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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미화가 나오며 날카롭게 말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밖에 환자분들 기다리는데!”
“네, 선배님.”
다시 진료실 안으로 사라진 미화를 보며 하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주 한바탕했으니 내가 곱게 보일 리가 없겠지.
“에휴.”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눈 것조차 오늘은 보기가 싫은 모양이다. 내가 참고 말지, 뭐.
고개를 돌리니 실습생들이 미화의 등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채 모여 있었다. 찬바람 쌩쌩 부는 미화의 목소리에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더운 날씨에 얼음 땡 놀이해요? 다음 환자 진료 준비해 주세요.”
짧지만 강했던 오전 시간이 흐르고 오후 2시가 되어갈 무렵 전화가 왔다.
“세림대학병원 치과, 치위생사 김하은입니다.”
—안녕하세요. 재활의학과 김주성입니다. 혹시 오후에 진료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선생님께서 직접 받으실 건가요?”
—아닙니다. 저희 선생님이 받으실 건데, 혹시 가능할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정말 급합니다.
스케줄을 보니 오늘은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았다. 오전 늦게 접수한 환자들과 초진 환자들이 많아서 정확한 시간을 말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간에 자리가 비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몇 번으로 연락하면 되나요?”
—0257번입니다. 연락 꼭 주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하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아프기에 그러지? 전호진 과장님은 치료가 다 끝났는데……. 과장님 진료 시간 묻지 않는 걸 보니 레지던트 중 한 명이겠네.”
오후에 있는 임플란트 수술 준비로 미화는 과장님 진료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외래만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3시 수술 예약한 환자가 오지 않아 조금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예약 환자들 때문에 그 조금의 여유조차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접수 시간인 4시 30분이 되자 하은은 학생들에게 기구 정리를 시켰다. 이리저리 흩어진 스케줄 표를 정리하던 하은은 레지던트 2년 차 김형일 선생의 빡빡한 스케줄에 시선이 갔다. 그런데 없던 이름이 보였다.
재활의학과 최성민.
“어? 이거 뭐야?”
하은은 모니터를 확인했다. 접수 환자 목록에 최성민란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접수도 안 해 놓고 진료받겠다 이거야?”
또 마음대로 환자를 받았다 이 말이지. 바쁜 거 뻔히 알면서 또!
하은은 형일의 스케줄 표를 들고 의국으로 들어갔다. 다른 과와 달리 치과 의국은 외래 진료실과 붙어 있다. 문을 열자 좁은 갈색 가죽 소파에 거구의 남자가 지친 듯 널브러져 있었다. 두 발이 다 올라가지 못하고 한 발은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치과 레지던트 2년 차. 키 183cm, 몸무게 90kg에 육박하는 체구를 가진 형일은 그녀보다 두 살 많지만, 인턴 과정 때부터 같이 일을 했기 때문에 돈독한 우정이란 게 존재했다.
하은은 마스크를 턱 아래로 끌어내리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형일 쌤, 이거 뭐예요?”
스케줄 표를 세워 보여 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형일이 하품을 하며 거구의 몸을 일으켰다.
“아, 맞다. 내가 아까 넣었는데.”
하은은 입술을 삐죽였다.
“아침 콘퍼런스 시간에도 아파서 고생했다고. 재활의학과 인턴 선생이 전화했었어. 의국으로. 꼭 봐 달라고.”
“흐음. 그래서 봐 준다고 했고요?”
상대방이 앓는 소리를 하면 영락없이 예스맨이 되는 이 사람을 어찌하면 좋을까.
“내가 봐 준다 했는데, 밖에 자리 없죠?”
“차트도 안 떴어요. 돌아가는 사정 뻔히 알면서 이 시간에 끼워 넣으면 어떻게 해요? 어시스트 못 할지도 몰라요. 손이 모자란 거 알면서 그러세요.”
간단한 어시스트면 학생을 세워 두면 된다. 사진도 찍으라고 하면 된다. 그러라고 실습 나온 거니까. 그러나 한 번 진료를 보기 시작하면 하나둘 늘어가 점점 바빠질 게 뻔했다.
“후우.”
