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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해연은 언짢게 입 모양만 달싹이며 재영을 올려다보았다. 능청스럽게 ‘뭐 해, 안 신을 거야?’라고 말하며 제 옆을 쌩하니 지나쳐 가는 그였다.
해연은 테이블에 살짝 걸터앉아 수면 양말을 신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정말! 그냥 기다렸다고 말해 주면 어디 덧나요?”
“네가 내 애인도 아닌데 왜 그래야 하는데?”
“7년을 알고 지냈으면 그 정도 립서비스는 해 줘야죠. 사람이 무드가 없어.”
“나중에 남자 친구 생기면 해 달라고 하고, 얼른 나오시죠. 문 닫게.”
해연은 토라진 얼굴로 쿵쿵쿵 발소리를 내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영은 카페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그의 뒷모습을 유유히 지켜보던 해연은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혀를 날름거렸다.
도재영. 해연이 그와 알고 지낸 지 벌써 7년이나 되었다. 글만 쓰면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던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던 찰나에, 7년 전 재영의 카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날 오픈을 한 동네의 작은 카페. 유리문에 붙여진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본 그녀는 바로 들어가 면접을 보았고,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오랜 시간 이곳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던 건 재영의 배려 덕분이었다. 원고 마감 때면 해연이 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쉬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내일부턴 다시 출근할게요. 편집장님이랑 점심 약속이 있는데, 얼른 먹고 올게요.”
“내일은 그냥 하루 쉬지? 그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 아냐.”
“내일 토요일이에요. 아무리 동네 작은 카페라도 혼자서 일 보는 건 힘든 거 다 알거든요?”
“세상에, 경해연 철들었네.”
재영이 작게 웃으며 큰 손으로 해연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다 문득 손을 허공으로 떼어 내곤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그런데 너, 머리는 감았어?”
“방금 감고 나왔거든요? 여기 봐요. 아직 물기 잔뜩 있는 거!”
해연이 목청을 높이며 말하자 그는 달래듯 ‘알았다, 알았어’하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안 감아서 기름진 건 줄 알았잖아.”
“나 참, 무슨 기름이 져요. 누가 봐도 덜 마른 건데.”
“오해 사기 싫으면 다음부터는 바싹 말리고 나와. 알았어?”
재영의 잔소리에 해연은 미묘하게 입을 삐죽거렸다.
두 사람은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을 지나 근처 자주 가는 삼겹살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안은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북적거렸다. 간신히 한 테이블이 남은 곳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바로 고기를 주문했다.
“와, 이게 며칠 만에 먹는 고기야.”
불판 위에서 익는 고기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해연의 허기진 배는 얼른 고기를 달라며 요동을 쳤다. 꿀꺽, 목울대를 움직이며 입맛을 다시자 보다 못한 재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해연아, 그러다 침 떨어지겠어.”
“오늘 라면 하나밖에 못 먹었단 말이에요.”
“조금만 기다려 봐.”
“요즘은 돼지도 덜 익혀 먹어도 된다던데. 그냥 먹으면 안 돼요?”
“아주 그냥 생으로 먹지 그래?”
“그럴까요? 기다리는 거 너무 힘들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배고픔에 몸부림치자, 재영이 적당히 익은 작은 고기 한 점을 그녀의 앞 접시에 내려놓았다.
“자, 먹어.”
“앗싸, 잘 먹겠습니다!”
환하게 웃는 해연을 보고 있자니 재영의 얼굴에도 금세 웃음이 번져 갔다.
“천천히 먹어.”
구워지는 족족 해연의 앞 접시로 옮겨진 고기는 쉴 틈 없이 그녀의 입안으로 사라져 갔다. 어느새 혼자 고기 3인분을 후딱 해치워 버린 그녀는 아직도 배를 다 채우지 못했는지 젓가락을 쪽쪽 빨며 텅 빈 불판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영은 작게 웃음을 짓더니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옆을 지나가던 주인아주머니를 불러 세웠다.
