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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아까부터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따라오던 민수가 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쳇! 눈치도 없는 바보랑은 안 놀아.”
“민수가 무슨 잘못이야. 내가 문제지.”
“아니야! 넌 아무 문제 없어. 없어! 저놈이 문제야. 무조건 문제야.”
자신의 호들갑에 정원이 싱겁게 웃자 언주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
“생각 같은 거 깊게 하지 말고, 생각은 얕고 짧은 시간에 하고 마는 거야. 길게 하는 거 그거 못 쓴다. 알겠지?”
“알겠으니까 얼른 가. 민수 목 빠지겠다.”
“나중에 전화할게!”
저를 향해 되돌아오는 언주를 발견한 민수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아마 언주도 같은 표정이겠지?
정원은 두 사람을 보며 씁쓸하게 웃다가 돌아서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
“승재야, 참고 목록에 있는 책은 다 찾았어?”
승재 앞에 쌓여 있는 책을 훑어보며 질문하던 석주가 머리를 북북 긁었다.
“대충.”
“언제 다 찾은 거야? 내 건 왜 없지? 다른 사람이 벌써 빌려 갔나?”
석주는 제가 가진 목록에서 빠진 세 권을 찾지 못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출판사 아들이 책을 못 구해서 이렇게 고생을 하다니…….”
석주는 말해 놓고도 어이없는지 한숨이 더 깊어졌다.
“1976년도에 발간된 책을 어디서 찾지? 이미 절판된 걸로 나오던데. 우리 학교에 있는 거 맞아?”
“리스트에 있는 거 보면 있겠지.”
“우리랑 같은 주제를 하는 조가 많나?”
“그거야 발표하는 날 봐야 아는 거지.”
기말고사를 대신하는 과제라 조끼리의 경쟁도 만만치 않았다. 네 개의 주제 중 한 가지를 고르는 거라 겹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조와는 자료를 공유하지도 않았고, 주제를 알려 주지도 않았다.
“괜히 오해받을까 봐 물어보지도 못하겠고.”
석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표 수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출판사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아. 거기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차 키 좀.”
석주가 손바닥을 내밀자 승재는 아무렇지 않게 차 키를 내밀었다.
“가서 보고, 있다 싶으면 문자 보낼게.”
“얼른 가기나 해.”
놀기 좋아하고, 실없는 농담을 입에 달고 사는 석주였지만 학업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욕심이 많은 편이었다.
석주는 승재에게 차 키를 받아 도서관을 나오다 정원과 마주쳤다.
“엇! 한정원 안뇽? 과제 준비하러 가는 거야? 안에 승재 있어. 같이 하고 있으면 되겠다.”
“어.”
반갑게 인사하는 석주를 발견한 정원은 대답하기 귀찮아서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대꾸했다. 하지만 석주는 정원이 자신의 말에 반응해 준 것이 좋아서 신나게 승재에게 문자를 보냈다.
[승재야. 한정원이 너랑 조별 과제 같이 하러 도서관에 들어갔다.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라. 괜히 정원 형님 노엽게 하지 말고. 매사에 순종하도록!]
“자, 그럼 한번 달려 볼까?”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석주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한편, 석주의 문자를 확인한 승재는 여간 난감하지가 않았다. 처음처럼 한정원이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승재는 괜히 집중이 되지 않아 도서관 입구를 보며 한정원이 언제 들어오나 살폈다.
곧이어 정원이 나타나자 몇몇 남학생의 시선이 정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야, 야! 한정원!”
“대박! 가까이서는 처음 봐.”
“쉿! 조용히 말해. 쪽팔려.”
하지만 정원은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건 신경 쓰지 않고 두리번거리다 가까운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석주 말대로라면 정원은 저를 찾으려는 노력을 더 해야 했다.
승재는 정원이 있는 곳으로 가 볼까 하다가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꾸만 정원이 앉은 쪽으로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원은 한 시간이 넘도록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뭘 읽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가서 물어볼 명분이 없었다.
집중력이 흐려진 승재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덩치 큰 남학생 하나가 정원의 옆에 앉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턱을 괴고 정원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던 정원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흠칫 놀랐다.
“뭐야?”
다행히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도서관 내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우람한 근육 때문에 입고 있는 티셔츠가 타이즈처럼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정원은 그가 보내오는 불편한 시선을 무시하고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한정원 맞지?”
남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좀 하죠?”
같은 테이블에 앉아 큰 목소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던 학생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가지 않아 정원이 앉은 테이블에는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기태웅. 나 알지?”
정원은 앞에 앉은 남학생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
정원은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그는 정원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이름은 들어 봤지?”