한숨 쉬는 하은을 형일의 눈이 세심하게 살폈다. 마스크 벗은 얼굴을 아침에 보고 이제야 또 보게 되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치과 인턴으로 왔을 때 한눈에 반해 버린 형일은 하은을 눈여겨보았다. 빈틈이 보이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게 벌써 3년째였다.
“하은 쌤이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어휴, 난 몰라요.”
“오후에 2과장님 진료 없는 거 알아. 좀 도와줘.”
“서원일 과장님 진료 없다고 내가 마냥 놀아요? 외래 환자부터 봐야 하는데, 인턴 쌤 둘 다 과장님 방에 들어가서 안 나오고 있다고요. 지금 초진 환자 밖에 있는데 쌤이 환자 보시든지. 그러면 생각해 볼게요.”
“오케이. 그 말 지키기.”
어시스트 해 준다는 말에 형일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운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귀에 걸면서 의국 밖으로 나갔다. 뒤따라 나가며 하은은 피식 웃었다. 내가 도와준다고 했지 어시스트 해 준다고는 안 했는데.
초진 환자 진료를 끝내고 시간을 확인한 하은이 더 늦지 않게 올라오라고 해야겠단 생각에 수화기를 드는 순간, 유리문을 밀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최성민 선생님 방금 접수했습니다.”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에 하은은 잠시 멈칫했다. 마치 자주 보는 사람처럼 친근한 말투에 그녀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능글맞은 목소리에 걸맞게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아까 전화했던 사람 같았다. 아파 죽겠다는 당사자는 어디에 있는 거지?
“대부분 직접 전화 주시고 접수도 하시던데. 급하게 진료 잡을 만큼 많이 안 아프신 모양인가 봐요?”
“아닙니다. 환자 본다고 정신이 없으셨는데, 진료 끝나고 나면 그제야 아프다고 하실 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십시오.”
윗사람에 대해 꽤 신경을 쓰는 걸 보니 스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최진국 과장님 같은 스타일인가? 아, 재수 없어.
“여기 오실 만한 과장님이 안 계시는데.”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해도 치과에 오면 달라진다. 체어에 눕는 순간 그들이 긴장한다는 것을 하은은 알고 있다. 어디 누가 오나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스케줄 표를 한 번 보고 빠르게 기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5시 40분쯤 되자 외래 환자가 정리되었다. 1과장님 진료실에서는 아무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임플란트 수술이 길어지고 있었다.
“오늘 늦게 끝날 모양인가 봐요.”
성희가 과장님 진료실을 기웃거리자 하은이 들어가 보라고 했다.
“밖은 내가 정리할 테니까 수정 쌤이랑 성희 쌤이 들어가 봐요.”
예정 시간보다 30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기구 정리를 다 끝낸 학생들이 진료실 한쪽에 멀뚱히 서 있는 게 보였다.
“오늘은 그만 가 봐요. 수고했어요.”
“네?”
“더 걸리니까 기다릴 필요 없어요.”
학생들이 있어 봐야 더 할 게 없다. 차라리 시야에 없는 게 더 편했다. 하은은 학생들의 실습 기간이 되면 신경이 더 예민해진다. 조심한다고 하지만 돌발 상황과 실수는 늘 일어났다.
“고생하셨습니다.”
합창하듯 인사하고 학생들이 사라졌다.
형일이 본 마지막 환자가 체어에서 내려오자 하은이 예약 날짜를 잡아 주었다.
그 순간 진료실 문을 밀면서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한 손으로 왼쪽 턱을 감싸고 들어오는 것을 보니 스케줄 표에 끼어든 그 의사가 분명했다. 하은은 마스크 아래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최성민 선생님이신가요?”
“네.”
남자의 억눌린 목소리를 들어 보니 어지간히 아픈 모양이었다.
“이쪽에 누우세요.”
진료 체어에 남자가 눕자 하은은 에이프런을 해 주고 진단 기구를 담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성민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하은이 의국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깝돌이 주성이 한 말이 떠올랐다.
“선배님. 치과에 목소리 끝내주는 치위생사 있던데요?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라는 표현을 이런 경우에 쓰나 봐요. 진짜 옥구슬이 굴러가요, 굴러가. 얼굴도 예쁘려나?”
접수해야겠다는 그의 말에 이미 접수하고 치과에 갔다 왔다는 주성이 내뱉은 말은 더 가관이었다.
