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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 길 끝에서
경수현이 죽었다. 세 살 터울인 수현은 해연에게 이 세상의 전부였다. 때로는 부모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모든 역할을 다해 주던 그가 해연을 홀로 두고 자살을 선택했다.
이 세상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곤 오로지 수현 하나밖에 없었다. 보육원 출신인 남매에겐 서로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딱 죽지 않을 만큼 수현을 패 주고 싶었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수현은 곧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로 발탁될 인재였다. 그런 그가 우연한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은 뒤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레 시력을 잃은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병원 옆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선택했다.
눈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곳까지 어떻게 올라간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가 그곳까지 올라가는 동안 말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을까. 왜 단 한 명도 수현을 말리지 못했을까. 괜한 남 탓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 모든 이가 원망스러웠다.
“나 이제 어떡할까, 경수현.”
그중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힘들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옆에서 수현을 지켜 주지 못한 해연은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사진 속 수현을 보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없었다. 영정 사진에 대고 묻는들 뾰족한 수가 날 리 없었다.
그녀는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영정 사진 속 경수현은 여전히 너무나 해맑았고, 열일곱 살의 경해연은 그런 그가 너무나도 미웠다.
해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섰다. 바스락거리는 상복 치마 소리가 장례식장의 고요함을 건드렸다. 짙게 어둠이 깔린 하늘엔 동그랗게 뜬 달만 지독히도 빛나고 있었다. 마치 홀로 남은 그녀를 조롱하는 듯싶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수현이 죽은 병원 옆 건물의 옥상으로 올랐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울분이 터졌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지만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듯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 계단은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수현에게는 더 많은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겠지. 그런데 이 긴 시간 동안 왜 동생인 자신을 생각해 주지 않았을까.
그녀가 마침내 옥상에 도착해 철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거세게 부는 겨울바람에 검은 치맛자락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거운 한숨이 짙게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그래. 단 한 번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던 수현이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홀로 남았는데 이제 누굴 믿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나도 같이 가.”
네가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면, 나도 이기적인 선택을 할 거야. 너랑 나는 같은 엄마 배에서 태어난 남매니까.
“거기서 똑똑히 지켜봐. 나쁜 새끼야.”
해연이 달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그녀의 시야에 어두운 사람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우뚝 난간에 선 누군가의 모습에 결의를 다졌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것만 같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는지 해연은 기억나지 않았다.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여 그 사람의 허리를 움켜잡고 끌어 내렸다. 옥상 바닥에 널브러지듯 쓰러진 그의 멱살을 쥐고 해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미친 새끼야!”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그제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해연의 뿌연 시야에 그는 수현처럼 보였다. 아니, 수현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꾹 눌러 참았던 모든 것이 모두 다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왜, 왜, 왜!”
그의 가슴을 작은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지만 타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손은 안쓰럽게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왜 혼자 죽어. 왜 나 혼자 두고 죽어!”
울음 맺힌 목소리도 그녀의 손처럼 떨림이 가득했다.
“죽으려면 같이 죽어야지. 왜 나 혼자 두는 건데. 너 없으면 나 어떡해. 어떻게 살아, 나…….”
원망의 소리는 곧 울음에 먹히고 말았다. 고개를 떨어트린 그녀는 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목 놓아 울었다. 한 번 쓰러진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가 그녀를 낳자마자 보육원에 버렸어도, 그 무수한 버려진 아이들 사이에서도 해연은 혼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빠가 있으니까, 가족이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밝고, 강하게 만들어 주는 매개체였다.
병원에서 수현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전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흰 천을 덮고 있는 모습을 봐도, 그것을 걷어 만신창이가 된 그를 봐도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온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 울음소리마저 나지 않았을 때였다. 뿌옇던 눈앞이 선명해졌을 때 그녀가 잡고 있었던 수현은 온데간데없었다. 주변을 훑어보며 그의 모습을 눈으로 찾아 헤맸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해연은 자신이 입고 있는 상복을 보곤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한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올라오면서 느꼈던 나쁜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해연의 두 눈엔 다른 결의가 맺혔고,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갔다.
