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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에 당신을 만나 1화

Prologue: 내생에 당신을 만나





“아닙니다.”

은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지나가는 낯선 이가 쳐다보는 눈빛에 더 빠르게 도리질을 했다. 이게 다 은형의 허리를 부여잡고 엉엉 울고 있는 초등학생 때문이었다.

“제가 울린 거 아니에요.”

여전히 이상한 표정으로 스쳐 가는 사람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처음 보는 애예요.”

그때 동그란 두상이 은형의 가슴을 비벼 댔다. 가는 연갈색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흐트러지는 게 보였다. 아이는 이제 소리까지 내 가며 울었다.

“왜 울어? 너 누구야?”

은형은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는 어린애에게 차마 더 이상 묻지 못하고 한숨을 쉰 뒤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이는 그 손길에 더 서럽게 눈물을 쏟아 냈다. 그러곤 은형을 끌어안은 채 울다 정신을 잃었다.

스르륵 풀리는 팔에 안도하던 은형은 소년이 그대로 쓰러져 버리자 놀라 부축하며 소리쳤다.

“어, 어? 야, 꼬맹아!”

둘은 그렇게 만났다.







1. 열아홉, 열하나 (1)





은형은 침대에 뻗어 버렸다. 왠지 피곤한 하루였다.

아침부터 자신이 죽는 악몽으로 시작한 데다가 학원에 가서 치른 모의고사는 모르는 문제가 너무 많았고, 더워서 산 아이스크림은 한 입 먹기도 전에 누군가와 부딪혀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제일 은형을 피곤하게 만들었던 것은, 조금 전 길에서 갑자기 달려든 초등학생이 저를 끌어안고 놔주지 않은 채 엉엉 울어 재끼다 쓰러져 버린 것이었다. 정말로 어째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처음에는 119를 부를까 하다가 급한 대로 눈앞의 파출소에 소년을 업고 갔다. 그 후에는 순경에게 꼬마를 맡긴 뒤 이제 그만 자신은 돌아가도 되냐고 물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린 꼬마가 옷자락을 잡고 빨갛게 부운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은형은 결국 그 옆에 앉아 자리를 지키고 말았다.

나란히 가만히만 앉아 있는 게 어색해 은형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너 이름 뭐야?’

‘…….’

‘아깐 왜 울었어?’

그 외에도 몇 마디 말을 건넸지만 소년은 전혀 답하지 않았다. 장소에 위축된 건지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은형도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누가 괴롭혔냐는 질문은 하지 못했다. 순경이 소년을 불러 이런저런 질문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웃긴 일이었다. 은형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던 소년이 순경의 질문엔 잘도 대답했던 것이다.

‘황도제요. 집 전화는 없고요 보호자 핸드폰 번호는 알아요.’

저게 뭐냐. 은형은 제 말을 무시하던 꼬마가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심지어 소년은 똘똘해 보였다.

그 광경에 은형이 입맛만 다시다 의자에 푹 기대앉았다. 다시 돌아온 옆자리 소년은 그 뒤 또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고 열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려다가 그래도 어른이 올 때까진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그는 폰만 들여다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옆에서 꼬마가 자꾸 쳐다보는 게 곁눈으로 보여 그쪽으로 시선을 주면 홱 하고 티 나게 고개를 돌려 버린다.

‘얜 뭐지.’

황당해진 은형은 이제 꼬마가 힐끗대든 말든 핸드폰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꼬마의 할머니가 연락을 받고 뛰어 들어오셨다. 그녀는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이었다.

파출소 안에서 순경들이 눈치 싸움을 했다.

영어 잘하는 사람?

‘고마워요.’

다행히도 할머니는 고개를 숙이며 한국말로 인사해 왔다. 은형은 이어서 소년의 할머니가 저에게까지 고개를 숙여 오자 같이 당황해 맞절하듯 허리를 접으며 손사래를 쳤다. 한참 어른에게 이런 식의 인사를 받은 적이 없어 불편하면서 동시에 어쩔 줄 몰랐다. 놀라서 손만 접었다 폈다 하는 은형을 옆에서 소년이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일이 일단락 지어지고 순경들에게 인사를 끝마친 노년의 여성은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은형의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졸졸 그의 뒤를 따라오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은형이 물었다.

‘……왜 따라오세요?’

‘아니. 우리도 이쪽에 살아요.’

‘아.’

같은 아파트.

‘어?’

같은 동.

‘설마…….’

‘어머. 옆집인가 보네.’

소년과 할머니가 커진 눈으로 은형을 봤다. 그러고 보니 은형도 엄마에게 새로운 이웃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저께 옆집에 새로 이웃이 들어왔다고 했다. 은형이 학교에 간 사이에 이사가 끝나 아직 본 적은 없었는데, 알고 보니 이 꼬마네 가족이었던 모양이다.

‘아, 하하하. 그렇구나……. 그럼 안녕히 계세요.’

계속 따라오길래 신종 유괴 수법인가 계속 의심을 늦추지 않던 은형이 사실을 알고 난 뒤 머쓱하게 인사했다. 그런 은형을 보는 소년의 눈은 아까 물기가 그렁그렁하던 것과 달리 똘망똘망하게 변해 있었다.

