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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작가님, 정말 수고하셨어요.”
“아녜요. 편집장님이 더 수고하셨죠.”
해연은 원고를 마감한 기념으로 편집장과 점심을 함께했다. 메뉴는 두 사람이 좋아하는 초밥이었다.
든든히 먹고 난 후에 행복한 얼굴로 초밥 가게를 나온 그들은 손을 맞잡으며 고생한 서로를 격려했다.
“맞다. 작가님, 도은우 작가 좋아한다고 하셨죠?”
편집장은 손뼉을 짝 치며 자신의 핸드백에서 흰 봉투를 꺼내 해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시선으로 그녀가 묻자 편집장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도은우 작가 강연회 티켓이에요. 그쪽 출판사에서 초대장을 보냈는데 작가님 생각나서 두 장 챙겨 왔어요.”
해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그래도 마감하던 기간에 강연회 예매가 끝나 버려서 취소표나 양도표를 알아보려던 중이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흰 봉투 속 표를 확인하고는 감격에 겨워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저, 정말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고생하셨는데 기분 전환하셔야죠.”
“……편집장님.”
해연은 울먹거리며 덥석 편집장을 끌어안았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던 그녀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내뱉었다. 편집장은 그런 그녀를 엄마처럼 토닥였다.
“이렇게 좋아하실 줄은 몰랐어요.”
편집장은 다음에 도은우 작가와 관련된 자리가 있으면 부르겠다는 약속까지 남기고 해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돌아가는 내내 강연회 티켓을 바라보는 해연의 시선에는 행복함이 가득했다.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더욱 벅차 올랐다.
“그런데 누구랑 갈까?”
제일 먼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해리를 떠올렸지만 현재 출장으로 미국에 가 있었다. 2주 뒤에나 온다고 했던 것 같았으니, 후보에서 제외해야 했다.
그다음으로 떠오른 사람은 해리 다음으로 가까운 재영이었다. 워낙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강연회 표를 내밀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어제 약속한 아이스크림과 함께 표 두 장을 그의 앞에 선물인 양 내밀었다.
“짜잔, 이게 뭐게요?”
재영은 해연의 내민 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사장님, 우리 여기 같이 가요!”
그녀가 신이 난 얼굴로 말하자 재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네 친구랑 가.”
“해리 지금 출장 중이라 미국에 있어요.”
“그럼 그냥 혼자…….”
“표가 두 장이잖아요, 표가! 거참, 같이 가 주면 안 돼요?”
당연지사 좋아할 줄 알았는데 냉랭한 그의 반응에 해연은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재영은 장르 가리지 않고 책을 좋아했만 도은우 작가의 책을 읽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도은우 작가 싫어해요?”
해연의 직설적인 물음에 재영은 말없이 동공만 또르르 굴렸다.
“싫어하네.”
“……그리 좋아하진 않아.”
“그러니까 싫어한다는 거잖아요.”
콕 집어 말하자 재영은 제 진한 눈썹을 엄지로 지분거렸다. 대답하기 싫을 때나 난감할 때 그가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뭐가 그렇게 어려운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재영이 저 행동을 했다는 건 끝까지 대답을 안 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해연은 더는 묻지 않고 옆에 있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알겠어요. 혼자 갈게요. 사장님이 정 싫다는데 뭐 어쩌겠어.”
“…….”
“9시에 시작이니까 두 시간 정도 한다고 치면, 11시에 끝날 테고. 거기서 우리 동네까지 넉넉잡아 한 시간 걸리니까 자정쯤에 난 이 어두운 골목을 혼자 걸어와야겠네요.”
“…….”
“요즘 우리 동네에 치한이 그렇게 많이 돌아다닌다던데. 으, 무서워라.”
해연은 몸을 부르르 떨며 힐끗 재영을 쳐다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해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사장님은 신경 쓰지 마요.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혼자 잘 찾아갈 수 있어요.”
해연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지만 연기하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재영은 말없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흔들린다는 신호였다. 해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제 손에 들린 표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에이, 초대권 하나는 쓸데도 없는데 그냥 찢어 버려야지.”
상실감에 가득 찬 얼굴로 해연은 표 하나를 양손에 집어 들었다. 찢으려는 제스처에 재영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해연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재영을 올려다보자 그는 심하게 미간을 구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만이야.”
