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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할머니, 일어나 봐. 밥 먹고 자야지.”
조심스레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할머니가 흐릿한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도미는 할머니를 일으켜 앉게 했다. 그리고 청국장에 밥을 비벼 한 숟가락씩 먹였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할머니?”
“우리 강아지지.”
할머니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조잘조잘 할머니에게 수다를 떨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그녀 혼자 남겨진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고등학교 때 엄마마저 돌아가시고 난 후, 이 세상에 의지할 데라곤 할머니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입가에 흘러내린 밥알을 닦아 주며 말했다.
“집에 민박 손님 왔어. 한 명은 진짜 싸가지야! 그것도 중증 싸가지.”
그 사람을 보고 잠깐 설렌 건 창피해서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보고 흐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정말 반가웠다.
그녀는 할머니 어깨를 주물러 주고, 얼굴을 닦아 준 뒤 다시 눕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온갖 동네 대소사에 참견하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를 보니,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한테 이장이 벌린 가슴 떨린 일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할머니, 빨리 건강해져야지. 그래야 나랑 마트도 시장도 가서 할머니 좋아하는 꽃무늬 원피스도 사 입고, 냉장고 바지도 사지. 참, 저 남자들이 내가 아끼던 신상 다 입어 버렸어. 얼른 일어나서 혼내 줘.”
예전 할머니 성격이었으면, 뭐라 할 건 뭐라 하면서도 손님들을 더 잘 챙겨 주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점점 흐려지는 정신으로 도미의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의 흐릿한 눈에 조잘대는 고운 도미의 얼굴이 가득 찼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도미의 온기가 자꾸만 굳어 가는 몸에 따스함을 불어넣어 주었다.
모처럼 할머니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세상을 먼저 떠난 그 야속한 아들 며느리가 보육원에서 데리고 온 아이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피붙이처럼 끌리던 아이였다.
비밀 입양이라 그 사실을 도미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자식을 먼저 보낸 할머니의 사무친 마음에 유일한 희망이 되어 주고 있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그게 너무 고마워,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어? 할머니 왜 울어?”
할머니가 우니까 괜히 콧날이 시큰거렸다. 도미는 애써 울음을 참고, 싹싹하게 할머니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고, 머리도 꼼꼼하게 빗겨 준 후, 방을 나왔다.
나와서는 저녁상을 차렸다. 흰밥을 소복하게 두 그릇을 퍼 오며 도미가 서준에게 말했다.
“그쪽은 뭐 아무 음식이나 안 먹으니까 우리만 먹어도 실례가 안 되겠죠?”
태우가 걱정스러움을 담아 서준에게 물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지금 몇 끼째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조금 드시죠.”
서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태우를 노려보았다.
“안 먹어. 지금 내가 이런 불결한 부엌에서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아까부터 나는 이 고약한 냄새는 뭐지?”
서준은 밥 냄새만 맡아도 메쓰꺼워했다. 이미 청국장의 강렬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코를 붙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도미는 그런 서준의 표정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기껏 힘들게 물질하고 와서 밥을 차려 주었더니, 코를 막고 얼굴을 찌푸려?
정말 예의라고는 화단에서 말라 죽어 가고 있는 맨드라미 씨앗만큼도, 초코 볼 먹고 남은 과자 부스러기만큼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자기를 살려 준 생명의 은인한테?
‘저런 십 원짜리 십전대보탕 같은 인성을 봤나! 생선 가시 발라 먹을 인간을 봤나!’
도미는 속으로 문장에 억양을 넣어, 할 수 있는 욕을 해 댔다.
서준은 냄새 공격을 막으려 부엌으로 내려가 부엌문을 열었다. 폭풍우에 나무가 날아다닐 것 같은 날씨였다.
어쩔 수 없이 서준은 다시 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기진맥진한 얼굴로 거실 구석에 앉았다.
모락모락 흰 김이 나는 밥을 보자, 태우는 급하게 허기가 졌다.
