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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주말에 결혼했는데.”

한 침대에 누워서도 핸드폰만 보고 있는 도윤에게 경은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래된 사이이니 예전처럼 격정적인 시간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달 만에 만났는데 최소한 도란도란 그동안의 얘기를 나누길 바랐다.

그러나 도윤은 한 팔만 그녀에게 내어 준 채 온통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도윤아.”

“잠깐만. 중간 스케줄 좀 보느라.”

“벌써 또 비행 잡혔어?”

“수요일에 갔다가 토요일에 돌아와.”

중간 스케줄은 계획 없이 그때그때 나오는지라 조종사들은 대부분 그런 비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1년 혹은 반년 전에 미리 짜 놓은 스케줄을 선호하는 건 도윤도 마찬가지였으나 그걸 따질 입장이 못 됐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스케줄을 소화해서 비행시간을 쌓고, 돈을 벌어야 했다.

경은은 도윤의 팔베개를 벤 채 물끄러미 옆얼굴을 바라봤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음 비행을 준비한다. 파일럿이 원래 이렇게 쉴 틈 없이 바쁜 걸까, 아니면 도윤의 욕심 때문일까?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데도 왠지 그는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방금 뭐라고 했어?”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윤주 결혼했다고. 궁금하지 않아?”

“결혼식이 다 그렇겠지 뭐.”

“……그야 그렇지.”

잠시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드레스를 입고 있던 윤주가 참 예쁘더라는 얘기, 케이크를 커팅할 때 긴장한 윤주가 바닥에 와인을 흘렸다는 얘기, 예식장 뷔페 음식이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는 얘기들…….

도윤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데, 그냥 안 하는 게 좋겠다. 그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도윤은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일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경은은 결국 조용히 등을 돌려 누웠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을 것 같다.

도윤의 핸드폰 액정 불빛이 사라졌을 때는 그로부터 20분이 더 지난 뒤였다. 아직 잠이 들지 않은 경은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가둔 도윤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다 봤어?”

묻는 말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든 줄 알았는데.”

그러더니 이불을 살짝 젖히고는 그녀의 아랫배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생리통으로 괴로워하는 경은에게 늘 해 주던 마사지였다. 그녀의 온기인지, 도윤의 체온인지 모를 따스한 감촉에 괜스럽게 뭉클했다.

“한도윤.”

“응.”

“……좋아한다고.”

도윤이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서 나지막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난 사랑해, 이경은.”

그래. 이거면 됐다. 이렇게 긴 시간, 그의 마음이 흔들림 하나 없이 여전히 저에게 향한 거면 됐지. 경은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 * *



“작가님, 여기 빵 드세요!”

회의를 마친 제작 팀은 커피를 마시거나 간식을 꺼내 먹느라 잠시 한담이 오가는 중이었다. 유나의 씩씩한 목소리에 습관적으로 손을 내밀었다가 경은은 곧 어색하게 거둬들였다.

“왜요? 안 드시게요?”

“됐어. 아침을 많이 먹었더니 생각이 없네.”

그럴듯하게 대답했지만 경은의 한 손은 슬며시 자신의 허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옆구리에 살이 좀 붙었다.”



아침에 도윤이 무심코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화장하는 그녀에게 연하게 탄 커피를 갖다 주며 그렇게 말했었다.

안 그래도 요즘 좀 움직임이 좀 둔해진 것 같더라니. 도윤의 눈은 정확했다.



“만져지더라.”



아니, 손이 정확했나? 세상 끝난 것 같은 경은에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하던 그가 생각났다.

오늘부터 다이어트다. 경은이 결의에 찬 표정을 했다. 얼마 전부터 PD의 시청률 압박 스트레스를 죄다 먹는 것으로 풀다 보니 야금야금 살이 붙었나 보다. 빵 끊고 간식도 끊고 저녁도 기왕이면 굶어야지.

아직도 스무 살 때의 체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도윤이었다. 그의 직업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주기적으로 테스트와 교육이 반복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했다.

도윤이 그러니 경은은 더욱더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10년 넘게 봐 왔지만 한도윤은 아직도 그녀가 아는 남자들 중 제일 멋있는 남자였다.

“이 작가는 주말에 뭐 했어? 대본이 손댈 곳 없이 깔끔한 걸 보니, 어제도 나와서 일한 거야?”

컵에 담긴 커피를 휘휘 저으며 마동림 PD가 경은에게 물었다.

내년이면 쉰 살이 되는 마 PD는 벌써 대학생 아들을 두고 있었다. 경은이 막내작가일 때부터 곁에 두고 일을 가르쳐 줬는지라 그동안 동고동락한 정이 끈끈했다.

