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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의 저택 2화
1. 참가 (2)
자리에 앉으려던 남자는 다시 일어서서 시호에게 손짓을 했다.
“앉으세요.”
“네?”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의문을 표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유를 묻진 못했다. 시호도 웃는 상은 아니었지만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보면 화가 났다 싶을 정도로 강한 인상이었다. 짙은 눈썹도 곧은 콧대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상당한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장점을 가릴 만큼 위압감이 있었다. 거기엔 덩치도 한몫했다. 그래서 시호는 별다른 말없이 다시 자리를 옮겼다.
남자 둘이 앉아도 그다지 좁지 않은 우등 좌석이었으나 옆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시호는 자꾸만 닿는 어깨를 움츠리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기껏 바꿔 준 창가 자리가 무색했다.
그때, 아주 낮고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잠들지 못한 시호의 귓가로 남자의 낮고 강한 어조가 들려왔다. 발음이 뚜렷해 더 귀에 박혔다.
“1월생이 없다고?”
시호는 1월생이었기에 더 집중하게 돼 버렸다.
“큰일인데. 당장 누구라도 알아봐. 이번 주 목요일부터 보름 동안 시간이 남는 1월생.”
이번 주는 지났다고 생각하던 시호는 사람에 따라 일요일부터 주를 세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목요일이면 자신이 백수가 되는 셋째 날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 남자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아직 기말고사 기간인가?”
마지막 말과 동시에 둘의 눈이 마주쳤다. 시호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을 때 남자는 어떤 감이 왔다.
“돈은 상관없으니 일단 알아봐.”
그리고 시호를 빤히 주시하며 전화를 끊었다. 시호는 어딘가에 사로잡힌 듯 새까만 남자의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보았다. 사내 또한 그런 시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한 시간 같은 1분이 흘렀다. 시간은 언제나 상대적이었다. 잠시 다른 이들보다 느려졌던 두 사람의 시간이 다시 각자의 속도로 돌아갔다.
“생일이 어떻게 되십니까?”
시호는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답했다.
“1월 2일이요.”
시호의 눈에 남자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는 침을 삼켰다. 넥타이가 올라붙은 위로 두드러진 목울대가 다시 한번 꿀렁였다. 남자는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앞에 있는 허여멀건 시호를 보았다. 자신의 통화를 듣고도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최소한 관심이 있어서일 것이다.
“신분증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시호는 순순히 주민 등록증을 내밀었다. 분명한 1월생이었다.
“실제로 1월에 태어나셨죠?”
“네.”
이상하게도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되레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옆에 앉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에게서 자신과 같은 냄새를 맡았다. 어쩌면 사내가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한, 마치 죽은 이를 만나러 가는 듯한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호 역시 검은색으로 범벅돼 있었다. 둘은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 새까만 복장이었다. 오직 하나, 남자의 와이셔츠만 하얬다.
“……장례식장 가세요?”
엉뚱한 질문에 남자가 살짝 웃었다. 웃어도 인상은 좋지 않았다. 무서웠다.
“비슷합니다.”
그러더니 주민 등록증을 돌려주면서도 사내의 시선은 여전히 시호에게 가 있었다. 그 역시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평소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만 하는 시호에게 있어선 특이한 일이었다.
“통화하는 것 들으셨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되십니까?”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남자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뭔지 알고 고개를 끄덕이는 겁니까.”
타이르는 말투였다. 시호가 물었다.
“저기요. 얼마 줘요?”
맹랑한 물음이었다. 마지막에 남자가 말한 돈은 상관없단 말을 떠올리며 한 질문에 남자는 즉각 답했다.
“보름에 오백.”
꽤 센 페이였다.
“보름 동안 장기 적출해요?”
자주 오인 받는 터라 남자는 거리낌 없었다.
“죽은 사람 상대해야 합니다. 괜찮겠어요?”
오히려 남자는 그를 놀릴 생각으로 겁을 주었다. 그렇지만 시호는 죽은 것은 무섭지 않았다. 매일 밤, 죽은 부모를 불러도 그들은 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고모할머니를 찾은 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시호에게 오지 않았다. 오히려 산 사람의 망령만이 찾아와 시호를 괴롭혔다.
