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7화
동석은 어젯밤 일을 떠올리니 웃겨 죽겠는지 어깨까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너는 왜 자꾸 술만 마시면 빵을 사냐? 내가 여러 주사를 봐 왔지만 너처럼 술만 취하면 빵에 집착하는 사람은 처음 봐.”
정원은 동석의 질문에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맛있잖아.”
정답이 아닌 것 같은데…….
동석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원이 저런 표정일 땐 절대 답을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
“야, 너 어제 한정원이 준 빵 먹었냐? 그 안에 스티커도 들어 있더라. 볼래?”
석주는 뭐가 신나는지 주머니 안에서 동전만 한 스티커를 꺼내 내밀었다.
“당근 빵이라고 토끼 스티커가 들어 있나 봐. 흐흐흐. 난 또 이런 건 처음 봐.”
“좋냐?”
승재가 스티커를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석주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어. 근데 빵은 맛없더라. 그런데 한정원 걔는 참 이상하지 않아?”
“뭐가.”
“몰라.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는데 좀 이상해. 그런데 막 싫지가 않다?”
승재는 여전히 스티커를 이리저리 보고 있는 석주를 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걘 우리 싫어한다며.”
“어. 그래도 싫지 않아. 왜? 너도 처음에 나 싫어했잖아.”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아.”
하지만 석주는 못 들은 척하고 싶은 말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나의 넓은 아량으로 치열하게 너를 싫어하지 않아서 이 끈끈한 우정을 이어 가고 있는 거지. 넌 나한테 감사해야 해.”
“응. 고마워.”
“진심 어린 인정 고마워. 근데 네 빵에도 스티커 들었냐?”
이상하게 스티커에 집착하는 석주를 귀찮게 쳐다보던 승재가 가방 안에 있던 빵을 그에게 내밀었다.
“야! 눌려서 완전 납작해졌잖아. 안 그래도 맛없는 빵 더 맛없어 보인다. 그래도 초코 빵이네. 당근 빵보다 맛있겠지?”
석주가 신나 하며 빵 봉지를 뜯었다. 그러자 달콤한 향기가 금세 훅 퍼졌다.
“오우! 이 노골적으로 단 초코의 향기. 좋아, 좋아. 스티커는 어디에 있나?”
석주가 부피가 반으로 줄어든 빵을 한 입 베어 물더니 빵 한쪽을 떼어 승재의 입에 쑥 집어넣었다.
“먹어.”
“윽! 야! 뭐야!”
방심하고 있다가 난데없이 입으로 들어온 달달한 빵에 승재의 눈썹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승재는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맛 같았다.
“어? 이거 피카추 스티커네. 이거도 내가 가져야겠다.”
석주가 스티커를 챙기자 승재는 한심하다는 듯 빵을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초딩이냐?”
“나 말고. 지혜 주려고 그러지. 캬! 낭만적이지 않냐? 빵 스티커라니. 되게 1980년대 같지?”
“그러지 말고 그냥 고백을 해.”
“내 감정은 말 따위로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석주야.”
“왜?”
“오랜 친구를 사랑한다는 건 어떤 느낌이냐?”
“뭘 어떤 느낌이야. 그냥 좋은 거지. 서로 알아 가느라 시간 낭비 할 필요 없고, 괜한 오해할 일도 없고 그런 거지. 너도 라희랑 약혼할 거잖아.”
“그렇지.”
하지만 승재는 라희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아마 라희가 주는 마음에 비해 자신이 내미는 마음의 조각이 턱없이 작고 볼품없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이 강의동 앞에서 영양가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 모습을 한 무리의 여학생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고 있었다.
“다른 날도 멋있는데 오늘은 더 멋있다.”
“누구?”
“누구기는! 당연히 석주 선배지.”
“난 승재 선배가 더 좋던데.”
다정하고 장난기 많은 석주와 담담하고 예의 바르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승재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야, 나 조만간 승재 선배한테 고백할 거야.”
