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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2화)
1장 무영서생 반사영(班査英)(2)


어김없이 다른 아이들이 가고 소아만이 남았다. 소아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반사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반사영은 피식 웃었다. 어린 제자에게 걱정을 끼친 스승이라니.
“수업에 집중하셔야죠!”
“미안하구나.”
진심이었다. 소아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공부에 대한 욕심이 상당했다. 조금만 형편이 나은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훗날 나라에 도움이 될 학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배움이 즐거우냐.”
“물론이죠! 전 알고 싶고, 익히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반사영은 소아의 모습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면서도 가슴이 아파 왔다.
아무리 꿈이 크다 한들, 지식이 많고 머리가 좋다 한들, 저 아이는 그저 농사꾼의 아들일 뿐이다.
삼류 무림인의 아들인 자신이 대접을 못 받듯 소아도 언젠가는 신분의 벽에 부딪혀 힘들어할 날이 올 것이다. 자신이 겪었듯이 말이다.
마음에 드는 책을 두어 권 빌려 가는 소아를 보며 반사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저 아이들의 부모들이 처음 글을 배우는 것을 반대했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저 아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되는 일이 있고, 되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이다. 애초부터 그런 꿈을 갖게 하고 싶지 않기에 글을 배우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다.
반사영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조정의 관리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무인이라는 이유로 과거조차 볼 수 없었다.
관부와 강호는 서로 다른 세상이었다. 관원이 무림인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무림인이 관원이 되는 일은 관부에서 허락지 않았다.
무림인의 자식도 마찬가지다. 반사영처럼 삼류 무인을 아버지로 둔 자식에게는 과거를 본다는 건 꿈같은 일이다.
뜻이 크고 지식이 많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세상이 그의 피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을.
“하아!”
그 사실을 알았을 때를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반사영은 마을 뒤편에 있는 산을 오르는 걸 즐겼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을 오르고 내려오다 보면, 복잡하던 머리도 조금은 풀리곤 했다.
그저 놀고먹는 한량에게 복잡한 일이 무엇이 있겠냐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사영은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십 대 중반의 그는 지금 말 그대로 한량이었다. 과거를 볼 수도 없을 뿐더러 할 줄 아는 것은 책을 읽는 게 다였다.
산 정상에 오르면 작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으로 온 지는 삼 년이 되었다. 고향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여기에 머물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머니가 이곳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과거 고위 관직에 있던 자가 별장으로 쓰던 곳이라고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산으로 이런 터를 구할 수나 있을까? 이상했지만,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마을 촌장에게 이름을 말했더니 그 집에서 머물면 된다고 했다.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듯했다.
삼 년 동안 천검맹으로 서신을 수차례 보냈다. 아버지는 천검맹 소속 무인이었다. 이건 어머니에게 들은 내용이다. 직접 보지 못했으니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가 따로 일을 하지 않고, 반사영이 공부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돈을 보낸 것으로 보아 낮은 위치에 있지는 않을 거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반사영은 정확히 아버지가 천검맹 내부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머니도 거기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이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 이후에도 아버지는 코빼기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죽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혼자 남은 자식을 보기 위해서라도 나타났어야만 했다.
그게 아버지다. 반사영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다물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버지라는 존재를 떠올리면 강한 증오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어머니 앞에서는 아버지의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도 모르지 않았다.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 아버지를 향해 작은 원망이라도 해 볼 수도 있건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눈을 감으셨다.

반사영은 해가 지기 시작하자 산에서 내려왔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입맛이 없어 저녁은 먹지 않았다. 대신 어제 읽던 책을 폈다.
“……!”
반사영은 엉덩이에 불이 붙은 사람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방 안을 둘러봤다.
그는 겁에 잔뜩 질린 얼굴이 되었다. 방 안은 자신이 외출을 하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아주 사소한 부분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어머니의 유품 중 하나인 석경(石鏡)의 위치가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농 위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어야 할 석경이 엎어져 있었다.
반사영은 세밀하고 꼼꼼한 성격이다. 게다가 기억력까지 좋았다. 그런 그가 어머니의 유품의 위치가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이 방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가 나갔을 수도 있지만, 지금 반사영의 감각에 낯선 기운이 감지되었다.
무림인도 아닌 그저 평범한 서생이 그런 걸 감지할 수가 있겠냐마는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반사영은 망설임 없이 방 밖으로 뛰어나왔다.
“누, 누구냐! 어서 썩 나오지 못할까!”
아마 마을 사람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너무 놀고먹은 나머지 미친놈 흉내를 낸다고 흉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끌끌끌.”
요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반사영의 고개가 지붕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허름한 옷차림의 중년인이 이죽거리고 있었다.
“책이나 파는 무명서생이라 얕봤다가 아주 놀랐어, 아들!”
“……!”
반사영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에게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아, 아버지?”
“그래. 아비가 돌아왔다!”

