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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



무영존 1권(1화)
서장


“맹주님을 뵙습니다.”
천검맹 맹주 천검제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내. 이제 이십 대 중반의 나이지만 그가 풍기는 기운은 천검제 위지강조차도 긴장시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백건영웅대를 잘 이끌어 줘서 고맙네.”
“과찬이십니다. 천검맹을 위해 미력하지만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이제 백건영웅대가 해체가 될 것이야.”
“…….”
“자네는 이제 어디로 갈 셈인가. 따로 사문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다시 천하를 떠돌 생각입니다.”
위지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네 같은 인재가 천검맹을 위해 일을 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사내는 대답을 미뤘다.
“그대에게 자리 하나를 맡기고 싶은데.”
“어떤 자리…… 말입니까.”
“천검맹 맹주를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천령군의 군장 자리 말일세.”
사내는 엄청난 제의에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 모습이 위지강의 마음에 쏙 들었다.
“충심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주군.”
“고맙네. 고마워.”
역대 최연소 천령군 군장의 탄생이었다.
“이름이 뭔가?”
“반……적풍이라고 합니다.”
“반적풍이라…… 하하! 좋은 이름일세. 군장의 별호는 무영존. 무영존 반적풍.”
위지강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반적풍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1장 무영서생 반사영(班査英)(1)


“스승님. 전 한량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
“헤헤!”
반사영(班査英)은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스승님은 제 우상입니다. 스승님처럼 멋진 한량이 되고 싶어요.”
“녀석아, 한량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나처럼 되려면 아는 것도 많아야 하며 돈도 많아야 한다.”
“그게 어려운 일입니까?”
반사영은 아직 어리기만 한 제자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어머님이 찾으시겠다. 수업은 끝났으니 어여 집에 가서 효도를 하거라.”
그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씩 웃으며 쪼르르 밖으로 나가는 아이를 보며 쓰게 웃었다.
“한량이 되겠다니. 혹여 집에 가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뒤늦은 걱정을 하며 반사영은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폈다. 하루의 일과가 끝이 났다.
글을 배우는 아이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남은 일이라고는 빈둥빈둥 노는 것만 남았다. 물론 그에게 노는 일이란 책을 읽고, 산책을 나서는 게 전부다.
술을 마시지도, 노름을 하지도 않는다.
가끔 계집질하는 걸 제외하고는 바람직한 무명서생의 표본이다.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을 맞으며 반사영은 집을 나섰다.
그가 머물고 있는 집은 이 마을에서는 보지 못할 엄청난 크기였다.
커다란 마당이 있고, 창고가 있었으며 사람이 쉴 수 있는 방은 세 곳이나 되는 집이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점심이 되기 전에 몇몇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글공부를 시켰다.
처음에는 반대도 있었다.
아이들의 부모는 대부분 없이 사는 시골의 농사꾼들이다.
글을 아는 것에 흥미가 없을 뿐더러 익힌다 하여 입에 풀칠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부모들을 설득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의 인원이 반사영에게서 글을 배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두 명으로 시작했지만,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열 명으로 늘어났다.
물론 돈은 받지 않는다.
다만 혼자 사는 반사영에게 필요한 밑반찬이나 음식들이 제공되곤 했다.
“어쩌다가 이 반사영이 한량 소리나 듣게 되었는지.”
자신처럼 멋있는 한량이 되고 싶다던 아이의 말을 떠올린 반사영은 실소를 흘렸다.
그 아이가 한량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저 어른들이 뒤에서 반사영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는 멋모르고 말했을 것이다.
그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반사영의 삶은 상당히 부러웠을 테지. 하기 싫은 밭일을 하지 않음에도 대궐 같은 집에서 사는데다가 아는 것도 많았다.
하는 일이라고는 빈둥빈둥 노는 게 전부인데, 어른들이 반사영의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까 말이다.
우상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산기슭 부근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은 원하는 물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말고는 한적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반사영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한량처럼 살기에는 더없이 최적의 장소였다.
반사영은 낡은 집의 문을 두드렸다.
“곽씨 아저씨, 계십니까.”
끼이익.
문이 열리고, 중년 남자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어이구, 선비님. 그렇잖아도 기별을 드릴 참이었습니다.”
인상 좋게 생긴 중년인 곽씨는 반사영을 보고 요란스럽게 반겼다.
“선비님이 적어 주신 목록에 있는 책들을 최대한 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예전 책들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지 뭡니까.”
“괜찮습니다.”
곽씨는 보름에 한 번씩 도시로 나가 마을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구해다 주는 일을 부업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반사영도 그에게 보고 싶은 책의 목록을 적어 주곤 했다. 워낙 많은 양이긴 했지만, 그만큼 곽씨의 주머니로 빨려 들어가는 돈의 액수가 짭짤했다.
반사영은 그에게 수고료를 챙겨 주고는 한 보따리나 되는 책들을 양손에 쥔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가져온 책들을 풀어놓았다.
“흠. 한 달은 버틸 수 있겠군.”
널브러진 책들을 보며 반사영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책을 훑어보는 그의 시선에는 사랑스러운 정인을 대하는 남자의 눈빛이 담겨 있었다.
곽씨가 가져온 책의 권수는 무려 백여 권이나 되었다.
반사영에게 이 책을 모조리 흡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한 달이다.
그것도 완전하게 암기하기에 부족함 없는 시간이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지만, 가장 흥미를 갖고 보는 건 무공 서적들이다.
무공을 익힐 생각은 없었다.
단지 그곳에서 사는 이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 강할 뿐이다.
내공심법, 화려하게 펼쳐지는 무공 초식들, 그리고 강자들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상.
그것은 평화롭고, 어찌 보면 지루하기까지 한 반사영의 인생에 있어서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갈망!
그랬다.
젊은 반사영의 피를 뜨겁게 하기에 그 단어 하나면 충분하다.
여지없이 반사영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무림에 관련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 대단한 내용은 아니지만, 과거부터 지금까지 악명을 떨치던 마인들과 그들을 물리친 정파의 고수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무림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들을 읽으며 반사영은 통쾌함과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대리 만족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한 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몰입하곤 했다.
“천검맹(天劍盟) 맹주의 곁에는 늘 그림자처럼 그를 호위하는 단체가 있었다. 그곳의 수장을 무영존(無影尊)이라고 불렀다.”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한 반사영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정파의 기둥 천검맹 맹주를 호위할 정도의 남자라면 지닌바 무공이 엄청날 것임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게다가 그만한 일을 해내려면 신분을 숨기기도 해야 할 것이다.
반사영은 무영존라는 별호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서책에는 무영존의 신상에 대한 것은 나와 있지 않았다.
워낙 비밀스러운 부분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그가 맹주를 호위하며 죽인 사파의 살수들 이야기가 주로 적혀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유명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악명을 떨치지 않은 자들이라고 해서 약한 존재들이 아닐 것이다. 천검맹주의 암살 시도를 할 정도면 어지간한 인물들로는 불가능할 테니까.
물론 반사영은 이 책의 내용을 완전히 믿을 정도로 순수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재미를 위해 없던 일도 만들어 적었을 것이다. 일 년 동안 오십 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건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반사영은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음에도 책 읽는 걸 멈추지 않았다.