여학생 무리의 한 사람인 은영이 친구들을 향해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자 양옆의 여학생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차이면 어쩌려고? 라희 선배랑 약혼할 사이라던데? 매일 붙어 다니잖아.”
하지만 은영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절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야. 라희 선배는 몰라도 승재 선배는 절대 라희 선배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선배 눈빛을 보면 알지. 라희 선배가 ‘승재야!’ 하고 다정하게 불러도 아주 건조한 눈으로 본다고.”
“아이고, 도사 나셨네. 그래도 넌 라희 선배한테 안 돼.”
“왜?”
은영은 화가 나는지 눈썹이 갈매기 날개처럼 위로 휙 올라갔다.
“라희 선배 얼굴이며 몸매며 우리랑은 급이 다른 사람이야.”
“인조인간이란 소문이 괜히 난 줄 알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고친 곳이 없대.”
“아냐, 코만 수술했다더라. 그리고 선배네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지 몰라서 그래? 그들만의 세상이야.”
“그래도 고백할 거야. 혹시 알아? 선배는 나같이 귀엽고 애교 많은 스타일을 좋아할지? 아직 약혼도 안 한 사인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아무래도 은영이 조만간 큰코다칠 것 같다는 생각에 친구들의 얼굴에 연민의 빛이 스쳤다.
*
“어? 저기 한정원이다. 오늘은 까만 티 입었네?”
석주가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승재의 고개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도서관으로 향하던 정원은 모른 척하고 가려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정원의 존재감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 눈에 띄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승재는 정원이 안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엇? 오늘은 안경 안 썼네? 정원이 안뇽?”
석주가 반갑게 인사하자 정원이 마지못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너무 반갑게 인사하는 석주를 보며 잠시 머뭇대던 정원이 두 사람을 향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는 미안하게 됐어. 전화를 잘못 걸었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미안해하는 얼굴도 어찌나 예쁜지.
“미안하긴. 뭘 그런 걸로.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두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던 승재가 툭 던지듯 한마디 했다.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닌가? 그리고 미안하면 미안한 거지. 미안하게 됐어, 는 뭐야?”
순간 세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쨌든 무마해 보려는 석주가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승재야 그런 말을 뭘 그렇게 살벌한 얼굴로. 하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승재 별명이 쓸정남이야. 쓸데없이 시도 때도 없이 정색한다고. 하하하!”
정원의 눈이 승재의 담담한 눈빛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순간 승재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모멸감이 들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으며, 벌거벗은 것처럼 부끄럽기도 했다.
왜 이러지? 왜…….
하지만 승재는 곧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정원이는 꼭 3년 전의 너 같아.’
석주의 말. 승재는 정원의 텅 빈 눈 안에서 3년 전 잔뜩 가시 돋쳐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과거로 돌아가 저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소름 끼쳤지만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을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는 정원이 가엽기도 했다.
승재는 정원이 던질 날 선 말을 호기심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정원의 입에서는 또다시 승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건 인정. 고맙다가 먼저네. 고맙다.”
할 말을 다 했는지 정원은 다시 도서관을 향해서 바쁘게 걸어갔다.
“승재야.”
석주가 점점 멀어지는 정원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게 말했다.
“왜.”
“나, 정원이를 형님으로 모시고 싶어. 존나 멋있지 않냐? 대인배야, 대인배!”
“미친 새끼.”
하지만 정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건 승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텅 빈 눈동자가 자꾸만 승재의 명치를 갉아 대기 시작했다.
*
비가 한차례 내릴 것 같더니 구름이 하늘을 우중충하게 가렸다. 해가 나지 않아 덥지 않았지만 공기 중의 물기가 살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난 정원은 시원하게 마실 것을 찾아 근처 자판기로 걸어가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뭐지? 누가 보는 것 같았는데…….”
다른 사람의 시선은 익숙했지만 느낌이 좀 달랐다. 정원은 저를 보는 시선을 찾기 위해 계속 두리번거렸다.
