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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조금 뒤, 마을 사람들에게서 한 명씩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다들 크고 작은 돈을 이장에게 빌려주었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결국 돌려받을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탄식 끝에 도미에 대한 걱정을 잊지 않았다.
“사실이 아닐 거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무릎이 꺾이는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분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이장님이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 분했고, 사람을 쉽게 믿어 그 큰돈을 선뜻 내어 준 자기도 분했다.
‘아, 어쩌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물기 어린 깊은 한숨만이 계속 목울대로 차고 올라왔다.
눈물이 터졌지만, 지금 같을 때 운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빗줄기와 함께 흘러내린 뜨거운 눈물을 닦았다. 날씨만 괜찮아지면, 당장 경찰서로 가서 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니, 웬 남자 두 명이 도미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아.”
아까 본 두 남자였다. 둘 다 흠뻑 젖은 상태였다.
태우가 도미를 보고 반가운 기색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하룻밤만 재워 주실 수 있을까요?”
도미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네? 민박 안 하는데요?”
“죄송합니다. 오늘 헬기를 타고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섬에는 이 집밖에 없더군요.”
하긴 용호리조트를 짓는다고 모두 다 이주하고, 집을 다 헐어 버려서 멀쩡한 집이라고는 여기밖에 없긴 했다.
그래도 지금은 누구를 집으로 들일 정신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과 전화로나마 대책 회의를 해야 했고, 앞으로 살아갈 궁리도 해야 했다.
도미는 잠긴 목으로 말했다.
“오늘은 곤란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집도 없는 곳에 두 남자를 그대로 두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서준이 입을 열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싸가지의 말에 그녀는 오기가 바짝 생겼다.
‘그래. 얼마든지 준다고? 지금은 푼돈이라도 다시 모아서 변호사 비용이라도 대야지. 어떻게든 내 돈 돌려받을 방법을 찾으려면 돈을 벌어야지.’
도미는 코를 한 번 세게 훌쩍이고는 열쇠로 대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발랄 해녀 민박입니다.”
도미는 두 남자와 함께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두 남자는 비를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에서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불쌍해졌다.
속으로 ‘아이고, 도미야. 누가 누굴 불쌍해하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혀를 찼다.
“일단 들어와요.”
부엌으로 두 사람을 들였다. 서준은 비에 젖어서도 여전히 사람을 압도하는 외모였다.
태우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어릴 적 교회 다닐 때, 목사님이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 하느님이 천사들을 손님으로 가장해서 보낸 적 있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 얘기가 생각났다.
‘이 사람들 혹시 천사 아니야?’
하지만 서준의 얼굴을 다시 본 순간, 그 생각은 싹 사라졌다. 서준은 거만한 표정으로 못마땅하다는 듯 부엌을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사는 무슨. 타락 천사네. 저 표정 봐. 완전 싸가지 없는 표정이네.’
서준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하루만 신세 지겠습니다. 얼마면 될까요?”
도미는 속으로 ‘오호!’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 싸가지. 아까도 얼마면 되겠냐고 했지?’
오기가 생겼다. ‘그래, 돈이 얼마나 많길래 돈돈거리는지 보겠어.’ 하는 마음이 생겼다.
예전 마을 사람들은 배낚시 하러 온 사람들에게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를 받았다. 아마 이런 날 다른 손님이었다면 3만 원 정도 받았을 터였다.
도미는 팔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호기롭게 말했다.
“20만 원이요.”
“네?”
서준의 눈이 커졌다.
“여기가요?”
도미가 자신감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독점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하.”
서준의 잇새 사이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도미는 마치 패스트푸드점에서 “포장이십니까? 드시고 가십니까?”를 묻는 알바생처럼 친절하게 대꾸했다.
“밖에서 폐렴 걸리시겠습니까? 안에서 아늑하게 지내시겠습니까? 어떻게 하실래요?”
그가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기며 지갑을 꺼내 5만 원권 4장을 꺼냈다.
“알았어요.”
도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고객님, 인당 20만 원입니다.”
“와.”
서준의 얼굴에 경악이 흘렀다. 도미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분 것까지 같이 계산하실 건가요?”
“강도네, 강도.”
그러면서 지갑에서 20만 원을 다시 꺼내 주었다. 그녀가 냉큼 그 돈을 받아 챙겼다.
“어머, 고객님.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강도라니요? 목숨 구해 준 생명의 은인한테.”
