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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녀가 차를 따르고 물러나자 두 귀부인의 담소가 시작되었다.
“정말 미안해, 리아. 너희 부부한테도, 엘렌한테도. 로일이 롤란다병에 걸린 걸 아무도 몰랐지 뭐야. 그때 로일더러 엘렌이랑 놀지 말라고 했어야 하는 건데.”
디아나는 글로리아에게 손짓으로 차를 권하면서, 자신은 찻잔에 입도 대지 않고 사과부터 했다.
“뭐가 미안해. 원래 롤란다가 잠복기가 긴 편이잖아. 그날 로일은 누가 봐도 환자가 아니라 건강한 어린애였는데 뭘. 누가 알았겠어.”
글로리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어린애들은 다 한 번씩 걸리는 병이야. 다행히 엘렌도 잘 나았고. 미안해할 것 없어.”
“그래도……. 워낙에 잘못될 확률이 높은 병이니까.”
“잘못될 기미가 보였으면 폐하께 말씀드려서 드래곤이라도 찾아갔을 거야. 아니면 마탑의 아티팩트라도 찾든가. 잘못될 일 절대 없었어, 디아나. 괜찮아.”
일부러 괜찮다는 말에 더 힘을 주는 글로리아를 보던 디아나가 이내 어깨에 힘을 풀고,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나저나, 병이 낫긴 했는데 엘렌이 좀 이상해졌어.”
“콜록켈록콜록!”
글로리아의 말에 디아나가 차를 마시다가 채신없이 거칠게 기침을 내뱉었다.
“응……?”
놀리려고 하는 말인가 싶어 살펴보았지만, 글로리아의 얼굴에는 전에 없이 진지한 빛이 가득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어떻게 이상해졌는데?”
디아나의 물음에 글로리아가 신중히 말을 골라서 꺼냈다.
“점잖아졌어.”
“뭐?”
“점잖아졌다고.”
디아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묘해졌다.
글로리아는 디아나의 묘한 표정을 보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병에 걸렸다가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힘이 없는 건가 했었어. 그래서 닥터에게 몸을 보하는 약을 좀 지어 달라고 했거든. 그런데 기력이 회복될 때가 지났는데도 애가 계속 점잖은 거야.”
“점잖은 엘렌이라니? 엘렌은 원래 망아지…… 아니, 강아지 같았잖아? 많이 활발하고. 가만히 안 있고.”
‘망아지’라는 단어를 못 들은 척한 글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지금도 활발하긴 한데…… 어딘가 힘이 빠져 있어. 전처럼 에너지가 무한하지는 않은 느낌이야. 그리고 나와 제럴드 앞에서는 활발한데, 혼자 있을 때면 혼이 반쯤 빠져나간 것 같을 때가 있더라고. 우리 앞에서는 티를 안 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밖에 나와서 친구를 만나면 좀 괜찮아질까 싶어서 데려왔어.”
글로리아의 말에 디아나가 주변을 잠깐 확인하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롤란다가 낫고 나서 우리 로일도 조금 달라졌어.”
“로일도?”
글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로일은 너무 조용했잖아?”
“그랬지. 그래서 우리가 로일이랑 엘렌이랑 섞어서 둘로 나눴으면 좋겠다는 얘기 한 번씩 하잖아.”
“맞아, 그랬지. 그런데 요즘은 로일이 저택 안에서 뛰어다녀.”
“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글로리아의 반응에 디아나가 한층 더 진지하게 말했다.
“로일이, 집 안에서, 뛰어다녔다고. 어린애니까 뛰어다니는 게 당연하지만, 우리 로일은 그 당연한 걸 안 했잖아. 나나 유모나 처음 봤을 땐 너무 놀라서 벙 쪘지 뭐야.”
“……원래 롤란다가 후유증이 있는 병인가?”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사망률이 높아서 그렇지, 이겨 내기만 하면 깔끔하게 완치되는 병 아니야?”
글로리아와 디아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로 마주 보았다.
***
로일레트의 놀이방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시녀가 초콜릿 케이크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며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그들은 금방 그림에 집중했다.
