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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하지만 석주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승재도 되게 많이 변했어. 예전엔 너만큼이나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고, 다정했는데.”
“그렇게 마음을 다쳤는데 변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어?”
“그런가…….”
“우리도 이제 가자. 아무도 없는 오피스텔에서 둘이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냐?”
석주가 짓궂은 표정으로 다가갔지만 지혜는 멀뚱했다.
“무슨 일?”
“어휴, 내가 꼬맹이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말자.”
석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지혜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먹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아프잖아!”
꿀밤을 맞은 지혜가 소파에 있던 쿠션을 던졌지만 석주는 재빠르게 피하며 혀를 끌끌 찼다.
“이렇게 둔해서야…….”
*
취한 딸을 부축하며 들어온 승재를 맞이하는 황 여사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언제 보아도 승재는 라희의 신랑감으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신우그룹의 셋째 아들이 아닌가.
승재는 신우의 세 아들 중 가장 명석하고, 의젓해서 소문난 신랑감이었기에 어려서부터 승재와 친하게 지내던 라희가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승재가 고생이 많네. 전화했으면 기사를 보냈을 텐데.”
황 여사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친절한 미소를 짜냈다.
“아닙니다. 들어가는 길에 데려다주면 되는걸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 권하고 싶은데 시간이 많이 늦어서 그러지도 못하겠네. 너도 어서 들어가. 어머님이 또 걱정하시겠다.”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승재는 소파에 기댄 라희를 흘끔 쳐다본 후 황 여사에게 꾸벅 인사했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취한 것을 보면 오늘 일이 많이 속상했던 모양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자연스럽게 정원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리고 승재는 정원과 많이 닮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쓰게 미소를 지었다.
다 똑같은 것들…….
*
Rrrrrrrr.
정원은 베개 근처에서 정신없이 울려 대는 휴대폰 알람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어제 다른 날보다 더 많이 걷고 스트레스를 받았더니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들었었다.
“으으으으으! 피곤해.”
스트레칭을 하는 정원의 입에서 저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오늘 수업도 별로 없으니까 자료 정리 끝내야겠다.”
정원은 어제의 그 남학생을 떠올리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자깨나 울렸을 것 같은 반질반질한 얼굴로 짓는 가식적인 미소라니. 절대 상대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덕분에 어제 자료 정리를 다 하지 못했다.
정원은 그를 떠올리며 기분 나빠 하다 아침부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욕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았다.
“머리가 너무 많이 길었네. 대충 잘라야겠다.”
집에서 대충 자르면 그뿐이었다. 머리를 말린 후 옷장 문을 활짝 연 정원의 눈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흰색 티셔츠와 검은색 티셔츠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뭘 입지?”
정원이 흥얼거리며 걸려 있던 흰색 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정원의 옷이라곤 흰색 티셔츠 4장과 검은색 티셔츠 3장, 그리고 청바지 3개와 반바지 2개가 전부였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원래 옷에 대한 욕심도 없는 사람이라 불편한 것도 없었다.
흔한 동아리 하나 들지 않은 정원은 학교와 과외 아르바이트, 집,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가끔 언주가 억지로 불러내지 않으면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을 것이다. 정원이 이렇게까지 변한 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끝낸 이후였다.
하지만 정원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나름 열심히 고른 옷을 입는 정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
“야, 저기 맨 앞에 앉아 있는 거 한정원 아니냐?”
석주는 맨 앞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언가를 열심히 끼적이고 있는 정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네.”
“너 한정원이 얼굴 자세히 봤냐? 안 봤지? 와아아. 나는 진짜 이 세상에서 우리 서희가 제일 예쁜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더라. 쟤는 진짜 대박이야. 그런데 왜 저러고 다니지?”
석주가 의아하다는 듯 갸웃거리자 승재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모르지. 너 같은 애가 이렇게 관심 가져 주길 바라는지도.”
“아닌 것 같은데. 어제의 그 아우라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어.”
한정원은 관심 밖의 일이라 승재는 석주의 말을 흘려들었다.
“내가 어제 느낀 바로는 너랑 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거든.”
