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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습관 같고 공기 같은
날씨가 아주 좋은 주말이었다. 초봄의 쌀쌀한 공기마저도 맑은 햇살에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오전, 경은은 막 도착한 예식장 앞에서 자신의 옷차림을 훑어봤다. 무난한 정장을 입고 있는 그녀는 고급스러우면서도 과하지 않아서 단아한 느낌을 줬다.
하객들로 복잡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대기실을 찾은 경은이 문을 열었다.
“결혼 축하해, 윤주야.”
대기실에 들어서며 친구에게 말을 했다. 거울을 마주 보고 있던 윤주가 고개를 돌리더니 화사하게 웃어 보인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친구인 지수도 있었다.
“오늘 윤주 정말 예쁘지 않니? 드레스가 비싸기는 해도 돈값을 한다, 얘.”
“평생 딱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돈이 대수야. 최고로 예쁘게 보여야지.”
지수와 윤주의 대화를 들으며 경은이 동조하듯이 웃었다. 그런 경은을 바라보던 지수가 기어이 한마디를 했다.
“이제 너만 남았다, 이경은.”
문지수는 대학 때부터 사귀던 남자와 5년 전에 결혼해 벌써 딸까지 낳았다.
여태 남자가 없던 윤주마저 서른이 되자 갑작스럽게 선을 보고는 결혼 행렬에 가담했다. 이쯤에 와서는 친구들 중 자신만 미혼으로 남은 것이다.
“나만 뭐?”
경은이 짐짓 모른 척 되묻자 지수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긴다.
“시침 떼기는. 결혼 말이야. 너도 얼른 해야지.”
“아, 난 아직 생각 없어. 벌써 유부녀가 되긴 싫다고.”
일부러 관심 없다는 듯 대답했지만 이번에는 새 신부 윤주가 딱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저거, 지가 아직 20대인 줄 아나 봐. 너, 벌써 서른하고도 한 살 더 먹었어. 서른하나라고.”
“그게 뭐. 나는 일이 재미있어. 메인 되고 나니 다루고 싶은 내용도 굉장히 많아졌고 당분간은 방송에만 집중하고 싶어.”
공중파 CYS의 시사프로에서 구성작가로 일한 지도 7년, 박봉에 서러움 많던 막내작가 생활을 꿋꿋이 버텨 내고 실질적인 방송작가라고 할 수 있는 서브작가로도 몇 년을 고생했다. 그러다 2년 전에 드디어 ‘함께 여는 사회’의 메인작가가 됐다.
함께 여는 사회는 CYS뿐만 아니라 국내 3대 방송사 중에서도 시청률과 만족도가 가장 높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다. 1998년에 첫 방송을 시작해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개편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최장수 프로 중 하나였다. 그런 프로그램의 전체를 관리하는 리더 격인 메인작가다 보니 그녀의 하루는 늘 바쁘기 그지없었다.
매일같이 일 더미에 파묻힌 채 살았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벌써 서른이 넘은 나이가 돼 버렸다.
“네가 일 욕심이 많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이제 결혼은 좀 진지하게 생각해 봐.”
윤주의 말에 지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래, 맞아. 사실 우리 나이가 아직까지는 여유 있다고 해도, 넌 좀 다르잖니. 연애가 너무 길면 여자한테 안 좋아. 벌써 10년도 넘었잖아. 도윤이랑 만난 시간이.”
“둘이 스무 살 때 만났으니 이제 11년 돼 가지.”
“11년이면 부부나 다름없어.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또 다르잖아. 남자야 서른한 살이 한창나이지만 여자는 임신과 출산 시기가 있기 때문에 시간 끌수록 손해야.”
둘의 끝날 줄 모르는 잔소리를 듣고만 있던 경은이 졌다는 듯 시무룩하게 웃었다.
“윤주 시집가는 날에 잘하면 나까지 덤으로 싸서 보내겠다. 알았으니까 그만들 하셔. 예식 시간 다 됐네. 지수야. 나가서 기다리자.”
그제야 시계를 본 지수가 화들짝 놀라면서 다가왔다. 윤주에게 떨지 말고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두 사람은 함께 대기실을 나왔다.
하객석에서 자리를 찾아 앉은 지수가 공연히 예식장 내부를 여기저기 둘러본다.
“불과 5년 지났는데 요새는 너무 예쁘게 잘해 주네. 우리 결혼 때는 완전 촌스러웠거든. 샘난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식 올리고 싶네.”
