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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남



8월 중순의 아침은 여전히 뜨겁다.

버스에서 내려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하며 타박타박 걸어가던 하은은 미화 선배가 주말을 잘 보내고 왔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미화가 주말을 보낸 결과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아마 출근하면 그녀의 기분도 기분이지만 신경 쓸 일도 많아질 것이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밤늦은 시간까지 포장마차나 야외에서 시원한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종종 싸움이 일어나는 모습 역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건 곧 응급실이 치과 환자로 바빠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술에 취해 사소한 싸움도 일어나게 되고, 차들이 다니지 않는 새벽 시간에 도로를 점령해 버리는 오토바이족들이 서로 기술을 뽐내다 사고를 당해 이가 부서져 오는 경우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시기가 바로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 말부터였다. 8월 중순이 되었으니 이제 그 끝자락이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하은은 진료실이 얼마나 엉망일지 상상해 보았다.

“안 봐도 훤하지.”

피 묻은 거즈가 바닥을 굴러다니고 진료 체어에 기구들이 쏟아져 나와 있으리라. 특히 새로 온 인턴은 응급 환자가 올 때마다 소독장에 있는 기구란 기구는 다 꺼내 사용해 진료실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재주가 있었다.

7시 40분. 옷장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미화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주말 잘 보내셨어요?”

“어.”

어찌 대답이 신통찮다.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겠지.

4년 동안 찍소리 안 하고 있던 하은이 처음으로 선배 대접받고 싶으면 제대로 하라며 말했고 윤미화는 한마디 반박도 못 한 채 입만 뻐끔거렸다.

그 사건 이후 업무적인 대화만이 간단하게 오갔다. 물어도 영혼 없는 대답. 딱 봐도 토라진 목소리와 표정이었지만, 하은은 굴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에 벌써부터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저 먼저 정리하고 있을게요. 천천히 오세요.”

윤미화. 나이 28세. 세림대학병원 구강외과 제1과장 최진국 교수의 어시스트 치위생사. 1과장님의 파워가 제일 센 관계로 그녀 또한 그와 똑같은 행동 양식을 보였다.

즐겁지 않은 주말을 보낸 경우 미화는 성격이 고약해진다. 다른 사람들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못 본다. 심통이 나는 것이다. 시무룩한 그녀에게 표정은 왜 그런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걱정스러운 말을 건네야 그나마 누그러진다. 정말 피곤한 스타일이다. 하은은 그 사실을 치과에 들어와서 한 달 만에 파악했다.

진료실 문을 열자 역시나 예상대로 바닥을 굴러다니는 거즈와 와이어 조각들이 열렬히 그녀를 환영하고 있었다. 체어 주변을 정리하고 진료에 필요한 소독된 솜과 거즈, 소모품들을 채워 나갔다.

진료실에는 총 12개의 진료 체어가 있다. 그중 8개는 바깥쪽에, 나머지 4개는 제1과장님과 제2과장님이 각각 두 대씩 쓰고 있었다. 과장님 체어를 제외한 8개 체어 중 4개가 엉망인 걸 보니 오전 입원 환자의 방문은 최소한 3명은 된다는 소리였다.

소모품을 겨우 다 채웠더니 기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독장이 활짝 열려 있고, 기구가 제멋대로 나뒹구는 것을 확인한 하은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빨리 기구를 씻고 소독해야 오전 9시에 오는 입원 환자와 외래 환자를 볼 수 있다. 피가 묻어 있는 기구부터 먼저 거두어 찬물에 씻기 시작했다.

“굿모닝!”

간호조무사 혜원과 함께 바닥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굿모닝.”

“네. 안녕하세요.”

“아, 참.”

하은은 목소리를 죽이며 소곤거렸다.

“미화 선배 저기압이야.”

“또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몰라. 주말 잘 보냈냐고 물으니까 어, 이러고 말더라.”

두 사람이 조심스레 말을 주고받으며 기구를 정리하고 있을 때 하은의 아래 기수 치위생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선배님,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응. 굿모닝. 미화 선배 아직 탈의실에 있어?”

“네.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세요. 후, 오늘 우리 말 한마디도 못 하는 거 맞죠?”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삐죽이자 성희가 한마디 했다.

“주말에 미팅한 거랑 영화 본 거, 정말 이야기할 게 많단 말이에요. 아이참.”

투덜대는 성희를 보며 하은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제 한바탕 치른 거 같으니까 빨리 정리하자.”

소독기 안에 기구를 넣어 Start 버튼을 누르는 순간 미화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곧바로 1과장님 구역으로 들어가 버리는 행동에 진료실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보이지 않는 한숨이 오갔다.

* * *

오전 8시 재활의학과 콘퍼런스 시간.