“잘못 봤나?”
정원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데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
매우 익숙한 발걸음이라 정원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정원아!”
언주였다. 어디서부터 뛰어왔는지 언주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수업 끝난 거야?”
“어. 이제 막. 김경덕 교수님 알지? 항상 수업을 더 하신다니까. 지치지도 않으시나 봐. 앞자리에 앉았다가 고막 나가고 익사당할 뻔. 내 얼굴에서 침 냄새 안 나냐? 좀 늦었더니 맨 앞자리 빼고 다 앉아 있는 거 있지.”
또다시 시작된 언주의 수다에 정원은 좀 전에 느꼈던 이상한 기분은 금세 떨쳐 버렸다.
참새처럼 쫑알거리는 언주의 말만큼 마음의 무게가 덜어지는 것 같았다. 언주의 일방적인 수다를 들으며 걸어가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민수가 알은척을 했다.
“안녕!”
“어. 오랜만.”
민수는 소개팅 일로 정원에게 한동안 골이 나 있었지만 정원이 좀 무서웠기 때문에 대놓고 못마땅한 척을 할 수도 없었다.
“아 참, 너희들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민수가 손뼉을 탁! 치며 하는 말에 언주가 정원이 들고 있던 음료를 빼앗아 먹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박 소식! 우리 학교에 연극영화과 교수님으로 누가 오시는지 아냐?”
“누가 보면 네가 연극영화과 학생인지 알겠다.”
언주가 들떠 있는 민수를 향해 타박하듯 말했지만 민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떠벌리기 시작했다.
“놀라지 마라. 한성우! 배우 한성우가 우리 학교에 연극영화과 교수님으로 온대! 대박이지 않냐? 우리 학교 클라스 지리지?”
민수의 말을 들은 정원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추어 섰다.
“누구?”
정원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차가웠지만 민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언주는 눈치 없이 떠들어 대는 남자 친구의 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야, 하하. 누가 오든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얘기는 뭐 하러 해.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하하하.”
“아니지! 무려 한성우라고!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혹시 우리 동아리 책임 교수님 해 달라고 부탁드리면 해 주실까?”
“아! 좀 닥쳐!”
민수가 한참 떠들어 대고 있는데 얼굴이 벌게진 언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민수는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언주를 보고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언주야. 내가 뭐 잘못했어?”
하지만 언주는 저만치 앞서 걷는 정원의 뒤를 쫓아가느라 민수의 말을 듣지 못했다.
“언주야!”
민수가 따라가며 부르자 언주가 속상한 얼굴로 민수를 노려본 후 정원의 뒤를 쫓아갔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혹시 말할 때 입 냄새 났나?”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민수가 손바닥을 입에 대고 하! 불어서 냄새를 맡으며 웅얼댔다.
연극영화과 학생들과 마주칠 일도 없었지만 정원은 같은 공간에 그 사람과 있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원아, 괜찮아?”
언주가 정원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정원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언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가?”
언주는 정원이 이렇게 억지로 웃을 때 마음이 제일 아팠다. 이런 때야말로 정말 힘들다는 뜻이었으니까.
“학교 앞에 생긴 막걸릿집 가 봤어? 거기 분위기 장난 아니라고 하더라. 나, 용돈 받았어. 한잔 쏠게. 가자!”
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애쓰는 언주가 고마워 같이 가고 싶었지만 내일 있을 조별 모임 준비를 해야 했다.
“안 돼. 나, 해야 할 게 많아. 도서관에서 좀 하다가 가려고. 인쇄할 것도 조금 있고.”
“그래? 그럼 같이 있어 줄까?”
정원은 이렇게 마음을 써 주는 언주가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언제나 제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와 주는 유일한 친구가 바로 언주였다.
“아니야. 저 뒤에서 따라오는 거 민수 아냐? 곧 울겠다. 가서 놀아 줘.”