“다시 해. 기왕이면 다른 남자랑.”
경은의 농담에 지수는 식장 한편에서 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태훈을 바라봤다.
“그럴까? 이젠 설렘이라고는 찾아보기도 힘든데.”
“태훈이도 같은 생각일 거야.”
“기지배. 무슨 농담을 웃지도 않고 하냐? 무섭게.”
세 살짜리 딸아이를 한 팔로 거뜬히 안은 채 다가오는 태훈을 보면서 경은이 말했다.
“넌 다시 결혼해도 태훈이랑 할 걸 다 알거든.”
그건 그렇다는 듯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훈을 향한 지수의 눈빛에는 변함없는 애정이 엿보였다.
늘 곁을 지켜 주는 남편, 그리고 둘을 꼭 닮은 아이까지. 가장 평범하면서도 더없이 부러운 가족이었다. 경은은 오늘따라 그들이 예뻐 보여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태훈이, 아직도 좋아? 너희도 11년 됐잖아. 아니다, 우리보다 좀 더 됐나?”
“그렇지 뭐. 두근거리는 감정이야 진즉에 사라져서, 이제는 그냥 서로가 습관 같고 공기 같아.”
습관 같고 공기 같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 경은이 그 생각을 하며 도윤을 떠올렸다.
그녀에게는 한도윤이란 남자가 그랬다. 오랜 시간 서로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무심히 하는 작은 행동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은 사이. 몸에 붙어 버린 버릇처럼 서로가 옆에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해진 관계. 둘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특별한 연인이었다.
“아까 들어올 때는 못 봤는데, 언제 왔어?”
어느새 그녀들 곁으로 다가온 태훈이 경은에게 물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린 경은이 웃어 보였다.
“온 지 얼마 안 됐어. 근데 집에서나 밖에서나 예원이 담당은 너구나. 멋지다, 김태훈. 좋은 아빠야.”
경은의 칭찬에 예원을 안고 있던 태훈이 자랑스럽게 씩, 웃는다. 앙증맞은 한복 차림의 예원을 지수가 안아 가자 태훈이 살짝 구겨진 슈트 자락을 매만지며 물었다.
“도윤이는? 오늘도 비행 있어?”
경은이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태훈은 걱정스레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국에 들르기는 해? 요즘은 얼굴 한 번 보기 힘드네. 이번에는 또 어디 갔어?”
“암스테르담. 새벽쯤 한국에 떨어진다고 했어.”
“짜식. 좋은 데는 다 가 보는구먼.”
그러게, 하고 경은도 담담히 웃었다.
예식은 곧 시작됐다. 눈물방울 같은 진주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고 윤주는 신랑 곁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경은은 현실감 없이 한참 바라봤다. 지수가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부들을 봤을 때도 그저 예쁘네, 하고 지나치는 게 다였다.
그런데 오늘은 왜인지 예전과는 다른 미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약간은 부럽고 또 아주 약간은 욕심이 생겼다. 결혼, 남편, 그리고 나만의 가정이라는 게.
결혼식이 끝난 뒤 경은은 바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 보기 드문 화창한 날씨였지만 딱히 같이 놀 사람이 없는지라 기꺼이 잔업을 선택했다.
화요일에 나가는 방송 마무리 작업이 어디까지 됐는지 확인할 겸 방송국에 들렀더니 막내작가인 유나가 김밥 한 줄을 놓고는 야근하고 있었다.
“고생한다. 유나 씨, 거의 다 돼 가?”
“네. 자막 부분만 한 번 더 체크 중이에요.”
경은이 재킷을 벗으며 유나를 살펴봤다. 편집화면을 꼼꼼히 확인하는 유나는 눈 밑이 수면 부족으로 거무스름했다. 녹화가 끝나고 프리뷰부터 시작해 벌써 며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작업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런 유나가 안쓰러워 경은은 책상에 마주 앉았다.
“내가 확인할게. 유나 씨는 그동안 소파에서 잠깐이라도 눈 붙여.”
“아니에요. 다 끝나면 자려고요.”
“오늘 일요일이야. 아직 이틀이나 더 남았어.”
화요일 방송 전까지 야근을 계속하려면 잠깐이라도 체력을 비축하라는 뜻이었다. 그걸 알아들은 유나가 고맙다는 듯이 웃어 보이고는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경은은 안경을 쓰고 일을 시작했다.
