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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25화)
8장. 납치되다(3)


주변은 온통 피 냄새로 가득했다.
시산혈해!
덜덜덜.
중년인의 턱 끝이 멈추지 않고 떨려 왔다.
태어나 이처럼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방갓을 쓴 자들의 무위는 차원이 달랐다. 불과 일각이라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수하들이 모조리 도륙을 당했다. 결코 누구도 저들을 저토록 무참히 유린할 수 없을 강자들이다.
“너의 주인에게 가서 전해라.”
“……!”
“위지세가는 감히…… 감히 그 어떤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가문이라는 것을.”
중년인에게 말을 건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방갓을 쓴 이들 중에서 흘러나올 뿐 어떤 이가 입을 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중년인은 이들의 수장이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년인은 무인의 자존심을 버리고 이곳에서 살아 떠나는 걸 선택했다.
“함께 가시죠.”
방갓을 쓴 이들 중 한 사람이 방갓을 벗었다.
삼십 대 초반의 그는 애꾸였다.
“정말 소맹주님께서 보낸 분들인가요?”
“그렇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리웅과 무태, 단유하의 시선이 반사영에게 모아졌다.
대체 지금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눈치다.
하지만 반사영이라고 해서 달리 정확하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아직까지는 이들이 자신들을 도와주러 왔다는 것밖에는 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반사영 일행은 방갓을 쓴 무리를 따라갔다.
산 깊숙하게 들어가자 계곡이 나왔다.
그곳에 천검맹 소맹주인 위지청이 반사영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셔 왔습니다, 주군.”
애꾸눈의 사내가 부복하며 보고하자, 계곡을 바라보고 있던 위지청이 몸을 돌렸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백룡단 단원들이 소맹주님을 뵙습니다!”
네 사람은 아직까지는 백룡단 소속임을 잊지 않고 위지청에게 예를 갖췄다.
위지청은 애꾸눈의 사내에게 그만 물러나라고 눈짓했다.
“일어들 나세요.”
네 사람이 일어섰다. 하나같이 긴장이 역력한 얼굴들이다.
“좀 걸을까요.”
위지청이 앞장서서 걸었고 네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이름을 정했어요.”
“……?”
“앞으로 그대들은 살야단(殺夜團)이라는 이름 아래 소속될 겁니다.”
“살야단…….”
반사영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위지청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못 알아들을 말이다.
“여러분은 현재로부터 백리세가의 사람인 백리연을 살해하고 도주한 천인공노할 살인범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 백리세가는 그대들 네 사람에 대한 추살령을 내리겠죠.”
“…….”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대들은 혈해도로 갈 테니까요.”
“잠, 잠시만요. 지금 혈해도라고 하셨습니까?”
혈해도!
백 년 전에 구중천의 수장들과 천마교와의 혈전이 벌어진 장소다. 그런 곳에서 생활한다니?
“그곳이라면 안전할 테니까요.”
“대체 왜 저희가 그런 곳에서 생활해야 하는 건가요.”
백리웅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따지듯 물었다.
“부친 되시는 백리운(百里雲) 대협은 맹주님께서 신뢰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 백리세가의 가주가 되셨다면 맹주님께서 아주 든든해하셨을 텐데…… 그랬다면 백리세가가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테고요.”
“말에 가시가 있군요. 지금 백리세가가 어떻다고 그러시는 거죠?”
“후훗. 감히 하늘에 검을 겨누고, 주인을 배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만.”
“……!”
“막내 동생을 세상에서 지우면서까지 야욕을 감추지 못하는 자가 가주인 이상 백리세가는 더 이상의 희망을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
백리웅은 반사영이 말한 걸 떠올렸다. 백리연이 죽고, 그 배후에는 가주인 백리천호가 있다.
믿을 수도, 믿기도 싫은 일이다. 아무리 야욕에 눈이 멀었다고 해서 어찌 동생을 희생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모든 상황은 그대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전 살야단을 창설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혈해도에서 훈련을 받을 겁니다.”
“대체 살야단이 뭘 하는 곳입니까?”
“맹주님에게 천령군이 있다면, 앞으로 천검맹을 이끌어 갈 나 위지청의 비밀 부대라고 해 두죠.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대들은 천검맹 내부에 숨어든 세작을 처리하고, 천검맹을 흔드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모두가 놀랄 만한 이야기를 위지청은 너무나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임무는 지극히 위험하고, 목숨 따위는 가볍게 여길 만한 일이 틀림없을 것이다.
“전적으로 음지에서 활동해야겠군요.”
무태, 단유하, 백리웅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로지 위지청의 그림자로 살아야 하는 일이다.
위지청은 자신들에게 설득하지 않는 말투였다. 이건 일종의 통보였다. 더욱 서글픈 건 그의 제의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 소맹주님의 제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네요.”
백리웅이 냉정하게 거절하고 몸을 돌렸다.
“혈해도로 가는 그 길에 어머니의 묘를 들르시는 것이 좋을 듯하네요.”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그대가 백리세가로 후송될 거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신 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더군요.”
“그 말을 내가 믿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보군요.”
“확인해 보면 될 일이지요. 정 내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백리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대의 어머니가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잘 생각해 보세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일이다.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정말 위지청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머니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자식에게 짐이 되고자 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아들이 자신 때문에 도망칠 기회가 오더라도 순순히 백리세가로 끌려올 것임을 그의 어머니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백리웅은 쓰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위지청은 네 사람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기로 하고 그들만 남겨 둔 채 자리를 비웠다.
“이거 생각보다 우리가 위험한 일에 휘말렸는데.”
무태의 말에 단유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태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백리웅을 바라봤다.
동생들 앞에서 창피한 줄도 모른 채 한참 울음을 터트리던 백리웅은 조금은 안정을 찾은 듯했다.
하지만 아직도 어머니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지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위지청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반사영도 백리웅의 주변을 배회하며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쩌실 생각이에요.”
반사영은 무태와 단유하의 의견을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지금으로서는 우리에게 선택의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너는 어쩔 셈이냐.”
“갑니다, 저는.”
“호오. 제법 강단이 있는데?”
“생긴 거랑은 다르게 말이지.”
두 사람은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는지 낄낄거렸다.
“형님.”
반사영은 백리웅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혈해도로 가기 전, 어머니…… 가 계신 그곳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