동석은 어젯밤 일을 떠올리니 웃겨 죽겠는지 어깨까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너는 왜 자꾸 술만 마시면 빵을 사냐? 내가 여러 주사를 봐 왔지만 너처럼 술만 취하면 빵에 집착하는 사람은 처음 봐.”
정원은 동석의 질문에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맛있잖아.”
정답이 아닌 것 같은데…….
동석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원이 저런 표정일 땐 절대 답을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
“야, 너 어제 한정원이 준 빵 먹었냐? 그 안에 스티커도 들어 있더라. 볼래?”
석주는 뭐가 신나는지 주머니 안에서 동전만 한 스티커를 꺼내 내밀었다.
“당근 빵이라고 토끼 스티커가 들어 있나 봐. 흐흐흐. 난 또 이런 건 처음 봐.”
“좋냐?”
승재가 스티커를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석주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어. 근데 빵은 맛없더라. 그런데 한정원 걔는 참 이상하지 않아?”
“뭐가.”
“몰라.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는데 좀 이상해. 그런데 막 싫지가 않다?”
승재는 여전히 스티커를 이리저리 보고 있는 석주를 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걘 우리 싫어한다며.”
“어. 그래도 싫지 않아. 왜? 너도 처음에 나 싫어했잖아.”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아.”
하지만 석주는 못 들은 척하고 싶은 말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나의 넓은 아량으로 치열하게 너를 싫어하지 않아서 이 끈끈한 우정을 이어 가고 있는 거지. 넌 나한테 감사해야 해.”
“응. 고마워.”
“진심 어린 인정 고마워. 근데 네 빵에도 스티커 들었냐?”
이상하게 스티커에 집착하는 석주를 귀찮게 쳐다보던 승재가 가방 안에 있던 빵을 그에게 내밀었다.
“야! 눌려서 완전 납작해졌잖아. 안 그래도 맛없는 빵 더 맛없어 보인다. 그래도 초코 빵이네. 당근 빵보다 맛있겠지?”
석주가 신나 하며 빵 봉지를 뜯었다. 그러자 달콤한 향기가 금세 훅 퍼졌다.
“오우! 이 노골적으로 단 초코의 향기. 좋아, 좋아. 스티커는 어디에 있나?”
석주가 부피가 반으로 줄어든 빵을 한 입 베어 물더니 빵 한쪽을 떼어 승재의 입에 쑥 집어넣었다.
“먹어.”
“윽! 야! 뭐야!”
방심하고 있다가 난데없이 입으로 들어온 달달한 빵에 승재의 눈썹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승재는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맛 같았다.
“어? 이거 피카추 스티커네. 이거도 내가 가져야겠다.”
석주가 스티커를 챙기자 승재는 한심하다는 듯 빵을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초딩이냐?”
“나 말고. 지혜 주려고 그러지. 캬! 낭만적이지 않냐? 빵 스티커라니. 되게 1980년대 같지?”
“그러지 말고 그냥 고백을 해.”
“내 감정은 말 따위로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석주야.”
“왜?”
“오랜 친구를 사랑한다는 건 어떤 느낌이냐?”
“뭘 어떤 느낌이야. 그냥 좋은 거지. 서로 알아 가느라 시간 낭비 할 필요 없고, 괜한 오해할 일도 없고 그런 거지. 너도 라희랑 약혼할 거잖아.”
“그렇지.”
하지만 승재는 라희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아마 라희가 주는 마음에 비해 자신이 내미는 마음의 조각이 턱없이 작고 볼품없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이 강의동 앞에서 영양가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 모습을 한 무리의 여학생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고 있었다.
“다른 날도 멋있는데 오늘은 더 멋있다.”
“누구?”
“누구기는! 당연히 석주 선배지.”
“난 승재 선배가 더 좋던데.”
다정하고 장난기 많은 석주와 담담하고 예의 바르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승재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야, 나 조만간 승재 선배한테 고백할 거야.”