“그럼 사장님, 전 먼저 먹겠습니다.”
태우는 청국장을 한 입 떠먹어 보았다. 고기를 넣지 않았는데도 깊은 국물맛과 김치와 청국장이 컬래버레이션 되어 태우 혀의 미뢰를 황홀하게 했다. 거기다 쫄깃한 전복이 들어가 있어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갈치조림은 칼칼한 게 조금 전 비 맞았던 추위를 싹 잊게 해 주었다.
해파리냉채는 코끝을 톡 쏘는 게 자꾸만 젓가락이 가는 솜씨였다.
흰밥에 비벼 먹는 짭조름한 명란젓과 비릿한 젓갈 냄새가 나는 김치는 말 그대로 밥도둑이었다.
거기에다 함께 밥을 먹는 도미 때문에 음식이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그녀는 음식을 참 복스럽게 먹었다. 그렇다고 음식을 허겁지겁 게걸스럽게 먹지는 않았다. 우아하면서도 먹음직스럽게 먹었다.
뜨거운 밥 위에 명란젓을 잘라 올리고 입으로 호호 불며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입을 다물고 해파리냉채를 야무지게 오독오독 씹는 소리에 태우의 젓가락질이 모터를 단 듯 빨라졌다.
서준도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절로 군침을 삼켰다.
곧 호기심이 들었다.
저 여자가 한 음식이 대체 어떻길래 강 비서가 저렇게 맛있게 먹을까.
저 여자는 또 왜 저리 밥을 맛깔나게 먹을까.
음, 정말 저 음식들이 맛있나?
그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슬금슬금 상 쪽으로 붙어 앉았다.
외국 스타 셰프가 차려 준 음식을 보아도 구역질이 나던 서준이었다.
그런 서준이 이 초라한 집에서 저렇게 촌스럽고 통통한 여자가 해 주는 음식을 탐하고 있었다.
태우가 해파리냉채를 먹으며 말했다.
“가정집에서 해파리냉채는 처음 먹어 봅니다.”
도미가 손으로 김치를 찢어 김이 나는 흰밥에 얹었다. 손가락을 입으로 쪽쪽 빨며 말했다.
“아, 그거요? 아까 저쪽 거시기에 찰싹 붙어 있던 거예요. 독해파리긴 한데, 독만 제거하면 이게 또 일품이거든요.”
“큭.”
“제가 저 분을 두 번 구했어요. 물에 빠졌을 때 한 번, 남자의 인생을 구한 거 한 번! 후손 생산하실 때 저한테 감사해 하셔야 할걸요.”
“푸하하.”
태우는 입 안에서 밥알이 튀어나오는 걸, 손으로 막으며 웃었다.
서준에게 저렇게 거침없이 대하는 여자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정말 신선했다.
서준은 도미가 뭐라고 하는지 이미 들리지 않았다. 오직 음식만 보였다. 어느새 상 옆으로 서준이 바짝 다가와 앉았다.
“강 비서. 맛있나?”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법입니다, 사장님!”
태우는 더 이상 말을 시키지 말라는 듯, 묵묵히 밥을 먹었다.
서준은 조금 전, 밥을 안 먹겠다고 큰소리쳤던 터라, 선뜻 같이 먹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한 번만 더 강 비서가 ‘사장님, 드셔 보실래요?’ 하면 기꺼이 맛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매정한 강 비서는 제 입으로 음식을 쓸어 넣기 바빴다.
‘제발 눈치 좀 채라.’
서준이 태우에게 말을 걸었다.
“강 비서. 그 갈치조림은 너무 짜 보이는데.”
여전히 태우는 밥상에 집중하며 흘려들었다.
“안 짭니다. 고소하고 간이 딱 맞습니다.”
서준은 침이 자꾸만 꼴깍꼴깍 넘어갔다. 조금 더 자존심을 챙기다간 상 위 음식이 곧 사라질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에 서준은 신들린 사람처럼 싱크대에 가서 수저를 들고, 밥그릇에 밥을 퍼서 두 사람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우걱우걱 소리가 들렸다.