눈치 백 단인 석주가 하는 말에 승재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반한 외모만 믿고 우리랑 엮여 보려는 심산이겠지. 관심 없는 척, 고고한 척, 가식 떨면서.
하지만,
“진짜 우리를 싫어하는 것 같던데. 간만에 보는 냉소적인 눈빛이었어. 크으으! 난 왜 그런 눈빛에 끌리나 몰라.”
석주의 설레발에 승재는 김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퍽이나.”
“아니야, 진짜라니까. 나한테 들러붙은 여자애들 한두 번 봤냐? 내 촉이 맞을걸? 한정원 쟤는.”
“쟤는?”
“우릴 싫어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승재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저러다가도 명품 백이나 보석 따위를 손에 쥐여 주면 질척하게 매달리겠지.
정원의 뒷모습을 보는 승재의 눈에 경멸의 빛이 스쳤다.
*
틈틈이 자료 정리를 마친 정원은 불편한 만남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바라며 약속 장소인 강의실로 들어섰다.
20분 정도 빨리 도착한 정원은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정리해 온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런 걸로 괜히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시간의 흐름을 느낀 정원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7시 15분이 지났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원은 가볍게 한숨을 쉰 다음 다시 자료를 살폈다.
30분쯤 지났을까.
강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시건방 1, 2와 여학생 두 명이 왁자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누구 하나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정원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라희와 눈이 마주치자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라희는 승재의 팔짱을 끼고 들어오다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정원을 발견했다.
“우리가 좀 늦었어. 이번에는 시간 맞춰서 왔네? 지난번처럼 늦게 올 것 같아서 우리도 늦게 왔지. 마냥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라서 말이야.”
라희는 정원과 떨어진 곳에 앉으며 거만하게 말했다.
여전히 흰 티셔츠와 청바지, 뿔테 안경을 쓴 촌스러운 여자애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싫어하는 동물을 억지로 구경하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좋아. 나도 지난번에 늦었으니까. 다음번엔 시간을 지켜 줬음 좋겠어.”
정원은 한마디 하려다 싸우는 것도 괜한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에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 우리가 많이 늦었지.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난 줄 몰랐어.”
그나마 지혜가 사과를 하자 정원은 마음이 좀 풀렸다. 하지만 노골적인 저들의 눈빛을 대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금만 참자. 그냥 지나치자.’
정원은 숨을 고르며 정리해 온 자료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정원이 막 라희에게 자료를 건넸을 때였다.
“그런데 너는 옷이 그거밖에 없니? 어제도 그 흰 티셔츠였는데 오늘도 그 티셔츠네?”
라희를 물끄러미 보던 정원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더니 관찰력도 없구나?”
“뭐?”
“어제는 스마일 하나, 오늘은 스마일 두 개. 다르잖아 멍청아.”
처음 라희는 정원이 한 말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게 지금 나더러 뭐라고 한 거야?’
라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한동안 정원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정원은 라희의 반응 때문에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몇 초간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멍청이’라는 단어였다.
“뭐야, 이 반응은. 설마 충격이라도 받은 거야?”
정원은 설마 다른 사람들도 같은 표정으로 보고 있나 싶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지혜는 라희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고, 뺀질뺀질 장난기로 똘똘 뭉친 것 같은 시건방 2호는 뭐가 재미있는지 웃느라 숨 쉬는 것도 까먹은 것 같았다.
그리고 문제의 시건방 1호.
라희를 장식품처럼 팔에 매달고 들어왔던 승재라는 녀석이 주변의 공기마저 얼려 버릴 것처럼 살벌하게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녀석들은 뭐지? 온실 속에서만 자라서 이 정도의 언어에도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그런 아이들이었던 건가?
“아, 하하하하! 미치겠네. 와! 한정원 너 완전 골 때리는 애구나! 나 정말 너 맘에 든다. 우리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자.”
석주가 숨넘어가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뭐가 재미있는지, 어느 포인트에서 웃음이 터진 건지 정원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들과 시간을 보낼수록 저도 이상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자료는?”
정원은 아직도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석주를 무시하고 겨우 턱을 제자리로 갖다 놓은 라희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라희는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 이것들을 어떻게 하지?’