여학생 무리의 한 사람인 은영이 친구들을 향해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자 양옆의 여학생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차이면 어쩌려고? 라희 선배랑 약혼할 사이라던데? 매일 붙어 다니잖아.”
하지만 은영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절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야. 라희 선배는 몰라도 승재 선배는 절대 라희 선배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선배 눈빛을 보면 알지. 라희 선배가 ‘승재야!’ 하고 다정하게 불러도 아주 건조한 눈으로 본다고.”
“아이고, 도사 나셨네. 그래도 넌 라희 선배한테 안 돼.”
“왜?”
은영은 화가 나는지 눈썹이 갈매기 날개처럼 위로 휙 올라갔다.
“라희 선배 얼굴이며 몸매며 우리랑은 급이 다른 사람이야.”
“인조인간이란 소문이 괜히 난 줄 알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고친 곳이 없대.”
“아냐, 코만 수술했다더라. 그리고 선배네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지 몰라서 그래? 그들만의 세상이야.”
“그래도 고백할 거야. 혹시 알아? 선배는 나같이 귀엽고 애교 많은 스타일을 좋아할지? 아직 약혼도 안 한 사인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아무래도 은영이 조만간 큰코다칠 것 같다는 생각에 친구들의 얼굴에 연민의 빛이 스쳤다.
*
“어? 저기 한정원이다. 오늘은 까만 티 입었네?”
석주가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승재의 고개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도서관으로 향하던 정원은 모른 척하고 가려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정원의 존재감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 눈에 띄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승재는 정원이 안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엇? 오늘은 안경 안 썼네? 정원이 안뇽?”
석주가 반갑게 인사하자 정원이 마지못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너무 반갑게 인사하는 석주를 보며 잠시 머뭇대던 정원이 두 사람을 향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는 미안하게 됐어. 전화를 잘못 걸었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미안해하는 얼굴도 어찌나 예쁜지.
“미안하긴. 뭘 그런 걸로.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두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던 승재가 툭 던지듯 한마디 했다.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닌가? 그리고 미안하면 미안한 거지. 미안하게 됐어, 는 뭐야?”
순간 세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쨌든 무마해 보려는 석주가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승재야 그런 말을 뭘 그렇게 살벌한 얼굴로. 하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승재 별명이 쓸정남이야. 쓸데없이 시도 때도 없이 정색한다고. 하하하!”
정원의 눈이 승재의 담담한 눈빛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순간 승재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모멸감이 들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으며, 벌거벗은 것처럼 부끄럽기도 했다.
왜 이러지? 왜…….
하지만 승재는 곧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정원이는 꼭 3년 전의 너 같아.’
석주의 말. 승재는 정원의 텅 빈 눈 안에서 3년 전 잔뜩 가시 돋쳐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과거로 돌아가 저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소름 끼쳤지만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을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는 정원이 가엽기도 했다.
승재는 정원이 던질 날 선 말을 호기심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정원의 입에서는 또다시 승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건 인정. 고맙다가 먼저네. 고맙다.”
할 말을 다 했는지 정원은 다시 도서관을 향해서 바쁘게 걸어갔다.
“승재야.”
석주가 점점 멀어지는 정원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게 말했다.
“왜.”
“나, 정원이를 형님으로 모시고 싶어. 존나 멋있지 않냐? 대인배야, 대인배!”
“미친 새끼.”
하지만 정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건 승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텅 빈 눈동자가 자꾸만 승재의 명치를 갉아 대기 시작했다.
*
비가 한차례 내릴 것 같더니 구름이 하늘을 우중충하게 가렸다. 해가 나지 않아 덥지 않았지만 공기 중의 물기가 살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난 정원은 시원하게 마실 것을 찾아 근처 자판기로 걸어가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뭐지? 누가 보는 것 같았는데…….”
다른 사람의 시선은 익숙했지만 느낌이 좀 달랐다. 정원은 저를 보는 시선을 찾기 위해 계속 두리번거렸다.