백리세가 본가.
콰아앙!
“뭐라고 했느냐.”
커다란 주먹이 대리석으로 만든 책상을 후려치자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 앞에는 이틀 전, 반사영을 납치하려던 무리의 수장이 부복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래도 위지세가 본가의 무인인 듯싶습니다.”
“위지청이 반사영이 누구의 자식인지를 알아 버렸다는 소리겠지.”
육 척 장신에 청색 태사의를 입고 있는 사내는 바로 백리세가의 가주 백리천호였다.
“그랬다면 굳이 살려 둘 필요가 있었을까요.”
“위지청이 반사영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면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특히나 그 녀석은 반적풍의 피를 이어받았으니까 말이다.”
“설익었지만 분명 자유자재로 무영살검류를 펼쳤습니다.”
“어떻게든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래, 어디로 향했는지 파악은 됐느냐.”
“워낙 은밀하게 움직여서 그것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백리웅이 함께 있으니 분명 자신의 모친이 묻힌 곳에 들르지 않겠습니까?”
“보냈겠지?”
“물론입니다.”
“직접 그들과 부딪히게 하지는 마.”
“네?”
“뒤를 미행하라는 말이야. 도대체 위지청이 그놈들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겠습니다.”

***

위지청의 말은 사실이었다.
백리웅의 모친은 수일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집안 식구들조차도 알지 못했다.
백리웅은 자신이 성장한 집으로는 한 발짝도 들어서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봐야 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자 홀로 어머니의 묘지가 있는 산을 올랐다.
“휴우. 뭔가 갑작스럽게 내 인생이 꼬여 버린 기분이다.”
무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용호방 시절이 그리운 눈치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무태.
은퇴한 노고수의 유일한 제자, 단유하.
백리세가의 방계, 백리웅.
그리고 일개 서생이었던 반사영.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던 네 명이 살야단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인생이 주어졌다.
모두가 하나같이 원해서 얻은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백리웅을 기다리는 동안 세 사람은 산 입구에서 각자 생각에 빠졌다.
그 주변으로는 방갓을 쓴 무인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위지세가의 무인들이라고 했다.
위지청이 천령군보다 신뢰한다는 점에서 반사영은 놀랐다. 앞으로 맹주 자리에 오를 위지청의 신뢰를 받는다는 건 오로지 자신의 대한 충성심과 실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방갓을 쓴 이들의 능력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저들을 보고 있자면 정말로 그림자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반사영으로서는 꽤나 충격적인 상황인 것이다.
무연심공은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이들의 기척도 느낄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좀 더 성장할 수가 있다는 거겠지.’
저들이 강해서가 아니다. 아직 자신의 능력이 무연심공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만큼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시진가량 지나자 백리웅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산을 오르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무덤덤하니까 그게 더욱 걱정이 됐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여기까지 들르게 해서.”
“…….”
“나도 혈해도로 갈 생각이다.”
“잘 선택했수다. 혼자만 안 가면 그게 말이 되나. 그렇지, 얘들아? 으하하하!”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무태가 방정을 떨었다.
그런 그의 노력 덕분에 네 사람은 굳은 얼굴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이동 수단은 말로 바뀌어 있었다.
백리세가에서 무인들을 풀어 네 사람을 찾기 위해 나섰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잠시 쉬었다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반사영도 서둘러 이동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쥐새끼들이 붙었습니다.”
일행 중 미행하는 이가 붙은 건 반사영과 애꾸눈의 사내만이 느끼고 있었다.
애꾸눈의 사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세 명이 동시에 흩어졌다.
일각 정도 흐르자 떠났던 세 명 중 두 명만이 돌아왔다.
두 명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나는 팔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서 계속 피를 토해 냈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애꾸눈의 사내는 수하들이 다쳤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알겠다. 너희는 따라오지 마라.”
그의 냉정함에 반사영 일행은 혀를 내둘렀다.
부상당한 수하들은 버리고 간다. 그만큼 속도가 더뎌질 뿐만 아니라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아직 한 명이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죽었을 겁니다.”
애꾸눈의 사내는 매몰차게 말하며 다시금 출발 신호를 알렸다.
“휘유우. 살벌하구먼.”
반사영 일행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말 엉덩이를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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