“친구 결혼식 갔었어요. 끝나고 사무실에 들렀다가 유나 씨가 있기에 같이 대본 마무리한 거예요.”

“자꾸 친구 결혼식만 가지 말고. 본인이 결혼해야지. 이 작가 좋은 소식은 언제 듣는 거야?”

“글쎄요. 천천히 생각해 봐야죠.”

그런 경은을 바라보던 맞은편의 조연출 민준이 끼어들었다.

“작가님은 남자 친구 있으시잖아요.”

성민준은 경은의 대학 선배로, 대학 때 그녀에게 고백했다가 경은이 사귀는 사람 있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머쓱하게 스쳐 지난 사이였다.

그러다 졸업하고 CYS에서 다시 조연출과 작가로 만났던 것이다.

“네.”

짧게 대답하는 경은을 대신해 서브작가인 장수연이 신나서 떠들었다.

“남자 친구분이 되게 멋있으세요. 몇 번 방송국으로 작가님 데리러 온 걸 봤는데, 처음에는 연예인인 줄 알았어요.”

“오, 그래? 하긴, 우리 이 작가 미모도 만만치 않잖아. 그때 그 방송 기억나지? 추석 특집 때 이 작가 얼굴이 화면에 잠깐 잡혀서 나갔잖아. 그 방송 나가고 인터넷에서 한동안 이 작가 사진이 많이 돌아다녔어. CYS 구성작가의 미친 미모라고. 아직도 이 작가 이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가 있을걸.”

“맞아요. 기억나요. 이 작가님이 전직 탤런트라는 루머도 한동안 돌았었어요.”

마 PD와 수연의 말들을 들으면서 경은은 쑥스럽게 웃어 보였다.

“이 작가가 남자 친구 얘기를 통 안 해서 몰랐는데, 남자 친구는 무슨 일을 하나?”

경은이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을 했다.

“한운항공에서 부기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와, 대박.”

이번에는 막내작가인 유나가 빵을 뜯어 먹다 말고 알은체했다.

“한운항공이면 국내 최고의 항공사 아니에요? 거기서 부기장이면 억대 연봉 받는 건 일도 아니겠네요.”

“그럼. 파일럿이 남자들한테는 꿈의 직업인걸.”

마 PD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는 쉽게 끝나질 않을 것 같았다. 경은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가서 전화하고 올게요.”

경은이 자리를 일어섰는데도 뒤에서는 한동안 그녀의 남자 친구 얘기가 계속됐다.

“근데 파일럿이면 다들 승무원이랑 결혼하는 거 아닌가요? 서로 같은 비행기를 자주 타다 보면…….”

“누가 그래? 오히려 서로의 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아서 꺼려한다고 했어. 보통 파일럿이 직업인 남자들은 말이야, 선봐서 비슷한 조건의 여자를 만나 결혼하거나 파일럿 되기 전부터 사귀어 온 애인과 결혼하더라고. 파일럿 되기까지 힘든 시간을 같이 견뎌 왔는데 그 정도 의리는 있어야지.”

유나와 수연의 말을 들으며 경은이 복도로 나왔다.

열어 놓은 복도 창문으로 봄바람이라고 하기에는 찬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몸을 파고드는 한기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힘든 시간을 같이 견뎌 왔는데 그 정도 의리는 있어야지.”



수연의 말이 슬며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함께해 왔던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 둘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도윤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업이 부도가 난 그해에 도윤은 한창 미국 비행 훈련원에서 유학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윤의 아버지는 거액의 빚을 남긴 채 뇌졸중으로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도윤의 어머니는 충격을 견디지 못해 쓰러지셨고 도윤의 늦둥이 남동생인 한도빈은 수능을 망쳤다.

아버지 장례에서 기절하다시피 울던 어머니와 동생을 달래고 돌아선 도윤은 그날 경은에게 이별을 얘기했다.

풍비박산이라는 말은 바로 도윤이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걸 잃고 빚까지 덤으로 떠안아야 했던 도윤은 경은에게 달리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이제는 사랑 같은 걸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도윤은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런 소리 말고 집안 수습이나 해.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얘기해 주고.”

“이경은.”

“안 헤어져. 못 헤어지겠어. 9년이야. 9년 동안 널 보고 웃었다고. 군대 갔을 때도 기다렸고 유학 갔을 때도 기다리기로 했었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기다릴게.”