몇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오후 해가 기울어지고 사무실 창밖 너머가 어둑어둑해질 때에야 둘은 방송국 근처의 식당을 찾았다.
해가 떨어지자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에 몸에는 으슬으슬 한기가 돌았다.
국물이 따뜻한 칼국수를 시키고 유나가 일하는 얘기를 들었다. 구성작가 일을 시작한 지 이제 5개월이 돼 가는 유나는 여전히 PD들이 가장 무섭고 어렵다고 했다.
“끝날 줄 모르는 일 폭탄과 정시 퇴근이 뭔지 모르는 생활도 그럭저럭 견딜 만한데 PD님들의 변덕은 정말 맞추기 힘들어요. 울릉도 특집이다 해서 열심히 자료 찾아 놨더니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 갑자기 강원도를 알아보라 하시고, 그래서 또 밤새 강원도만 뽑아 놓으면 생뚱맞게 제주도로 결정하시는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경은이 그건 그래, 하면서 웃었다.
유나의 서러운 넋두리를 듣다 보니 막내작가 시절 집에도 못 가고 늦은 시간까지 작업에 몰두했던 날들이 생각났다. 방송 날짜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채 PD가 테이프를 던져 주면 그때는 정말 울 것 같았다.
그녀의 작업이 끝나야 다음 사람이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을 맞추려 어떤 때는 며칠을 못 자기도 했다. 다들 밥 먹으러 나간 빈 사무실이나 화장실에서 잠깐잠깐 10분씩 자는 게 다였다. 그래서 늘 시도 때도 없이 졸다가 혼나기를 반복했었다. 그때가 아마 스물다섯 살이었지.
방송가에서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냐만, 막내작가가 떠맡아야 하는 자잘한 잡일과 그 스트레스는 유독 심했다. 그녀도 그랬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 이 일을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PD한테 치이고 조연출한테 까이고, 심지어는 같은 팀인 서브와 메인작가들의 텃세도 견뎌 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서러움이 터져 화장실에서 울고는 했다.
그렇게 소처럼 열심히 일해도 방송작가는 한낱 비정규직인 프리랜서라 도윤의 어머니는 볼 때마다 못마땅해했다. 지금에야 그녀를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지만, 한때는 넉넉한 집안에 파일럿 공부를 하는 도윤과 견주어 그녀의 조건이 하잘것없다고 몇 번이나 헤어짐을 종용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일은 재미있어?”
경은의 물음에 유나는 칼국수를 호로록, 소리 나게 먹으면서 웃었다.
“고생해서 만든 방송이 나갈 때면 뭔가 뿌듯한 게 보람이 있더라고요. 아직은 버틸 만해요.”
“다행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좋은 날도 있을 거야.”
“일 잘해서 작가님처럼 얼른 메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하면 돼. 일어나자. 마무리 짓고 오늘은 집에 가서 자.”
식당을 나오니 언제 내리기 시작했는지 부슬부슬 비가 오고 있었다.
“저녁쯤에 비가 온다고 하더라고요.”
유나가 가지고 온 우산을 펴며 경은에게 말했다. 어둠이 드리워진 밤하늘은 비안개로 뽀얗다.
착륙하는데 문제는 없겠지? 언제부턴가 날이 흐리거나 안개가 많이 끼면 하늘에 떠다니는 비행기 걱정부터 하게 됐다. 그건 1년 전, 도윤이 한운항공의 부기장이 되어 정식으로 조종간을 잡으면서부터 더 심해졌다.
* * *
자막 점검을 끝냈을 때는 새벽 1시가 돼 가고 있었다. 월요일 회의 때 PD한테 확인받은 뒤 더 보충하자 생각하며 경은은 노트북을 껐다.
시계를 한 번 봤다가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지금쯤이면 착륙했을 텐데, 아무 소식이 없다.
<잘 도착했어?>
전화를 하려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주방에서 간단히 우유를 데워 먹고 밀린 설거지를 하고 나올 때까지도 핸드폰은 잠잠했다.
경은은 조용한 제 핸드폰을 습관처럼 확인하고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 쏟아지는 따뜻한 물줄기가 잠시간이지만 무거운 피로와 번뇌를 잊게 해 줬다. 경은은 그 감각을 즐기듯 꽤나 오랜 시간 샤워를 했다.
몸에 묻은 물기를 닦고 젖은 머리칼을 말리려 헤어드라이어를 틀었는데 문득 무슨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행동을 정지한 채 귀를 기울였다. 오피스텔 도어록 잠금이 해제되고 있었다.