재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해연의 입꼬리가 하늘 위로 올랐다. 그녀는 기분 좋게 소리를 지르며 그의 품에 폭 안겼다. 그 반동에 몸이 뒤로 살짝 휘청거렸다.
“야, 야.”
“헤헤, 역시 사장님밖에 없어요.”
“너 왔다 갔다 할 때 지하철이나 택시 타기 싫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
“택시 타면 돈도 많이 들고, 지하철은 사람도 많고, 사장님 차 타고 가면 편하고, 혼자가 아니어서 덜 외롭고.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사장님과 가는 게 제일 좋으니까.”
“으휴, 말이나 못 하면.”
“이번 기회에 사장님도 도은우 작가한테 호감을 가져 보면 좋잖아요. 그 작가님 글 진짜 좋아요. 저 믿고 한번 보는 건 어때요?”
해연은 그대로 안긴 채 고개를 들며 말했다. 재영이 별로 탐탁지 않은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칫, 진짜 좋은데’하며 그녀가 작게 혼잣말을 내뱉던 때였다. 카페 문이 열리며 손님 두 명이 들어섰다. 놀란 재영이 해연의 어깨를 잡고 제 품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어서 오세요.”
해연은 그의 행동에 별 상관하지 않고 메뉴판을 들어 손님에게로 다가갔다.
재영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우렁찬 해연의 목소리에 넋을 놓고 있던 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머신 앞에 섰다. 묘하게 그녀의 온기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재영은 제 손을 꼼지락대다가 다가오는 해연을 보고 커피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 * *
해연은 6시 알바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가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은우 작가를 실제로 보는 것이었다. 훈훈한 외모 덕에 TV에 자주 등장하고 팬 사인회도 많이 했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서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옷장에서 원피스를 여러 벌 꺼내 들었다. 평소엔 바지를 즐겨 입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기에 한껏 꾸며 보고 싶었다. 평소엔 비비만 살짝 바르던 얼굴도 자주 쓰지 않았던 화장품을 모두 꺼내어 얼굴에 덧발랐다.
“으흠, 이상한가.”
거울 앞에 남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꼼꼼히 제 모습을 살폈다. 치마가 너무 짧은 건가 싶다가도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문득 떠올려 보면 하루쯤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준비를 끝내고 보니 벌써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재영이 8시에 가게 앞에서 보자고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그녀는 가방을 들고 부랴부랴 뛰어갔다.
오랜만에 힐을 신은 탓에 뒤뚱거리며 카페에 도착하자 그 앞에서 재영이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
“사장님!”
시야에 보이는 그의 모습에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재영의 시선이 달려오는 해연에게로 옮겨졌다.
“오늘 좀 꾸며 봤어요. 어때요? 오랜만에 원피스 입어서 좀 어색하긴 한데.”
그녀는 길게 늘어진 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기며 말했다. 재영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마지막 담배 연기를 후 내뱉으며 조수석 문을 열어 주기만 했다.
뭐야, 사람이 물어봤으면 대답이라도 해 주지.
해연은 조금 실망스런 표정을 짓다 순순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해 주면 입에 가시가 돋나 보다.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며 재영을 흘겨보았다.
“뭐야, 진짜.”
해연은 못내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안 어울리나 싶어 지금이라도 편한 바지로 갈아입고 나올까 싶었다. 그녀가 재영이 서 있던 쪽을 바라보려던 찰나,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 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카페 문을 열고 나오는 재영이 보였다. 곧바로 운전석에 탄 그는 그녀의 무릎에 작은 담요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거 덮고 있어.”
“아…….”
그녀는 물끄러미 재영을 올려다보다 실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꼭 우리 오빠 같아.”
“어?”
“아니, 예전에 우리 오빠가 교복 치마 조금이라도 올려 입으면 어디선가 담요 들고 와서 맨날 허리에 묶어 주고 그랬거든요.”
해연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오빠라는 말을 내뱉는 그녀의 얼굴에 조금 씁쓸함이 자리 잡혔다.
예전에 술에 취한 해연이 울며불며 수현의 이야기를 해 준 것이 문득 떠올랐다. 재영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지어졌다.
“저녁 뭐 먹을래?”
그가 화제를 전화하려는 듯 조심스레 묻자 해연이 슬쩍 내렸던 시선을 올렸다.
“에이, 새삼스럽게 그런 걸 왜 물어보십니까. 그거야 당연히…….”
“고기겠지.”
“고기죠!”