도미와 태우가 놀라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니, 서준이 식탁 위 음식을 맹렬한 속도로 먹어 치우고 있었다.
태우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그 모습을 놀라 쳐다보았다.
서준은 태우의 앞에 놓여 있던 갈치조림을 자기 앞으로 당겨 왔다. 거기다 도미가 손으로 찢어 놓은 김치도 밥에 넣어 비벼 먹었다.
평상시라면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서준은 평소에 남의 젓가락이 닿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태우는 너무 놀라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사, 사장님, 지금 뭐 하시는…….”
그러다 태우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변했다. 마치 먹이를 물어 온 어미 제비에게 입 벌리고 받아먹는 아기 새를 보는 눈빛이었다.
“자, 그럼 갈치조림 제가 발라 드리죠.”
태우는 엄마 미소를 지으며, 서준의 밥공기 위에 갈치 살을 발라 주었다. 이미 서준의 밥공기는 텅 비어 있었다.
서준은 순식간에 밥을 두 그릇 먹었고, 상 위 반찬을 다 쓸어 먹고 나서야 숟가락을 놓았다.
그 모습을 도미는 정지 화면처럼 놀라 바라보았다.
태우가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이게 그렇게 맛있습니까?”
“그냥 먹을 만하네, 뭐.”
그 말을 듣고 기막혀하는 도미에게 서준이 말했다.
“그리고 그쪽, 좀 밥맛없어.”
“네?”
“밥 먹을 때 그렇게 요란한 소리 내면, 함께 밥 먹는 사람 밥맛이 떨어지잖아.”
뭐? 밥맛이 떨어져?
지금 그릇까지 씹어 먹을 기세로 밥을 먹는 사람이 할 소리인가?
3초 만에 사람을 열받게 하는 비법을 전수하는 학원이라도 다니는 걸까?
어쩜 저렇게 뭐 해 준 사람이 해 준 걸 후회하게 만드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얼굴이 신 레몬을 먹었을 때보다 더 시큼하게 구겨졌다.
밥을 다 먹고 숭늉까지 원샷으로 다 마신 서준이 도미에게 태연하게 물었다.
“칫솔 없나? 난 미세 3중 모 아니면 안 쓰는데.”
그 말에 도미의 참았던 이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했다.
“와. 뭐 이런 아저씨가 다 있어요?”
도미가 숟가락을 던지려는 걸, 태우가 도미의 손목을 잡아 막았다. 태연하게 서준이 물었다.
“우린 어디서 잡니까?”
40만 원씩이나 받았기 때문에 도미는 어쩔 수 없이 화를 눌렀다.
그녀는 두 사람을 메주를 매달아 놓은 방으로 안내했다. 두 남자는 냉장고 바지로 가릴 수 없는 우월한 기럭지를 뽐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안방하고 여기가 전부라서요.”
쿰쿰한 메주 냄새가 진동하는 방이었다. 방이 좁은 탓에 두 남자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려야 했다.
“그럼, 편히 쉬세요.”
도미가 나가고, 태우가 이불을 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 사건’ 이후, 사장님이 이렇게 식사를 마음 놓고 하는 걸 본 적은 처음입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이번 주에도 거의 하루나 이틀에 한 끼밖에 못 드셨지 않습니까? 또 갑자기 쓰러지실까 봐 얼마나 신경 썼는지 모릅니다.”
‘그 사건’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서준이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곤 고개를 흔들었다.
“태우야. 우리 둘이 있을 때는 그냥 말 놓으라니까. 네가 자꾸 말을 높이면 자꾸만 네가 멀리 느껴져.”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용호그룹에 내가 믿을 사람이, 아니 이 세상에 내가 믿을 사람이 너랑 돌아가신 네 아버지 말고 누가 있겠냐? 말 놔.”