시호는 흐리게 웃었다.
“산 사람이 더 무서워요.”
남자는 시호를 참가시키기로 결정했다.
이후 터미널에서 잠깐의 인터뷰라며 대화를 나눈 사내는 끝내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대신 3월이라 부르라 했다. 시호는 그런 사내를 보며 ‘3월 아저씨’라 불렀다. 3월은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그냥 ‘3월’이면 족하니 별다른 호칭을 붙이지 말라고 말했다. 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요, 1월.”
시호에겐 ‘1월’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
공장에서 나온 월요일 이른 저녁에 시호는 자신만을 위한 기념을 가졌다. 기념이라고 해 봐야 돈을 모으는 중이라 평소보다 맛있고 비싼 음식을 먹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위안이었다. 그는 악몽을 꾸질 않길 바라며 술을 입에 퍼붓고 잠이 들었다.
화요일엔 약속 장소와 시각이 핸드폰 메시지를 통해 고지됐다. 보아하니 전체 문자인 것 같았다. 시호는 장소를 가늠해 보고 그곳이 꽤 번화가 한복판이란 사실에 안심했다. 홀린 듯 약속했지만 사실 걱정이 됐던 것이다.
수요일은 간소하게 짐을 싸고 쉬었다.
목요일 이른 아침. 시호는 아직 깜깜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가방을 둘러매고 길을 나셨다. 스물다섯 살의 시호는 어린 티가 남을 정도로 마르고 선이 가늘었지만 파릇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지치고 심약한 기운 탓에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흘렀다. 등산을 가는 노년의 부인이 시호를 보곤 잠깐이나마 산에 올라가 자살을 하려는 사람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걱정되는 마음에 유심히 그를 살피던 부인은 시호가 길을 틀어 동네 구멍가게에 들어가 담배를 사서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뒷산을 향했다.
멀지 않은 장소였다. 그렇지만 약속 시각 자체가 8시였다. 시호는 왜 하필이면 사람들 출근 시간과 겹치게 만들어 일을 피곤하게 만드느냐는 짜증을 안은 상태로 약속 시각보다도 한참 일찍 어느 카페의 회의 룸에 들어갔다. 디귿 모양으로 붙인 넓은 책상들과 그 앞의 화이트보드가 보였다. 그리고 한 남자가 먼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3월이었다. 혼자만 시간을 넘은 것처럼 3일 전과 비슷한 복장이었다. 하나 다른 점은 오늘은 검은 양복 안에 흰색 와이셔츠가 아닌 검은색 와이셔츠라는 점이었다. 또 넥타이 없이 위의 단추가 벌어진 채 였는데 그 모습이…….
‘조폭인가.’
설마. 시호는 머리를 털고 다른 화제로 생각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만 가득이었다. 이런저런 수박 겉핥기 같은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죽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란 것밖에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더 묻지 않았고 3월 역시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즉, 나눌 말이 없었다. 침묵이 둘을 감쌌으나 시호는 차라리 이게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15분이 지나자 줄줄이 사람들이 들어왔다. 각자 개성을 가진 이들은 젊게는 20대 초반부터 많게는 60대 정도로 보이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전부 다 남자였다. 시호는 어색하게 목례를 했다. 떠들썩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들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 같았다.
“오늘 간단히 역할을 설명하기에 앞서 바뀐 1월의 인사가 있겠습니다.”
조금 긴장한 시호가 일어나자 3월이 작게 얘기했다.
“소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름도 밝히지 마세요.”
그래서 시호의 인사는 자신의 소개 한마디 없이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정말 인사만 하고 자리에 앉자 사람들의 시선이 저를 향해 모아졌다가 다시 3월에게로 옮겨 가는 것이 느껴졌다. 시호는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날 사전 미팅 이후로 처음 뵙습니다. 3월입니다. ‘그곳’에 가서는 ‘심부름꾼’이 될 예정이니 ‘가족’분들은 제게 마음껏 심부름을 시키셔도 됩니다.”