밑그림을 다 그렸을 무렵 시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로일레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시녀가 초콜릿 케이크와 차를 들고 들어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시녀가 나갈 때까지 그림에 집중하던 로일레트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엘레노아. 케이크 먹자.”
초콜릿 케이크가 들어올 때부터 엘렌은 이미 케이크에 시선을 뺏겨 있었다. 그녀는 방 주인인 로일레트가 계속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엘렌은 그의 말에 냉큼 일어나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제 이거 먹어도 되나 싶어 맞은편에 앉은 로일레트를 보자, 그가 어서 먹으라며 손짓을 했다.
엘렌이 포크를 들어 커다란 케이크 조각을 푹 찔렀다. 포크가 케이크에 들어가는 느낌마저 마음에 든다! 그녀가 케이크를 먹기 시작하는 걸 보고 로일레트도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진한 초콜릿 맛에 엘렌의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이렇게 맛있는 초콜릿 케이크는 지구에서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진짜 맛있어. 우리 집 요리사도 이거 만들 줄 알면 좋겠다.”
케이크를 우물우물 먹던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맛있어?”
“응.”
“그럼 지금 새로 만들라고 할게. 너 집에 갈 때 한 판 들고 가.”
엘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니, 이렇게 착한 꼬마가 다 있나!
그녀는 ‘일곱 살 꼬마 데리고 놀기 귀찮다’는 생각을 버리고 로일레트에게 잘해 주기로 했다. 실제로 그는 딱히 귀찮은 꼬마도 아니었다.
“로일레트. 날 엘렌이라고 불러도 좋아.”
뭔가 결심한 듯한 엘렌의 태도에 로일레트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너도 로일이라고 불러.”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가만히 보던 그가 다시 말했다.
“엘렌? 엘렌보다 엘리가 더 어울려. 엘리라고 부를래.”
“마음대로 해.”
그녀는 ‘남의 애칭을 막 정하는 거야?’ 싶었지만 어린애 나름대로의 미적 감각이 있겠거니 하고 마음대로 부르라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린애들끼리는 원래 서로의 애칭을 마음대로 정하는 건가 싶어 말을 조금 덧붙였다.
“대신 나도 로이라고 부를래. 오빠도 로이가 더 어울려.”
“그래.”
그가 웃으며 승낙했다.
어쩐지 봐준다는 것 같은 로일의 웃음에 그녀가 속으로 ‘어쭈?’ 했다.
‘꼬맹이가 귀엽게 구네.’
한참 어린 아이가 오빠노릇을 하려 드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은호가 생각나 그리운 마음도 들었다.
서로의 애칭을 허락했지만 엘렌의 입장에서는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로일레트든, 로일이든, 로이든 그녀는 ‘오빠’라고 불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엘렌’보다 ‘엘리’라는 애칭이 조금 더 귀여운 것 같아 그건 마음에 들었다.
엘렌은 초콜릿 케이크를 다 먹고 나서야 바닥에 흩어져 있는 자신들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그린 그림은 혜서일 때 키웠던, 엉덩이에 초승달 모양의 검은 점이 있는 누렁이였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할아버지께서 키우시던 개를 데려와 키웠는데, 몇 달 후에 집을 나가 버렸다.
온 가족이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누렁이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었다. 그 후로도 계속 기다렸지만 누렁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엘렌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엄마, 아빠와 혜림이었지만 그릴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펑펑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녀의 그림을 보고 누구를 그린 거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래서 그 가족들 대신 그린 게 누렁이였다.
엘렌은 자신이 그린 누렁이 그림을 아련하게 보다가, 로일이 그린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앉은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로일이 그림을 그린 종이 위에는 크고 작은 열기구가 여러 개 둥둥 떠 있었다.
그의 종이를 보던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로이. 저게 뭐야? 오빠가 그린 거.”
“하늘을 나는 기구야.”
이 세계에도 열기구가 있나?
묘한 기분을 애써 누른 그녀가 표정 관리를 하며 다시 물었다.
“저런 게 있어?”
“아니. 그냥……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상상해서 그린 거야.”
아……. 상상.
엘렌은 어쩜 저렇게 똑같은 모양새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의아했지만, 이거나 저거나 다 사람 머리에서 나온 거니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다 싶었다.