그런 경은에게 도윤은 가족 앞에서도 보이지 못했던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던 그 겨울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눈 오는 하늘도, 거리에 가득 찬 자동차 배기가스도,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줄기도 전부 다 회색이었던 겨울을 어떻게 지나왔던지 계절은 어느새 두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문득 재킷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경은이 정신을 차렸다. 액정을 보니 할머니였다.

“네. 할머니.”

─주말에 올 거야?

“네. 일찍 들를게요. 선물도 좋은 걸로 준비했어요.”

─선물은 필요 없으니까, 도윤이랑 둘이 와. 맛있는 거 많이 해 놓고 있을게.

할머니의 전화를 끊고 잠시 액정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도윤에게 문자를 넣었다.



<주말에 같이 부천 갈래?>



답장은 바로 왔다.



<할머니 생신이시지? 그날 비행이 있긴 한데, 저녁쯤이면 맞춰 갈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다. 경은은 환하게 웃으며 도윤의 프로필 사진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 * *



“고생했네. 어서 들어와.”

미선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도윤에게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그동안 쉴 틈 없이 이어진 비행과 교육으로 한국에는 한 달 만에 들르는 아들이었다.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인지 도윤은 전보다 마른 듯했다.

“도빈이는요?”

“학교 갔어. 새 학기 개강한 지 얼마 안 돼서 요즘은 얼굴 보기 바빠.”

남편이 떠난 이듬해에 다시 수능을 봐서 대학에 들어간 둘째 아들 도빈은 건축학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제 아버지의 건설 사업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옆에서 지켜봤음에도 기어이 건축학을 택했을 때, 미선은 거세게 반대했었다.

그러나 다 큰 자식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고 도빈은 현재까지 별 탈 없이 다니고 있다.

“언제 도착했어?”

“월요일 새벽에요.”

오늘은 화요일이었다. 미선은 소파에 앉는 도윤을 보며 답이 정해진 물음을 건넸다.

“경은이한테 먼저 들렀구나.”

그러자 도윤이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섭섭한 기색을 한 제 엄마에게 도윤은 말했다.

“습관이 됐어요.”

비행이 끝나 돌아오면 언제나 본가보다 먼저 들르는 게 경은의 오피스텔이었고 이젠 그게 당연한 순서가 됐다. 그런 도윤을 탓해 봤지만 말을 듣질 않았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마음 따라 발길이 움직이는 거겠지. 미선도 이제는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지내시기는 문제없죠?”

도윤은 실내를 둘러보며 물었다. 15평 남짓한 빌라는 2년 전 경은의 도움으로 간신히 마련한 전세였다. 고급 아파트에서 살다가 좁다란 이곳에 이사 온 그 몇 달은 어머니도, 도빈도 무척 힘들어했다.

“꽤 적응됐어.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아직도 올라올 때는 다리가 아프긴 해.”

“잠시만 참으세요. 더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

“됐다. 이거라도 어디냐. 있을 데가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지.”

미선의 말을 들으며 도윤이 스카프를 꺼내 놓았다.

“이건 뭐냐?”

“선물. 도빈이 거는 뭐 살지 몰라서 그냥 면세점에서 샀어요.”

도빈의 몫으로 내놓은 건 전동 면도기였다. 해외 비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 올 줄 아는 도윤은 다정다감한 게 꼭 제 아버지를 닮았다. 미선은 흐뭇한 표정으로 스카프를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경은이 거는 사 왔겠지?”

“그럼요.”

어제 여성용 선글라스를 선물로 꺼내 놓자 경은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번 여름휴가 때는 반드시 그 선글라스를 쓰고 바닷가로 갈 거라고 계획까지 세웠다. 경은이 신나하던 모습이 떠올라 도윤은 기분이 좋아졌다.

“경은이한테 소홀하지 말고 잘해. 요즘은 그만한 여자도 없다.”

도윤이 그런 미선을 바라봤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둘의 만남을 반대하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아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미선이 겸연쩍게 웃었다.

“처음에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조건이 영 눈에 차지 않았다만, 마음이 예쁘잖아. 성실하고 열심히 살고.”

“어머니가 너무 늦게 아셨어요. 경은이가 어떤 여잔지.”

미선은 부정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고 한순간에 빚더미에 올라앉자 가깝게 지내던 친척들마저 모른 척 등을 돌렸던 그 겨울, 평소 그렇게도 하찮게만 여겼던 경은은 말없이 곁을 지켰다.

정신이 없는 그들 가족을 대신해 장례 절차를 진행했고 있을 곳을 알아봐 줬으며 이듬해에는 도빈의 대학 첫 등록금까지 내줬다. 한줄기 빛도 보이지 않던 그날들. 경은은 도윤을 버리지 않았고, 오갈 데 없는 그들 가족을 품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