몇 몇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호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3월은 그런 그를 힐끗 보며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오늘 점심 식사를 가진 이후부터 연극은 시작됩니다. 본인의 생일이 속한 달이니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서로의 실명이나 정보를 묻지 마시고 오로지 맡은 역할만 수행해 주시면 됩니다.”
남자는 검은색 매직을 들어 설명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저는 이 ‘귀신 연극’의 주최자에게서 간단한 설명을 들었을 뿐, 여러분들과 같은 참여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시작하겠습니다. 연극 내부에서 밸런스를 조절하기 위해 투입됐으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3월, 심부름꾼입니다.”
화이트보드엔 3월이란 글씨가 써졌다. 곧이어 옆에 심부름꾼이라는 글자가 첨가됐다. 월은 한문으로 써 있었다. 그 뒤로 3월은 12월부터 1월까지 차례대로 적어 내려갔다.
“12월은 가족인 아들, 11월은 운전기사, 10월은 가족인 아내, 9월은 총괄 지배인, 8월은 청소장, 7월은 조달 관리인, 6월은 주방장, 5월은 정원사, 4월은 12월의 유모 출신이자 10월의 오랜 친우이며 3월의 어머니이도 합니다.”
4월역할을 맡은 중년의 남자가 끌끌 웃었다.
“참, 나 여자였지? 이따가 면도라도 해야겠네.”
3월은 그런 4월을 한 번 보곤 말을 계속했다.
“4월은 안에서 딱히 뭘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3월은 저, 극중 가장 어린 17살입니다.”
20대 초반의 남자에게서 약간의 야유가 쏟아졌다.
“그럼 3월보다 연상이자 운전기사인 저를 뭐라고 부르실 거예요?”
“그래도 그냥 11월입니다. 호칭은 월로만 부르는 것으로 통일합니다.”
“와, 진짜 웃긴다.”
시호와 20대 초반 남자, 11월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호감상의 미남은 시호에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1. 참가 (2)
자리에 앉으려던 남자는 다시 일어서서 시호에게 손짓을 했다.
“앉으세요.”
“네?”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의문을 표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유를 묻진 못했다. 시호도 웃는 상은 아니었지만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보면 화가 났다 싶을 정도로 강한 인상이었다. 짙은 눈썹도 곧은 콧대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상당한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장점을 가릴 만큼 위압감이 있었다. 거기엔 덩치도 한몫했다. 그래서 시호는 별다른 말없이 다시 자리를 옮겼다.
남자 둘이 앉아도 그다지 좁지 않은 우등 좌석이었으나 옆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시호는 자꾸만 닿는 어깨를 움츠리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기껏 바꿔 준 창가 자리가 무색했다.
그때, 아주 낮고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잠들지 못한 시호의 귓가로 남자의 낮고 강한 어조가 들려왔다. 발음이 뚜렷해 더 귀에 박혔다.
“1월생이 없다고?”
시호는 1월생이었기에 더 집중하게 돼 버렸다.
“큰일인데. 당장 누구라도 알아봐. 이번 주 목요일부터 보름 동안 시간이 남는 1월생.”
이번 주는 지났다고 생각하던 시호는 사람에 따라 일요일부터 주를 세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목요일이면 자신이 백수가 되는 셋째 날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 남자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아직 기말고사 기간인가?”
마지막 말과 동시에 둘의 눈이 마주쳤다. 시호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을 때 남자는 어떤 감이 왔다.
“돈은 상관없으니 일단 알아봐.”
그리고 시호를 빤히 주시하며 전화를 끊었다. 시호는 어딘가에 사로잡힌 듯 새까만 남자의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보았다. 사내 또한 그런 시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한 시간 같은 1분이 흘렀다. 시간은 언제나 상대적이었다. 잠시 다른 이들보다 느려졌던 두 사람의 시간이 다시 각자의 속도로 돌아갔다.
“생일이 어떻게 되십니까?”
시호는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답했다.