“아주머니, 여기 삼겹살 3인분 추가해 주세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해연은 배시시 웃었다. 염치없이 3인분을 혼자 다 먹은 것도 모자라 더 시켜 달라고 하기가 내심 민망했기 때문이다.
사실 재영에게 얻어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거의 2주의 한 번은 오늘처럼 고기를 사 주거나 근처 호프집에 가서 맥주를 한잔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사장님이 알바생에게 사 주는 거니 편하게 먹으라고 말했지만 매번 얻어먹기만 하니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아 참, 이번 책 너 언제 출간된다고 했지?”
“11월 말쯤이요.”
“그래? 기대되네. 네 두 번째 작품은 어떨지.”
“사람 민망하게. 그런 거 기대하지 마요.”
“뭐가 민망해.”
“그냥…… 책 얘기하는 거 부끄럽고 민망하단 말이에요.”
“사람들 보라고 출간한 글이잖아.”
“날 모르는 사람이 보는 건 상관없는데 아는 사람이 내 글을 읽는 건 뭐랄까, 나를 간파당하는 기분이랄까.”
“음, 나랑 아는 사람이랑은 정반대구나.”
“어? 사장님 아는 사람도 글 써요?”
“아니, 그냥 좀……. 어, 고기 탄다.”
재영은 재바르게 고기를 뒤집었지만 이미 고기는 검게 그슬려 있었다. 당황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풉 작게 웃었다.
─발매한 지 2주일 만에 월간 베스트 1위를 기록한 도은우 작가는 스물아홉이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문득 시끄러운 사람들 목소리 사이로 해연의 귓가에 익숙한 이름이 들려 왔다. 그녀는 고깃집 선반 위 작고 낡은 TV로 시선을 돌렸다. 모니터에선 잔뜩 터지는 플래시 사이로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화면을 향해 손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도은우의 대한 뉴스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해연은 시선을 돌렸다. 얼굴엔 작은 웃음기가 감돌았다. 재영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해연은 괜히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니, 그냥. 저 작가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당연하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엄청 존경했던 작가인데.”
해연은 ‘맞다, 저 책 사러 가야 하는데. 마감 끝났으니 내일 갔다 와야지’라고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도은우 작가를 알게 된 건 해연이 중학생 때쯤이었다. 그녀의 오빠인 수현이 그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가 선물해 준 것이라며 가져왔었지만 워낙에 운동밖에 모르는 그가 책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자연스레 해연의 손으로 온 그 책은 그녀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10대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하고 흡입력 있는 문체와 내용에 그녀는 여러 번이고 곱씹어 읽었다.
해연에게 처음으로 글의 매력을 알게 해 준 것이 그 작가였다. 그때부터 조금씩 글을 써 왔고, 수현이 죽은 뒤로 매일같이 도은우의 책을 읽으며 버티고 버텼던 것 같다.
그러다 3년 전, 해연은 신춘문예에서 등단하면서 작가의 삶을 시작했고, 이번에 두 번째 소설도 내게 된 것이었다. 작년 처음 출간한 첫 소설 ‘무늬’는 그다지 욕을 먹지도, 히트를 치지도 못했다. 무난하게 물 흘러가듯 그녀의 첫 소설은 스멀스멀 지나가 버렸다.
“이번엔 잘될 거야. 네가 좋아하는 저 작가보다 더.”
“에이, 빈말을 그렇게 부풀려서 하면 신빙성이 없잖아요. 그냥 전 누가 제 책을 읽고 공감된다고 한마디만 해 주면 좋아요.”
“공감돼. 네 이야기들, 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재영의 말에 해연은 조금 당황스런 표정을 짓다가 이내 손사래를 치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요.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무슨.”
“진심인데.”
재영은 나지막하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해연은 그만하라며 다그칠 뿐이었다.