정원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정말 과제를 포기해야 하는 걸까? 잠깐 고민하고 있는데 책상 앞에 또 다른 정리 자료가 턱 놓였다.
정원은 반가운 마음에 자료를 휘리릭 넘겼다.
“누구 거지?”
“내 거.”
대충 봐도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라 궁금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원의 말에 승재가 짧게 대답했다.
“앗! 내 것도 있어.”
뒤늦게 생각났는지 바보처럼 웃기만 하던 석주도 가방 안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곧이어 지혜도 우물쭈물 자료를 꺼내 들었다.
“라희야, 네 건?”
저를 향해 살벌하게 쏘아 대던 눈빛과는 정반대로 라희를 향한 승재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따뜻했다.
그러자 지금껏 정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쏘아보던 라희가 자료를 꺼내 옆에 있는 지혜에게 건넸다.
“이거, 쟤한테 전달해 줘.”
날라리 개떡 같은 것들이지만 정리라도 해 오니 다행이었다.
네 명이 정리해 온 자료는 덧붙일 것도 없이 훌륭했다. 정원은 조금 전까지 이 조모임을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고 열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너는 나한테 사과 안 하니?”
날 선 목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뚫고 정원에게 날아왔다. 아직도 ‘멍청이’라는 단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라면 이깟 단어에도 세상이 끝난 것처럼 반응을 할까?
정원은 마치 순진한 아이를 향해 쌍욕을 퍼부은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하지만 사과는 라희가 먼저 해야 한다 생각했다.
“네가 나한테 먼저 사과하면.”
“뭐? 내가 왜 너한테 사과를 해?”
정원은 깜짝 놀라 라희를 쳐다봤다. 그녀는 정말 하얗게 질려서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 정말 모르는구나.”
정원은 라희가 일부러 사과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사과를 해야 할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나는 어떤 인간들과 한 공간에 있는 걸까?
“내가 뭘 몰라? 내가 보기엔 네가 정말 뭘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왜 너한테 멍청이라고 했는지 알아 오면 너한테 사과할게. 됐지?”
“스마일! 그 스마일 때문이잖아! 내가 한 개인지 두 개인지 어떻게 알아? 그깟 거지 같은 티셔츠를 내가 어떻게 구분하냐고!”
정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껏 만난 사람 중에 이런 강적이 있었던가? 완전 상또라이 아닌가.
정원은 잠시 숨을 고른 후 그나마 이 중 제정신으로 보이는 승재를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이런 걸로 쓸데없이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아. 너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분일초가 아까운 사람이야.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하고 있는 것 자체도 너무 짜증 나. 어떡할래? 오늘 조별 과제 의논할 거야? 말 거야?”
승재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눈까지 벌게진 라희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정원만큼이나 차분한 말투로 라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라희야, 이건 한정원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 시간도 별로 없는데 빨리 진행하자. 둘의 문제는 따로 시간을 내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러자 어떤 것으로도 달래지지 않을 것 같던 라희의 벌게진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런 신기한 현상을 봤나.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끼리끼리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승재의 말을 시작으로 조별 모임은 놀랄 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정원이라는 애는 분명 우리를 싫어해.’
누가 할 소릴.
승재는 크지 않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자료를 요약하여 말하는 정원을 쳐다보다 고개를 든 정원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승재는 당황했지만 정원은 건조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잠시 응시하다 자료를 마저 읽었다.
“그럼 다음 주에 발표 연습 한번 하게 다시 모이자. 정원아 네 폰 번호 좀 알려 줄래? 다음 주에 우리가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중간에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석주가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묻자 라희가 아니꼽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쳇! 언제부터 친했다고 저래?”
정원은 잠시 망설이다 석주가 내민 휴대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되도록이면 카톡이나 문자로 연락해.”
“왜? 나는 통화가 더 좋은데?”
석주가 능글능글 웃으며 말하자 정원의 눈썹이 참을 수 없다는 듯 꿈틀댔다.
“그냥 다음 모임 시간만 보내.”
최근 들어 이렇게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원의 피로도는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입도 아프고 땍땍거리는 소리를 듣느라 귀도 아팠다.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
석주는 돌아서는 정원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하지만 석주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승재도 되게 많이 변했어. 예전엔 너만큼이나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고, 다정했는데.”