“이경은.”
그리고 도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은은 타월을 얼른 몸에 두르고 욕실 문을 열었다.
현관에는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도윤이 있었다. 비행 유니폼을 갈아입지도 않은 걸 봐서는 다소 급하게 이리로 온 것 같았다.
“왔어?”
“잘 지냈어?”
둘은 똑같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안부 인사를 전했다. 꽤 오랜만에 보는 서로의 모습이 반가운 건 변함이 없지만 뜨거운 눈빛보다는 제일 먼저 편안한 웃음이 나왔다.
도윤은 팔을 뻗어 다가온 그녀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향수 냄새에 경은은 기분이 좋아져 웃었다. 그런 그녀의 젖은 머리칼에 도윤이 얼굴을 비볐다.
“좋다. 이경은.”
“한국이 제일 좋지?”
“응.”
비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도윤은 늘 한국이 제일 좋다고 했다.
경은은 그 말이 왠지 듣기 좋았다. 1년 내내 서울을 떠날 일 없는 자신에 비해 도윤의 일상은 매일같이 해외를 넘나드는 화려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이 작은 한국 땅과 여기에 있는 자신을 잊어버릴까 봐 걱정 아닌 걱정을 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매번 돌아와 이곳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도윤이었다. 경은은 그런 도윤을 사랑했다.
의례적인 포옹을 마치고 도윤이 팔을 풀었다. 그러곤 신발을 벗고 넥타이를 푸느라 그녀에게는 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경은이 괜히 서운해져 중얼거렸다.
“변했어, 한도윤.”
“뭐가?”
“이런 차림의 나를 그냥 내버려 두니까.”
몇 년 전, 그러니까 둘의 연애 초기에는 이러지 않았다. 씻고 나오기 바쁘게 그녀를 안던 도윤이었다. 새삼스럽게 그때를 떠올리는데 도윤이 셔츠 단추를 풀면서 무심코 말한다.
“생리 중이잖아.”
결국 경은은 할 말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함께 지내 온 시간이 10년도 넘었다. 그 시간 동안 도윤은 그녀의 생일은 물론 생리 주기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 됐다.
날씨가 아주 좋은 주말이었다. 초봄의 쌀쌀한 공기마저도 맑은 햇살에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오전, 경은은 막 도착한 예식장 앞에서 자신의 옷차림을 훑어봤다. 무난한 정장을 입고 있는 그녀는 고급스러우면서도 과하지 않아서 단아한 느낌을 줬다.
하객들로 복잡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대기실을 찾은 경은이 문을 열었다.
“결혼 축하해, 윤주야.”
대기실에 들어서며 친구에게 말을 했다. 거울을 마주 보고 있던 윤주가 고개를 돌리더니 화사하게 웃어 보인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친구인 지수도 있었다.
“오늘 윤주 정말 예쁘지 않니? 드레스가 비싸기는 해도 돈값을 한다, 얘.”
“평생 딱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돈이 대수야. 최고로 예쁘게 보여야지.”
지수와 윤주의 대화를 들으며 경은이 동조하듯이 웃었다. 그런 경은을 바라보던 지수가 기어이 한마디를 했다.
“이제 너만 남았다, 이경은.”
문지수는 대학 때부터 사귀던 남자와 5년 전에 결혼해 벌써 딸까지 낳았다.
여태 남자가 없던 윤주마저 서른이 되자 갑작스럽게 선을 보고는 결혼 행렬에 가담했다. 이쯤에 와서는 친구들 중 자신만 미혼으로 남은 것이다.
“나만 뭐?”
경은이 짐짓 모른 척 되묻자 지수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긴다.
“시침 떼기는. 결혼 말이야. 너도 얼른 해야지.”
“아, 난 아직 생각 없어. 벌써 유부녀가 되긴 싫다고.”
일부러 관심 없다는 듯 대답했지만 이번에는 새 신부 윤주가 딱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저거, 지가 아직 20대인 줄 아나 봐. 너, 벌써 서른하고도 한 살 더 먹었어. 서른하나라고.”
“그게 뭐. 나는 일이 재미있어. 메인 되고 나니 다루고 싶은 내용도 굉장히 많아졌고 당분간은 방송에만 집중하고 싶어.”