레지던트 3년 차 유정이 환자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3월에 들어온 1년 차 종윤과 주성은 귀를 쫑긋 세우며 발표를 듣고 있었다. 반면 성민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콕콕 쑤시는 느낌의 두통과 치통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콘퍼런스 시간이 끝날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는데 턱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에 참았던 신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윽…….”

성민이 왼쪽 턱을 감싸며 인상을 찡그리자 유정이 물었다.

“최성민 선생. 왜 그래?”

“아, 죄송합니다.”

“치통이야?”

“아프다 말다가 아프다 말다가 하더니 새벽에 아파서 깼는데, 지금은 어디가 아픈 건지…….”

“오전에 급한 거 끝내 놓고 치과에 가 봐. 치과 치료는 미루면 더 고생하니까.”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성민을 보며 재활의학과 1과장인 전호진 과장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지. 원래 이가 아프면 갑자기 아픈 게 아니거든. 아파서 가려고 하면 안 아프고, 또 괜찮다가 아프니까. 그러다 잊어버리고, 미루면 신경 치료하고 덮어씌워야 하잖아. 나도 환자 본다고 미루다가 공사 크게 한번 했지.”

“알겠습니다.”

얼마 전까지 치과 치료 때문에 열심히 2층을 오르락내리락했던 전 과장은 성민의 고통을 충분히 알고도 남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아픈 건 진짜 못 참아. 진통제도 안 들을 때가 있어. 환자 보다 보면 치통 왔던 걸 잊고 있다가 나중에 생각이 나거든. 자꾸 병 키우지 말고 시간 내서 치과에 가 봐.”

“네, 과장님. 감사합니다.”

재활의학과는 다른 과에 비해서 많이 바쁜 편은 아니다. 수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꼬박꼬박 회진을 도는 경우도 거의 없는 편이다. 재활을 목적으로 치료하는 곳이라 진행 상태를 주기적으로 체크하면 됐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재활의학과의 비중은 엄청난 속도로 커졌다. 비인기 진료과였을 때도 있었지만 재활에 대한 인식이 바뀐 후 레지던트 지원도 많아졌다. 교통사고 후유증, 혹은 절단된 신체 부위에 맞는 의수나 의족들을 적응시키는 훈련, 인대가 늘어나거나 끊어지는 경우 사고로 뇌 손상에 의한 마비로 인해 운동 기능이 떨어지는 등 많은 곳에 재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민도 처음부터 재활의학과에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다. 사촌 동생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재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 그가 재활의학과를 지원한다고 했을 때 타 외과 과장들은 의아함과 동시에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입학 때부터 과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를 흉부외과에서 일찍이 점찍어 놓은 상태라 성민의 결정은 더 파란을 일으켰다.

오전 콘퍼런스가 끝나자마자 성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 제가 치과에 예약할까요?”

성민을 따라 나오며 종윤이 물었다.

“아니야. 치과도 환자가 많잖아. 나도 오전은 힘들고. 오후에 보고 진료받을 수 있으면 가 봐야지.”

“그럼 진통제라도 하나 드려요? 그거라도 드셔야 견디실 텐데요.”

“있으면 하나 줘. 그거 먹고 어떻게든 버텨야지.”

치과는 누구에게나 가고 싶지 않은 곳 중의 한 곳이다. 성민도 어릴 때 충치 때문에 갔다가 큰 공포를 경험했다. 의사는 안 아플 거라고 어린 그에게 말했지만, 귀 가까이에서 들리는 윙윙 소리와 이를 파고드는 금속 드릴의 그 느낌. 뭔가 타는 듯한 냄새와 입안 가득 고이는 물은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할지 몰라 어린 그를 두렵게 하기에 충분했다. 코로 숨 쉬라는데 그게 말처럼 쉽게 돼야 말이지. 그 뒤로 치과에 가는 일을 없게 만들기 위해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양치질했다.

무탈하게 잘 지내다 병원 생활을 하면서 관리에 소홀했는지 충치가 생겼다. 20년 만에 치과를 가려니 선뜻 내키지 않았다.

“구강 건강을 위해 담배도 안 피웠는데.”

하지만 치과에 가지 않는 이상 어떤 방법도 그를 평화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 * *

입원 환자 맞을 준비를 끝내고 나니 시계가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입원 환자가 없다면 지금쯤 다들 의국에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을 시간이지만 월요일 오전만큼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방학이라 실습하는 학생들까지 합세하니 넓다고 생각했던 진료실이 좁게 느껴졌다. 하은은 오늘만큼은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진료실 밖에는 입원 환자들이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안으로 들어오지 그러셨어요.”

그녀의 말에 환자들이 각자의 링거 걸대를 밀며 진료실 안으로 움직였다. 입원 환자는 총 세 명으로, 새벽에 응급실로 들어온 사람 중 두 명이 입원한 모양이다. 체어에 환자가 눕고, 모니터에 차트를 띄워 과장님 두 분이 나오길 모두 일렬로 서서 기다렸다.