“이야, 선배님. 진짜 예뻐요! 키는 좀 작은 거 같은데 그건 문제가 안 되고요. 눈이 정말 예뻐요. 동그랗고 말간 눈이 절 쳐다보는데 순간 이거 뭐지? 했어요. 나도 치과에 한번 가 봐야 할까 봐요. 검사하면 견적 꽤 나올 텐데.”
호들갑스러운 주성의 말을 100% 믿는 사람은 재활의학과에 아무도 없다. 주성이 한 말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성민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옥구슬보다는 조금 차분한 목소리랄까. 차분하면서도 깨끗한 목소리가 귀에 착 감겨 왔다. 머리가 맑아지는 목소리였다. 주성의 말대로 목소리가 예뻤으며 눈은 정말 크고 맑았다. 강아지 눈처럼 동글동글했다. 게다가 긴 속눈썹이 맑은 눈을 더 예쁘게 만들었다. 김주성, 이번엔 과장이 아니었군.
뒷모습을 보니 키는 한 162cm 정도? 어시스트를 하게 된다면 좀 더 자세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민은 자신이 아주 오랜만에 여자를 찬찬히 훑어본다는 것을 미처 느끼지 못했다.
시간만 나면 의국 소파에 길게 늘어지는 형일을 하은이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레지던트 3년 차 서영주 선생은 발표 준비 때문에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태세였고, 레지던트 1년 차 한준우 선생은 이면지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한 선생님 뭐해요?”
“아! 조금 있으면 과장님 수술 끝날 거 같아서요. 사다리 타기나 할까 하고요.”
통통한 체격에 걸맞게 군것질을 좋아하는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사다리 타기를 했다.
“하은 쌤도 오늘 동참?”
“아뇨. 또 나한테 제일 큰 거 걸리게 하려고 하죠? 한 선생님은 만날 꽝 아니면 2천 원짜리 걸리는 게 수상해요!”
“정말 아닌데. 하은 쌤이 또 큰 거 걸리면 다시 해요, 그럼.”
“됐어요, 형일 쌤. 최성민 선생님 왔어요.”
성민의 이름을 듣자 형일이 기지개를 켜며 거구의 몸을 일으켰다.
“아흠. 일단 사진부터 먼저 찍죠. 곧 나갈게요.”
“네.”
성민은 체어에 얌전히 누워 있지 않았다. 20년 만에 오게 된 치과라 그런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미러를 들고 그 작은 거울에 얼굴을 비쳐 보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분명 이것을 입안에 넣고 좌우로 점막 안에 갖다 대겠지.
오른쪽을 보니 윙윙 소리가 나는 그 기계가 보였다. 작은 금속 머리끝에 뾰족한 침 같은 것을 보자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작은 핸드피스가 입안으로 들어와 아픈 곳을 후벼 파겠지. 상상만으로도 머리끝이 쭈빗 섰다. 귓가에 크게 울리는 기계 소리와 입안 가득 고이는 물을 떠올리자 손끝이 간질거렸다.
다시 하은이 진료실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오며 체어에 누워 있는 성민에게 말했다.
“일단 사진부터 찍을게요.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성민은 체어에서 내려와 그녀를 따라갔다. 한쪽에 마련된 작은 공간으로 들어간 그녀가 둥근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이쪽을 보고 앉으시고요. 어느 쪽이 아프시죠?”
“여기 왼쪽 어금니요. 너무 아파서 새벽에 깼어요.”
“아, 해 보세요.”
그녀가 작은 필름을 집게에 꽂더니 왼쪽 어금니 안쪽에 밀어 넣었다.
“조금 아플 거예요. 금방 찍으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성민은 마스크를 한 그녀의 얼굴에 집중했다. 눈만 보였다. 그의 입술, 아니 정확히 입안을 살피는 눈길이 좋으면서도 부끄러웠다. 하필 이런 모습이라니.
“살짝 물어보세요. 그렇죠. 그 상태로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지 마세요.”
아이에게 설명하듯 친절한 설명과 함께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곧 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주시고, 자리에 가서 누우세요.”
