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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아니.”

보통의 여자애들 같으면 ‘뭔데?’라는 반응이 먼저 나와야 하는데 이 반응은 평소 승재의 것과 매우 비슷했다. 석주는 정원이라는 아이가 더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너 누구 닮았다는 소리 안 들었어? 너는 네가 되게 예쁘다는 거 알고 있지? 그래서 이렇게 도도하게 구는 거지?”

분명 질문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을 주절거리는 석주가 정원은 질릴 것 같았다.

“…….”

정원은 석주를 무시하면서 계속 앞을 향해 걸어갔다. 빠르게 걸었지만 정원보다 한참 큰 석주는 성큼성큼 잘도 따라왔다.

“나는 너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정원은 더 참지 못하고 멈추어 섰다. 석주는 정원의 곁을 지나쳤다 얼른 옆으로 다가왔다.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말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건 네 사정이고.”

석주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다 살벌한 정원의 눈빛에 순간 멈칫했다. 우어어, 무서운데?

“다음 모임 날짜, 시간.”

“그것만 보내라고? 알았어. 알았어. 어유, 큰 눈으로 노려보니까 진짜 무섭다야. 나 기절할 뻔.”

석주는 정원이라는 사람에게 점점 흥미가 생겼다.

“야, 넌 뭘 그렇게 쫄래쫄래 따라가? 쟤가 뭐래? 나한테 사과한대?”

묘한 표정으로 되돌아오는 석주를 보며 팔짱을 낀 라희가 물었다. 궁금한 건 지혜와 승재도 마찬가지. 대답을 기다리는 친구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물론 승재는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저 애 뭐지?”

“왜? 뭐라는데?”

석주에게서 대답 대신 혼잣말 같은 의문문이 흘러나오자 대답을 기다리던 라희는 더 조급해졌다.

“별말 안 했어. 그냥…….”

“그냥?”

“조별 모임 날짜, 시간.”

“엥? 그게 뭐야?”

“그 일 말고 다른 걸로 연락하면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가더라.”

석주는 무섭다는 듯 손바닥으로 팔을 비볐지만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석주가 승재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쟤 꼭, 3년 전 네 모습 같더라. 되게 무서워. 눈빛에 찔려 죽을 뻔.”

석주의 말에 승재는 미간을 찌푸리고 정원의 뒷모습을 한동안 응시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정원의 뒷모습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



살얼음판 같던 조별 모임이 있은 지도 벌써 삼 일이나 지났다. 승재는 의도하지 않은 장면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정원의 건조한 눈빛이 무척 거슬리고 짜증이 났다.

왜 한정원이 이토록 신경을 긁는지 승재는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이름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신이 싫었다.

“승재야. 너희 조 모임은 잘돼 가?”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는 승재를 발견한 태현이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하지만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한 승재는 답이 없었다.

“조별 모임 잘 되냐고.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불러도 몰라?”

태현은 대학에 와서 알게 된 친구였다. 대부분 신우그룹 셋째라는 소문을 들으면 멀어지거나 어색해졌지만 태현은 승재의 집안에 대해 가끔씩 농담거리로 삼을 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냥 그렇지 뭐.”

승재의 재미없는 대답에 태현은 무료해 죽겠다는 듯 기지개를 쭈욱 폈다.

“으으으으으! 우리 조는 완전히 말아먹었어.”

“왜? 다들 열심히 하는 것 같던데.”

“그게 문제야, 다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태현은 생각만 해도 답답한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찌나 이기적인지 좋은 파트를 차지하려고 눈이 벌게서 나는 말 한마디 못 꺼내고 있다니까.”

“열심히 하면 좋지 뭐.”

“아니야, 그런 게. 우리 조에 나 혼자 남자잖아. 여자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 무슨 말만 하면 잡아먹을 듯이 눈에 쌍라이트를 켜서 덤비는데! 호러물이 따로 없다. 어휴 내 팔자야!”

자신의 푸념에 승재가 싱겁게 웃자 태현은 뭔가 생각났는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신나 하는 얼굴로 물었다.

“야! 너네 조에 한정원 있지?”

한정원……. 승재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나, 너희 모임에 그냥 한 번만 끼면 안 될까? 한정원이랑 말 한번 섞어 보면 소원이 없겠다.”

“지금이라도 가서 말 걸면 될 걸 뭐 하러 조 모임까지 끼려고 하냐?”

승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태현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학과에서 한정원한테 말 걸어 본 남자애가 한 명도 없으니까 하는 말 아니냐. 아니지, 과대는 한 번 걸어 봤다고 했나?”

“정말?”

“어쨌든 많은 남학생이 말 한번 걸어 보려고 별짓을 다 했는데 와아아아, 정말 끄떡도 안 하더라.”

“…….”

“하여튼, 나 네 빽으로 모임에 들어가서 한정원이랑 친해져 보려고. 응? 안 될까? 그게 아니면 그냥 얼굴만 보다 나오게 해 줘.”

“걔 이상하던데?”

승재의 한마디에 절절한 목소리로 두 손까지 모으던 태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럼, 넌 걔랑 말해 봤다는 거야? 짜식! 좋겠다! 부럽다 진짜!”