치과 1과장 최진국 과장은 환자 상태에 관한 설명을 들은 후 처지에 대해서만 오더를 내리고 들어간다. 보수적이고 근엄한 태도로 딱 자신의 환자만 선별해서 보는 스타일이다. 반면 2과장인 서원일 과장은 부교수로 있을 때와 똑같은 태도로 진료를 보는 편이었다. 잘 웃고 환자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모습을 의사로서의 근엄함이 없다며 최진국 과장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더 웃긴 건 최진국 과장의 진료 행동을 윤미화가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진국 과장이 두 번째 체어에 도착하자 진료실은 일순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응급실 차트의 히스토리를 보면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 여자 친구에게 강제로 키스하려다가 상대방이 저항의 의미로 남자의 혀를 깨물었다고 적혀 있었다. 남자의 혀는 반이나 잘려 나갔다. 어젯밤 당직이었던 박도현 선생이 봉합(Suture)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환자의 입을 벌렸다.

환자가 입을 열자 진료실 공기가 순식간에 흑색으로 변했다. 모두 마스크를 하고 있어서 입을 가리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스크를 뚫고 뇌에 박히는 썩은 냄새는 달리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예후가 좋지 않았다. 제대로 붙는다면 다행이지만 잘려 나간 부분의 색이 변한 것을 보니 다시 떼어 내야 할지도 몰랐다. 최 과장은 환자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 봉합을 한 박 선생에게 치료 지시를 한 뒤 발걸음을 움직였다.

세 번째 환자는 21살의 남자였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 역주행해 오는 음주 운전자의 차를 피하다가 도로에 미끄러진 케이스였다. 차 밑으로 들어가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왼쪽 다리는 허벅지까지 깁스한 상태였고 여러 군데 찰과상과 함께 치아가 심하게 흔들려 브래킷(Bracket:치아 교정용)을 장착한 상태였다. 아마 이 환자 때문에 바닥에 와이어(Wire:치아 교정용 철사) 조각들과 브래킷이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드레싱을 끝내고 입원 환자들이 병실로 올라가자 5분 정도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하은은 학생들을 시켜 대기실에 있는 초진 환자들에게 치과에 오게 된 히스토리를 적는 용지를 나눠 주게 했다.

학생이 들고 온 예약 접수증을 본 하은은 환자 이름을 확인했다.

“여기에 담당 교수님 성함 보이지? 1과장님 환자야. 내가 미화 선배한테 주면 되고. 학생들은 예약 스케줄엔 손대지 말아요.”

환자의 예약을 잡기 위해선 다섯 명의 스케줄 표를 동시에 확인하며 빈 시간대에 예약을 잡아야 한다. 진료 체어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선 예약 시간을 분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리고 스케줄 표 중간에 선생님들이 예약 없이 집어넣은 환자들도 있을 거야. 대부분 지인을 중간에 끼워 넣는 거니까 거기에 붙어 있지 말고, 다른 외래 환자들 어시스트 하는 걸 중심으로 진행해요.”

“네, 알겠습니다.”

“후우. 어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1과장님이 방으로 들어간 순간 미화 역시 과장님 진료실 안으로 사라졌다.

9시가 되기 무섭게 사랑니 발치(S.E) 예약을 한 환자가 진료실 안에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치과 안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전 수술 환자의 마취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다른 환자의 신경 치료가 옆 체어에서 진행되었다. 30대 중반의 이 환자는 유독 엄살이 심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뭔가 처치를 하려고 하면 끙끙 앓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 인턴 선생도 진료 보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10분이면 끝날 치료를 시간을 두 배로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이 환자는 처치가 다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치료받은 쪽을 손으로 감싸며 활짝 웃는다. 다음엔 언제 오면 되냐고 물으며 약속을 꼭 잡고 갔다.

예약 환자 목록을 보던 성희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어머, 선배님. 오늘 최종호 환자 오네요?”

“나도 봤어. 저번 충치 치료받고 한 6개월 정도 지났나? 관리 잘하는 편인데 오늘 무슨 일이지?”

“전 이분 굉장히 웃기던데요? 저만 보면 정말 예쁘십니다. 주님께서 제게 보내 주신 것 같습니다, 하시면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그러잖아요.”

“처음엔 나도 깜짝 놀랐어. 정확한 히스토리는 모르지만, 참 착한 분 같던데 어쩌다 그리되었는지 안타까워.”

오후에는 정신병동에서 두 명의 환자가 오기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하면 일반 외래에서 치료하고 통제 불능인 경우엔 전신 마취를 한 상태에서 입안의 모든 치료를 한꺼번에 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 오는 환자 중 한 명은 의대 공부를 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진 케이스다. 증상을 말할 때도 전문 용어를 사용하고 진료 중에도 의학 용어를 쓰며 불평을 호소해 하은은 그 환자를 처음 봤을 땐 정말 의사인지 알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