입안에 있던 것을 빼자 침이 묻어 나왔다. 이상한 필름을 입에 넣을 때부터 생기기 시작한 침이 제법 고이자 그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침이 묻은 작고 네모난 필름이 그녀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 젠장. 이게 뭐야. 창피하게. 성민은 얼른 자리로 돌아가 입을 헹궜다. 컵을 올려놓자 위에서 또르르 물이 내려와 컵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외래 진료가 끝난 시간이라 그런지 진료실이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창피함이 얼굴로 번졌다. 여러 번 입을 헹구며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라앉혔다.
하은은 필름을 현상하고 에어를 불어 말리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찍힌 대구치가 보였다. 세 개의 뿌리 중 두 개의 커다란 뿌리 아래로 시커먼 고름 주머니가 보였다.
“흠, 많이 아팠겠네.”
하은은 체어에 있는 작은 필름 박스에 사진을 붙이고 스위치를 켰다. 고름 주머니를 단 튼튼하게 생긴 대구치가 하얗게 나타났다. 성민의 관심 있는 태도에 하은은 시커멓게 변한 부분을 가리켰다.
“많이 아프셨겠어요.”
“신경 치료를 해야겠죠?”
“치료 단계는 김형일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실 거예요.”
형일이 의국에서 나오더니 마스크 통에서 새 마스크를 하나 집어 들었다. 사진을 보곤 어떻게 참고 있었냐며 물었다.
“처음에 아프다 말다 그러더니 오늘 새벽에 정말 아파서 죽는지 알았어요. 콘퍼런스 시간에 너무 아파하니까 전호진 과장님이 치과 빨리 가라고 하셔서 그나마 눈치 덜 보고 왔죠.”
“전 과장님이 치료를 거의 4개월 정도 하셨나? 대 공사를 하셨죠.”
형일이 웃으면서 미러를 손에 들자 아, 하고 입을 벌리던 성민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많이 아프겠죠?”
말을 해 놓고 민망한지 입을 다물며 웃는 그의 모습에 하은은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내가 언제부터 남자의 눈웃음에 홀랑 빠졌다고? 웃을 때 휘어지는 눈에 시선이 꽂혔다. 예쁘게 만들어지는 반달 모양이 성인 남자와 어울리지 않게 순진하게 느껴졌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밖에 환자분들 기다리는데!”
“네, 선배님.”
다시 진료실 안으로 사라진 미화를 보며 하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주 한바탕했으니 내가 곱게 보일 리가 없겠지.
“에휴.”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눈 것조차 오늘은 보기가 싫은 모양이다. 내가 참고 말지, 뭐.
고개를 돌리니 실습생들이 미화의 등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채 모여 있었다. 찬바람 쌩쌩 부는 미화의 목소리에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더운 날씨에 얼음 땡 놀이해요? 다음 환자 진료 준비해 주세요.”
짧지만 강했던 오전 시간이 흐르고 오후 2시가 되어갈 무렵 전화가 왔다.
“세림대학병원 치과, 치위생사 김하은입니다.”
—안녕하세요. 재활의학과 김주성입니다. 혹시 오후에 진료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선생님께서 직접 받으실 건가요?”
—아닙니다. 저희 선생님이 받으실 건데, 혹시 가능할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정말 급합니다.
스케줄을 보니 오늘은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았다. 오전 늦게 접수한 환자들과 초진 환자들이 많아서 정확한 시간을 말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간에 자리가 비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몇 번으로 연락하면 되나요?”
—0257번입니다. 연락 꼭 주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하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아프기에 그러지? 전호진 과장님은 치료가 다 끝났는데……. 과장님 진료 시간 묻지 않는 걸 보니 레지던트 중 한 명이겠네.”
오후에 있는 임플란트 수술 준비로 미화는 과장님 진료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외래만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3시 수술 예약한 환자가 오지 않아 조금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예약 환자들 때문에 그 조금의 여유조차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접수 시간인 4시 30분이 되자 하은은 학생들에게 기구 정리를 시켰다. 이리저리 흩어진 스케줄 표를 정리하던 하은은 레지던트 2년 차 김형일 선생의 빡빡한 스케줄에 시선이 갔다. 그런데 없던 이름이 보였다.
재활의학과 최성민.
“어? 이거 뭐야?”
하은은 모니터를 확인했다. 접수 환자 목록에 최성민란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접수도 안 해 놓고 진료받겠다 이거야?”
