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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뭐?”
“나도 너 모르고, 너도 나 모르고 공평하네. 그러니까 자료도 공평하게.”
정원은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좀 귀찮았지만 이 같잖은 것들과 상대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승재야, 무슨 말 좀 해 봐. 이 애 진짜 이상해. 어떻게 이렇게 경우가 없을 수가 있니?”
아무래도 시건방 1호의 이름이 승재인 것 같았다. 승재는 종이 뭉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걸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자료 정리해서 내일 저녁 7시까지 다시 여기로 모이는 걸로 하자.”
하지만 7시면 정원의 과외 아르바이트 시간이었다. 학생 사정으로 내일만 시간을 바꾼 것이었다.
“7시는 내가 약속이 있어.”
정원의 말에 밖으로 나가려던 여학생이 따지듯 말했다.
“우리도 시간 없어. 우리가 시간 나는 때가 그때뿐이야. 많은 사람한테 맞춰 줘야 하지 않을까? 자료 정리도 우리가 같이 하기로 했는데.”
정원은 열받았지만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6시는 안 돼?”
“응 안 돼. 나 약속 있어.”
“나도 약속 있어.”
정말 약속이 있는지 세 사람은 다들 약속이 있다며 킥킥댔다. 정원은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강의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내일 과외 시간을 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왜? 알바라도 가니?”
좀 전의 여학생이 비싸 보이는 가방을 고쳐 메며 물었다. 저 가방을 사려면 1년 동안 번 과외비를 꼬박 다 들이부어야 할 것이다.
정원은 너무 짜증이 났다.
‘이런 것들을 내가 왜 상대를 하고 있어야 할까? 그냥 과제 F 받고 말까?’
하지만 안 될 일이었다. 학기 마지막 과제인데 망치면 장학금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한테 지고 싶지도 않았다.
“더럽게 앵앵거리네.”
정원이 툭 뱉은 말에 쿡쿡 웃던 여학생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너 뭐라고 했어? 뭐? 더럽게?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릴. 야, 너한테 지금 얼마나 땀 냄새 많이 나는지 모르지? 누가 누구한테 더럽대?”
여학생은 정말 열받았는지 하얗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정원은 왠지 고소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한테.”
정원이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라희는 서슬 퍼런 정원의 눈빛에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자존심이 상한 라희는 친구들에게 구조의 눈빛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지혜는 정원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느라, 얄미운 석주는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승재야…….”
라희는 승재 앞에서 다른 여자애에게 눌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승재가 편을 들어 준다면 이까짓 것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승재는 석주의 귓속말을 듣느라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라희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다음 턱을 치켜들고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너 말 다 했어?”
한마디만 더 해 봐 어디. 내가 껍질까지 홀랑 다 벗겨 줄 테니까.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라희를 이제야 발견한 지혜가 슬그머니 다가와 팔을 붙들었다. 여차하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응.”
덤덤하게 튀어나온 정원의 대답에 라희도 지혜도 잠시 할 말을 잊고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정원이 뻥한 표정의 사람들을 뒤로하고 종이 꾸러미를 가방 속에 욱여넣으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7시, 여기.”
정원이 강의실을 나간 후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런 경우엔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정적을 깬 것은 바로 석주였다.
“크하하하하학! 크크큭! 라희 표정 관리 안 된다. 승재야. 라희 저런 표정 짓는 거 본 적 있냐?”
입 안에서 벌레가 터진 것 같은 표정을 한 라희는 정말 얼이 빠진 것 같았다. 라희의 기분을 알아챈 지혜가 어깨를 토닥였다.
“라희야…….”
하지만 지혜의 위로 따위가 라희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죽을힘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한참이 지난 후에야 충격에서 벗어난 라희는 친구들 들으란 듯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골이 잔뜩 나서 씩씩거리는 라희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었다.
“니들도 아까 한정원인가 하는 애가 하는 말 들었지? 어쩌면 애가 그렇게 몰상식하고 교양이 없을 수가 있지? 나는 정말 그런 유의 인간은 상종하고 싶지가 않아.”
