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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로리아, 마샤와 함께 마차에 탄 엘렌은 카르젤가로 가는 내내 마차 창문에 들러붙어 있었다.

저택 밖으로는 처음 나오는 거라 그녀는 눈 깜빡일 시간도 아껴 가며 열심히 바깥을 구경했다.

고층 건물이 가득한 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 이렇게 탁 트인 풍경을 보니 눈이 시원했다.

‘여기는 하늘도 넓고 땅도 넓네. 한국에서 살 때는 하늘은 넓고 땅은 좁았는데.’



그녀가 시골 풍경과 풀 내음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동안, 마차는 열심히 달려 카르젤가에 도착했다.

마차는 정문을 통과해서도 한참 안으로 들어갔다.

‘이 집도 우리 집만큼이나 크구나.’

엘렌이 여전히 마차 창문에 들러붙은 채로 밖을 구경하며 생각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고 카르젤가의 하인이 와서 문을 열었다. 마차에서 내린 엘렌은 집사의 안내에 따라 엄마 손을 잡고 정원으로 향했다.

예쁘게 꾸며진 정원엔 차양이 쳐진 티 테이블과 온화해 보이는 카르젤 부인이 있었다.

“리아! 오랜만이야.”

카르젤 부인이 다가와 인사했다. 그녀는 글로리아의 손을 잡고 손수 티 테이블 앞으로 이끌었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디아나. 로일은 좀 괜찮아?”

“응, 완전히 다 나았어. 다행히 엘렌도 건강해진 것 같네. 많이 걱정했는데.”

언제 인사해야 할지 타이밍을 못 찾고 어색하게 서 있던 엘렌은 제 이름이 입에 오른 그 순간, 이때다 싶어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카르젤 부인.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 엘렌. 로일한테 병이 옮아서 너까지 고생하고 말았네. 정말 미안하구나. 다 나아서 다행이야. 그런데 갑자기 웬 부인이니? 이제 디아나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기로 한 거야?”

상냥하게 웃으며 엘렌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인을 보면서 그녀가 아차, 했다.

아줌마라고 부르던 사람이구나!

“헤헤, 아니에요. 아줌마, 로일레트는요?”

엘렌은 당황해서 웃음으로 넘기며,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로일레트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또 어떤 실수를 할지 모르니 일단은 로일레트에게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렴, 무슨 실수를 하더라도 꼬맹이를 상대로 하는 게 티가 덜 나겠지.

“응?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후원에 늘 푸른 나무 알지? 그 얼록 나무 밑에 가 보렴. 거기 가 있을 것 같구나.”

얼록 나무는 또 뭐야. 엘렌은 이제 나무 이름도 알아야 하는 거냐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부인이 가리킨 쪽으로 뛰어갔다.

얼록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어떡하지 했으나, 염려와 달리 그녀는 금세 얼록 나무를 알아볼 수 있었다. 후원 한쪽에 아주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가을인데도 무성한 초록 잎을 뽐내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남자아이 한 명이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저 애가 로일레트이리라.

아주 떠들썩하고, 강아지 혹은 새끼 고양이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남자아이를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조용하고 점잖은 아이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금 안도하며 남자아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그 애는 낮게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좌우로 느릿느릿하게 까딱이고 있었다. 엘렌은 그 모습을 보고 몇 걸음을 앞두고 우뚝 멈춰 섰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은호도 휘파람을 잘 불었는데. 생각할 게 많을 때면 휘파람을 불며 저렇게 고개를 느릿느릿하게 옆으로 까딱거리곤 했다.

딱 저렇게 나른하게 앉아서. 딱 저렇게 눈을 감고, 주변에 보이지 않는 막을 친 것처럼.

은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앞에 가만히 앉아 그 고갯짓에 호흡을 맞추고 있자면, 혜서는 금세 잠이 와서 꼬박꼬박 졸곤 했다. 그러면 생각을 끝낸 은호가 팔을 툭툭 건드리며 일어나라고 그녀를 깨웠다.

그리운 친구가 떠오른 바람에 엘렌의 얼굴에 물기가 가득해졌다.

그녀는 로일레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고 은호에게 하던 것처럼 로일레트의 앞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은호야.” 하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순간 로일레트가 눈을 확 떴다. 드, 들었나?

눈을 두어 번 깜빡인 로일레트의 얼굴이 금세 당황으로 물들었다.

“엘레노아. 왜, 왜 우는 거야?”

그녀도 모르게 울고 있었나 보다. 그녀가 눈물을 쓱쓱 닦으며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휘파람 소리가 슬퍼서.”

“으응……. 미안. 초콜릿 케이크 먹을래?”

로일레트는 자기가 미안할 일도 아닌데 뺨을 긁적이며 사과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맛있는 거나 먹이자’고 생각하는 티가 역력했다.