공중파 CYS의 시사프로에서 구성작가로 일한 지도 7년, 박봉에 서러움 많던 막내작가 생활을 꿋꿋이 버텨 내고 실질적인 방송작가라고 할 수 있는 서브작가로도 몇 년을 고생했다. 그러다 2년 전에 드디어 ‘함께 여는 사회’의 메인작가가 됐다.
함께 여는 사회는 CYS뿐만 아니라 국내 3대 방송사 중에서도 시청률과 만족도가 가장 높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다. 1998년에 첫 방송을 시작해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개편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최장수 프로 중 하나였다. 그런 프로그램의 전체를 관리하는 리더 격인 메인작가다 보니 그녀의 하루는 늘 바쁘기 그지없었다.
매일같이 일 더미에 파묻힌 채 살았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벌써 서른이 넘은 나이가 돼 버렸다.
“네가 일 욕심이 많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이제 결혼은 좀 진지하게 생각해 봐.”
윤주의 말에 지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래, 맞아. 사실 우리 나이가 아직까지는 여유 있다고 해도, 넌 좀 다르잖니. 연애가 너무 길면 여자한테 안 좋아. 벌써 10년도 넘었잖아. 도윤이랑 만난 시간이.”
“둘이 스무 살 때 만났으니 이제 11년 돼 가지.”
“11년이면 부부나 다름없어.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또 다르잖아. 남자야 서른한 살이 한창나이지만 여자는 임신과 출산 시기가 있기 때문에 시간 끌수록 손해야.”
둘의 끝날 줄 모르는 잔소리를 듣고만 있던 경은이 졌다는 듯 시무룩하게 웃었다.
“윤주 시집가는 날에 잘하면 나까지 덤으로 싸서 보내겠다. 알았으니까 그만들 하셔. 예식 시간 다 됐네. 지수야. 나가서 기다리자.”
그제야 시계를 본 지수가 화들짝 놀라면서 다가왔다. 윤주에게 떨지 말고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두 사람은 함께 대기실을 나왔다.
하객석에서 자리를 찾아 앉은 지수가 공연히 예식장 내부를 여기저기 둘러본다.
“불과 5년 지났는데 요새는 너무 예쁘게 잘해 주네. 우리 결혼 때는 완전 촌스러웠거든. 샘난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식 올리고 싶네.”
“다시 해. 기왕이면 다른 남자랑.”
경은의 농담에 지수는 식장 한편에서 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태훈을 바라봤다.
“그럴까? 이젠 설렘이라고는 찾아보기도 힘든데.”
“태훈이도 같은 생각일 거야.”
“기지배. 무슨 농담을 웃지도 않고 하냐? 무섭게.”
세 살짜리 딸아이를 한 팔로 거뜬히 안은 채 다가오는 태훈을 보면서 경은이 말했다.
“넌 다시 결혼해도 태훈이랑 할 걸 다 알거든.”
그건 그렇다는 듯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훈을 향한 지수의 눈빛에는 변함없는 애정이 엿보였다.
늘 곁을 지켜 주는 남편, 그리고 둘을 꼭 닮은 아이까지. 가장 평범하면서도 더없이 부러운 가족이었다. 경은은 오늘따라 그들이 예뻐 보여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태훈이, 아직도 좋아? 너희도 11년 됐잖아. 아니다, 우리보다 좀 더 됐나?”
“그렇지 뭐. 두근거리는 감정이야 진즉에 사라져서, 이제는 그냥 서로가 습관 같고 공기 같아.”
습관 같고 공기 같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 경은이 그 생각을 하며 도윤을 떠올렸다.
그녀에게는 한도윤이란 남자가 그랬다. 오랜 시간 서로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무심히 하는 작은 행동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은 사이. 몸에 붙어 버린 버릇처럼 서로가 옆에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해진 관계. 둘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특별한 연인이었다.
“아까 들어올 때는 못 봤는데, 언제 왔어?”
어느새 그녀들 곁으로 다가온 태훈이 경은에게 물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린 경은이 웃어 보였다.
“온 지 얼마 안 됐어. 근데 집에서나 밖에서나 예원이 담당은 너구나. 멋지다, 김태훈. 좋은 아빠야.”
경은의 칭찬에 예원을 안고 있던 태훈이 자랑스럽게 씩, 웃는다. 앙증맞은 한복 차림의 예원을 지수가 안아 가자 태훈이 살짝 구겨진 슈트 자락을 매만지며 물었다.
“도윤이는? 오늘도 비행 있어?”