생각하면 할수록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승재야, 나는 정말…….”
아까부터 돌림 노래처럼 반복되는 라희의 푸념에 승재는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눈치 빠른 석주가 달래 주면 좋으련만 석주는 뭐가 재미있는지 라희의 약을 바싹바싹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 그런데 한정원 정말 강력하더라. 나는 얼굴은 처음 봤거든. 예쁘긴 오지게 예쁘더라. 이마며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도 예쁘더라니까. 라희는 개껌이던데?”
능글거리는 석주의 말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라희가 있는 힘껏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석주가 아픈 다리를 붙들고 겅중거렸다.
“야! 이! 정신 나간 계집애를 봤나! 어딜 차! 으으윽! 아파! 너 이거 폭행이야. 폭행!”
“억울하면 고소하든지. 쳇!”
라희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는 석주의 등을 가방으로 한 대 더 후려친 후 승재가 앉아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승재야, 넌 내 편이지? 그렇지?”
“응.”
어릴 때와 다름없는 라희의 모습에 승재는 피식 웃음이 샜다. 승재의 미소에 만족한 라희는 똥 씹은 표정을 걷어 내고 평소의 발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
정원은 시간을 확인한 다음 학교 도서실로 향했다.
“에어컨, 에어컨.”
집에서 탈탈거리는 고물 선풍기 바람을 쐬느니 도서관의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자료 정리를 끝내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찬물을 끼얹은 듯 시원한 바람이 정원의 얼굴을 덮었다.
정원은 뿌옇게 흐려진 안경을 벗고 빈자리를 찾았다. 다행히 빈자리가 군데군데 보였다. 사람이 가장 적은 자리를 찾아 앉은 정원은 땀 때문에 젖은 모자를 벗어 가방 안에 넣었다.
“으으, 더워.”
머리카락을 손목에 있던 검은색 고무줄로 대충 묶어 올리던 정원은 맞은편에 앉은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멍한 얼굴로 보고 있던 그는 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저런 반응이 오히려 나았다.
정원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저를 흘끔거리는 남학생을 무시하고 가방에서 꺼낸 종이 뭉치를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종이 아깝게 프린트를 왜 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패거리를 떠올리며 정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과제만 아니면 그런 것들하고 엮일 일 따위는 없을 텐데. 빨리 끝내고 보지 말자.’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원의 집중력은 고도로 높아져서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료 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워드 작업을 위해 가방 안에 있는 노트북을 꺼내던 정원은 캔 커피 하나를 쭈뼛쭈뼛 놓는 남학생과 또 눈이 마주쳤다. 정원이 다른 반응 없이 저를 빤히 쳐다보자 이마에 여드름이 송송 솟고 코가 납작한 남학생이 변명 비슷한 걸 더듬더듬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제가 커, 커피가 하나 더 있어서요. 뭐 다, 다른 뜻은 없어요.”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는 듯 다른 손의 커피를 흔들던 남학생의 말꼬리가 점점 흐려지자 정원은 노트북을 가방에 다시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황급히 정원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땡큐.”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 버릴 줄 알았던 정원이 고맙다고 말하자 기분이 좋아진 남학생이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나가면 이 남학생이 따라올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해가 이미 진 후였지만 밖은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얼마나 더울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정원은 풀어진 운동화 끈을 고쳐 묶느라 잠시 멈추어 섰다. 스트레스 탓인지 다른 날보다 곱절은 더 피곤했다.
“얼른 가서 씻고 누웠으면 좋겠네.”
혼잣말을 하며 운동화 끈을 묶고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서는데 곁에 그림자가 느껴졌다. 좀 전의 그 남학생이었다.
정원의 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잡혔다. 왜 거기 서 있냐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아 모른 척 가려는데 그가 얼른 정원의 팔을 붙들었다.
“저기 잠시만요.”
정원은 짜증이 솟구쳐 눈썹이 저절로 올라갔다. 입술을 잘근대던 남학생은 잠시 주저하더니 정원의 손에 종이쪽지를 쥐여 주었다.
“제 친구가요……. 이걸 좀 전해 달라고 해서요.”