그녀는 로일과 열기구 그림을 번갈아 보다 생각했다.
‘다음에 로이가 열기구 같은 걸 진짜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면 힌트를 좀 줘야겠다.’
엘렌과 로일은 다시 바닥에 내려가서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했다.
덜 발달한 어린애의 손이라 그런지 물감 칠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지만, 일부러 미숙한 척할 필요가 없어 그 점은 편했다.
엘렌은 개 그림에 누런 칠을 다 한 뒤에, 검은색 물감으로 개의 엉덩이에 검은색 초승달 모양 점을 그려 넣는 것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붓을 내려놓은 엘렌이 로일의 그림을 보았다. 그의 그림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색칠을 끝내고 붓을 내려놓았다.
로일은 만족한 듯 자신의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엘렌의 것을 힐끔 보았다. 무심하게 엘렌의 그림에 눈길을 주던 로일이 갑자기 그녀의 그림을 홱 낚아챘다.
깜짝 놀란 엘렌이 로일을 돌아보니, 그는 눈빛으로 종이를 찢을 듯이 그림을 보고 있었다.
로일이 개의 엉덩이에 그려진 검은 점을 뚫어져라 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거…… 왜 엉덩이에 달이 있어?”
어쩐지 목소리까지 한 톤 높아져 있었다.
“엉덩이에 검은 초승달이 있는 개……. 보고 싶어서.”
“왜 하필이면 검은 초승달인데?”
엘렌이 로일을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내 마음이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렇지. 네 마음이지.”
로일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웃음이 왠지 무척 씁쓸해 보여서 엘렌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그림 그리기는 어쩐지 울적한 분위기로 끝이 났다.
엘렌은 자신이 그린 개 그림과 로일의 열기구 그림을 보자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로일도 두 장의 그림을 우울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가라앉은 공기가 무거웠지만, 엘렌은 전생의 추억들을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로일 역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집에 돌아갈 때, 로일은 엘렌에게 초콜릿 케이크를 한 판 내밀었다.
시녀가 차를 따르고 물러나자 두 귀부인의 담소가 시작되었다.
“정말 미안해, 리아. 너희 부부한테도, 엘렌한테도. 로일이 롤란다병에 걸린 걸 아무도 몰랐지 뭐야. 그때 로일더러 엘렌이랑 놀지 말라고 했어야 하는 건데.”
디아나는 글로리아에게 손짓으로 차를 권하면서, 자신은 찻잔에 입도 대지 않고 사과부터 했다.
“뭐가 미안해. 원래 롤란다가 잠복기가 긴 편이잖아. 그날 로일은 누가 봐도 환자가 아니라 건강한 어린애였는데 뭘. 누가 알았겠어.”
글로리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어린애들은 다 한 번씩 걸리는 병이야. 다행히 엘렌도 잘 나았고. 미안해할 것 없어.”
“그래도……. 워낙에 잘못될 확률이 높은 병이니까.”
“잘못될 기미가 보였으면 폐하께 말씀드려서 드래곤이라도 찾아갔을 거야. 아니면 마탑의 아티팩트라도 찾든가. 잘못될 일 절대 없었어, 디아나. 괜찮아.”
일부러 괜찮다는 말에 더 힘을 주는 글로리아를 보던 디아나가 이내 어깨에 힘을 풀고,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나저나, 병이 낫긴 했는데 엘렌이 좀 이상해졌어.”
“콜록켈록콜록!”
글로리아의 말에 디아나가 차를 마시다가 채신없이 거칠게 기침을 내뱉었다.
“응……?”
놀리려고 하는 말인가 싶어 살펴보았지만, 글로리아의 얼굴에는 전에 없이 진지한 빛이 가득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어떻게 이상해졌는데?”
디아나의 물음에 글로리아가 신중히 말을 골라서 꺼냈다.
“점잖아졌어.”
“뭐?”
“점잖아졌다고.”
디아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묘해졌다.