동시에 같은 말을 한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작가님, 정말 수고하셨어요.”
“아녜요. 편집장님이 더 수고하셨죠.”
해연은 원고를 마감한 기념으로 편집장과 점심을 함께했다. 메뉴는 두 사람이 좋아하는 초밥이었다.
든든히 먹고 난 후에 행복한 얼굴로 초밥 가게를 나온 그들은 손을 맞잡으며 고생한 서로를 격려했다.
“맞다. 작가님, 도은우 작가 좋아한다고 하셨죠?”
편집장은 손뼉을 짝 치며 자신의 핸드백에서 흰 봉투를 꺼내 해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시선으로 그녀가 묻자 편집장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도은우 작가 강연회 티켓이에요. 그쪽 출판사에서 초대장을 보냈는데 작가님 생각나서 두 장 챙겨 왔어요.”
해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그래도 마감하던 기간에 강연회 예매가 끝나 버려서 취소표나 양도표를 알아보려던 중이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흰 봉투 속 표를 확인하고는 감격에 겨워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저, 정말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고생하셨는데 기분 전환하셔야죠.”
“……편집장님.”
해연은 울먹거리며 덥석 편집장을 끌어안았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던 그녀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내뱉었다. 편집장은 그런 그녀를 엄마처럼 토닥였다.
“이렇게 좋아하실 줄은 몰랐어요.”
편집장은 다음에 도은우 작가와 관련된 자리가 있으면 부르겠다는 약속까지 남기고 해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돌아가는 내내 강연회 티켓을 바라보는 해연의 시선에는 행복함이 가득했다.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더욱 벅차 올랐다.
“그런데 누구랑 갈까?”
제일 먼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해리를 떠올렸지만 현재 출장으로 미국에 가 있었다. 2주 뒤에나 온다고 했던 것 같았으니, 후보에서 제외해야 했다.
그다음으로 떠오른 사람은 해리 다음으로 가까운 재영이었다. 워낙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강연회 표를 내밀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어제 약속한 아이스크림과 함께 표 두 장을 그의 앞에 선물인 양 내밀었다.
“짜잔, 이게 뭐게요?”
재영은 해연의 내민 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사장님, 우리 여기 같이 가요!”
그녀가 신이 난 얼굴로 말하자 재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네 친구랑 가.”
“해리 지금 출장 중이라 미국에 있어요.”
“그럼 그냥 혼자…….”
“표가 두 장이잖아요, 표가! 거참, 같이 가 주면 안 돼요?”
당연지사 좋아할 줄 알았는데 냉랭한 그의 반응에 해연은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재영은 장르 가리지 않고 책을 좋아했만 도은우 작가의 책을 읽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도은우 작가 싫어해요?”
해연의 직설적인 물음에 재영은 말없이 동공만 또르르 굴렸다.
“싫어하네.”
“……그리 좋아하진 않아.”
“그러니까 싫어한다는 거잖아요.”
콕 집어 말하자 재영은 제 진한 눈썹을 엄지로 지분거렸다. 대답하기 싫을 때나 난감할 때 그가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뭐가 그렇게 어려운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재영이 저 행동을 했다는 건 끝까지 대답을 안 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해연은 더는 묻지 않고 옆에 있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알겠어요. 혼자 갈게요. 사장님이 정 싫다는데 뭐 어쩌겠어.”
“…….”
“9시에 시작이니까 두 시간 정도 한다고 치면, 11시에 끝날 테고. 거기서 우리 동네까지 넉넉잡아 한 시간 걸리니까 자정쯤에 난 이 어두운 골목을 혼자 걸어와야겠네요.”
“…….”
“요즘 우리 동네에 치한이 그렇게 많이 돌아다닌다던데. 으, 무서워라.”
해연은 몸을 부르르 떨며 힐끗 재영을 쳐다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해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사장님은 신경 쓰지 마요.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혼자 잘 찾아갈 수 있어요.”
해연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지만 연기하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재영은 말없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흔들린다는 신호였다. 해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제 손에 들린 표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에이, 초대권 하나는 쓸데도 없는데 그냥 찢어 버려야지.”
상실감에 가득 찬 얼굴로 해연은 표 하나를 양손에 집어 들었다. 찢으려는 제스처에 재영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해연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재영을 올려다보자 그는 심하게 미간을 구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만이야.”