뭐지 이 찐따 같은 전개는?
잔뜩 인상을 쓴 정원을 보던 남학생은 죄인처럼 풀 죽은 모습으로 뒤편에 있는 다른 한 명을 가리켰다. 그러자 말쑥한 남학생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얘나 쟤나 참 답 안 나오는 것들이었다.
“뭐 어쩌라고.”
“네?”
“오늘따라 왜 다들 말을 시키지?”
정원은 혀를 끌끌 찬 후 커피를 따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빈 캔을 신경질적으로 콱콱 밟은 후 농구하듯 자판기 옆 수거함을 향해 집어 던졌다.
팅!
하지만 캔은 쓰레기통 모서리를 맞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에이씨.”
하는 수 없이 캔을 주운 정원은 분리수거함 안에 캔과 들고 있던 쪽지를 구겨서 버렸다. 그러자 화사하게 미소 짓던 남학생의 표정이 경악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커피 시원하네.”
그를 똑바로 보며 한마디 툭 던진 정원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뒤에서 남학생이 욕지거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찮아.”
*
멍하게 버스 차창 밖을 보고 있던 정원의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 하나가 불쑥 찾아왔다.
“엄마, 뭐라도 좀 먹어.”
크게 말하면 엄마가 가루로 변해 날아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여 정원이 작게 말했다.
정원은 엄마가 왜 밥을 먹지 않는지, 누구를 기다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원은 엄마가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아서 화가 났다.
“엄마는 왜 그렇게 아빠를 기다려? 엄마도 이제 엄마 인생 좀 찾아!”
“아니야, 정원아. 아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야. 지금은 좀 오해가 있어서 그런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빠가 지금 누구랑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래?”
정원은 다른 여자와 있는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엄마도, 엄마의 숨 쉬는 순간조차 아픔으로 만드는 아빠도 싫었다.
하지만 더 싫은 건 아빠를 쏙 빼닮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빈말로라도 아빠를 닮았다고 하는 사람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아무도 저에게서 아빠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으면 했다.
― 다음 정류장은…….
차창에 비친 아빠의 얼굴을 노려보다 정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려야 할 곳을 두 정거장이나 지나쳐 버렸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뒷문에서 내리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근처에 앉은 대여섯 살쯤 된 남자아이 하나가 엄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엄마, 저 누나 진짜 예뻐.”
“그러네, 정말 예쁘네. 연예인 같네.”
정원은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눌러쓰고 버스가 멈추어 서자마자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렸다.
*
“승재야, 너는 그런 애 어때? 얼굴만 믿고 사람들한테 함부로 대하는 애들 말이야. 어이가 없어서.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그런 애들 한 트럭으로 갖다줘도 승재는 눈 하나 깜빡 안 할걸? 석주라면 몰라도.”
라희는 홀짝이던 와인에 취기가 도는지 같은 이야기를 몇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지트로 쓰고 있는 곳은 미국으로 유학 간 지혜의 언니가 쓰던 오피스텔이었다.
“야, 라희 취했다. 어쩌지?”
지혜가 얼굴이 뻘게진 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라희를 보며 속삭였지만 석주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뒤처리는 승재가 하는 수밖에. 지금 라희한테 우리는 저기 있는 화분이나 다름없어.”
석주가 구석에서 시들어 가는 화분을 가리키며 들으라는 듯 말하자 라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승재의 어깨에 기댔다. 승재는 익숙하게 라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일으켜 세웠다.
“악! 내 눈! 눈 버렸어!”
석주가 과장되게 말하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너희들 약혼식 1년도 안 남았네. 부러워해야 하는 거 맞지?”
“라희 데려다주고 나는 집에 들어갈게.”
지혜가 물었지만 비틀거리는 라희를 부축하며 오피스텔을 나가는 승재의 표정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지혜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석주에게 바싹 다가갔다.
“야, 그런데 승재 이제 약혼해도 괜찮은 거야?”
그러자 석주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뚝뚝 흐르던 장난기를 순식간에 걷어 냈다.
“괜찮아야지. 그게 벌써 3년도 더 된 일인데…….”