경은이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태훈은 걱정스레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국에 들르기는 해? 요즘은 얼굴 한 번 보기 힘드네. 이번에는 또 어디 갔어?”
“암스테르담. 새벽쯤 한국에 떨어진다고 했어.”
“짜식. 좋은 데는 다 가 보는구먼.”
그러게, 하고 경은도 담담히 웃었다.
예식은 곧 시작됐다. 눈물방울 같은 진주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고 윤주는 신랑 곁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경은은 현실감 없이 한참 바라봤다. 지수가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부들을 봤을 때도 그저 예쁘네, 하고 지나치는 게 다였다.
그런데 오늘은 왜인지 예전과는 다른 미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약간은 부럽고 또 아주 약간은 욕심이 생겼다. 결혼, 남편, 그리고 나만의 가정이라는 게.
결혼식이 끝난 뒤 경은은 바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 보기 드문 화창한 날씨였지만 딱히 같이 놀 사람이 없는지라 기꺼이 잔업을 선택했다.
화요일에 나가는 방송 마무리 작업이 어디까지 됐는지 확인할 겸 방송국에 들렀더니 막내작가인 유나가 김밥 한 줄을 놓고는 야근하고 있었다.
“고생한다. 유나 씨, 거의 다 돼 가?”
“네. 자막 부분만 한 번 더 체크 중이에요.”
경은이 재킷을 벗으며 유나를 살펴봤다. 편집화면을 꼼꼼히 확인하는 유나는 눈 밑이 수면 부족으로 거무스름했다. 녹화가 끝나고 프리뷰부터 시작해 벌써 며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작업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런 유나가 안쓰러워 경은은 책상에 마주 앉았다.
“내가 확인할게. 유나 씨는 그동안 소파에서 잠깐이라도 눈 붙여.”
“아니에요. 다 끝나면 자려고요.”
“오늘 일요일이야. 아직 이틀이나 더 남았어.”
화요일 방송 전까지 야근을 계속하려면 잠깐이라도 체력을 비축하라는 뜻이었다. 그걸 알아들은 유나가 고맙다는 듯이 웃어 보이고는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경은은 안경을 쓰고 일을 시작했다.
몇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오후 해가 기울어지고 사무실 창밖 너머가 어둑어둑해질 때에야 둘은 방송국 근처의 식당을 찾았다.
해가 떨어지자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에 몸에는 으슬으슬 한기가 돌았다.
국물이 따뜻한 칼국수를 시키고 유나가 일하는 얘기를 들었다. 구성작가 일을 시작한 지 이제 5개월이 돼 가는 유나는 여전히 PD들이 가장 무섭고 어렵다고 했다.
“끝날 줄 모르는 일 폭탄과 정시 퇴근이 뭔지 모르는 생활도 그럭저럭 견딜 만한데 PD님들의 변덕은 정말 맞추기 힘들어요. 울릉도 특집이다 해서 열심히 자료 찾아 놨더니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 갑자기 강원도를 알아보라 하시고, 그래서 또 밤새 강원도만 뽑아 놓으면 생뚱맞게 제주도로 결정하시는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경은이 그건 그래, 하면서 웃었다.
유나의 서러운 넋두리를 듣다 보니 막내작가 시절 집에도 못 가고 늦은 시간까지 작업에 몰두했던 날들이 생각났다. 방송 날짜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채 PD가 테이프를 던져 주면 그때는 정말 울 것 같았다.
그녀의 작업이 끝나야 다음 사람이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을 맞추려 어떤 때는 며칠을 못 자기도 했다. 다들 밥 먹으러 나간 빈 사무실이나 화장실에서 잠깐잠깐 10분씩 자는 게 다였다. 그래서 늘 시도 때도 없이 졸다가 혼나기를 반복했었다. 그때가 아마 스물다섯 살이었지.
방송가에서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냐만, 막내작가가 떠맡아야 하는 자잘한 잡일과 그 스트레스는 유독 심했다. 그녀도 그랬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 이 일을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PD한테 치이고 조연출한테 까이고, 심지어는 같은 팀인 서브와 메인작가들의 텃세도 견뎌 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서러움이 터져 화장실에서 울고는 했다.
그렇게 소처럼 열심히 일해도 방송작가는 한낱 비정규직인 프리랜서라 도윤의 어머니는 볼 때마다 못마땅해했다. 지금에야 그녀를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지만, 한때는 넉넉한 집안에 파일럿 공부를 하는 도윤과 견주어 그녀의 조건이 하잘것없다고 몇 번이나 헤어짐을 종용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일은 재미있어?”