“말이 그렇게 되나?”
“얼마면 되냐면서요. 아까 10억 주신다면서요, 목숨값으로. 이 돈이 아까우세요?”
“아니야. 됐어.”
도미는 그들을 거실로 안내했다. 거실은 부엌으로 들어와서 부엌에 놓인 댓돌을 밟고 들어갈 수 있었다.
집안은 불을 때서인지 훈훈했다. 서준의 몸에 올라왔던 한기가 바로 잦아들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거실 한쪽 벽 책장에 어울리지 않는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돈이 넝쿨째 굴러오는 브랜딩』, 『돈을 부르는 영업력』, 『마케팅의 비밀』처럼 해녀인 여자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책들이었다.
집안에 들어서면서부터 마른 약초 냄새 같은 은은한 향이 났는데, 어쩐지 서준에게 익숙했다. 기억 속 어딘가에 각인된 향이었다.
도미가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일단 씻으세요. 좀 있다 식사 같이해요. 원래 식사비는 별도로 받지만 원 플러스 원으로 무료로 해 드릴게요.”
서준이 서늘하게 말했다.
“난 밥 안 먹어.”
서준의 말에 도미가 놀라 물었다.
“왜요? 다이어트해요? 아저씨 똥배가 나보다 없어 보이는데요?”
남다른 식욕과 소화력을 가진 도미였기에, 밥을 안 먹는다는 건 도미 입장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우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희 사장님은 아무 음식이나 드시지 못합니다.”
서준은 사실 아홉 살 ‘그 사건’ 이후 음식 거부증이 있었다. 도미가 그런 그의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이제 보니 딱 귀족병에 걸린 남자였다. 도미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아무 음식이요? 아! 아저씨처럼 고상한 사람들은 이런 아무 음식을 못 드신다는 건가요?”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아니라고 말 못 하겠네.”
이미 모래사장에서도 그의 중증 싸가지 향기를 바가지로 느꼈지만 설마 했다. 저 남자는 이런 곳에서는 밥도 안 먹는 귀족병에 걸린 것 같았다.
도미가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일단 씻으세요. 정말 별꼴이야.”
서준이 일어나 욕실 문을 열었다. 세면대 없이 샤워기 하나와 고무 통에 바가지 하나가 전부인 욕실을 보고 툴툴댔다.
“여기서 씻으란 건가? 어쩐지 불결하군.”
서준의 말을 들은 도미는 기가 막혔다. 그녀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씩씩대며 말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면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더니 딱 그 꼴이네요!”
아까 이 남자를 구해 놓고 잠시나마 남자의 외모에 홀려 침을 살짝 흘렸던 것을 후회했다.
‘이런 얼빠! 얼굴 보고 마음 설레고. 결국 옥도미 너도 얼빠였어.’
서준은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계속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수건 더 깨끗한 거는 없나? 이왕이면 이태리제면 더 좋고.”
“새 비누로 씻고 싶군. 남이 쓰던 비누로는 못 씻어.”
“슬리퍼 새거는 없어? 슬리퍼가 더러워서, 원.”
도미는 슬슬 화가 났다.
“걍 씻어요! 여기가 호텔인 줄 아세요? 아님 둘 다 그냥 나가든가. 자, 비누는 여기 새거요.”
도미가 싱크대에서 알뜨랑 비누를 꺼내 던지자 서준이 간신히 받고는 도미를 쳐다봤다.
서준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서슬 퍼런 그녀를 피해 다시 욕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도미는 중얼거렸다.
“아, 진짜 나중에 와이프가 누가 될지 몰라도 진짜 손 많이 가겠네. 아니지, 결혼이나 하겠어?”
도미는 씩씩거리며 부엌으로 갔다. 곧 정성을 다해 요리했다.
“저기요.”
등 뒤로 서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또 왜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묻다가 들고 있던 국자를 떨어뜨렸다.
서준이 작은 수건 한 장으로 아슬아슬하게 하체만 간신히 가린 채, 그녀를 당당하게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월 아래 서준의 쭉 뻗은 탄탄하고 강인한 허벅지와 종아리가 드러났다.
도미는 남자의 벗은 몸을 본 게 처음이었다.
어디다 눈을 두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손으로 가리고 볼 것은 다 봤다.
그의 복근은 아기처럼 뽀얀 얼굴색과 달리 구릿빛이었다.