“1월 2일이요.”
시호의 눈에 남자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는 침을 삼켰다. 넥타이가 올라붙은 위로 두드러진 목울대가 다시 한번 꿀렁였다. 남자는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앞에 있는 허여멀건 시호를 보았다. 자신의 통화를 듣고도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최소한 관심이 있어서일 것이다.
“신분증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시호는 순순히 주민 등록증을 내밀었다. 분명한 1월생이었다.
“실제로 1월에 태어나셨죠?”
“네.”
이상하게도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되레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옆에 앉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에게서 자신과 같은 냄새를 맡았다. 어쩌면 사내가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한, 마치 죽은 이를 만나러 가는 듯한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호 역시 검은색으로 범벅돼 있었다. 둘은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 새까만 복장이었다. 오직 하나, 남자의 와이셔츠만 하얬다.
“……장례식장 가세요?”
엉뚱한 질문에 남자가 살짝 웃었다. 웃어도 인상은 좋지 않았다. 무서웠다.
“비슷합니다.”
그러더니 주민 등록증을 돌려주면서도 사내의 시선은 여전히 시호에게 가 있었다. 그 역시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평소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만 하는 시호에게 있어선 특이한 일이었다.
“통화하는 것 들으셨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되십니까?”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남자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뭔지 알고 고개를 끄덕이는 겁니까.”
타이르는 말투였다. 시호가 물었다.
“저기요. 얼마 줘요?”
맹랑한 물음이었다. 마지막에 남자가 말한 돈은 상관없단 말을 떠올리며 한 질문에 남자는 즉각 답했다.
“보름에 오백.”
꽤 센 페이였다.
“보름 동안 장기 적출해요?”
자주 오인 받는 터라 남자는 거리낌 없었다.
“죽은 사람 상대해야 합니다. 괜찮겠어요?”
오히려 남자는 그를 놀릴 생각으로 겁을 주었다. 그렇지만 시호는 죽은 것은 무섭지 않았다. 매일 밤, 죽은 부모를 불러도 그들은 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고모할머니를 찾은 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시호에게 오지 않았다. 오히려 산 사람의 망령만이 찾아와 시호를 괴롭혔다.
시호는 흐리게 웃었다.
“산 사람이 더 무서워요.”
남자는 시호를 참가시키기로 결정했다.
이후 터미널에서 잠깐의 인터뷰라며 대화를 나눈 사내는 끝내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대신 3월이라 부르라 했다. 시호는 그런 사내를 보며 ‘3월 아저씨’라 불렀다. 3월은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그냥 ‘3월’이면 족하니 별다른 호칭을 붙이지 말라고 말했다. 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요, 1월.”
시호에겐 ‘1월’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
공장에서 나온 월요일 이른 저녁에 시호는 자신만을 위한 기념을 가졌다. 기념이라고 해 봐야 돈을 모으는 중이라 평소보다 맛있고 비싼 음식을 먹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위안이었다. 그는 악몽을 꾸질 않길 바라며 술을 입에 퍼붓고 잠이 들었다.
화요일엔 약속 장소와 시각이 핸드폰 메시지를 통해 고지됐다. 보아하니 전체 문자인 것 같았다. 시호는 장소를 가늠해 보고 그곳이 꽤 번화가 한복판이란 사실에 안심했다. 홀린 듯 약속했지만 사실 걱정이 됐던 것이다.
수요일은 간소하게 짐을 싸고 쉬었다.
목요일 이른 아침. 시호는 아직 깜깜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가방을 둘러매고 길을 나셨다. 스물다섯 살의 시호는 어린 티가 남을 정도로 마르고 선이 가늘었지만 파릇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지치고 심약한 기운 탓에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흘렀다. 등산을 가는 노년의 부인이 시호를 보곤 잠깐이나마 산에 올라가 자살을 하려는 사람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걱정되는 마음에 유심히 그를 살피던 부인은 시호가 길을 틀어 동네 구멍가게에 들어가 담배를 사서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뒷산을 향했다.