글로리아는 디아나의 묘한 표정을 보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병에 걸렸다가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힘이 없는 건가 했었어. 그래서 닥터에게 몸을 보하는 약을 좀 지어 달라고 했거든. 그런데 기력이 회복될 때가 지났는데도 애가 계속 점잖은 거야.”
“점잖은 엘렌이라니? 엘렌은 원래 망아지…… 아니, 강아지 같았잖아? 많이 활발하고. 가만히 안 있고.”
‘망아지’라는 단어를 못 들은 척한 글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지금도 활발하긴 한데…… 어딘가 힘이 빠져 있어. 전처럼 에너지가 무한하지는 않은 느낌이야. 그리고 나와 제럴드 앞에서는 활발한데, 혼자 있을 때면 혼이 반쯤 빠져나간 것 같을 때가 있더라고. 우리 앞에서는 티를 안 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밖에 나와서 친구를 만나면 좀 괜찮아질까 싶어서 데려왔어.”
글로리아의 말에 디아나가 주변을 잠깐 확인하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롤란다가 낫고 나서 우리 로일도 조금 달라졌어.”
“로일도?”
글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로일은 너무 조용했잖아?”
“그랬지. 그래서 우리가 로일이랑 엘렌이랑 섞어서 둘로 나눴으면 좋겠다는 얘기 한 번씩 하잖아.”
“맞아, 그랬지. 그런데 요즘은 로일이 저택 안에서 뛰어다녀.”
“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글로리아의 반응에 디아나가 한층 더 진지하게 말했다.
“로일이, 집 안에서, 뛰어다녔다고. 어린애니까 뛰어다니는 게 당연하지만, 우리 로일은 그 당연한 걸 안 했잖아. 나나 유모나 처음 봤을 땐 너무 놀라서 벙 쪘지 뭐야.”
“……원래 롤란다가 후유증이 있는 병인가?”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사망률이 높아서 그렇지, 이겨 내기만 하면 깔끔하게 완치되는 병 아니야?”
글로리아와 디아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로 마주 보았다.
***
로일레트의 놀이방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시녀가 초콜릿 케이크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며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그들은 금방 그림에 집중했다.
밑그림을 다 그렸을 무렵 시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로일레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시녀가 초콜릿 케이크와 차를 들고 들어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시녀가 나갈 때까지 그림에 집중하던 로일레트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엘레노아. 케이크 먹자.”
초콜릿 케이크가 들어올 때부터 엘렌은 이미 케이크에 시선을 뺏겨 있었다. 그녀는 방 주인인 로일레트가 계속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엘렌은 그의 말에 냉큼 일어나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제 이거 먹어도 되나 싶어 맞은편에 앉은 로일레트를 보자, 그가 어서 먹으라며 손짓을 했다.
엘렌이 포크를 들어 커다란 케이크 조각을 푹 찔렀다. 포크가 케이크에 들어가는 느낌마저 마음에 든다! 그녀가 케이크를 먹기 시작하는 걸 보고 로일레트도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진한 초콜릿 맛에 엘렌의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이렇게 맛있는 초콜릿 케이크는 지구에서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진짜 맛있어. 우리 집 요리사도 이거 만들 줄 알면 좋겠다.”
케이크를 우물우물 먹던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맛있어?”
“응.”
“그럼 지금 새로 만들라고 할게. 너 집에 갈 때 한 판 들고 가.”
엘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니, 이렇게 착한 꼬마가 다 있나!
그녀는 ‘일곱 살 꼬마 데리고 놀기 귀찮다’는 생각을 버리고 로일레트에게 잘해 주기로 했다. 실제로 그는 딱히 귀찮은 꼬마도 아니었다.
“로일레트. 날 엘렌이라고 불러도 좋아.”
뭔가 결심한 듯한 엘렌의 태도에 로일레트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너도 로일이라고 불러.”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가만히 보던 그가 다시 말했다.
“엘렌? 엘렌보다 엘리가 더 어울려. 엘리라고 부를래.”
“마음대로 해.”
그녀는 ‘남의 애칭을 막 정하는 거야?’ 싶었지만 어린애 나름대로의 미적 감각이 있겠거니 하고 마음대로 부르라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린애들끼리는 원래 서로의 애칭을 마음대로 정하는 건가 싶어 말을 조금 덧붙였다.