복근에는 한 조각씩 토독토독 떼어 먹어도 될 초콜릿처럼 각이 져 있었다. 큰 왕 자가 선명하게 배에 새겨져 있어 손빨래를 해도 될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이 불에 덴 듯 빨개졌고, 갑자기 주위가 더워졌다.
이제야 자기 본성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변태구나. 싸가지라고 욕할 때는 언제고, 왜 얼굴이 빨개지지?’
심장이 태풍에 이는 나뭇잎처럼 퍼덕거렸다. 계속 눈치 없이 심장이 나댔다.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았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당장 옷 입어요.”
“알잖아. 나 옷 다 젖은 거.”
“아! 기다려 봐요.”
옷을 안 찾아 줬다가는 저 남자가 그 타월마저 벗어 던지고 돌아다닐 것 같았다.
도미는 얼른 장롱으로 가, 최대한 박시한 티셔츠와 프리 사이즈인 까만색 냉장고 바지를 꺼냈다.
흰 바탕에 촘촘한 가로 줄무늬가 새겨진 바지였다.
“자요. 이거 신상이에요.”
서준은 옷을 건네받아, 그녀의 박스 티셔츠를 입었다.
온몸의 근육이 티셔츠 속에서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성난 근육들이 티셔츠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냉장고 바지는 부드럽게 그의 하체를 감쌌다. 바지 아래로 탄탄한 그의 종아리가 드러났다.
“그쪽 다리가 짧긴 많이 짧네.”
“그쪽은 말이 짧으시네요.”
“이 바지, 촉감 좋네. 실큰가? 원산지가 어디지?”
“실크라뇨! 냉장고 바지 몰라요? 원산지는 메이드 인 차이나.”
어쩐지 자꾸만 도미는 그의 바지에 눈길이 갔다.
‘훠이훠이, 정신 차려! 옥도미.’
그녀가 정신을 부여잡고, 앉은뱅이 상을 펴서 안방으로 향했다.
“할머니 밥 먼저 먹여 드리고 차려 드릴게요.”
도미가 상을 내려놓고 안방 문을 열려고 하자 태우가 얼른 달려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아저씨는 저 아저씨랑 달리 매너가 좋으시네요.”
그녀는 찌릿하게 서준을 한 번 째려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조금 뒤, 마을 사람들에게서 한 명씩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다들 크고 작은 돈을 이장에게 빌려주었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결국 돌려받을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탄식 끝에 도미에 대한 걱정을 잊지 않았다.
“사실이 아닐 거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무릎이 꺾이는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분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이장님이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 분했고, 사람을 쉽게 믿어 그 큰돈을 선뜻 내어 준 자기도 분했다.
‘아, 어쩌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물기 어린 깊은 한숨만이 계속 목울대로 차고 올라왔다.
눈물이 터졌지만, 지금 같을 때 운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빗줄기와 함께 흘러내린 뜨거운 눈물을 닦았다. 날씨만 괜찮아지면, 당장 경찰서로 가서 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니, 웬 남자 두 명이 도미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아.”
아까 본 두 남자였다. 둘 다 흠뻑 젖은 상태였다.
태우가 도미를 보고 반가운 기색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하룻밤만 재워 주실 수 있을까요?”
도미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네? 민박 안 하는데요?”
“죄송합니다. 오늘 헬기를 타고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섬에는 이 집밖에 없더군요.”
하긴 용호리조트를 짓는다고 모두 다 이주하고, 집을 다 헐어 버려서 멀쩡한 집이라고는 여기밖에 없긴 했다.
그래도 지금은 누구를 집으로 들일 정신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과 전화로나마 대책 회의를 해야 했고, 앞으로 살아갈 궁리도 해야 했다.
도미는 잠긴 목으로 말했다.
“오늘은 곤란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집도 없는 곳에 두 남자를 그대로 두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서준이 입을 열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싸가지의 말에 그녀는 오기가 바짝 생겼다.
‘그래. 얼마든지 준다고? 지금은 푼돈이라도 다시 모아서 변호사 비용이라도 대야지. 어떻게든 내 돈 돌려받을 방법을 찾으려면 돈을 벌어야지.’
도미는 코를 한 번 세게 훌쩍이고는 열쇠로 대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발랄 해녀 민박입니다.”
도미는 두 남자와 함께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두 남자는 비를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에서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불쌍해졌다.
속으로 ‘아이고, 도미야. 누가 누굴 불쌍해하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혀를 찼다.