또 마음대로 환자를 받았다 이 말이지. 바쁜 거 뻔히 알면서 또!
하은은 형일의 스케줄 표를 들고 의국으로 들어갔다. 다른 과와 달리 치과 의국은 외래 진료실과 붙어 있다. 문을 열자 좁은 갈색 가죽 소파에 거구의 남자가 지친 듯 널브러져 있었다. 두 발이 다 올라가지 못하고 한 발은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치과 레지던트 2년 차. 키 183cm, 몸무게 90kg에 육박하는 체구를 가진 형일은 그녀보다 두 살 많지만, 인턴 과정 때부터 같이 일을 했기 때문에 돈독한 우정이란 게 존재했다.
하은은 마스크를 턱 아래로 끌어내리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형일 쌤, 이거 뭐예요?”
스케줄 표를 세워 보여 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형일이 하품을 하며 거구의 몸을 일으켰다.
“아, 맞다. 내가 아까 넣었는데.”
하은은 입술을 삐죽였다.
“아침 콘퍼런스 시간에도 아파서 고생했다고. 재활의학과 인턴 선생이 전화했었어. 의국으로. 꼭 봐 달라고.”
“흐음. 그래서 봐 준다고 했고요?”
상대방이 앓는 소리를 하면 영락없이 예스맨이 되는 이 사람을 어찌하면 좋을까.
“내가 봐 준다 했는데, 밖에 자리 없죠?”
“차트도 안 떴어요. 돌아가는 사정 뻔히 알면서 이 시간에 끼워 넣으면 어떻게 해요? 어시스트 못 할지도 몰라요. 손이 모자란 거 알면서 그러세요.”
간단한 어시스트면 학생을 세워 두면 된다. 사진도 찍으라고 하면 된다. 그러라고 실습 나온 거니까. 그러나 한 번 진료를 보기 시작하면 하나둘 늘어가 점점 바빠질 게 뻔했다.
“후우.”
한숨 쉬는 하은을 형일의 눈이 세심하게 살폈다. 마스크 벗은 얼굴을 아침에 보고 이제야 또 보게 되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치과 인턴으로 왔을 때 한눈에 반해 버린 형일은 하은을 눈여겨보았다. 빈틈이 보이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게 벌써 3년째였다.
“하은 쌤이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어휴, 난 몰라요.”
“오후에 2과장님 진료 없는 거 알아. 좀 도와줘.”
“서원일 과장님 진료 없다고 내가 마냥 놀아요? 외래 환자부터 봐야 하는데, 인턴 쌤 둘 다 과장님 방에 들어가서 안 나오고 있다고요. 지금 초진 환자 밖에 있는데 쌤이 환자 보시든지. 그러면 생각해 볼게요.”
“오케이. 그 말 지키기.”
어시스트 해 준다는 말에 형일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운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귀에 걸면서 의국 밖으로 나갔다. 뒤따라 나가며 하은은 피식 웃었다. 내가 도와준다고 했지 어시스트 해 준다고는 안 했는데.
초진 환자 진료를 끝내고 시간을 확인한 하은이 더 늦지 않게 올라오라고 해야겠단 생각에 수화기를 드는 순간, 유리문을 밀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최성민 선생님 방금 접수했습니다.”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에 하은은 잠시 멈칫했다. 마치 자주 보는 사람처럼 친근한 말투에 그녀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능글맞은 목소리에 걸맞게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아까 전화했던 사람 같았다. 아파 죽겠다는 당사자는 어디에 있는 거지?
“대부분 직접 전화 주시고 접수도 하시던데. 급하게 진료 잡을 만큼 많이 안 아프신 모양인가 봐요?”
“아닙니다. 환자 본다고 정신이 없으셨는데, 진료 끝나고 나면 그제야 아프다고 하실 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십시오.”
윗사람에 대해 꽤 신경을 쓰는 걸 보니 스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최진국 과장님 같은 스타일인가? 아, 재수 없어.
“여기 오실 만한 과장님이 안 계시는데.”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해도 치과에 오면 달라진다. 체어에 눕는 순간 그들이 긴장한다는 것을 하은은 알고 있다. 어디 누가 오나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스케줄 표를 한 번 보고 빠르게 기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5시 40분쯤 되자 외래 환자가 정리되었다. 1과장님 진료실에서는 아무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임플란트 수술이 길어지고 있었다.