두 사람은 삼겹살 6인분을 전부 다 해치운 뒤에야 가게를 나섰다. 해연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배를 통통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며 작게 웃음 짓던 재영은 해연이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꾸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집 앞에 도착하자 해연이 꾸벅 인사를 건네었다. 재영은 손 인사를 건네며 뒷걸음질 쳤다.
“들어가서 푹 자.”
“네, 사장님. 들어가십쇼!”
해연은 우렁찬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곤 쏜살같이 계단을 올라 빌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쿵쿵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소리와 함께 한 층, 한 층 계단 비상등이 켜지는 것을 확인한 재영은 그녀가 완전히 집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은 뒤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작은 진동을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내일 출근할 때 사장님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 가지고 갈게요. 고기 사 준 답례로요!>
문자를 확인한 그의 입가에는 애정 어린 웃음이 지어졌다. 문장 뒤에 귀엽게 찡그린 이모티콘이 마치 해연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그는 애써 터진 웃음을 참으며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해연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카페를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올라가면 바로 보이는 곳이었다. 낡은 집들 사이에 지은 지 얼마 안 된 신축 건물 주택이라 이질적인 느낌이 들곤 했다.
재영은 익숙하게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에서 그는 불은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길게 심호흡을 하던 그는 소파 옆을 더듬거리다 리모컨을 들어 TV 전원을 켰다. 어둠 사이로 쨍한 불빛이 퍼졌다.
─이번 도은우 작가의 처음 열리는 강연회는 5분 만에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다음 주 금요일에 열리는 이 강연회는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홀에서 진행되는데요. 인기 작가 도은우의…….
낯익은 얼굴과 이름이 들려왔다.
재영은 가만히 TV를 보다가 끝까지 뉴스를 보지 못하고 전원을 꺼 버렸다.
또다시 어둠으로 덮인 집 안에서 재영의 긴 한숨이 들려왔다.
그는 제 눈두덩을 지그시 누르며 소파에 완전히 몸을 뉘었다.
해연은 언짢게 입 모양만 달싹이며 재영을 올려다보았다. 능청스럽게 ‘뭐 해, 안 신을 거야?’라고 말하며 제 옆을 쌩하니 지나쳐 가는 그였다.
해연은 테이블에 살짝 걸터앉아 수면 양말을 신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정말! 그냥 기다렸다고 말해 주면 어디 덧나요?”
“네가 내 애인도 아닌데 왜 그래야 하는데?”
“7년을 알고 지냈으면 그 정도 립서비스는 해 줘야죠. 사람이 무드가 없어.”
“나중에 남자 친구 생기면 해 달라고 하고, 얼른 나오시죠. 문 닫게.”
해연은 토라진 얼굴로 쿵쿵쿵 발소리를 내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영은 카페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그의 뒷모습을 유유히 지켜보던 해연은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혀를 날름거렸다.
도재영. 해연이 그와 알고 지낸 지 벌써 7년이나 되었다. 글만 쓰면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던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던 찰나에, 7년 전 재영의 카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날 오픈을 한 동네의 작은 카페. 유리문에 붙여진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본 그녀는 바로 들어가 면접을 보았고,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오랜 시간 이곳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던 건 재영의 배려 덕분이었다. 원고 마감 때면 해연이 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쉬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내일부턴 다시 출근할게요. 편집장님이랑 점심 약속이 있는데, 얼른 먹고 올게요.”
“내일은 그냥 하루 쉬지? 그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 아냐.”
“내일 토요일이에요. 아무리 동네 작은 카페라도 혼자서 일 보는 건 힘든 거 다 알거든요?”
“세상에, 경해연 철들었네.”
재영이 작게 웃으며 큰 손으로 해연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다 문득 손을 허공으로 떼어 내곤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그런데 너, 머리는 감았어?”
“방금 감고 나왔거든요? 여기 봐요. 아직 물기 잔뜩 있는 거!”