“그렇게 마음을 다쳤는데 변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어?”
“그런가…….”
“우리도 이제 가자. 아무도 없는 오피스텔에서 둘이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냐?”
석주가 짓궂은 표정으로 다가갔지만 지혜는 멀뚱했다.
“무슨 일?”
“어휴, 내가 꼬맹이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말자.”
석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지혜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먹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아프잖아!”
꿀밤을 맞은 지혜가 소파에 있던 쿠션을 던졌지만 석주는 재빠르게 피하며 혀를 끌끌 찼다.
“이렇게 둔해서야…….”
*
취한 딸을 부축하며 들어온 승재를 맞이하는 황 여사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언제 보아도 승재는 라희의 신랑감으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신우그룹의 셋째 아들이 아닌가.
승재는 신우의 세 아들 중 가장 명석하고, 의젓해서 소문난 신랑감이었기에 어려서부터 승재와 친하게 지내던 라희가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승재가 고생이 많네. 전화했으면 기사를 보냈을 텐데.”
황 여사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친절한 미소를 짜냈다.
“아닙니다. 들어가는 길에 데려다주면 되는걸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 권하고 싶은데 시간이 많이 늦어서 그러지도 못하겠네. 너도 어서 들어가. 어머님이 또 걱정하시겠다.”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승재는 소파에 기댄 라희를 흘끔 쳐다본 후 황 여사에게 꾸벅 인사했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취한 것을 보면 오늘 일이 많이 속상했던 모양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자연스럽게 정원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리고 승재는 정원과 많이 닮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쓰게 미소를 지었다.
다 똑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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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rrrrrrr.
정원은 베개 근처에서 정신없이 울려 대는 휴대폰 알람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어제 다른 날보다 더 많이 걷고 스트레스를 받았더니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들었었다.
“으으으으으! 피곤해.”
스트레칭을 하는 정원의 입에서 저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오늘 수업도 별로 없으니까 자료 정리 끝내야겠다.”
정원은 어제의 그 남학생을 떠올리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자깨나 울렸을 것 같은 반질반질한 얼굴로 짓는 가식적인 미소라니. 절대 상대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덕분에 어제 자료 정리를 다 하지 못했다.
정원은 그를 떠올리며 기분 나빠 하다 아침부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욕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았다.
“머리가 너무 많이 길었네. 대충 잘라야겠다.”
집에서 대충 자르면 그뿐이었다. 머리를 말린 후 옷장 문을 활짝 연 정원의 눈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흰색 티셔츠와 검은색 티셔츠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뭘 입지?”
정원이 흥얼거리며 걸려 있던 흰색 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정원의 옷이라곤 흰색 티셔츠 4장과 검은색 티셔츠 3장, 그리고 청바지 3개와 반바지 2개가 전부였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원래 옷에 대한 욕심도 없는 사람이라 불편한 것도 없었다.
흔한 동아리 하나 들지 않은 정원은 학교와 과외 아르바이트, 집,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가끔 언주가 억지로 불러내지 않으면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을 것이다. 정원이 이렇게까지 변한 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끝낸 이후였다.
하지만 정원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나름 열심히 고른 옷을 입는 정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
“야, 저기 맨 앞에 앉아 있는 거 한정원 아니냐?”
석주는 맨 앞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언가를 열심히 끼적이고 있는 정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네.”
“너 한정원이 얼굴 자세히 봤냐? 안 봤지? 와아아. 나는 진짜 이 세상에서 우리 서희가 제일 예쁜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더라. 쟤는 진짜 대박이야. 그런데 왜 저러고 다니지?”
석주가 의아하다는 듯 갸웃거리자 승재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모르지. 너 같은 애가 이렇게 관심 가져 주길 바라는지도.”
“아닌 것 같은데. 어제의 그 아우라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어.”
한정원은 관심 밖의 일이라 승재는 석주의 말을 흘려들었다.
“내가 어제 느낀 바로는 너랑 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거든.”