1. 동경의 그대
타닥타닥. 경쾌한 키보드 소리가 해연의 원룸 안을 울렸다. 모니터에 빠르게 써 내려 가는 한글을 따라 동공이 빠르게 움직이고, 그녀의 손도 쉴 새 없이 움직여져 갔다.
마침내 마지막 문장 끝에 점을 찍는 순간, 그녀의 무표정했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끝났다!”
키보드 위에서 떨어진 두 손이 하늘 높게 천장으로 치솟았다.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뻑뻑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머리를 안 감은 지 벌써 일주일 째, 책상 옆에는 사흘 전부터 삼시 세끼를 대신했던 컵라면과 과자 봉지들이 탑을 쌓고 있었다.
해연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자 그 상큼했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말이다.
“몰골이 가관이다. 가관이야.”
기름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다 이마에 볼록하게 솟은 뾰루지를 손으로 매만졌다.
“이건 또 뭐냐.”
한동안 씻지 않았더니 피부마저 말썽이었다. 해연은 고개를 저으며 얼른 윗옷을 훌러덩 벗어 던졌다.
30여 분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개운하게 묵은 때를 벗긴 그녀는 상쾌한 얼굴로 욕실 밖을 나섰다. 서랍장에서 검은색 바지와 후드를 꺼내 입은 그녀는 젖은 머리를 말리며 오랜만에 바깥 구경을 할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해연은 거의 일주일간 집 안에서 생활했었다. 마감이라는 감옥에 갇혀 먹는 것도 대충, 잠도 대충, 오로지 마감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으로 달렸고, 그 결실은 오늘 밤 10시가 되어서야 맺을 수 있었다.
“슬슬 나가 볼까?”
기분 좋은 미소를 한껏 입가에 띠며 해연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춥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새 겨울이 한층 다가와서인지 쌀쌀함이 감돌았다. 너무 얇게 입고 나왔나? 라는 생각을 하며 몸을 웅크린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해연이 사는 동네는 주택과 빌라가 빽빽이 들어선 곳이었다. 밤 10시가 되면 골목은 조용해지고, 오롯이 가로등 불빛과 구름에 가려진 희미한 달빛만이 골목을 비출 뿐이었다. 하지만 해연의 집에서 500m쯤 가다 보면 가로등과 달빛이 아닌 또 다른 불빛을 볼 수 있었다.
해연의 입가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곤 휴대폰 액정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카페 문을 닫는 시간은 10시. 그런데 지금은 10시 반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다는 건 자신이 찾아올 것이라는 걸 직감한 사장이 아직 가게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문 앞으로 달려가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에 보고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옆에 빗자루가 놓여 있는 걸 보니 또 마감하다 말고 책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해연은 조심스레 카페 안으로 들어섰지만 그는 완전히 책에 빠져들었는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옆 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잔뜩 미간이 좁혀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어깨를 맞대고 낮게 물었다.
“무슨 책 읽어요?”
해연의 목소리에 놀란 그의 시선이 책에서 떨어졌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어, 언제 왔어?”
“방금요.”
재영은 대답 대신 실없이 웃으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해연은 슬쩍 책 표지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 소설, 사람들 많이 죽는데. 꼭 이런 것만 골라서 읽더라.”
해연은 재영의 손에 들린 책을 빼앗아 들곤 장난스럽게 싱긋 웃었다. 그러자 그도 그녀를 따라 웃으며 물었다.
“마감은 잘 끝냈어?”
“당연히 잘 끝냈죠. 내가 누군데.”
“마감 끝낸 기념으로 밥 사 줄 테니까 나가자.”
재영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해연은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그 뒤를 총총 따라갔다.
“역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사장님.”
