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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이종사촌이야. 우리 이모 딸.”

“뭐어? 너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에 태현의 목소리가 커지자 동석은 쑥스러운 듯 자신의 통통한 볼을 만지며 대답했다.

“정원이는 아빠를 많이 닮았으니까.”

“아! 한정원이 아버지가 무척 미남이셨구나. 그런데 왜 너한테 오빠라고 하는 거야? 나이가 같잖아. 너 혹시 일이 년 꿇었어……요?”

태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급히 말끝에 ‘요’를 슬쩍 붙였다.

“아니. 내가 생일이 두 달 빨라. 어른들이 시켜서 오빠라고 억지로 불렀는데 이젠 그게 습관이 돼서.”

이제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는 듯 태현이 다시 동석의 팔을 붙들었다.

“동석아, 나 너를 베프로 삼고 싶어. 그런 의미에서 한정원이 좋아하는 스타일 좀 알려 주지 않으련? 아니, 우리 여기서 말고 나중에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할까. 횽아가 살게. 응?”

태현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이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여학생 두 명이 승재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선배. 이거 좀 드세요.”

여학생들은 머뭇대다 캔 커피 하나와 예쁘게 포장된 쿠키를 내려놓고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와아, 이 와중에 또 인기 많은 것 보소! 에잇, 짜증 나는 놈. 저리 꺼져 버렷!”

태현은 승재 앞에 놓인 캔 커피를 따 보란 듯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학생들의 눈이 곧 레이저가 나올 것처럼 사납게 위로 올라갔다. 같은 남자가 봐도 승재가 좀 잘나기는 했다. 너무 잘나서 질투조차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바로 승재였다.

190에서 3센티 모자란다는 전설의 황금비율과 귀공자 같은 얼굴, 태현은 승재의 어마무시한 집안보다 멀끔하게 잘생긴 얼굴이 더 부러웠다.

아직도 노려보는 여학생들에게 회심의 메롱을 날려 준 태현이 이번엔 쿠키를 뜯었다. 그것을 본 여학생이 벌떡 일어났지만 속상한 표정을 지을 뿐 달려오지는 않았다.

“동석쓰! 어서어서 나에게 정원의 이상형을 알려 주시오!”

하지만 강의가 시작되는 바람에 태현은 동석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무래도 저녁에 술을 한잔하면서 정보를 얻어 봐야 할 것 같았다.



*



학교 주변에 생긴 막걸리천국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꾸며진 주점이었다. 그 시대의 신문들로 도배된 벽면, 음악, 인테리어 장식들 모두 마치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듯 정교했다.

“와, 여긴 점원들도 다 복고풍 옷을 입고 있네. 진짜 1980년대 같아.”

“그때를 살아 본 것처럼 말한다?”

“눈은 장식이냐? 드라마 안 봐?”

“안 봐.”

태현의 핀잔에 승재가 간단히 답하자 대화는 일단락됐다.

“어? 저건 옛날 오락기 아니냐? 와아, 나 저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태현이 신기한 듯 오락기 근처로 다가갔다. 오락기 앞에는 벌써 자리 잡은 학생들이 뿅뿅 신나는 효과음에 맞춰 신나게 손가락을 두드려 대고 있었다.

잠시 후 빈자리에 앉은 태현이 동석에게 갖은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동석쓰, 넌 어쩜 그렇게 얼굴이 동글동글 귀여워? 여자애들이 완전 좋아하겠다. 난 예전부터 어쩐지 네가 무지막지하게 끌리더라고. 앞으로 우리 많이 친해지자!”

“어? 그, 그래.”

동석이 마지못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승재는 태현이 아양 떠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가벼운 한숨을 섞어 물었다.

“나는 왜 여기에 데려온 거야?”

여태껏 동석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던 태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사근사근한 태도로 승재 앞에 놓인 막걸리 잔을 정성스레 채웠다.

“우리 승재도 심심하지? 이 횽아가 따라 주는 막걸리 한 잔 마셔!”

분명 태현은 물주로 자신을 부른 것이겠지만, 승재는 그런 태현이 싫지 않았다. 돈 많은 놈이 돈 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태현의 노골적인 뻔뻔함이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솔직히 한정원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도 한몫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근데 너 진짜 술 하나도 못 마시냐?”

태현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묻자 동석이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 못 마셔. 미안.”

“아니, 미안한 건 아니고. 네가 술 못 마시는 거 알았으면 다른 데 가는 건데.”

“아니야, 여기도 한번 와 보고 싶었어. 고마워.”

“그 대신 안주 많이 먹어. 여기 안주 괜찮다고 소문났어.”

“응. 잘 먹을게.”

두 사람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승재가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그런데 나는 여기 왜 불려 나와 있는 거냐?”