“잘못 봤나?”
정원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데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
매우 익숙한 발걸음이라 정원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정원아!”
언주였다. 어디서부터 뛰어왔는지 언주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수업 끝난 거야?”
“어. 이제 막. 김경덕 교수님 알지? 항상 수업을 더 하신다니까. 지치지도 않으시나 봐. 앞자리에 앉았다가 고막 나가고 익사당할 뻔. 내 얼굴에서 침 냄새 안 나냐? 좀 늦었더니 맨 앞자리 빼고 다 앉아 있는 거 있지.”
또다시 시작된 언주의 수다에 정원은 좀 전에 느꼈던 이상한 기분은 금세 떨쳐 버렸다.
참새처럼 쫑알거리는 언주의 말만큼 마음의 무게가 덜어지는 것 같았다. 언주의 일방적인 수다를 들으며 걸어가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민수가 알은척을 했다.
“안녕!”
“어. 오랜만.”
민수는 소개팅 일로 정원에게 한동안 골이 나 있었지만 정원이 좀 무서웠기 때문에 대놓고 못마땅한 척을 할 수도 없었다.
“아 참, 너희들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민수가 손뼉을 탁! 치며 하는 말에 언주가 정원이 들고 있던 음료를 빼앗아 먹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박 소식! 우리 학교에 연극영화과 교수님으로 누가 오시는지 아냐?”
“누가 보면 네가 연극영화과 학생인지 알겠다.”
언주가 들떠 있는 민수를 향해 타박하듯 말했지만 민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떠벌리기 시작했다.
“놀라지 마라. 한성우! 배우 한성우가 우리 학교에 연극영화과 교수님으로 온대! 대박이지 않냐? 우리 학교 클라스 지리지?”
민수의 말을 들은 정원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추어 섰다.
“누구?”
정원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차가웠지만 민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언주는 눈치 없이 떠들어 대는 남자 친구의 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야, 하하. 누가 오든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얘기는 뭐 하러 해.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하하하.”
“아니지! 무려 한성우라고!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혹시 우리 동아리 책임 교수님 해 달라고 부탁드리면 해 주실까?”
“아! 좀 닥쳐!”
민수가 한참 떠들어 대고 있는데 얼굴이 벌게진 언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민수는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언주를 보고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언주야. 내가 뭐 잘못했어?”
하지만 언주는 저만치 앞서 걷는 정원의 뒤를 쫓아가느라 민수의 말을 듣지 못했다.
“언주야!”
민수가 따라가며 부르자 언주가 속상한 얼굴로 민수를 노려본 후 정원의 뒤를 쫓아갔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혹시 말할 때 입 냄새 났나?”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민수가 손바닥을 입에 대고 하! 불어서 냄새를 맡으며 웅얼댔다.
연극영화과 학생들과 마주칠 일도 없었지만 정원은 같은 공간에 그 사람과 있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원아, 괜찮아?”
언주가 정원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정원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언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가?”
언주는 정원이 이렇게 억지로 웃을 때 마음이 제일 아팠다. 이런 때야말로 정말 힘들다는 뜻이었으니까.
“학교 앞에 생긴 막걸릿집 가 봤어? 거기 분위기 장난 아니라고 하더라. 나, 용돈 받았어. 한잔 쏠게. 가자!”
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애쓰는 언주가 고마워 같이 가고 싶었지만 내일 있을 조별 모임 준비를 해야 했다.
“안 돼. 나, 해야 할 게 많아. 도서관에서 좀 하다가 가려고. 인쇄할 것도 조금 있고.”
“그래? 그럼 같이 있어 줄까?”
정원은 이렇게 마음을 써 주는 언주가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언제나 제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와 주는 유일한 친구가 바로 언주였다.
“아니야. 저 뒤에서 따라오는 거 민수 아냐? 곧 울겠다. 가서 놀아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