시골 마을의 반찬은 마땅치가 않았다. 하지만 반사영의 아버지 반적풍(班赤風)은 며칠을 굶은 사람마냥 음식을 먹어 치웠다.
“네가 만든 거냐.”
“아뇨.”
“하긴, 책이나 읽고 있는 놈이 이런 음식을 만들 리가 없지.”
반사영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십 년 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말치고는 너무나 형편없었다.
반사영은 아버지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깔끔하게 다듬지 않은 수염, 헝클어진 머리카락, 너저분한 옷. 거지들이 형님이라 부르며 쫓아다닐 행색이었다.
아버지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던 반사영이다. 천검맹 무인들은 모두가 이런 몰골을 하고서 지낸단 말인가?
식사를 다 마친 반적풍은 이를 쑤시며 방 안을 둘러봤다.
“다 읽은 것들이냐.”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요.”
반사영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무연심공을 꾸준하게 했구나.”
“…….”
반적풍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평범한 자들과는 어울리기 힘들겠어.”
“무슨 말씀이죠?”
“아니다. 아무것도.”
반적풍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바람 좀 쐬고 오마.”
“아버지.”
반사영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내가 미우냐?”
반사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지 따지고 싶었다.
“왜 오지 않으셨죠. 아무리 천검맹이 중요하다고 해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오셨어야 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반사영은 최대한 자신의 화를 순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정말이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다.
“네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다.”
그게 끝이다. 반적풍은 그 말만을 하고는 방을 나갔다. 반사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저히 아버지라고도 부르기 싫었다.
와장창.
그는 반적풍이 먹고 남은 탁자를 들어 올려 벽에 내던졌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반적풍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술병을 손에 쥔 채 걸었다.
그는 반사영이 올랐던 산으로 향했다.
이 산은 자신의 아내가 좋아했다. 정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높지는 않았지만, 오르고 나면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었다. 그녀가 태어나 자란 곳.
반적풍은 이 산에서 만약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날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날이 인연이 되어 정을 나누고, 반사영을 낳게 되었다. 하지만 혼례는 올리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신분도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 혼례를 올리지 못했지만, 아이를 낳은 이상 가장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 하지만 가장의 역할도 제대로 해 주지 못했다. 늘 멀찌감치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매달 넉넉하게 돈을 부쳐 주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이생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낼 적에도 자신은 올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해해 줬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마음의 짐은 덜했다. 누구보다 처해 있는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반사영이다. 그 아이는 모른다. 자기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아직은 모든 걸 말해 줄 때가 아니었다.
다행인 일은 무연심공을 성실하게 운기해 왔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반사영은 무림인으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춘 것이다. 그것도 시작부터가 다른 그릇이 생긴 셈이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지도를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생의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반적풍은 알고 있었다. 삶에 대한 미련은 없다. 누구보다 지금까지 치열하고 뜨겁게 살았다 자부한다.
다만 죽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걸 끝내기 위해서 돌아온 것이다. 반적풍은 마지막 남은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

“아하하하! 이게 누구야!”
곽씨는 전란에 헤어진 가족을 만난 사람처럼 반적풍을 반겼다.
“두 분이서 아세요?”
반사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요. 이 친구는 이 마을의 처녀를 보쌈해 간 놈입니다.”
“처녀…… 보쌈이오?”
“크하하하! 이거 참, 형님은 여전하십니다.”
곽씨와 반적풍은 서로를 보며 호탕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근데 선비님하고 자네가 어찌 같이 있는가?”
“선비는 얼어 죽을.”
“어허! 나이가 어려도 박학다식한 분이네.”
반사영이 반적풍의 아들이라는 걸 모르는 그로서는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제 아들놈입니다. 형님.”
“아…… 아들? 이 선비님이?”
“예.”
“어허허허! 그럼 그 아이의?”
반적풍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반사영은 곽씨가 어머니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설마 보쌈당한 처녀가…… 어머니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험!”
반적풍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건 곽씨도 마찬가지였다. 아들 앞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런 식으로 꼬였다는 민망한 이야기를 해 버리다니.
“여튼, 자네에게서 이렇게 훌륭하신 선비님이 태어났다는 게 신기할 뿐이네.”
“제깟 놈이 훌륭해 봤자지.”
“우리 마을 아이들의 글공부를 아무 대가 없이 해 주고 계시네.”
“호오?”
“돈도 받지 않고, 아이들도 선비님을 잘 따르네.”
“그건 그렇고, 아우의 아들놈한테 언제까지 선비님, 선비님, 그럴 겁니까. 낯간지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