“그럼 말 놓는다, 서준아.”
“이제야 내 죽마고우 태우랑 있는 것 같네.”
그때 우르르 쾅쾅 하며, 창밖에서 고막을 테러하는 드센 천둥소리가 들렸다. 장난스레 태우가 서준을 뒤에서 껴안았다.
“야, 너 어릴 때 천둥 번개 치는 날은 베개 들고 내 방으로 와서 뒤에서 이렇게 꼭 안았잖아?
“내가 언제?”
또다시 하늘이 찢어져라 천둥이 쳤다.
“저렇게 천둥 치면 막 울면서 ‘태우야, 나랑 같이 자자. 무서워.’라고 했잖아.”
“난 그런 적 없다.”
“하긴 지금은 이렇게 냉정한 용호홈쇼핑 사장이 어린 시절 그렇게 찌질했다는 걸 누가 알겠냐?”
“그만해라.”
“지금도 해 봐. 내가 자 줄게. 지금도 천둥 치니까 무섭잖아.”
서준이 어린 시절 그때처럼 태우의 등 뒤에서 간지럼을 태웠다.
“나 이번에는 안 참아. 각오해!”
태우가 서준의 팔을 제압했다. 갑자기 서준이 태우의 손을 들어 손의 냄새를 맡았다.
“강태우, 담배 냄새. 손에서 담배 냄새 나잖아.”
“말도 마라. 너 같은 상사 모시려면 담배라도 피워야지.”
“어쭈. 강태우 너 많이 컸다? 좋은 말 할 때 담배 끊어라.”
“그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람을 부려 먹지 말든가.”
“얼마면 돼? 연봉이 모자라서 그러나?”
“아이고. 됐습니다, 사장님. 잠이나 주무세요.”
이게 몇 달 만에 서준이 웃는 것인가. 또 몇 주 만에 이렇게 밥을 잘 먹는 것인가. 태우는 그것이 궂은 장마철에 잠깐 나온 해를 보는 것보다 더 반가웠다.
“할머니, 일어나 봐. 밥 먹고 자야지.”
조심스레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할머니가 흐릿한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도미는 할머니를 일으켜 앉게 했다. 그리고 청국장에 밥을 비벼 한 숟가락씩 먹였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할머니?”
“우리 강아지지.”
할머니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조잘조잘 할머니에게 수다를 떨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그녀 혼자 남겨진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고등학교 때 엄마마저 돌아가시고 난 후, 이 세상에 의지할 데라곤 할머니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입가에 흘러내린 밥알을 닦아 주며 말했다.
“집에 민박 손님 왔어. 한 명은 진짜 싸가지야! 그것도 중증 싸가지.”
그 사람을 보고 잠깐 설렌 건 창피해서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보고 흐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정말 반가웠다.
그녀는 할머니 어깨를 주물러 주고, 얼굴을 닦아 준 뒤 다시 눕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온갖 동네 대소사에 참견하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를 보니,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한테 이장이 벌린 가슴 떨린 일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할머니, 빨리 건강해져야지. 그래야 나랑 마트도 시장도 가서 할머니 좋아하는 꽃무늬 원피스도 사 입고, 냉장고 바지도 사지. 참, 저 남자들이 내가 아끼던 신상 다 입어 버렸어. 얼른 일어나서 혼내 줘.”
예전 할머니 성격이었으면, 뭐라 할 건 뭐라 하면서도 손님들을 더 잘 챙겨 주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점점 흐려지는 정신으로 도미의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의 흐릿한 눈에 조잘대는 고운 도미의 얼굴이 가득 찼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도미의 온기가 자꾸만 굳어 가는 몸에 따스함을 불어넣어 주었다.
모처럼 할머니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세상을 먼저 떠난 그 야속한 아들 며느리가 보육원에서 데리고 온 아이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피붙이처럼 끌리던 아이였다.