“대신 나도 로이라고 부를래. 오빠도 로이가 더 어울려.”
“그래.”
그가 웃으며 승낙했다.
어쩐지 봐준다는 것 같은 로일의 웃음에 그녀가 속으로 ‘어쭈?’ 했다.
‘꼬맹이가 귀엽게 구네.’
한참 어린 아이가 오빠노릇을 하려 드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은호가 생각나 그리운 마음도 들었다.
서로의 애칭을 허락했지만 엘렌의 입장에서는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로일레트든, 로일이든, 로이든 그녀는 ‘오빠’라고 불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엘렌’보다 ‘엘리’라는 애칭이 조금 더 귀여운 것 같아 그건 마음에 들었다.
엘렌은 초콜릿 케이크를 다 먹고 나서야 바닥에 흩어져 있는 자신들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그린 그림은 혜서일 때 키웠던, 엉덩이에 초승달 모양의 검은 점이 있는 누렁이였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할아버지께서 키우시던 개를 데려와 키웠는데, 몇 달 후에 집을 나가 버렸다.
온 가족이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누렁이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었다. 그 후로도 계속 기다렸지만 누렁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엘렌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엄마, 아빠와 혜림이었지만 그릴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펑펑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녀의 그림을 보고 누구를 그린 거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래서 그 가족들 대신 그린 게 누렁이였다.
엘렌은 자신이 그린 누렁이 그림을 아련하게 보다가, 로일이 그린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앉은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로일이 그림을 그린 종이 위에는 크고 작은 열기구가 여러 개 둥둥 떠 있었다.
그의 종이를 보던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로이. 저게 뭐야? 오빠가 그린 거.”
“하늘을 나는 기구야.”
이 세계에도 열기구가 있나?
묘한 기분을 애써 누른 그녀가 표정 관리를 하며 다시 물었다.
“저런 게 있어?”
“아니. 그냥……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상상해서 그린 거야.”
아……. 상상.
엘렌은 어쩜 저렇게 똑같은 모양새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의아했지만, 이거나 저거나 다 사람 머리에서 나온 거니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다 싶었다.
그녀는 로일과 열기구 그림을 번갈아 보다 생각했다.
‘다음에 로이가 열기구 같은 걸 진짜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면 힌트를 좀 줘야겠다.’
엘렌과 로일은 다시 바닥에 내려가서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했다.
덜 발달한 어린애의 손이라 그런지 물감 칠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지만, 일부러 미숙한 척할 필요가 없어 그 점은 편했다.
엘렌은 개 그림에 누런 칠을 다 한 뒤에, 검은색 물감으로 개의 엉덩이에 검은색 초승달 모양 점을 그려 넣는 것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붓을 내려놓은 엘렌이 로일의 그림을 보았다. 그의 그림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색칠을 끝내고 붓을 내려놓았다.
로일은 만족한 듯 자신의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엘렌의 것을 힐끔 보았다. 무심하게 엘렌의 그림에 눈길을 주던 로일이 갑자기 그녀의 그림을 홱 낚아챘다.
깜짝 놀란 엘렌이 로일을 돌아보니, 그는 눈빛으로 종이를 찢을 듯이 그림을 보고 있었다.
로일이 개의 엉덩이에 그려진 검은 점을 뚫어져라 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거…… 왜 엉덩이에 달이 있어?”
어쩐지 목소리까지 한 톤 높아져 있었다.
“엉덩이에 검은 초승달이 있는 개……. 보고 싶어서.”
“왜 하필이면 검은 초승달인데?”
엘렌이 로일을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내 마음이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렇지. 네 마음이지.”
로일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웃음이 왠지 무척 씁쓸해 보여서 엘렌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그림 그리기는 어쩐지 울적한 분위기로 끝이 났다.
엘렌은 자신이 그린 개 그림과 로일의 열기구 그림을 보자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로일도 두 장의 그림을 우울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가라앉은 공기가 무거웠지만, 엘렌은 전생의 추억들을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로일 역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집에 돌아갈 때, 로일은 엘렌에게 초콜릿 케이크를 한 판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