꼬맹이 주제에 스킬이 제법인데? 그 모습에 그녀는 콧바람을 퐁 뿜으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가자.”



***



로일이 손을 들자 거울 속의 아이도 따라서 손을 들었다.

어두운 갈색 머리에 기억 속 제 모습과 비슷한 눈동자 색. 한국에 살 때에도 그리 드물지 않았던 조합이라 그런지, 이곳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거울 속 얼굴이 눈에 익었다.

그러나 낮은 시야와 짧은 팔다리는 역시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올 때나 무언가를 잡으려 팔을 뻗을 때 종종 움찔하곤 했다.

‘나는 로일레트다. 로일레트 카르젤.’

로일, 아니 은호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수도 없이 되뇌었다. 이렇게 주의하지 않으면 손님 앞에서 실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아침부터 손님이 온다는 말에 온 집이 수선했다. 로일은 분주한 사용인들을 바라보며 뒷목을 주물렀다. 바쁘게 움직이는 저들은, 아마 이 작은 소년의 몸에 다른 이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는 상상도 못 하겠지.

눈떠 보니 낯선 천장. 눈떠 보니 낯선 외국인 부모님.

은호는 거듭해서 맞닥뜨리게 되는 비일상에 좀처럼 익숙해지기가 어려웠다.

아직 이 집에도 적응을 다 못 했는데 그런 와중에 손님이라니! 정신 차린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건 너무 고난이도 미션 아니냐?

심지어 그 손님이 부모님의 절친한 친구란다. 은호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급하게 예절 교육책을 찾아본 참이었다. 글자를 읽을 수 없어 바로 덮어 버렸지만.

은호가 급한 대로 유모에게 주의해야 할 것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유모는 기특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늘 하던 대로 하시면 돼요, 도련님.”

……그 ‘하던 대로’가 뭔데, 도대체.

그쪽 가문에 로일레트보다 한 살 어린 여자아이가 있다고 하니 그냥 걔랑 놀아 주면 되는 건가.

전생에서부터 막연히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정작 어린 여자애가 놀러 오는 상황에 놓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은호는 그냥 전생의 조카 대하듯이 대하기로 마음먹고는 신경을 끊어 버렸다.

아직 새로운 생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버거웠다. 마음 정리가 덜 되어 조금 힘들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몸이 바뀌고, 가족이 바뀌고, 세계가 바뀌었다. 여기에 적응을 해야 되는 건지, 아니, 해도 되는 건지부터 확신이 서지 않았다.

“도련님, 곧 손님이 도착하십니다.”

그때 불쑥 집사가 찾아와 소식을 알렸다. 그 말에 다시금 번뜩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일단 지금의 나는 로일레트다. 로일레트 카르젤.’

로일이 크라바트를 매만지며 거울 속의 자신에게 한 번 더 되뇌었다.



로일은 정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손님을 기다리다가, 결국 후원의 얼록 나무 밑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냥 어린 나이 뒤에 숨기로 했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확신도 없는 상태로 가족도 아닌 외부인까지 만나는 것은 솔직히 좀 버거웠다. 자신을 ‘진짜 로일레트’로 바라보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려웠다.

그는 얼록 나무 밑에 앉아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계속 생각 중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로일레트인 척, 이 상태 그대로 살아야 하는 건가? 이곳 부모님을 속이며 살기엔 아무래도 죄송한데. 그렇다고 집을 나가자니 그분들께는 생때같은 자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꼴이고, 여기 붙어살자니 그건 내가 가시방석이고.’

타박타박.

근처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딱 들어도 가볍지만 힘이 넘치는 어린애의 발걸음 소리였다. 로일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냥 눈을 감고 있었다.

‘하긴, 이런 고민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마는. 내가 여기서 적응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들 달리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생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적응 안 하면 어쩔 거야.’

답이 정해져 있는 고민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참 웃기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인 것은 웬 여자아이의 얼굴이었다. 쿡 찌르면 온 얼굴에서 눈물이 펑 하고 터져 나올 것만 같은.

‘히익. 왜 우는 거야? 내가 모르는 척 계속 눈 감고 있어서?’

조카 대하듯이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는 한 번도 우는 조카를 달래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그때 무언가가 생각났다. 언젠가 혜서가 은호에게 말해 줬던, 혜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잘 통할 법한 꿀팁이라면 꿀팁이었다.



‘내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일단 맛있는 걸 먹여. 무조건은 아니겠지만,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대체로 대화가 부드럽게 진행될 거야.’



“초콜릿 케이크 먹을래?”

여기서도 과연 혜서의 팁이 통할까? 로일은 약간 긴장하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러자 꼬마가 콧바람을 퐁 뿜으며 웃었다. 그 모습에 로일이 안심했다.

‘고맙다, 혜서야. 네 팁은 여기서도 통한다.’

꼬마의 얼굴에서 어쩐지 혜서의 웃는 얼굴이 겹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