비밀 입양이라 그 사실을 도미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자식을 먼저 보낸 할머니의 사무친 마음에 유일한 희망이 되어 주고 있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그게 너무 고마워,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어? 할머니 왜 울어?”
할머니가 우니까 괜히 콧날이 시큰거렸다. 도미는 애써 울음을 참고, 싹싹하게 할머니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고, 머리도 꼼꼼하게 빗겨 준 후, 방을 나왔다.
나와서는 저녁상을 차렸다. 흰밥을 소복하게 두 그릇을 퍼 오며 도미가 서준에게 말했다.
“그쪽은 뭐 아무 음식이나 안 먹으니까 우리만 먹어도 실례가 안 되겠죠?”
태우가 걱정스러움을 담아 서준에게 물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지금 몇 끼째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조금 드시죠.”
서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태우를 노려보았다.
“안 먹어. 지금 내가 이런 불결한 부엌에서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아까부터 나는 이 고약한 냄새는 뭐지?”
서준은 밥 냄새만 맡아도 메쓰꺼워했다. 이미 청국장의 강렬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코를 붙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도미는 그런 서준의 표정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기껏 힘들게 물질하고 와서 밥을 차려 주었더니, 코를 막고 얼굴을 찌푸려?
정말 예의라고는 화단에서 말라 죽어 가고 있는 맨드라미 씨앗만큼도, 초코 볼 먹고 남은 과자 부스러기만큼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자기를 살려 준 생명의 은인한테?
‘저런 십 원짜리 십전대보탕 같은 인성을 봤나! 생선 가시 발라 먹을 인간을 봤나!’
도미는 속으로 문장에 억양을 넣어, 할 수 있는 욕을 해 댔다.
서준은 냄새 공격을 막으려 부엌으로 내려가 부엌문을 열었다. 폭풍우에 나무가 날아다닐 것 같은 날씨였다.
어쩔 수 없이 서준은 다시 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기진맥진한 얼굴로 거실 구석에 앉았다.
모락모락 흰 김이 나는 밥을 보자, 태우는 급하게 허기가 졌다.
“그럼 사장님, 전 먼저 먹겠습니다.”
태우는 청국장을 한 입 떠먹어 보았다. 고기를 넣지 않았는데도 깊은 국물맛과 김치와 청국장이 컬래버레이션 되어 태우 혀의 미뢰를 황홀하게 했다. 거기다 쫄깃한 전복이 들어가 있어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갈치조림은 칼칼한 게 조금 전 비 맞았던 추위를 싹 잊게 해 주었다.
해파리냉채는 코끝을 톡 쏘는 게 자꾸만 젓가락이 가는 솜씨였다.
흰밥에 비벼 먹는 짭조름한 명란젓과 비릿한 젓갈 냄새가 나는 김치는 말 그대로 밥도둑이었다.
거기에다 함께 밥을 먹는 도미 때문에 음식이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그녀는 음식을 참 복스럽게 먹었다. 그렇다고 음식을 허겁지겁 게걸스럽게 먹지는 않았다. 우아하면서도 먹음직스럽게 먹었다.
뜨거운 밥 위에 명란젓을 잘라 올리고 입으로 호호 불며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입을 다물고 해파리냉채를 야무지게 오독오독 씹는 소리에 태우의 젓가락질이 모터를 단 듯 빨라졌다.
서준도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절로 군침을 삼켰다.
곧 호기심이 들었다.
저 여자가 한 음식이 대체 어떻길래 강 비서가 저렇게 맛있게 먹을까.
저 여자는 또 왜 저리 밥을 맛깔나게 먹을까.
음, 정말 저 음식들이 맛있나?
그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슬금슬금 상 쪽으로 붙어 앉았다.
외국 스타 셰프가 차려 준 음식을 보아도 구역질이 나던 서준이었다.
그런 서준이 이 초라한 집에서 저렇게 촌스럽고 통통한 여자가 해 주는 음식을 탐하고 있었다.
태우가 해파리냉채를 먹으며 말했다.