해연이 목청을 높이며 말하자 그는 달래듯 ‘알았다, 알았어’하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안 감아서 기름진 건 줄 알았잖아.”
“나 참, 무슨 기름이 져요. 누가 봐도 덜 마른 건데.”
“오해 사기 싫으면 다음부터는 바싹 말리고 나와. 알았어?”
재영의 잔소리에 해연은 미묘하게 입을 삐죽거렸다.
두 사람은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을 지나 근처 자주 가는 삼겹살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안은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북적거렸다. 간신히 한 테이블이 남은 곳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바로 고기를 주문했다.
“와, 이게 며칠 만에 먹는 고기야.”
불판 위에서 익는 고기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해연의 허기진 배는 얼른 고기를 달라며 요동을 쳤다. 꿀꺽, 목울대를 움직이며 입맛을 다시자 보다 못한 재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해연아, 그러다 침 떨어지겠어.”
“오늘 라면 하나밖에 못 먹었단 말이에요.”
“조금만 기다려 봐.”
“요즘은 돼지도 덜 익혀 먹어도 된다던데. 그냥 먹으면 안 돼요?”
“아주 그냥 생으로 먹지 그래?”
“그럴까요? 기다리는 거 너무 힘들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배고픔에 몸부림치자, 재영이 적당히 익은 작은 고기 한 점을 그녀의 앞 접시에 내려놓았다.
“자, 먹어.”
“앗싸, 잘 먹겠습니다!”
환하게 웃는 해연을 보고 있자니 재영의 얼굴에도 금세 웃음이 번져 갔다.
“천천히 먹어.”
구워지는 족족 해연의 앞 접시로 옮겨진 고기는 쉴 틈 없이 그녀의 입안으로 사라져 갔다. 어느새 혼자 고기 3인분을 후딱 해치워 버린 그녀는 아직도 배를 다 채우지 못했는지 젓가락을 쪽쪽 빨며 텅 빈 불판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영은 작게 웃음을 짓더니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옆을 지나가던 주인아주머니를 불러 세웠다.
“아주머니, 여기 삼겹살 3인분 추가해 주세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해연은 배시시 웃었다. 염치없이 3인분을 혼자 다 먹은 것도 모자라 더 시켜 달라고 하기가 내심 민망했기 때문이다.
사실 재영에게 얻어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거의 2주의 한 번은 오늘처럼 고기를 사 주거나 근처 호프집에 가서 맥주를 한잔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사장님이 알바생에게 사 주는 거니 편하게 먹으라고 말했지만 매번 얻어먹기만 하니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아 참, 이번 책 너 언제 출간된다고 했지?”
“11월 말쯤이요.”
“그래? 기대되네. 네 두 번째 작품은 어떨지.”
“사람 민망하게. 그런 거 기대하지 마요.”
“뭐가 민망해.”
“그냥…… 책 얘기하는 거 부끄럽고 민망하단 말이에요.”
“사람들 보라고 출간한 글이잖아.”
“날 모르는 사람이 보는 건 상관없는데 아는 사람이 내 글을 읽는 건 뭐랄까, 나를 간파당하는 기분이랄까.”
“음, 나랑 아는 사람이랑은 정반대구나.”
“어? 사장님 아는 사람도 글 써요?”
“아니, 그냥 좀……. 어, 고기 탄다.”
재영은 재바르게 고기를 뒤집었지만 이미 고기는 검게 그슬려 있었다. 당황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풉 작게 웃었다.
─발매한 지 2주일 만에 월간 베스트 1위를 기록한 도은우 작가는 스물아홉이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문득 시끄러운 사람들 목소리 사이로 해연의 귓가에 익숙한 이름이 들려 왔다. 그녀는 고깃집 선반 위 작고 낡은 TV로 시선을 돌렸다. 모니터에선 잔뜩 터지는 플래시 사이로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화면을 향해 손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도은우의 대한 뉴스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해연은 시선을 돌렸다. 얼굴엔 작은 웃음기가 감돌았다. 재영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해연은 괜히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니, 그냥. 저 작가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당연하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엄청 존경했던 작가인데.”