“이번 참에 너도 한정원에 대한 정보 알고, 이 횽님의 연애 사업도 도와주고. 얼마나 좋아! 불우이웃 돕기라고 생각해!”

“네가 무슨 불우이웃이냐?”

“돈도 많으면서 쪼잔하게 그러지 마라. 나중에 네 소원 하나 들어줄게. 알았지? 돈 드는 거 빼고 다 부탁해. 대신 똥도 싸 줄게.”

“더럽게. 됐어! 술이나 마셔.”

익살스럽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태현을 보며 승재가 싱겁게 웃었다.

“그래서 동석아, 정원이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아무리 철벽이라도 이상형은 있을 거 아냐.”

동석은 태현의 질문에 입으로 가져가던 계란말이를 내려놓고 느릿느릿 대답했다.

“음……. 정원이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는데…….”

동석의 대답에 태현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어 갈 무렵

“그런데 어떤 스타일을 싫어하는지는 알아.”

태현은 의외의 소득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 같았다. 우리 학교, 아니 대한민국 최고의 미인을 여자 친구로 둘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으리!

태현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궁금하긴 승재도 마찬가지.

왜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궁금하긴 했으므로 조용히 동석을 쳐다보고 있는데, 잠시 대답을 꺼리던 동석의 손가락이 승재를 향했다.

“이런 애. 승재 같은……. 제일 싫어해.”

“뭐어어!”

태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승재와 오동통한 동석의 손가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세상에 승재 같은 스타일을 싫어하는 여자애가 있다니.

“에이! 설마. 그러려고.”

믿기 힘든 건 승재도 마찬가지였다. 정원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해서 딱히 불편한 점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 좋은 일도 아니었다.

“아니야, 정원이는 얼굴값 하는 애들 제일 싫어해. 승재 봐, 완전 잘생겼잖아. 정원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야.”

“야! 그게 말이 되냐? 얼굴 잘생겨서 싫으면! 그러면, 한정원은? 지는 예쁘면서 왜 남들 잘난 건 싫어해?”

태현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따졌다. 어이가 없기는 승재도 마찬가지. 좋은 마음으로 술값 내 주러 왔다가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정원이는 자기 얼굴도 싫어하는 거야.”

동석이 아까 먹으려던 계란말이를 입에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



승재는 도서관에 앉아 있었지만 책의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난데없이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승재는 이렇게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 언제부터인가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 한정원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한정원을 봤을 땐 전에 알던 누군가와 비슷했기에 신경을 긁었고, 하는 행동이 거슬린다 생각했을 뿐 그 이상의 관심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한정원은 꼭 3년 전 너 같아.’



석주의 말을 들은 후부터 그 애의 뒷모습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너는 뭐냐……. 한정원.

승재는 정원의 서늘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석주가 왜 정원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뭘 그렇게 생각해?”

맞은편에 앉은 석주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승재는 대답은 안 했지만 석주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아, 맞다. 나 아까 한정원한테 전화했었거든.”

석주가 속닥이는 말에 승재가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알아, 알아. 문자로만 연락하라고 한 거. 하지만 내가 그렇게 고분고분한 애가 아니잖아.”

석주가 계속 숙덕이자 옆에 앉은 학생이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석주는 더 작은 목소리로 말하려다 옆에서 쏘아보는 눈빛 때문에 승재의 책 위에 뭔가를 끼적였다.

[걔는 정말 우릴 싫어해!]



*



석주가 이렇게 확신을 하게 된 건 바로 한 시간 전이었다. 정원은 아르바이트에 늦지 않기 위해 빠르게 걷다 전화를 받았다.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 한정원?

“누구세요?”

― 나, 석주! 우리 같은 조잖아. 벌써 내 목소리 잊은 거야?

정원은 카톡이나 문자로 연락하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고 전화를 건 석주가 짜증이 났다.

“문자나 카톡으로 연락하라고 했잖아. 끊어.”

그리고 종료 버튼을 누른 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말고사 기간이라 정원은 11시가 다 되어서야 승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나올 수가 있었다. 서늘한 밤바람에 갑갑한 속이 좀 뚫리는 것 같았다.

Rrrrrrrr.

무거워진 다리를 질질 끌며 걷고 있는데 정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원은 밤늦게 전화할 사람은 언주밖에 없으므로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Rrrrrrrr.

통화 버튼을 누르는 정원의 얼굴에 엷게 남아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정원이니?

“…….”

전화기 너머에서는 밝고 명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너랑 통화하기 너무 힘들다. 아빠가 계속 연락해 보라고 하셔서…….

“뭐 하러요?”

― 그런 말이 어디 있니? 이번 주 주말이 아버지 생신인 건 알고 있지? 아버지가 은근히 너 기다리는 눈치야.