멀지 않은 장소였다. 그렇지만 약속 시각 자체가 8시였다. 시호는 왜 하필이면 사람들 출근 시간과 겹치게 만들어 일을 피곤하게 만드느냐는 짜증을 안은 상태로 약속 시각보다도 한참 일찍 어느 카페의 회의 룸에 들어갔다. 디귿 모양으로 붙인 넓은 책상들과 그 앞의 화이트보드가 보였다. 그리고 한 남자가 먼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3월이었다. 혼자만 시간을 넘은 것처럼 3일 전과 비슷한 복장이었다. 하나 다른 점은 오늘은 검은 양복 안에 흰색 와이셔츠가 아닌 검은색 와이셔츠라는 점이었다. 또 넥타이 없이 위의 단추가 벌어진 채 였는데 그 모습이…….
‘조폭인가.’
설마. 시호는 머리를 털고 다른 화제로 생각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만 가득이었다. 이런저런 수박 겉핥기 같은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죽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란 것밖에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더 묻지 않았고 3월 역시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즉, 나눌 말이 없었다. 침묵이 둘을 감쌌으나 시호는 차라리 이게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15분이 지나자 줄줄이 사람들이 들어왔다. 각자 개성을 가진 이들은 젊게는 20대 초반부터 많게는 60대 정도로 보이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전부 다 남자였다. 시호는 어색하게 목례를 했다. 떠들썩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들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 같았다.
“오늘 간단히 역할을 설명하기에 앞서 바뀐 1월의 인사가 있겠습니다.”
조금 긴장한 시호가 일어나자 3월이 작게 얘기했다.
“소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름도 밝히지 마세요.”
그래서 시호의 인사는 자신의 소개 한마디 없이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정말 인사만 하고 자리에 앉자 사람들의 시선이 저를 향해 모아졌다가 다시 3월에게로 옮겨 가는 것이 느껴졌다. 시호는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날 사전 미팅 이후로 처음 뵙습니다. 3월입니다. ‘그곳’에 가서는 ‘심부름꾼’이 될 예정이니 ‘가족’분들은 제게 마음껏 심부름을 시키셔도 됩니다.”
몇 몇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호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3월은 그런 그를 힐끗 보며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오늘 점심 식사를 가진 이후부터 연극은 시작됩니다. 본인의 생일이 속한 달이니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서로의 실명이나 정보를 묻지 마시고 오로지 맡은 역할만 수행해 주시면 됩니다.”
남자는 검은색 매직을 들어 설명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저는 이 ‘귀신 연극’의 주최자에게서 간단한 설명을 들었을 뿐, 여러분들과 같은 참여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시작하겠습니다. 연극 내부에서 밸런스를 조절하기 위해 투입됐으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3월, 심부름꾼입니다.”
화이트보드엔 3월이란 글씨가 써졌다. 곧이어 옆에 심부름꾼이라는 글자가 첨가됐다. 월은 한문으로 써 있었다. 그 뒤로 3월은 12월부터 1월까지 차례대로 적어 내려갔다.
“12월은 가족인 아들, 11월은 운전기사, 10월은 가족인 아내, 9월은 총괄 지배인, 8월은 청소장, 7월은 조달 관리인, 6월은 주방장, 5월은 정원사, 4월은 12월의 유모 출신이자 10월의 오랜 친우이며 3월의 어머니이도 합니다.”
4월역할을 맡은 중년의 남자가 끌끌 웃었다.
“참, 나 여자였지? 이따가 면도라도 해야겠네.”
3월은 그런 4월을 한 번 보곤 말을 계속했다.
“4월은 안에서 딱히 뭘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3월은 저, 극중 가장 어린 17살입니다.”
20대 초반의 남자에게서 약간의 야유가 쏟아졌다.
“그럼 3월보다 연상이자 운전기사인 저를 뭐라고 부르실 거예요?”
“그래도 그냥 11월입니다. 호칭은 월로만 부르는 것으로 통일합니다.”
“와, 진짜 웃긴다.”
시호와 20대 초반 남자, 11월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호감상의 미남은 시호에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