해연의 말에 그는 잠시 우뚝 멈춰 서더니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책 읽다가 마감 시간을 놓친 것뿐이야.”
재영은 가볍게 그녀의 말을 받아치며 카페 열쇠를 들었다. 하지만 해연은 으스대듯 목에 힘을 주며 말을 늘어놓았다.
“에이, 이제 솔직해지시죠? 마감하느라 밥도 못 챙겨 먹은 날 예상하고, 책 읽은 척 기다리고 있었던 거. 맞잖아요!”
아까 빼앗았던 책을 흔들자 재영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해연에게 다가서며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마감일 지키지 않은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내가 왜 널 기다렸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볼 땐 오히려 네가 날 기다린 것 같은데?”
재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묻자 조금 찔린 해연이 입이 살짝 삐죽거렸다.
“아닌데. 난 그냥 산책 나가던 길이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듯 눈가에 잔뜩 힘을 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거짓말을 할 때 해연은 속내를 감추려고 더욱더 눈에 힘을 주며 말한다. 또 다른 버릇은 목소리가 반 톤 미세하게 높아진다는 것이다. 재영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냈다.
“넌 내가 문 닫고 가 버렸을까 봐 불안하셨겠지. 그럼 내 저녁밥은 누가 사 주나 하면서, 부랴부랴…….”
“진짜 아니라니까요!”
끝까지 우기는 해연을 보며 재영은 팔짱을 끼고 재밌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곤 카운터 쪽으로 가더니 자신의 남색 카디건 하나와 파란색 수면 양말 하나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섰다. 해연의 어깨에 카디건을 걸쳐 주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추위 많이 타는 네가 쌀쌀하다는 걸 느꼈을 텐데. 겉옷도 안 챙기고, 신발도 그냥 슬리퍼를 신은 채 나올 리가 없지.”
재영은 손에 든 수면 양말을 내밀며 말했다. 자연스레 내려간 그녀의 시선에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제 발이 보였다.
와, 졌다. 졌어. 저 도재영의 통찰력을 누가 이기겠어.
경수현이 죽었다. 세 살 터울인 수현은 해연에게 이 세상의 전부였다. 때로는 부모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모든 역할을 다해 주던 그가 해연을 홀로 두고 자살을 선택했다.
이 세상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곤 오로지 수현 하나밖에 없었다. 보육원 출신인 남매에겐 서로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딱 죽지 않을 만큼 수현을 패 주고 싶었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수현은 곧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로 발탁될 인재였다. 그런 그가 우연한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은 뒤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레 시력을 잃은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병원 옆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선택했다.
눈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곳까지 어떻게 올라간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가 그곳까지 올라가는 동안 말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을까. 왜 단 한 명도 수현을 말리지 못했을까. 괜한 남 탓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 모든 이가 원망스러웠다.
“나 이제 어떡할까, 경수현.”
그중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힘들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옆에서 수현을 지켜 주지 못한 해연은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사진 속 수현을 보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없었다. 영정 사진에 대고 묻는들 뾰족한 수가 날 리 없었다.
그녀는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영정 사진 속 경수현은 여전히 너무나 해맑았고, 열일곱 살의 경해연은 그런 그가 너무나도 미웠다.
해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섰다. 바스락거리는 상복 치마 소리가 장례식장의 고요함을 건드렸다. 짙게 어둠이 깔린 하늘엔 동그랗게 뜬 달만 지독히도 빛나고 있었다. 마치 홀로 남은 그녀를 조롱하는 듯싶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수현이 죽은 병원 옆 건물의 옥상으로 올랐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울분이 터졌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지만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듯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 계단은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수현에게는 더 많은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겠지. 그런데 이 긴 시간 동안 왜 동생인 자신을 생각해 주지 않았을까.
그녀가 마침내 옥상에 도착해 철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거세게 부는 겨울바람에 검은 치맛자락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거운 한숨이 짙게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그래. 단 한 번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던 수현이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홀로 남았는데 이제 누굴 믿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나도 같이 가.”