해연은 ‘맞다, 저 책 사러 가야 하는데. 마감 끝났으니 내일 갔다 와야지’라고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도은우 작가를 알게 된 건 해연이 중학생 때쯤이었다. 그녀의 오빠인 수현이 그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가 선물해 준 것이라며 가져왔었지만 워낙에 운동밖에 모르는 그가 책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자연스레 해연의 손으로 온 그 책은 그녀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10대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하고 흡입력 있는 문체와 내용에 그녀는 여러 번이고 곱씹어 읽었다.
해연에게 처음으로 글의 매력을 알게 해 준 것이 그 작가였다. 그때부터 조금씩 글을 써 왔고, 수현이 죽은 뒤로 매일같이 도은우의 책을 읽으며 버티고 버텼던 것 같다.
그러다 3년 전, 해연은 신춘문예에서 등단하면서 작가의 삶을 시작했고, 이번에 두 번째 소설도 내게 된 것이었다. 작년 처음 출간한 첫 소설 ‘무늬’는 그다지 욕을 먹지도, 히트를 치지도 못했다. 무난하게 물 흘러가듯 그녀의 첫 소설은 스멀스멀 지나가 버렸다.
“이번엔 잘될 거야. 네가 좋아하는 저 작가보다 더.”
“에이, 빈말을 그렇게 부풀려서 하면 신빙성이 없잖아요. 그냥 전 누가 제 책을 읽고 공감된다고 한마디만 해 주면 좋아요.”
“공감돼. 네 이야기들, 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재영의 말에 해연은 조금 당황스런 표정을 짓다가 이내 손사래를 치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요.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무슨.”
“진심인데.”
재영은 나지막하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해연은 그만하라며 다그칠 뿐이었다.
두 사람은 삼겹살 6인분을 전부 다 해치운 뒤에야 가게를 나섰다. 해연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배를 통통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며 작게 웃음 짓던 재영은 해연이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꾸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집 앞에 도착하자 해연이 꾸벅 인사를 건네었다. 재영은 손 인사를 건네며 뒷걸음질 쳤다.
“들어가서 푹 자.”
“네, 사장님. 들어가십쇼!”
해연은 우렁찬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곤 쏜살같이 계단을 올라 빌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쿵쿵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소리와 함께 한 층, 한 층 계단 비상등이 켜지는 것을 확인한 재영은 그녀가 완전히 집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은 뒤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작은 진동을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내일 출근할 때 사장님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 가지고 갈게요. 고기 사 준 답례로요!>
문자를 확인한 그의 입가에는 애정 어린 웃음이 지어졌다. 문장 뒤에 귀엽게 찡그린 이모티콘이 마치 해연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그는 애써 터진 웃음을 참으며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해연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카페를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올라가면 바로 보이는 곳이었다. 낡은 집들 사이에 지은 지 얼마 안 된 신축 건물 주택이라 이질적인 느낌이 들곤 했다.
재영은 익숙하게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에서 그는 불은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길게 심호흡을 하던 그는 소파 옆을 더듬거리다 리모컨을 들어 TV 전원을 켰다. 어둠 사이로 쨍한 불빛이 퍼졌다.
─이번 도은우 작가의 처음 열리는 강연회는 5분 만에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다음 주 금요일에 열리는 이 강연회는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홀에서 진행되는데요. 인기 작가 도은우의…….
낯익은 얼굴과 이름이 들려왔다.
재영은 가만히 TV를 보다가 끝까지 뉴스를 보지 못하고 전원을 꺼 버렸다.
또다시 어둠으로 덮인 집 안에서 재영의 긴 한숨이 들려왔다.
그는 제 눈두덩을 지그시 누르며 소파에 완전히 몸을 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