“오늘 늦게 끝날 모양인가 봐요.”
성희가 과장님 진료실을 기웃거리자 하은이 들어가 보라고 했다.
“밖은 내가 정리할 테니까 수정 쌤이랑 성희 쌤이 들어가 봐요.”
예정 시간보다 30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기구 정리를 다 끝낸 학생들이 진료실 한쪽에 멀뚱히 서 있는 게 보였다.
“오늘은 그만 가 봐요. 수고했어요.”
“네?”
“더 걸리니까 기다릴 필요 없어요.”
학생들이 있어 봐야 더 할 게 없다. 차라리 시야에 없는 게 더 편했다. 하은은 학생들의 실습 기간이 되면 신경이 더 예민해진다. 조심한다고 하지만 돌발 상황과 실수는 늘 일어났다.
“고생하셨습니다.”
합창하듯 인사하고 학생들이 사라졌다.
형일이 본 마지막 환자가 체어에서 내려오자 하은이 예약 날짜를 잡아 주었다.
그 순간 진료실 문을 밀면서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한 손으로 왼쪽 턱을 감싸고 들어오는 것을 보니 스케줄 표에 끼어든 그 의사가 분명했다. 하은은 마스크 아래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최성민 선생님이신가요?”
“네.”
남자의 억눌린 목소리를 들어 보니 어지간히 아픈 모양이었다.
“이쪽에 누우세요.”
진료 체어에 남자가 눕자 하은은 에이프런을 해 주고 진단 기구를 담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성민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하은이 의국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깝돌이 주성이 한 말이 떠올랐다.
“선배님. 치과에 목소리 끝내주는 치위생사 있던데요?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라는 표현을 이런 경우에 쓰나 봐요. 진짜 옥구슬이 굴러가요, 굴러가. 얼굴도 예쁘려나?”
접수해야겠다는 그의 말에 이미 접수하고 치과에 갔다 왔다는 주성이 내뱉은 말은 더 가관이었다.
“이야, 선배님. 진짜 예뻐요! 키는 좀 작은 거 같은데 그건 문제가 안 되고요. 눈이 정말 예뻐요. 동그랗고 말간 눈이 절 쳐다보는데 순간 이거 뭐지? 했어요. 나도 치과에 한번 가 봐야 할까 봐요. 검사하면 견적 꽤 나올 텐데.”
호들갑스러운 주성의 말을 100% 믿는 사람은 재활의학과에 아무도 없다. 주성이 한 말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성민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옥구슬보다는 조금 차분한 목소리랄까. 차분하면서도 깨끗한 목소리가 귀에 착 감겨 왔다. 머리가 맑아지는 목소리였다. 주성의 말대로 목소리가 예뻤으며 눈은 정말 크고 맑았다. 강아지 눈처럼 동글동글했다. 게다가 긴 속눈썹이 맑은 눈을 더 예쁘게 만들었다. 김주성, 이번엔 과장이 아니었군.
뒷모습을 보니 키는 한 162cm 정도? 어시스트를 하게 된다면 좀 더 자세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민은 자신이 아주 오랜만에 여자를 찬찬히 훑어본다는 것을 미처 느끼지 못했다.
시간만 나면 의국 소파에 길게 늘어지는 형일을 하은이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레지던트 3년 차 서영주 선생은 발표 준비 때문에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태세였고, 레지던트 1년 차 한준우 선생은 이면지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한 선생님 뭐해요?”
“아! 조금 있으면 과장님 수술 끝날 거 같아서요. 사다리 타기나 할까 하고요.”
통통한 체격에 걸맞게 군것질을 좋아하는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사다리 타기를 했다.
“하은 쌤도 오늘 동참?”
“아뇨. 또 나한테 제일 큰 거 걸리게 하려고 하죠? 한 선생님은 만날 꽝 아니면 2천 원짜리 걸리는 게 수상해요!”
“정말 아닌데. 하은 쌤이 또 큰 거 걸리면 다시 해요, 그럼.”
“됐어요, 형일 쌤. 최성민 선생님 왔어요.”