“일단 들어와요.”
부엌으로 두 사람을 들였다. 서준은 비에 젖어서도 여전히 사람을 압도하는 외모였다.
태우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어릴 적 교회 다닐 때, 목사님이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 하느님이 천사들을 손님으로 가장해서 보낸 적 있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 얘기가 생각났다.
‘이 사람들 혹시 천사 아니야?’
하지만 서준의 얼굴을 다시 본 순간, 그 생각은 싹 사라졌다. 서준은 거만한 표정으로 못마땅하다는 듯 부엌을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사는 무슨. 타락 천사네. 저 표정 봐. 완전 싸가지 없는 표정이네.’
서준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하루만 신세 지겠습니다. 얼마면 될까요?”
도미는 속으로 ‘오호!’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 싸가지. 아까도 얼마면 되겠냐고 했지?’
오기가 생겼다. ‘그래, 돈이 얼마나 많길래 돈돈거리는지 보겠어.’ 하는 마음이 생겼다.
예전 마을 사람들은 배낚시 하러 온 사람들에게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를 받았다. 아마 이런 날 다른 손님이었다면 3만 원 정도 받았을 터였다.
도미는 팔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호기롭게 말했다.
“20만 원이요.”
“네?”
서준의 눈이 커졌다.
“여기가요?”
도미가 자신감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독점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하.”
서준의 잇새 사이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도미는 마치 패스트푸드점에서 “포장이십니까? 드시고 가십니까?”를 묻는 알바생처럼 친절하게 대꾸했다.
“밖에서 폐렴 걸리시겠습니까? 안에서 아늑하게 지내시겠습니까? 어떻게 하실래요?”
그가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기며 지갑을 꺼내 5만 원권 4장을 꺼냈다.
“알았어요.”
도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고객님, 인당 20만 원입니다.”
“와.”
서준의 얼굴에 경악이 흘렀다. 도미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분 것까지 같이 계산하실 건가요?”
“강도네, 강도.”
그러면서 지갑에서 20만 원을 다시 꺼내 주었다. 그녀가 냉큼 그 돈을 받아 챙겼다.
“어머, 고객님.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강도라니요? 목숨 구해 준 생명의 은인한테.”
“말이 그렇게 되나?”
“얼마면 되냐면서요. 아까 10억 주신다면서요, 목숨값으로. 이 돈이 아까우세요?”
“아니야. 됐어.”
도미는 그들을 거실로 안내했다. 거실은 부엌으로 들어와서 부엌에 놓인 댓돌을 밟고 들어갈 수 있었다.
집안은 불을 때서인지 훈훈했다. 서준의 몸에 올라왔던 한기가 바로 잦아들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거실 한쪽 벽 책장에 어울리지 않는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돈이 넝쿨째 굴러오는 브랜딩』, 『돈을 부르는 영업력』, 『마케팅의 비밀』처럼 해녀인 여자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책들이었다.
집안에 들어서면서부터 마른 약초 냄새 같은 은은한 향이 났는데, 어쩐지 서준에게 익숙했다. 기억 속 어딘가에 각인된 향이었다.
도미가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일단 씻으세요. 좀 있다 식사 같이해요. 원래 식사비는 별도로 받지만 원 플러스 원으로 무료로 해 드릴게요.”
서준이 서늘하게 말했다.
“난 밥 안 먹어.”
서준의 말에 도미가 놀라 물었다.
“왜요? 다이어트해요? 아저씨 똥배가 나보다 없어 보이는데요?”
남다른 식욕과 소화력을 가진 도미였기에, 밥을 안 먹는다는 건 도미 입장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우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희 사장님은 아무 음식이나 드시지 못합니다.”
서준은 사실 아홉 살 ‘그 사건’ 이후 음식 거부증이 있었다. 도미가 그런 그의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이제 보니 딱 귀족병에 걸린 남자였다. 도미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아무 음식이요? 아! 아저씨처럼 고상한 사람들은 이런 아무 음식을 못 드신다는 건가요?”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아니라고 말 못 하겠네.”
이미 모래사장에서도 그의 중증 싸가지 향기를 바가지로 느꼈지만 설마 했다. 저 남자는 이런 곳에서는 밥도 안 먹는 귀족병에 걸린 것 같았다.
도미가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일단 씻으세요. 정말 별꼴이야.”