반사영이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은 운기조식이었다.
무인들이나 하는 걸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해 왔다.
무공을 익히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운기조식을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어머니의 제안으로 시작했다.
무연심공(無然心功).
어머니는 내공심법의 이름을 그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이 심공은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머리를 맑게 하고, 체력이 좋아진다는 말에 지금까지 해 오고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반사영의 어린 시절 꿈은 유능한 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변한 건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라도 관리가 될 준비는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라는 것이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지켜야 했기에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한량 소리나 들으며 지내야만 했다.
운기조식을 마칠 즈음 아이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을 맞이했다.
“스승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제 반사영에게 한량이 되고 싶다던 소아가 대뜸 말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인데요. 스승님은 저희가 오는 줄 어찌 아십니까?”
“응?”
그야 아이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소아는 항상 동무들과 정문을 넘어서기 전부터 반사영이 마당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반사영은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라고 생각하다가 불현듯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려 마당으로 나오는 건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정문을 열고 들어서는 건 마당으로 나와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안채와 집의 정문까지는 거리가 짧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대화 소리를 들었다면 아이들이 정문을 들어서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반사영의 귀에는 훨씬 이전부터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동안 그걸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걸 소아가 일깨워 준 것이다.
수업을 진행하면서도 반사영은 자신의 몸에 무슨 변화가 일었는지를 고민했다.
언제부터라고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청력이 좋아지고, 시력도 좋아졌다.
청명한 하늘처럼 머리도 맑았다.
기억력도 괜찮아졌다.
분명 신체 기능들이 좋아진 건 맞았다.
하지만 그게 남들보다 비정상적으로 좋아진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조금 월등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반사영은 무연심공을 떠올렸다.
그가 아는 무림인들은 범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신체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었고, 손끝에서 기를 발산해 바위나 나무를 박살 낸다.
그런 능력들의 시작은 단전에 내공을 담는 내공심법에 있었다.
그저 공부를 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익힌 내공심법으로 인해 육체의 변화가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반사영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걱정거리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