“뭐?”
“나도 너 모르고, 너도 나 모르고 공평하네. 그러니까 자료도 공평하게.”
정원은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좀 귀찮았지만 이 같잖은 것들과 상대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승재야, 무슨 말 좀 해 봐. 이 애 진짜 이상해. 어떻게 이렇게 경우가 없을 수가 있니?”
아무래도 시건방 1호의 이름이 승재인 것 같았다. 승재는 종이 뭉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걸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자료 정리해서 내일 저녁 7시까지 다시 여기로 모이는 걸로 하자.”
하지만 7시면 정원의 과외 아르바이트 시간이었다. 학생 사정으로 내일만 시간을 바꾼 것이었다.
“7시는 내가 약속이 있어.”
정원의 말에 밖으로 나가려던 여학생이 따지듯 말했다.
“우리도 시간 없어. 우리가 시간 나는 때가 그때뿐이야. 많은 사람한테 맞춰 줘야 하지 않을까? 자료 정리도 우리가 같이 하기로 했는데.”
정원은 열받았지만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6시는 안 돼?”
“응 안 돼. 나 약속 있어.”
“나도 약속 있어.”
정말 약속이 있는지 세 사람은 다들 약속이 있다며 킥킥댔다. 정원은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강의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내일 과외 시간을 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왜? 알바라도 가니?”
좀 전의 여학생이 비싸 보이는 가방을 고쳐 메며 물었다. 저 가방을 사려면 1년 동안 번 과외비를 꼬박 다 들이부어야 할 것이다.
정원은 너무 짜증이 났다.
‘이런 것들을 내가 왜 상대를 하고 있어야 할까? 그냥 과제 F 받고 말까?’
하지만 안 될 일이었다. 학기 마지막 과제인데 망치면 장학금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한테 지고 싶지도 않았다.
“더럽게 앵앵거리네.”
정원이 툭 뱉은 말에 쿡쿡 웃던 여학생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너 뭐라고 했어? 뭐? 더럽게?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릴. 야, 너한테 지금 얼마나 땀 냄새 많이 나는지 모르지? 누가 누구한테 더럽대?”
여학생은 정말 열받았는지 하얗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정원은 왠지 고소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한테.”
정원이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라희는 서슬 퍼런 정원의 눈빛에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자존심이 상한 라희는 친구들에게 구조의 눈빛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지혜는 정원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느라, 얄미운 석주는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승재야…….”
라희는 승재 앞에서 다른 여자애에게 눌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승재가 편을 들어 준다면 이까짓 것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승재는 석주의 귓속말을 듣느라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라희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다음 턱을 치켜들고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너 말 다 했어?”
한마디만 더 해 봐 어디. 내가 껍질까지 홀랑 다 벗겨 줄 테니까.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라희를 이제야 발견한 지혜가 슬그머니 다가와 팔을 붙들었다. 여차하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응.”
덤덤하게 튀어나온 정원의 대답에 라희도 지혜도 잠시 할 말을 잊고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정원이 뻥한 표정의 사람들을 뒤로하고 종이 꾸러미를 가방 속에 욱여넣으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7시, 여기.”
정원이 강의실을 나간 후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런 경우엔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정적을 깬 것은 바로 석주였다.
“크하하하하학! 크크큭! 라희 표정 관리 안 된다. 승재야. 라희 저런 표정 짓는 거 본 적 있냐?”
입 안에서 벌레가 터진 것 같은 표정을 한 라희는 정말 얼이 빠진 것 같았다. 라희의 기분을 알아챈 지혜가 어깨를 토닥였다.
“라희야…….”
하지만 지혜의 위로 따위가 라희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죽을힘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한참이 지난 후에야 충격에서 벗어난 라희는 친구들 들으란 듯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골이 잔뜩 나서 씩씩거리는 라희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었다.
“니들도 아까 한정원인가 하는 애가 하는 말 들었지? 어쩌면 애가 그렇게 몰상식하고 교양이 없을 수가 있지? 나는 정말 그런 유의 인간은 상종하고 싶지가 않아.”