“가정집에서 해파리냉채는 처음 먹어 봅니다.”
도미가 손으로 김치를 찢어 김이 나는 흰밥에 얹었다. 손가락을 입으로 쪽쪽 빨며 말했다.
“아, 그거요? 아까 저쪽 거시기에 찰싹 붙어 있던 거예요. 독해파리긴 한데, 독만 제거하면 이게 또 일품이거든요.”
“큭.”
“제가 저 분을 두 번 구했어요. 물에 빠졌을 때 한 번, 남자의 인생을 구한 거 한 번! 후손 생산하실 때 저한테 감사해 하셔야 할걸요.”
“푸하하.”
태우는 입 안에서 밥알이 튀어나오는 걸, 손으로 막으며 웃었다.
서준에게 저렇게 거침없이 대하는 여자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정말 신선했다.
서준은 도미가 뭐라고 하는지 이미 들리지 않았다. 오직 음식만 보였다. 어느새 상 옆으로 서준이 바짝 다가와 앉았다.
“강 비서. 맛있나?”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법입니다, 사장님!”
태우는 더 이상 말을 시키지 말라는 듯, 묵묵히 밥을 먹었다.
서준은 조금 전, 밥을 안 먹겠다고 큰소리쳤던 터라, 선뜻 같이 먹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한 번만 더 강 비서가 ‘사장님, 드셔 보실래요?’ 하면 기꺼이 맛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매정한 강 비서는 제 입으로 음식을 쓸어 넣기 바빴다.
‘제발 눈치 좀 채라.’
서준이 태우에게 말을 걸었다.
“강 비서. 그 갈치조림은 너무 짜 보이는데.”
여전히 태우는 밥상에 집중하며 흘려들었다.
“안 짭니다. 고소하고 간이 딱 맞습니다.”
서준은 침이 자꾸만 꼴깍꼴깍 넘어갔다. 조금 더 자존심을 챙기다간 상 위 음식이 곧 사라질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에 서준은 신들린 사람처럼 싱크대에 가서 수저를 들고, 밥그릇에 밥을 퍼서 두 사람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우걱우걱 소리가 들렸다.
도미와 태우가 놀라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니, 서준이 식탁 위 음식을 맹렬한 속도로 먹어 치우고 있었다.
태우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그 모습을 놀라 쳐다보았다.
서준은 태우의 앞에 놓여 있던 갈치조림을 자기 앞으로 당겨 왔다. 거기다 도미가 손으로 찢어 놓은 김치도 밥에 넣어 비벼 먹었다.
평상시라면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서준은 평소에 남의 젓가락이 닿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태우는 너무 놀라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사, 사장님, 지금 뭐 하시는…….”
그러다 태우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변했다. 마치 먹이를 물어 온 어미 제비에게 입 벌리고 받아먹는 아기 새를 보는 눈빛이었다.
“자, 그럼 갈치조림 제가 발라 드리죠.”
태우는 엄마 미소를 지으며, 서준의 밥공기 위에 갈치 살을 발라 주었다. 이미 서준의 밥공기는 텅 비어 있었다.
서준은 순식간에 밥을 두 그릇 먹었고, 상 위 반찬을 다 쓸어 먹고 나서야 숟가락을 놓았다.
그 모습을 도미는 정지 화면처럼 놀라 바라보았다.
태우가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이게 그렇게 맛있습니까?”
“그냥 먹을 만하네, 뭐.”
그 말을 듣고 기막혀하는 도미에게 서준이 말했다.
“그리고 그쪽, 좀 밥맛없어.”
“네?”
“밥 먹을 때 그렇게 요란한 소리 내면, 함께 밥 먹는 사람 밥맛이 떨어지잖아.”
뭐? 밥맛이 떨어져?
지금 그릇까지 씹어 먹을 기세로 밥을 먹는 사람이 할 소리인가?
3초 만에 사람을 열받게 하는 비법을 전수하는 학원이라도 다니는 걸까?