성민의 이름을 듣자 형일이 기지개를 켜며 거구의 몸을 일으켰다.
“아흠. 일단 사진부터 먼저 찍죠. 곧 나갈게요.”
“네.”
성민은 체어에 얌전히 누워 있지 않았다. 20년 만에 오게 된 치과라 그런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미러를 들고 그 작은 거울에 얼굴을 비쳐 보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분명 이것을 입안에 넣고 좌우로 점막 안에 갖다 대겠지.
오른쪽을 보니 윙윙 소리가 나는 그 기계가 보였다. 작은 금속 머리끝에 뾰족한 침 같은 것을 보자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작은 핸드피스가 입안으로 들어와 아픈 곳을 후벼 파겠지. 상상만으로도 머리끝이 쭈빗 섰다. 귓가에 크게 울리는 기계 소리와 입안 가득 고이는 물을 떠올리자 손끝이 간질거렸다.
다시 하은이 진료실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오며 체어에 누워 있는 성민에게 말했다.
“일단 사진부터 찍을게요.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성민은 체어에서 내려와 그녀를 따라갔다. 한쪽에 마련된 작은 공간으로 들어간 그녀가 둥근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이쪽을 보고 앉으시고요. 어느 쪽이 아프시죠?”
“여기 왼쪽 어금니요. 너무 아파서 새벽에 깼어요.”
“아, 해 보세요.”
그녀가 작은 필름을 집게에 꽂더니 왼쪽 어금니 안쪽에 밀어 넣었다.
“조금 아플 거예요. 금방 찍으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성민은 마스크를 한 그녀의 얼굴에 집중했다. 눈만 보였다. 그의 입술, 아니 정확히 입안을 살피는 눈길이 좋으면서도 부끄러웠다. 하필 이런 모습이라니.
“살짝 물어보세요. 그렇죠. 그 상태로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지 마세요.”
아이에게 설명하듯 친절한 설명과 함께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곧 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주시고, 자리에 가서 누우세요.”
입안에 있던 것을 빼자 침이 묻어 나왔다. 이상한 필름을 입에 넣을 때부터 생기기 시작한 침이 제법 고이자 그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침이 묻은 작고 네모난 필름이 그녀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 젠장. 이게 뭐야. 창피하게. 성민은 얼른 자리로 돌아가 입을 헹궜다. 컵을 올려놓자 위에서 또르르 물이 내려와 컵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외래 진료가 끝난 시간이라 그런지 진료실이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창피함이 얼굴로 번졌다. 여러 번 입을 헹구며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라앉혔다.
하은은 필름을 현상하고 에어를 불어 말리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찍힌 대구치가 보였다. 세 개의 뿌리 중 두 개의 커다란 뿌리 아래로 시커먼 고름 주머니가 보였다.
“흠, 많이 아팠겠네.”
하은은 체어에 있는 작은 필름 박스에 사진을 붙이고 스위치를 켰다. 고름 주머니를 단 튼튼하게 생긴 대구치가 하얗게 나타났다. 성민의 관심 있는 태도에 하은은 시커멓게 변한 부분을 가리켰다.
“많이 아프셨겠어요.”
“신경 치료를 해야겠죠?”
“치료 단계는 김형일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실 거예요.”
형일이 의국에서 나오더니 마스크 통에서 새 마스크를 하나 집어 들었다. 사진을 보곤 어떻게 참고 있었냐며 물었다.
“처음에 아프다 말다 그러더니 오늘 새벽에 정말 아파서 죽는지 알았어요. 콘퍼런스 시간에 너무 아파하니까 전호진 과장님이 치과 빨리 가라고 하셔서 그나마 눈치 덜 보고 왔죠.”
“전 과장님이 치료를 거의 4개월 정도 하셨나? 대 공사를 하셨죠.”
형일이 웃으면서 미러를 손에 들자 아, 하고 입을 벌리던 성민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많이 아프겠죠?”
말을 해 놓고 민망한지 입을 다물며 웃는 그의 모습에 하은은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내가 언제부터 남자의 눈웃음에 홀랑 빠졌다고? 웃을 때 휘어지는 눈에 시선이 꽂혔다. 예쁘게 만들어지는 반달 모양이 성인 남자와 어울리지 않게 순진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