눈치 백 단인 석주가 하는 말에 승재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반한 외모만 믿고 우리랑 엮여 보려는 심산이겠지. 관심 없는 척, 고고한 척, 가식 떨면서.
하지만,
“진짜 우리를 싫어하는 것 같던데. 간만에 보는 냉소적인 눈빛이었어. 크으으! 난 왜 그런 눈빛에 끌리나 몰라.”
석주의 설레발에 승재는 김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퍽이나.”
“아니야, 진짜라니까. 나한테 들러붙은 여자애들 한두 번 봤냐? 내 촉이 맞을걸? 한정원 쟤는.”
“쟤는?”
“우릴 싫어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승재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저러다가도 명품 백이나 보석 따위를 손에 쥐여 주면 질척하게 매달리겠지.
정원의 뒷모습을 보는 승재의 눈에 경멸의 빛이 스쳤다.
*
틈틈이 자료 정리를 마친 정원은 불편한 만남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바라며 약속 장소인 강의실로 들어섰다.
20분 정도 빨리 도착한 정원은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정리해 온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런 걸로 괜히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시간의 흐름을 느낀 정원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7시 15분이 지났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원은 가볍게 한숨을 쉰 다음 다시 자료를 살폈다.
30분쯤 지났을까.
강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시건방 1, 2와 여학생 두 명이 왁자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누구 하나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정원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라희와 눈이 마주치자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라희는 승재의 팔짱을 끼고 들어오다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정원을 발견했다.
“우리가 좀 늦었어. 이번에는 시간 맞춰서 왔네? 지난번처럼 늦게 올 것 같아서 우리도 늦게 왔지. 마냥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라서 말이야.”
라희는 정원과 떨어진 곳에 앉으며 거만하게 말했다.
여전히 흰 티셔츠와 청바지, 뿔테 안경을 쓴 촌스러운 여자애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싫어하는 동물을 억지로 구경하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좋아. 나도 지난번에 늦었으니까. 다음번엔 시간을 지켜 줬음 좋겠어.”
정원은 한마디 하려다 싸우는 것도 괜한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에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 우리가 많이 늦었지.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난 줄 몰랐어.”
그나마 지혜가 사과를 하자 정원은 마음이 좀 풀렸다. 하지만 노골적인 저들의 눈빛을 대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금만 참자. 그냥 지나치자.’
정원은 숨을 고르며 정리해 온 자료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정원이 막 라희에게 자료를 건넸을 때였다.
“그런데 너는 옷이 그거밖에 없니? 어제도 그 흰 티셔츠였는데 오늘도 그 티셔츠네?”
라희를 물끄러미 보던 정원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더니 관찰력도 없구나?”
“뭐?”
“어제는 스마일 하나, 오늘은 스마일 두 개. 다르잖아 멍청아.”
처음 라희는 정원이 한 말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게 지금 나더러 뭐라고 한 거야?’
라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한동안 정원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정원은 라희의 반응 때문에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몇 초간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멍청이’라는 단어였다.
“뭐야, 이 반응은. 설마 충격이라도 받은 거야?”
정원은 설마 다른 사람들도 같은 표정으로 보고 있나 싶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지혜는 라희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고, 뺀질뺀질 장난기로 똘똘 뭉친 것 같은 시건방 2호는 뭐가 재미있는지 웃느라 숨 쉬는 것도 까먹은 것 같았다.
그리고 문제의 시건방 1호.
라희를 장식품처럼 팔에 매달고 들어왔던 승재라는 녀석이 주변의 공기마저 얼려 버릴 것처럼 살벌하게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녀석들은 뭐지? 온실 속에서만 자라서 이 정도의 언어에도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그런 아이들이었던 건가?
“아, 하하하하! 미치겠네. 와! 한정원 너 완전 골 때리는 애구나! 나 정말 너 맘에 든다. 우리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자.”
석주가 숨넘어가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뭐가 재미있는지, 어느 포인트에서 웃음이 터진 건지 정원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들과 시간을 보낼수록 저도 이상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자료는?”
정원은 아직도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석주를 무시하고 겨우 턱을 제자리로 갖다 놓은 라희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라희는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 이것들을 어떻게 하지?’