네가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면, 나도 이기적인 선택을 할 거야. 너랑 나는 같은 엄마 배에서 태어난 남매니까.
“거기서 똑똑히 지켜봐. 나쁜 새끼야.”
해연이 달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그녀의 시야에 어두운 사람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우뚝 난간에 선 누군가의 모습에 결의를 다졌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것만 같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는지 해연은 기억나지 않았다.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여 그 사람의 허리를 움켜잡고 끌어 내렸다. 옥상 바닥에 널브러지듯 쓰러진 그의 멱살을 쥐고 해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미친 새끼야!”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그제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해연의 뿌연 시야에 그는 수현처럼 보였다. 아니, 수현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꾹 눌러 참았던 모든 것이 모두 다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왜, 왜, 왜!”
그의 가슴을 작은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지만 타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손은 안쓰럽게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왜 혼자 죽어. 왜 나 혼자 두고 죽어!”
울음 맺힌 목소리도 그녀의 손처럼 떨림이 가득했다.
“죽으려면 같이 죽어야지. 왜 나 혼자 두는 건데. 너 없으면 나 어떡해. 어떻게 살아, 나…….”
원망의 소리는 곧 울음에 먹히고 말았다. 고개를 떨어트린 그녀는 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목 놓아 울었다. 한 번 쓰러진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가 그녀를 낳자마자 보육원에 버렸어도, 그 무수한 버려진 아이들 사이에서도 해연은 혼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빠가 있으니까, 가족이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밝고, 강하게 만들어 주는 매개체였다.
병원에서 수현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전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흰 천을 덮고 있는 모습을 봐도, 그것을 걷어 만신창이가 된 그를 봐도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온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 울음소리마저 나지 않았을 때였다. 뿌옇던 눈앞이 선명해졌을 때 그녀가 잡고 있었던 수현은 온데간데없었다. 주변을 훑어보며 그의 모습을 눈으로 찾아 헤맸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해연은 자신이 입고 있는 상복을 보곤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한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올라오면서 느꼈던 나쁜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해연의 두 눈엔 다른 결의가 맺혔고,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갔다.
1. 동경의 그대
타닥타닥. 경쾌한 키보드 소리가 해연의 원룸 안을 울렸다. 모니터에 빠르게 써 내려 가는 한글을 따라 동공이 빠르게 움직이고, 그녀의 손도 쉴 새 없이 움직여져 갔다.
마침내 마지막 문장 끝에 점을 찍는 순간, 그녀의 무표정했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끝났다!”
키보드 위에서 떨어진 두 손이 하늘 높게 천장으로 치솟았다.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뻑뻑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머리를 안 감은 지 벌써 일주일 째, 책상 옆에는 사흘 전부터 삼시 세끼를 대신했던 컵라면과 과자 봉지들이 탑을 쌓고 있었다.
해연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자 그 상큼했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말이다.
“몰골이 가관이다. 가관이야.”
기름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다 이마에 볼록하게 솟은 뾰루지를 손으로 매만졌다.
“이건 또 뭐냐.”
한동안 씻지 않았더니 피부마저 말썽이었다. 해연은 고개를 저으며 얼른 윗옷을 훌러덩 벗어 던졌다.
30여 분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개운하게 묵은 때를 벗긴 그녀는 상쾌한 얼굴로 욕실 밖을 나섰다. 서랍장에서 검은색 바지와 후드를 꺼내 입은 그녀는 젖은 머리를 말리며 오랜만에 바깥 구경을 할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해연은 거의 일주일간 집 안에서 생활했었다. 마감이라는 감옥에 갇혀 먹는 것도 대충, 잠도 대충, 오로지 마감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으로 달렸고, 그 결실은 오늘 밤 10시가 되어서야 맺을 수 있었다.
“슬슬 나가 볼까?”