재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해연의 입꼬리가 하늘 위로 올랐다. 그녀는 기분 좋게 소리를 지르며 그의 품에 폭 안겼다. 그 반동에 몸이 뒤로 살짝 휘청거렸다.
“야, 야.”
“헤헤, 역시 사장님밖에 없어요.”
“너 왔다 갔다 할 때 지하철이나 택시 타기 싫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
“택시 타면 돈도 많이 들고, 지하철은 사람도 많고, 사장님 차 타고 가면 편하고, 혼자가 아니어서 덜 외롭고.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사장님과 가는 게 제일 좋으니까.”
“으휴, 말이나 못 하면.”
“이번 기회에 사장님도 도은우 작가한테 호감을 가져 보면 좋잖아요. 그 작가님 글 진짜 좋아요. 저 믿고 한번 보는 건 어때요?”
해연은 그대로 안긴 채 고개를 들며 말했다. 재영이 별로 탐탁지 않은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칫, 진짜 좋은데’하며 그녀가 작게 혼잣말을 내뱉던 때였다. 카페 문이 열리며 손님 두 명이 들어섰다. 놀란 재영이 해연의 어깨를 잡고 제 품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어서 오세요.”
해연은 그의 행동에 별 상관하지 않고 메뉴판을 들어 손님에게로 다가갔다.
재영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우렁찬 해연의 목소리에 넋을 놓고 있던 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머신 앞에 섰다. 묘하게 그녀의 온기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재영은 제 손을 꼼지락대다가 다가오는 해연을 보고 커피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 * *
해연은 6시 알바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가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은우 작가를 실제로 보는 것이었다. 훈훈한 외모 덕에 TV에 자주 등장하고 팬 사인회도 많이 했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서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옷장에서 원피스를 여러 벌 꺼내 들었다. 평소엔 바지를 즐겨 입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기에 한껏 꾸며 보고 싶었다. 평소엔 비비만 살짝 바르던 얼굴도 자주 쓰지 않았던 화장품을 모두 꺼내어 얼굴에 덧발랐다.
“으흠, 이상한가.”
거울 앞에 남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꼼꼼히 제 모습을 살폈다. 치마가 너무 짧은 건가 싶다가도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문득 떠올려 보면 하루쯤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준비를 끝내고 보니 벌써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재영이 8시에 가게 앞에서 보자고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그녀는 가방을 들고 부랴부랴 뛰어갔다.
오랜만에 힐을 신은 탓에 뒤뚱거리며 카페에 도착하자 그 앞에서 재영이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
“사장님!”
시야에 보이는 그의 모습에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재영의 시선이 달려오는 해연에게로 옮겨졌다.
“오늘 좀 꾸며 봤어요. 어때요? 오랜만에 원피스 입어서 좀 어색하긴 한데.”
그녀는 길게 늘어진 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기며 말했다. 재영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마지막 담배 연기를 후 내뱉으며 조수석 문을 열어 주기만 했다.
뭐야, 사람이 물어봤으면 대답이라도 해 주지.
해연은 조금 실망스런 표정을 짓다 순순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해 주면 입에 가시가 돋나 보다.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며 재영을 흘겨보았다.
“뭐야, 진짜.”
해연은 못내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안 어울리나 싶어 지금이라도 편한 바지로 갈아입고 나올까 싶었다. 그녀가 재영이 서 있던 쪽을 바라보려던 찰나,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 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카페 문을 열고 나오는 재영이 보였다. 곧바로 운전석에 탄 그는 그녀의 무릎에 작은 담요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거 덮고 있어.”
“아…….”
그녀는 물끄러미 재영을 올려다보다 실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꼭 우리 오빠 같아.”
“어?”
“아니, 예전에 우리 오빠가 교복 치마 조금이라도 올려 입으면 어디선가 담요 들고 와서 맨날 허리에 묶어 주고 그랬거든요.”
해연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오빠라는 말을 내뱉는 그녀의 얼굴에 조금 씁쓸함이 자리 잡혔다.
예전에 술에 취한 해연이 울며불며 수현의 이야기를 해 준 것이 문득 떠올랐다. 재영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지어졌다.
“저녁 뭐 먹을래?”
그가 화제를 전화하려는 듯 조심스레 묻자 해연이 슬쩍 내렸던 시선을 올렸다.
“에이, 새삼스럽게 그런 걸 왜 물어보십니까. 그거야 당연히…….”
“고기겠지.”
“고기죠!”
동시에 같은 말을 한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