정원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정말 과제를 포기해야 하는 걸까? 잠깐 고민하고 있는데 책상 앞에 또 다른 정리 자료가 턱 놓였다.
정원은 반가운 마음에 자료를 휘리릭 넘겼다.
“누구 거지?”
“내 거.”
대충 봐도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라 궁금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원의 말에 승재가 짧게 대답했다.
“앗! 내 것도 있어.”
뒤늦게 생각났는지 바보처럼 웃기만 하던 석주도 가방 안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곧이어 지혜도 우물쭈물 자료를 꺼내 들었다.
“라희야, 네 건?”
저를 향해 살벌하게 쏘아 대던 눈빛과는 정반대로 라희를 향한 승재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따뜻했다.
그러자 지금껏 정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쏘아보던 라희가 자료를 꺼내 옆에 있는 지혜에게 건넸다.
“이거, 쟤한테 전달해 줘.”
날라리 개떡 같은 것들이지만 정리라도 해 오니 다행이었다.
네 명이 정리해 온 자료는 덧붙일 것도 없이 훌륭했다. 정원은 조금 전까지 이 조모임을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고 열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너는 나한테 사과 안 하니?”
날 선 목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뚫고 정원에게 날아왔다. 아직도 ‘멍청이’라는 단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라면 이깟 단어에도 세상이 끝난 것처럼 반응을 할까?
정원은 마치 순진한 아이를 향해 쌍욕을 퍼부은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하지만 사과는 라희가 먼저 해야 한다 생각했다.
“네가 나한테 먼저 사과하면.”
“뭐? 내가 왜 너한테 사과를 해?”
정원은 깜짝 놀라 라희를 쳐다봤다. 그녀는 정말 하얗게 질려서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 정말 모르는구나.”
정원은 라희가 일부러 사과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사과를 해야 할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나는 어떤 인간들과 한 공간에 있는 걸까?
“내가 뭘 몰라? 내가 보기엔 네가 정말 뭘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왜 너한테 멍청이라고 했는지 알아 오면 너한테 사과할게. 됐지?”
“스마일! 그 스마일 때문이잖아! 내가 한 개인지 두 개인지 어떻게 알아? 그깟 거지 같은 티셔츠를 내가 어떻게 구분하냐고!”
정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껏 만난 사람 중에 이런 강적이 있었던가? 완전 상또라이 아닌가.
정원은 잠시 숨을 고른 후 그나마 이 중 제정신으로 보이는 승재를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이런 걸로 쓸데없이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아. 너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분일초가 아까운 사람이야.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하고 있는 것 자체도 너무 짜증 나. 어떡할래? 오늘 조별 과제 의논할 거야? 말 거야?”
승재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눈까지 벌게진 라희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정원만큼이나 차분한 말투로 라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라희야, 이건 한정원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 시간도 별로 없는데 빨리 진행하자. 둘의 문제는 따로 시간을 내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러자 어떤 것으로도 달래지지 않을 것 같던 라희의 벌게진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런 신기한 현상을 봤나.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끼리끼리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승재의 말을 시작으로 조별 모임은 놀랄 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정원이라는 애는 분명 우리를 싫어해.’
누가 할 소릴.
승재는 크지 않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자료를 요약하여 말하는 정원을 쳐다보다 고개를 든 정원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승재는 당황했지만 정원은 건조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잠시 응시하다 자료를 마저 읽었다.
“그럼 다음 주에 발표 연습 한번 하게 다시 모이자. 정원아 네 폰 번호 좀 알려 줄래? 다음 주에 우리가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중간에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석주가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묻자 라희가 아니꼽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쳇! 언제부터 친했다고 저래?”
정원은 잠시 망설이다 석주가 내민 휴대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되도록이면 카톡이나 문자로 연락해.”
“왜? 나는 통화가 더 좋은데?”
석주가 능글능글 웃으며 말하자 정원의 눈썹이 참을 수 없다는 듯 꿈틀댔다.
“그냥 다음 모임 시간만 보내.”
최근 들어 이렇게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원의 피로도는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입도 아프고 땍땍거리는 소리를 듣느라 귀도 아팠다.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
석주는 돌아서는 정원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