“그래서요?”

― 이번에는 와서 같이 밥도 먹고,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

“누가 내 가족인데?”

― 얘!

“같잖게 가족인 척 전화 같은 거 하지 말죠. 한성우 씨한테도 전해요. 이제 와서 아버지인 척하지 말라고.”

― 정원아! 너 그런 말이 어디 있니? 사춘기 애도 아니고.

“끊어요.”

전화기 너머 또 다른 말이 들려왔지만 정원은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정원은 때마침 나타난 편의점으로 들어가 캔 맥주를 사서 나왔다.

정원은 머리가 아파 잠시 이마를 한 손으로 짚었다가 휴대폰을 열어 1번을 꾹 눌렀다.

컬러링으로 ‘내 사랑 내 곁에’가 흘러나와 말없이 듣고 있던 정원은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소리에 다시 이마를 짚었다.

“엄마, 잘 지내고 있어? 이제 안 아프지? 그런데 왜 화가 나지?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아. 엄마가 잘못한 거야. 엄마가 다 참고, 기다리고…….”

정원은 음성 메시지를 확인할 사람도 없는 번호에 대고 주절주절 메시지를 남겼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아빠 미워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엄마는 장례식에서야 그리워하던 남편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뒤늦게 나타났던 아빠는 번쩍이는 카메라들을 꼬리처럼 주렁주렁 달고 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역겨웠던지 정원은 하얀 국화꽃을 미친 듯이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 무슨 염치로 여길 와!”

“정원아…….”

“슬퍼? 지금 우는 거야?”

정원은 말리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번쩍이는 플래시 때문에 눈이 아팠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빠가 미안하다.”

“아빠 좋아하네. 나가!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나한테 연락도 하지 말고, 가서 당신 좋아하는 그 젊은 여자랑 천년만년 잘 살아. 꺼져.”

옆에서 언주가 정원을 붙들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울지 않아. 저런 인간 때문에 울지 않아.

정원은 울지 않으려 이를 앙다물었지만 엄마가 불쌍해서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결국 성우는 아내의 영정에 국화 한 송이 놓아 보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고, 탈진할 때까지 울던 정원은 쓰러졌다.

곁에 있던 언주와 장례식 일을 처리하고 뒤늦게 달려온 이모가 놀라 정원을 부둥켜안았고 동석은 쓰러진 정원을 업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정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오는 쓴 기억을 삼키려는 듯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생일 좋아하시네.”

한 캔씩 마시던 맥주는 어느덧 일곱 캔이 넘어가 머리가 띵했다. 아무래도 언주에게 전화를 걸어 데려다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2번을 꾹 누른 정원의 눈이 자꾸만 감겼다. 정원은 통화 연결음이 짧게 흐른 후 멈추자 눈꺼풀에 힘을 주며 웅얼거렸다.

“언주야……. 나 좀 데리러 와. 대일 아파트 앞에 편의점인데…….”



*



“뭔데 그렇게 놀란 표정이야?”

운전하던 승재가 옆에 앉은 석주를 향해 물었다.

“그게……. 한정원이 좀 데리러 와 달라는데?”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한 석주가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누가 뭘 하라고 했다고?”

승재는 하마터면 달리던 차를 멈출 뻔했다. 이런 전개는 한 번도 예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싫어한다면서 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석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본인이 전화를 받고서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한정원이 좀 데리러 와 달라고 했다니까.”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되지. 그런데 얘 지금 좀 취한 것 같은데? 내 예상이 맞는다면 편의점 밖 테이블에서 얘 뻗었다.”

석주는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은주? 연주? 뭐 그딴 이름으로 부르는 걸 보면 잘못 건 건가 싶기도 하고.”

그제야 승재는 상황 파악이 됐는지 좀 전보다 훨씬 더 밝아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면 그렇지. 한정원이……. 말이 돼?”

석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휴대폰에서 눈을 못 뗀 채로 대답했다. 얼떨떨한 표정은 차츰 걷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안 가도 될까?”

“다시 친구한테 걸겠지.”

“지금 12시가 다 돼 가는데? 길가에 혼자 있는 것 같은데? 그대로 뻗어 버리면 어쩌냐? 다음 날 변사체로 발견됐는데 마지막 통화가 나인 거지. 나는 유력한 용의자가 되는 거고, 온 세상이 떠들어 대겠지. 부용출판사 차남이 술 취한 친구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석주가 특유의 과장된 억양으로 억지 눈물을 쥐어짜며 줄줄 읊어 대기 시작했다. 승재는 짜증 난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자고.”

역시, 승재는 내 손바닥 안에 있지. 석주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편하게 기대어 앉으며 대답했다.

“대일 아파트. 그런데 거기가 어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