생각하면 할수록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승재야, 나는 정말…….”
아까부터 돌림 노래처럼 반복되는 라희의 푸념에 승재는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눈치 빠른 석주가 달래 주면 좋으련만 석주는 뭐가 재미있는지 라희의 약을 바싹바싹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 그런데 한정원 정말 강력하더라. 나는 얼굴은 처음 봤거든. 예쁘긴 오지게 예쁘더라. 이마며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도 예쁘더라니까. 라희는 개껌이던데?”
능글거리는 석주의 말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라희가 있는 힘껏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석주가 아픈 다리를 붙들고 겅중거렸다.
“야! 이! 정신 나간 계집애를 봤나! 어딜 차! 으으윽! 아파! 너 이거 폭행이야. 폭행!”
“억울하면 고소하든지. 쳇!”
라희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는 석주의 등을 가방으로 한 대 더 후려친 후 승재가 앉아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승재야, 넌 내 편이지? 그렇지?”
“응.”
어릴 때와 다름없는 라희의 모습에 승재는 피식 웃음이 샜다. 승재의 미소에 만족한 라희는 똥 씹은 표정을 걷어 내고 평소의 발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
정원은 시간을 확인한 다음 학교 도서실로 향했다.
“에어컨, 에어컨.”
집에서 탈탈거리는 고물 선풍기 바람을 쐬느니 도서관의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자료 정리를 끝내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찬물을 끼얹은 듯 시원한 바람이 정원의 얼굴을 덮었다.
정원은 뿌옇게 흐려진 안경을 벗고 빈자리를 찾았다. 다행히 빈자리가 군데군데 보였다. 사람이 가장 적은 자리를 찾아 앉은 정원은 땀 때문에 젖은 모자를 벗어 가방 안에 넣었다.
“으으, 더워.”
머리카락을 손목에 있던 검은색 고무줄로 대충 묶어 올리던 정원은 맞은편에 앉은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멍한 얼굴로 보고 있던 그는 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저런 반응이 오히려 나았다.
정원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저를 흘끔거리는 남학생을 무시하고 가방에서 꺼낸 종이 뭉치를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종이 아깝게 프린트를 왜 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패거리를 떠올리며 정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과제만 아니면 그런 것들하고 엮일 일 따위는 없을 텐데. 빨리 끝내고 보지 말자.’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원의 집중력은 고도로 높아져서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료 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워드 작업을 위해 가방 안에 있는 노트북을 꺼내던 정원은 캔 커피 하나를 쭈뼛쭈뼛 놓는 남학생과 또 눈이 마주쳤다. 정원이 다른 반응 없이 저를 빤히 쳐다보자 이마에 여드름이 송송 솟고 코가 납작한 남학생이 변명 비슷한 걸 더듬더듬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제가 커, 커피가 하나 더 있어서요. 뭐 다, 다른 뜻은 없어요.”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는 듯 다른 손의 커피를 흔들던 남학생의 말꼬리가 점점 흐려지자 정원은 노트북을 가방에 다시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황급히 정원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땡큐.”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 버릴 줄 알았던 정원이 고맙다고 말하자 기분이 좋아진 남학생이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나가면 이 남학생이 따라올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해가 이미 진 후였지만 밖은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얼마나 더울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정원은 풀어진 운동화 끈을 고쳐 묶느라 잠시 멈추어 섰다. 스트레스 탓인지 다른 날보다 곱절은 더 피곤했다.
“얼른 가서 씻고 누웠으면 좋겠네.”
혼잣말을 하며 운동화 끈을 묶고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서는데 곁에 그림자가 느껴졌다. 좀 전의 그 남학생이었다.
정원의 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잡혔다. 왜 거기 서 있냐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아 모른 척 가려는데 그가 얼른 정원의 팔을 붙들었다.
“저기 잠시만요.”
정원은 짜증이 솟구쳐 눈썹이 저절로 올라갔다. 입술을 잘근대던 남학생은 잠시 주저하더니 정원의 손에 종이쪽지를 쥐여 주었다.
“제 친구가요……. 이걸 좀 전해 달라고 해서요.”