어쩜 저렇게 뭐 해 준 사람이 해 준 걸 후회하게 만드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얼굴이 신 레몬을 먹었을 때보다 더 시큼하게 구겨졌다.
밥을 다 먹고 숭늉까지 원샷으로 다 마신 서준이 도미에게 태연하게 물었다.
“칫솔 없나? 난 미세 3중 모 아니면 안 쓰는데.”
그 말에 도미의 참았던 이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했다.
“와. 뭐 이런 아저씨가 다 있어요?”
도미가 숟가락을 던지려는 걸, 태우가 도미의 손목을 잡아 막았다. 태연하게 서준이 물었다.
“우린 어디서 잡니까?”
40만 원씩이나 받았기 때문에 도미는 어쩔 수 없이 화를 눌렀다.
그녀는 두 사람을 메주를 매달아 놓은 방으로 안내했다. 두 남자는 냉장고 바지로 가릴 수 없는 우월한 기럭지를 뽐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안방하고 여기가 전부라서요.”
쿰쿰한 메주 냄새가 진동하는 방이었다. 방이 좁은 탓에 두 남자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려야 했다.
“그럼, 편히 쉬세요.”
도미가 나가고, 태우가 이불을 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 사건’ 이후, 사장님이 이렇게 식사를 마음 놓고 하는 걸 본 적은 처음입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이번 주에도 거의 하루나 이틀에 한 끼밖에 못 드셨지 않습니까? 또 갑자기 쓰러지실까 봐 얼마나 신경 썼는지 모릅니다.”
‘그 사건’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서준이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곤 고개를 흔들었다.
“태우야. 우리 둘이 있을 때는 그냥 말 놓으라니까. 네가 자꾸 말을 높이면 자꾸만 네가 멀리 느껴져.”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용호그룹에 내가 믿을 사람이, 아니 이 세상에 내가 믿을 사람이 너랑 돌아가신 네 아버지 말고 누가 있겠냐? 말 놔.”
“그럼 말 놓는다, 서준아.”
“이제야 내 죽마고우 태우랑 있는 것 같네.”
그때 우르르 쾅쾅 하며, 창밖에서 고막을 테러하는 드센 천둥소리가 들렸다. 장난스레 태우가 서준을 뒤에서 껴안았다.
“야, 너 어릴 때 천둥 번개 치는 날은 베개 들고 내 방으로 와서 뒤에서 이렇게 꼭 안았잖아?
“내가 언제?”
또다시 하늘이 찢어져라 천둥이 쳤다.
“저렇게 천둥 치면 막 울면서 ‘태우야, 나랑 같이 자자. 무서워.’라고 했잖아.”
“난 그런 적 없다.”
“하긴 지금은 이렇게 냉정한 용호홈쇼핑 사장이 어린 시절 그렇게 찌질했다는 걸 누가 알겠냐?”
“그만해라.”
“지금도 해 봐. 내가 자 줄게. 지금도 천둥 치니까 무섭잖아.”
서준이 어린 시절 그때처럼 태우의 등 뒤에서 간지럼을 태웠다.
“나 이번에는 안 참아. 각오해!”
태우가 서준의 팔을 제압했다. 갑자기 서준이 태우의 손을 들어 손의 냄새를 맡았다.
“강태우, 담배 냄새. 손에서 담배 냄새 나잖아.”
“말도 마라. 너 같은 상사 모시려면 담배라도 피워야지.”
“어쭈. 강태우 너 많이 컸다? 좋은 말 할 때 담배 끊어라.”
“그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람을 부려 먹지 말든가.”
“얼마면 돼? 연봉이 모자라서 그러나?”
“아이고. 됐습니다, 사장님. 잠이나 주무세요.”
이게 몇 달 만에 서준이 웃는 것인가. 또 몇 주 만에 이렇게 밥을 잘 먹는 것인가. 태우는 그것이 궂은 장마철에 잠깐 나온 해를 보는 것보다 더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