“미쳤냐? 부럽긴 뭐가 부러워? 난 그런 애 딱 질색이야.”

승재가 정색하며 하는 말에 태현이 알 만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에휴, 그래. 너 같은 놈이 뭐가 아쉽겠냐? 마음만 먹으면 한서희고 이유경이고 다 볼 수 있을 텐데. 부러운 놈! 부모는 랜덤인데 왜 우리 아버지는 문구점을 하실고!”

“왜? 어렸을 때는 반에서 제일 인기 많았다며?”

“그러췌. 뭐니 뭐니 해도 초등학교 제일 인기남은 문구점 아들이지. 다들 나랑 친하게 지내려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특히 새로운 뽑기가 나오는 날이면 어마어마했지!”

아스라한 옛 추억을 떠올리듯 주절대던 태현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야! 야! 한정원! 한정원!”

마치 연예인이라도 본 듯 흥분하는 태현의 목소리에 강의실에 있던 남학생 몇 명이 창밖을 향해 고개를 주욱 뺐다. 창밖에는 벤치에 앉아 나른한 표정으로 목을 이리저리 주무르는 정원이 보였다.

“야, 쟤는 맨날 저렇게 티 쪼가리만 입는데도 어쩜 저렇게 예쁘냐. 저 안경 벗으면 더 예쁠 텐데……. 그래도 오늘은 모자를 벗었네.”

“뭐가 예쁘다고 난리야.”

승재가 투덜대며 창밖을 보는 순간 강의실 쪽으로 고개를 돌린 정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야! 한정원이 너 보는 거 아냐?”

정원이 유심히 강의실 안쪽을 바라보다 천천히 일어섰다.

승재는 그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라 느꼈다. 묶어 올린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치듯 천천히 흔들리고,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살짝 찌푸린 표정마저 그려 놓은 듯했다.

“어? 어! 한정원이 이쪽으로 온다. 어라? 손 흔드는데? 지금 승재 너한테 알은척하는 거야?”

태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러면 그렇지. 싫어하기는 개뿔.’

승재는 우리를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던 석주의 말을 떠올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저런 종류의 여자애들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많이 봐 왔다.

“야, 역시 되는 놈은 다르구나. 가진 자만 더 가지는 이 더러운 세상!”

태현이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며 자리로 비틀비틀 돌아갔다. 그사이 정원은 강의실 창가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승재는 정원의 체면도 있고 하니 알은척해 줘야겠다 생각하고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통통한 남학생 한 명이 창가로 다가가 정원의 이름을 반갑게 불렀다.

“정원아! 오랜만이다!”

“동석 오빠 맞아?”

정원이 인사하며 다가간 사람은 승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승재는 올렸던 손으로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복학한 거야?”

“어. 넌 여전하네?”

“나야 매일 똑같지. 그나저나 학교에서 보니까 좋네.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내일 저녁 같이 먹자. 혹시 약속 있어?”

“없어. 같이 먹자. 오빠가 오랜만에 한 끼 사 줄게.”

“좋아.”

강의실 안의 남학생들이 창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두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며 숙덕댔다.

“지금 한정원이 오빠라고 한 거 들었어?”

“대박, 전화번호도 교환한 모양이야.”

“대단한 집 자식인가?”

“아무리 봐도 아닌데?”

키도 작고, 통통한 체격에 눈도, 코도 동글동글한 게 잘생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고 있는 옷 또한 낡은 청바지에 생수 회사에서 홍보용으로 나누어 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야, 야, 한정원이 웃는다. 나 쟤 웃는 거 처음 봐. 우와아……. 더럽게 예쁘네.”

올라갔던 손이 부끄러워 휴대폰만 만지고 있던 승재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는데 환하게 웃고 있는 정원이 보였다.

웃으니까 저런 얼굴이 되는구나.

“그런데 동석이 쟤는 어떻게 한정원이랑 저렇게 친하지? 뭐지? 혹시 만수르라도 되나? 궁금해 죽겠네.”

태현이 조바심을 내며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사이 동석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태현은 얼른 동석의 옆으로 갔다.

“야, 임동석. 너 한정원이랑 친한가 봐?”

동석은 가방 안에서 책과 노트북을 꺼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대애박! 어떻게 친해졌는데? 아까 승재가 손 흔들다가 완전 등신 됐잖아. 천하의 승재까지 상등신으로 만드는 한정원을 네가 어떻게 알고? 게다가 미소까지!”

승재는 아무도 못 봤을 거라 생각했다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태현의 말에 오히려 놀란 것은 동석이었다.

“정원이 되게 착한 앤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번엔 승재가 동석의 말을 자르며 나섰다.

며칠 전에 있었던 조별 모임에서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게 누군데 착한 아이라니. 거짓말도 어느 정도껏 해야지.

“정원이가 사람을 좀 가리긴 하지.”

동석은 자기가 말해 놓고도 좀 우스운지 말끝을 웃음으로 흐렸다.

“그래서 어떻게 친해진 건데? 너희 집 어마어마하게 부자야? 혹시 백두생수 그거 너희 회사야? 그래서 그거 홍보하려고 입고 다니는 거고?”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태현이 애원하듯 물었다. 제발 엄청 부자라고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