서준이 일어나 욕실 문을 열었다. 세면대 없이 샤워기 하나와 고무 통에 바가지 하나가 전부인 욕실을 보고 툴툴댔다.
“여기서 씻으란 건가? 어쩐지 불결하군.”
서준의 말을 들은 도미는 기가 막혔다. 그녀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씩씩대며 말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면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더니 딱 그 꼴이네요!”
아까 이 남자를 구해 놓고 잠시나마 남자의 외모에 홀려 침을 살짝 흘렸던 것을 후회했다.
‘이런 얼빠! 얼굴 보고 마음 설레고. 결국 옥도미 너도 얼빠였어.’
서준은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계속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수건 더 깨끗한 거는 없나? 이왕이면 이태리제면 더 좋고.”
“새 비누로 씻고 싶군. 남이 쓰던 비누로는 못 씻어.”
“슬리퍼 새거는 없어? 슬리퍼가 더러워서, 원.”
도미는 슬슬 화가 났다.
“걍 씻어요! 여기가 호텔인 줄 아세요? 아님 둘 다 그냥 나가든가. 자, 비누는 여기 새거요.”
도미가 싱크대에서 알뜨랑 비누를 꺼내 던지자 서준이 간신히 받고는 도미를 쳐다봤다.
서준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서슬 퍼런 그녀를 피해 다시 욕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도미는 중얼거렸다.
“아, 진짜 나중에 와이프가 누가 될지 몰라도 진짜 손 많이 가겠네. 아니지, 결혼이나 하겠어?”
도미는 씩씩거리며 부엌으로 갔다. 곧 정성을 다해 요리했다.
“저기요.”
등 뒤로 서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또 왜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묻다가 들고 있던 국자를 떨어뜨렸다.
서준이 작은 수건 한 장으로 아슬아슬하게 하체만 간신히 가린 채, 그녀를 당당하게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월 아래 서준의 쭉 뻗은 탄탄하고 강인한 허벅지와 종아리가 드러났다.
도미는 남자의 벗은 몸을 본 게 처음이었다.
어디다 눈을 두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손으로 가리고 볼 것은 다 봤다.
그의 복근은 아기처럼 뽀얀 얼굴색과 달리 구릿빛이었다.
복근에는 한 조각씩 토독토독 떼어 먹어도 될 초콜릿처럼 각이 져 있었다. 큰 왕 자가 선명하게 배에 새겨져 있어 손빨래를 해도 될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이 불에 덴 듯 빨개졌고, 갑자기 주위가 더워졌다.
이제야 자기 본성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변태구나. 싸가지라고 욕할 때는 언제고, 왜 얼굴이 빨개지지?’
심장이 태풍에 이는 나뭇잎처럼 퍼덕거렸다. 계속 눈치 없이 심장이 나댔다.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았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당장 옷 입어요.”
“알잖아. 나 옷 다 젖은 거.”
“아! 기다려 봐요.”
옷을 안 찾아 줬다가는 저 남자가 그 타월마저 벗어 던지고 돌아다닐 것 같았다.
도미는 얼른 장롱으로 가, 최대한 박시한 티셔츠와 프리 사이즈인 까만색 냉장고 바지를 꺼냈다.
흰 바탕에 촘촘한 가로 줄무늬가 새겨진 바지였다.
“자요. 이거 신상이에요.”
서준은 옷을 건네받아, 그녀의 박스 티셔츠를 입었다.
온몸의 근육이 티셔츠 속에서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성난 근육들이 티셔츠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냉장고 바지는 부드럽게 그의 하체를 감쌌다. 바지 아래로 탄탄한 그의 종아리가 드러났다.
“그쪽 다리가 짧긴 많이 짧네.”
“그쪽은 말이 짧으시네요.”
“이 바지, 촉감 좋네. 실큰가? 원산지가 어디지?”
“실크라뇨! 냉장고 바지 몰라요? 원산지는 메이드 인 차이나.”
어쩐지 자꾸만 도미는 그의 바지에 눈길이 갔다.
‘훠이훠이, 정신 차려! 옥도미.’
그녀가 정신을 부여잡고, 앉은뱅이 상을 펴서 안방으로 향했다.
“할머니 밥 먼저 먹여 드리고 차려 드릴게요.”
도미가 상을 내려놓고 안방 문을 열려고 하자 태우가 얼른 달려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아저씨는 저 아저씨랑 달리 매너가 좋으시네요.”
그녀는 찌릿하게 서준을 한 번 째려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