기분 좋은 미소를 한껏 입가에 띠며 해연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춥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새 겨울이 한층 다가와서인지 쌀쌀함이 감돌았다. 너무 얇게 입고 나왔나? 라는 생각을 하며 몸을 웅크린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해연이 사는 동네는 주택과 빌라가 빽빽이 들어선 곳이었다. 밤 10시가 되면 골목은 조용해지고, 오롯이 가로등 불빛과 구름에 가려진 희미한 달빛만이 골목을 비출 뿐이었다. 하지만 해연의 집에서 500m쯤 가다 보면 가로등과 달빛이 아닌 또 다른 불빛을 볼 수 있었다.
해연의 입가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곤 휴대폰 액정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카페 문을 닫는 시간은 10시. 그런데 지금은 10시 반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다는 건 자신이 찾아올 것이라는 걸 직감한 사장이 아직 가게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문 앞으로 달려가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에 보고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옆에 빗자루가 놓여 있는 걸 보니 또 마감하다 말고 책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해연은 조심스레 카페 안으로 들어섰지만 그는 완전히 책에 빠져들었는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옆 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잔뜩 미간이 좁혀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어깨를 맞대고 낮게 물었다.
“무슨 책 읽어요?”
해연의 목소리에 놀란 그의 시선이 책에서 떨어졌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어, 언제 왔어?”
“방금요.”
재영은 대답 대신 실없이 웃으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해연은 슬쩍 책 표지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 소설, 사람들 많이 죽는데. 꼭 이런 것만 골라서 읽더라.”
해연은 재영의 손에 들린 책을 빼앗아 들곤 장난스럽게 싱긋 웃었다. 그러자 그도 그녀를 따라 웃으며 물었다.
“마감은 잘 끝냈어?”
“당연히 잘 끝냈죠. 내가 누군데.”
“마감 끝낸 기념으로 밥 사 줄 테니까 나가자.”
재영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해연은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그 뒤를 총총 따라갔다.
“역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사장님.”
해연의 말에 그는 잠시 우뚝 멈춰 서더니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책 읽다가 마감 시간을 놓친 것뿐이야.”
재영은 가볍게 그녀의 말을 받아치며 카페 열쇠를 들었다. 하지만 해연은 으스대듯 목에 힘을 주며 말을 늘어놓았다.
“에이, 이제 솔직해지시죠? 마감하느라 밥도 못 챙겨 먹은 날 예상하고, 책 읽은 척 기다리고 있었던 거. 맞잖아요!”
아까 빼앗았던 책을 흔들자 재영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해연에게 다가서며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마감일 지키지 않은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내가 왜 널 기다렸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볼 땐 오히려 네가 날 기다린 것 같은데?”
재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묻자 조금 찔린 해연이 입이 살짝 삐죽거렸다.
“아닌데. 난 그냥 산책 나가던 길이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듯 눈가에 잔뜩 힘을 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거짓말을 할 때 해연은 속내를 감추려고 더욱더 눈에 힘을 주며 말한다. 또 다른 버릇은 목소리가 반 톤 미세하게 높아진다는 것이다. 재영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냈다.
“넌 내가 문 닫고 가 버렸을까 봐 불안하셨겠지. 그럼 내 저녁밥은 누가 사 주나 하면서, 부랴부랴…….”
“진짜 아니라니까요!”
끝까지 우기는 해연을 보며 재영은 팔짱을 끼고 재밌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곤 카운터 쪽으로 가더니 자신의 남색 카디건 하나와 파란색 수면 양말 하나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섰다. 해연의 어깨에 카디건을 걸쳐 주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추위 많이 타는 네가 쌀쌀하다는 걸 느꼈을 텐데. 겉옷도 안 챙기고, 신발도 그냥 슬리퍼를 신은 채 나올 리가 없지.”
재영은 손에 든 수면 양말을 내밀며 말했다. 자연스레 내려간 그녀의 시선에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제 발이 보였다.
와, 졌다. 졌어. 저 도재영의 통찰력을 누가 이기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