경은의 물음에 유나는 칼국수를 호로록, 소리 나게 먹으면서 웃었다.
“고생해서 만든 방송이 나갈 때면 뭔가 뿌듯한 게 보람이 있더라고요. 아직은 버틸 만해요.”
“다행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좋은 날도 있을 거야.”
“일 잘해서 작가님처럼 얼른 메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하면 돼. 일어나자. 마무리 짓고 오늘은 집에 가서 자.”
식당을 나오니 언제 내리기 시작했는지 부슬부슬 비가 오고 있었다.
“저녁쯤에 비가 온다고 하더라고요.”
유나가 가지고 온 우산을 펴며 경은에게 말했다. 어둠이 드리워진 밤하늘은 비안개로 뽀얗다.
착륙하는데 문제는 없겠지? 언제부턴가 날이 흐리거나 안개가 많이 끼면 하늘에 떠다니는 비행기 걱정부터 하게 됐다. 그건 1년 전, 도윤이 한운항공의 부기장이 되어 정식으로 조종간을 잡으면서부터 더 심해졌다.
* * *
자막 점검을 끝냈을 때는 새벽 1시가 돼 가고 있었다. 월요일 회의 때 PD한테 확인받은 뒤 더 보충하자 생각하며 경은은 노트북을 껐다.
시계를 한 번 봤다가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지금쯤이면 착륙했을 텐데, 아무 소식이 없다.
<잘 도착했어?>
전화를 하려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주방에서 간단히 우유를 데워 먹고 밀린 설거지를 하고 나올 때까지도 핸드폰은 잠잠했다.
경은은 조용한 제 핸드폰을 습관처럼 확인하고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 쏟아지는 따뜻한 물줄기가 잠시간이지만 무거운 피로와 번뇌를 잊게 해 줬다. 경은은 그 감각을 즐기듯 꽤나 오랜 시간 샤워를 했다.
몸에 묻은 물기를 닦고 젖은 머리칼을 말리려 헤어드라이어를 틀었는데 문득 무슨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행동을 정지한 채 귀를 기울였다. 오피스텔 도어록 잠금이 해제되고 있었다.
“이경은.”
그리고 도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은은 타월을 얼른 몸에 두르고 욕실 문을 열었다.
현관에는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도윤이 있었다. 비행 유니폼을 갈아입지도 않은 걸 봐서는 다소 급하게 이리로 온 것 같았다.
“왔어?”
“잘 지냈어?”
둘은 똑같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안부 인사를 전했다. 꽤 오랜만에 보는 서로의 모습이 반가운 건 변함이 없지만 뜨거운 눈빛보다는 제일 먼저 편안한 웃음이 나왔다.
도윤은 팔을 뻗어 다가온 그녀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향수 냄새에 경은은 기분이 좋아져 웃었다. 그런 그녀의 젖은 머리칼에 도윤이 얼굴을 비볐다.
“좋다. 이경은.”
“한국이 제일 좋지?”
“응.”
비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도윤은 늘 한국이 제일 좋다고 했다.
경은은 그 말이 왠지 듣기 좋았다. 1년 내내 서울을 떠날 일 없는 자신에 비해 도윤의 일상은 매일같이 해외를 넘나드는 화려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이 작은 한국 땅과 여기에 있는 자신을 잊어버릴까 봐 걱정 아닌 걱정을 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매번 돌아와 이곳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도윤이었다. 경은은 그런 도윤을 사랑했다.
의례적인 포옹을 마치고 도윤이 팔을 풀었다. 그러곤 신발을 벗고 넥타이를 푸느라 그녀에게는 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경은이 괜히 서운해져 중얼거렸다.
“변했어, 한도윤.”
“뭐가?”
“이런 차림의 나를 그냥 내버려 두니까.”
몇 년 전, 그러니까 둘의 연애 초기에는 이러지 않았다. 씻고 나오기 바쁘게 그녀를 안던 도윤이었다. 새삼스럽게 그때를 떠올리는데 도윤이 셔츠 단추를 풀면서 무심코 말한다.
“생리 중이잖아.”
결국 경은은 할 말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함께 지내 온 시간이 10년도 넘었다. 그 시간 동안 도윤은 그녀의 생일은 물론 생리 주기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