국경을 지키는 백작가로, 퀸터가와 영지를 맞대고 있다. 카르젤가도 변경백인 만큼 영지가 크지만, 퀸터가와 카르젤가의 저택은 서로 가까이 위치한다고 했다.

카르젤가의 백작 부부는 그녀의 부모님과 아주 절친한 친구라고 들었다. 엄마끼리는 유년 시절부터 친구였고, 아빠끼리는 엄마들을 통해, 그리고 젊은 시절 전쟁터에서 전우로서 등을 맞대면서 친해졌다고.

그리고 카르젤가에는 그녀보다 한 살 많은 로일레트라는 남자아이가 있다고 한다.

엘렌은 새로운 곳에 방문할 생각과 또래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어,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잊고 있던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 번째는 카르젤가의 영식이 일곱 살이란 사실이었다. 그녀처럼 속에 성인이 든 게 아닌 진짜로 일곱 살 어린애.

‘한마디로 어른들 노시는 동안 애 보기 당첨이란 거지. 일곱 살 남자애라니. 무시무시한데.’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일곱 살짜리 남자아이가 그녀보다 오빠라는 사실이었다.

‘오빠에 대한 로망이 있긴 했지만 일곱 살짜리 오빠를 바란 건 아니었어!’

엘렌이 속으로 비명을 꽥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