뭐지 이 찐따 같은 전개는?
잔뜩 인상을 쓴 정원을 보던 남학생은 죄인처럼 풀 죽은 모습으로 뒤편에 있는 다른 한 명을 가리켰다. 그러자 말쑥한 남학생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얘나 쟤나 참 답 안 나오는 것들이었다.
“뭐 어쩌라고.”
“네?”
“오늘따라 왜 다들 말을 시키지?”
정원은 혀를 끌끌 찬 후 커피를 따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빈 캔을 신경질적으로 콱콱 밟은 후 농구하듯 자판기 옆 수거함을 향해 집어 던졌다.
팅!
하지만 캔은 쓰레기통 모서리를 맞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에이씨.”
하는 수 없이 캔을 주운 정원은 분리수거함 안에 캔과 들고 있던 쪽지를 구겨서 버렸다. 그러자 화사하게 미소 짓던 남학생의 표정이 경악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커피 시원하네.”
그를 똑바로 보며 한마디 툭 던진 정원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뒤에서 남학생이 욕지거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찮아.”
*
멍하게 버스 차창 밖을 보고 있던 정원의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 하나가 불쑥 찾아왔다.
“엄마, 뭐라도 좀 먹어.”
크게 말하면 엄마가 가루로 변해 날아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여 정원이 작게 말했다.
정원은 엄마가 왜 밥을 먹지 않는지, 누구를 기다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원은 엄마가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아서 화가 났다.
“엄마는 왜 그렇게 아빠를 기다려? 엄마도 이제 엄마 인생 좀 찾아!”
“아니야, 정원아. 아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야. 지금은 좀 오해가 있어서 그런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빠가 지금 누구랑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래?”
정원은 다른 여자와 있는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엄마도, 엄마의 숨 쉬는 순간조차 아픔으로 만드는 아빠도 싫었다.
하지만 더 싫은 건 아빠를 쏙 빼닮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빈말로라도 아빠를 닮았다고 하는 사람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아무도 저에게서 아빠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으면 했다.
― 다음 정류장은…….
차창에 비친 아빠의 얼굴을 노려보다 정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려야 할 곳을 두 정거장이나 지나쳐 버렸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뒷문에서 내리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근처에 앉은 대여섯 살쯤 된 남자아이 하나가 엄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엄마, 저 누나 진짜 예뻐.”
“그러네, 정말 예쁘네. 연예인 같네.”
정원은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눌러쓰고 버스가 멈추어 서자마자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렸다.
*
“승재야, 너는 그런 애 어때? 얼굴만 믿고 사람들한테 함부로 대하는 애들 말이야. 어이가 없어서.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그런 애들 한 트럭으로 갖다줘도 승재는 눈 하나 깜빡 안 할걸? 석주라면 몰라도.”
라희는 홀짝이던 와인에 취기가 도는지 같은 이야기를 몇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지트로 쓰고 있는 곳은 미국으로 유학 간 지혜의 언니가 쓰던 오피스텔이었다.
“야, 라희 취했다. 어쩌지?”
지혜가 얼굴이 뻘게진 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라희를 보며 속삭였지만 석주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뒤처리는 승재가 하는 수밖에. 지금 라희한테 우리는 저기 있는 화분이나 다름없어.”
석주가 구석에서 시들어 가는 화분을 가리키며 들으라는 듯 말하자 라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승재의 어깨에 기댔다. 승재는 익숙하게 라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일으켜 세웠다.
“악! 내 눈! 눈 버렸어!”
석주가 과장되게 말하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너희들 약혼식 1년도 안 남았네. 부러워해야 하는 거 맞지?”
“라희 데려다주고 나는 집에 들어갈게.”
지혜가 물었지만 비틀거리는 라희를 부축하며 오피스텔을 나가는 승재의 표정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지혜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석주에게 바싹 다가갔다.
“야, 그런데 승재 이제 약혼해도 괜찮은 거야?”
그러자 석주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뚝뚝 흐르던 장난기를 순식간에 걷어 냈다.
“괜찮아야지. 그게 벌써 3년도 더 된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