도제의 시선을 알아챈 은형이 이젠 마지막 인사를 하고 들어가기 위해 살짝 몸을 숙여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얼굴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선명한 눈빛이 미묘하게 흐려졌다.

‘도제라고 했나?’

또 무시하려나? 말을 걸면서도 내심 들었던 걱정과 달리 도제는 잠시 눈알을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은형은 소년에게 ‘이젠 집 위치 까먹지 마’라고 말한 뒤 손인사만 남기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현재, 방으로 들어와 쓰러진 것이다.

“근데 왜 피곤하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온몸의 기운이 쑥 빠져나간 느낌에 은형은 침대 위로 엎어져 생각했다. 왜일까. 평소 체력이 좋은 은형은 산을 달려서 올라간 것처럼 엄청나게 에너지를 소비한 것처럼 지친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 건가.

그러다 문득 아까 도제라는 애가 매달려 울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애는 왜 날 붙들고 그렇게 울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분명 누가 괴롭혔냐고 묻던 순경의 말에 아니라고 답했었다. 그저 길을 잃어 당황해 아무나 붙잡고 울었다고 또박또박 답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단순히 길을 잃어서 무서웠다고 하기에는 할머니 전화번호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고, 아파트도 학교도 바로 근처일 테니 길이 어렵지도 않았을 터였다. 게다가 키로 가늠해보건대 저학년 같지도 않아 보였다. 즉, 길 잃었다고 그리 서럽게 울 정도로 어려 보이진 않았단 뜻이다.

‘그냥 울본가…….’

그럴 수도 있지, 뭐. 은형은 막연하게 생각하며 양말을 벗어던졌다. 그런데 자꾸만 머릿속에 아이가 우는 장면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생생하지?’

단지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라서 생생한 것치곤 너무 익숙한 느낌이었다. 은형은 아이를 떠올리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더운 여름, 뜨거운 햇볕, 발갛게 두 뺨이 달아오른 체온 높은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내뿜던 열. ……빨갛고 뜨거운 불. 그 불이 화르륵 치솟는, 이미지.

순간 새빨간 불이 훨훨 날아가는 환상에 눈을 번쩍 떴다가 천천히 다시 감았다. 졸려……. 팔다리 근육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며 은형은 점점 밀려오는 수마에 눈을 감았다.

잠시 뒤 깨어났을 땐 두 시간이 지나 오후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언제 돌아왔는지 가족들의 말소리와 티브이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저녁 준비를 하는 냄새까지 난다.

“민은형. 안 나와?”

“아. 어, 나가.”

밥 안 먹냐고 소리치던 엄마가 기어코 방문을 열었다. 주섬주섬 핸드폰을 내려놓고 일어나자 숙제는 다 했냐고 잔소리를 시작해서 한 귀로 흘렸다. 기껏 비싼 학원에 등록시켜 놨더니 예습은 못할망정 게임이나 하고 있다는 뻔한 얘기였다.

사실 핸드폰은 방금 전에 든 거고 사실은 지금까지 자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좀 그래서 은형은 순순히 답했다.

“알았어. 나갈게.”

엄마를 지나쳐 바로 식탁을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부터 은형 본인과 여동생, 막내 남동생까지 금방 가족이 전부 모였다.

엄마가 은형을 보며 물었다.

“길 잃은 옆집 애 데려다줬다며?”

많은 부분을 정정할 필요가 있었지만, 은형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기 귀찮았다.

“이거, 너 잠든 사이에 고맙다고 옆집에서 갖다 준 햄이야. 홈 메이드 훈제 햄이래. 맛있지?”

그제야 제 입에 들어온 음식의 출처를 안 은형이 입에 든 것을 꿀꺽 삼켰다.

“그 집에서 뭐래?”

“응? 뭐가. 그냥 고맙다던데?”

“그래?”

은형은 햄이 꽤 맛있다고 생각하면서 옆집과 생겨 버린 접점을 떠올리다 금세 잊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은형은 학생들에게 방학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신발을 신었다.

모처럼의 여름 방학인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매일 학원에 가야 하는 자신이 조금 불쌍했다. 직장인은 휴일이면 쉬기라도 하지 자신은 쉬는 날이 단 하루도 없다며 투덜거리는 은형의 마음속엔 불만이 쌓이는 중이었다. 그래도 올해만 지나면 이 거지같은 학원을 더 이상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은 갖고 있었다. 대학 가면 학원에 가 봤자 토익 학원 정도이겠거니 생각하며 가방을 다시 고쳐 맸다.

“어?”

문을 열고 현관을 나서는 순간, 옆집 문 앞에 기대 서 있는 어제 만난 꼬마와 마주쳤다. 이름이 뭐더라? 황도 뭐였는데……. 은형은 바로 어제 듣고, 직접 부르기까지 했는데도 까먹은 이름에 황도, 백도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다 그냥 씨익 웃었다. 소년은 말없이 그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