“아니.”
무표정한 정원을 지그시 바라보던 태웅이 정원이 보고 있던 책을 잡아 슬그머니 제 앞으로 가지고 왔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그렇게 재미있게 읽는 거야?”
조용한 도서관에 태웅의 목소리만 낮게 퍼졌다. 태웅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학생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지만 태웅은 여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이야기하려면 나가서 하세요!”
참다못한 여학생 하나가 태웅과 정원을 향해 못마땅한 듯 말하자 정원은 가방을 싸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태웅이 가져갔던 책도 빼앗아 가방에 욱여넣었다.
“그래. 나가자. 나가서 이야기하자.”
태웅이 일어서자 주변의 시선이 그의 큰 키를 따라 저절로 움직였다. 적어도 195센티미터는 훨씬 넘어 보였다.
정원은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태웅의 느물거리는 시선을 못 본 척하며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승재는 정원이 도서관을 나가자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승재는 책을 덮고 가방을 챙겨 열람실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밖에는 태웅만 멍청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디로 간 거야?”
태웅은 덩치와는 달리 인내심은 매우 짧은지 잠시 정원을 찾다 머리를 긁적이며 로비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진짜 어디로 간 거지?’
정원은 그사이 어디로 간 건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승재가 잠시 머뭇대는 사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정원이 도서관 로비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일부러 피해 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별일이 없었으므로 승재는 석주를 찾아가기로 했다.
“어?”
밖에 나가려던 승재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차 안에 우산을 두고 온 승재는 비가 떨어지는 하늘만 멍하게 보고 있었다.
“아……. 차도 석주가 가져갔지.”
비는 금세 그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석주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내 드는데 누군가 알은척을 하며 다가왔다.
“선배, 우산이 없으세요?”
얼마 전 보았던 단발머리 여학생이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승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은영의 인사를 받았다.
“저랑 같이 쓰고 가실래요?”
양 볼이 발그레 물든 은영이 수줍게 우산을 내밀었다. 하지만 승재는 그녀와 우산을 같이 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친구가 올 거야.”
“아……. 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할 은영이 아니었다.
“선배 친구 올 때까지 같이 있어 드릴게요. 혼자 심심하잖아요.”
“괜찮아.”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승재가 야속했지만 그것 또한 승재의 매력이었으므로 싫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매번 거절을 당해도 계속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영은 승재의 옆모습을 흘끔거리며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했다. 멋있어서 보고만 있어도 하루 종일 행복할 것 같았다.
“석주 선배가 오기로 하셨나 봐요.”
승재는 자꾸 말을 거는 은영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친하지도 않으면서 선뜻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다른 목적이 있기 마련이었다.
석주가 올 거라고 말하려는데 까만색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정원이 보였다. 승재는 잠시 망설인 끝에
“친구 왔어. 갈게.”
하고 말한 후 정원의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뭐 하는 짓이야?”
정원이 승재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나도 도왔으니 지금 날 좀 돕지?”
승재가 로비 앞에 울상을 하며 서 있는 여학생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대충 눈치를 챈 정원이 못마땅한 듯 눈을 찌푸렸다.
승재는 이 와중에도 정원이 예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날 이용하겠다고?”
“아니, 우산을 이용하겠다고.”
비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갇혀 점점 사라졌다. 정원은 우산을 쓰고 있으면서도 등이 다 젖고 있는 승재가 신경 쓰였다.
‘돈도 많다면서 왜 우산을 안 가지고 다니는 거야?’
동석에게 지난번 일을 듣지 않았다면 모른 척하고 갈 텐데. 정원은 잠시 고민하다 승재 쪽으로 우산을 내밀었다.
“이걸로 퉁.”
“오케이.”
“친한 척 말고.”
“오케이.”
승재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우산을 들고 있는 정원을 쳐다봤다. 승재 쪽으로 우산을 기울인 정원의 어깨가 다 젖어 있었다.
승재는 우산을 슬그머니 정원이 있는 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정원의 팔에 힘이 들어가 우산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승재가 다시 우산을 미는데 순간 바람이 강하게 불더니 정원이 들고 있던 우산이 훌렁 뒤집어졌다.
휘이이잉!
쏴아아아아아!
두 사람은 순식간에 쫄딱 젖었고 뒤집어진 우산을 들고 멍하게 서 있는 정원을 본 승재가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크큭, 크크크 하하하하!”
승재는 뒤집어진 우산을 꿋꿋하게 잡고 서 있는 고집스런 정원의 모습이 우스워 쿡쿡 웃다가 짜증으로 가득한 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재밌냐고 으르렁대는 정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원은 바람을 등지고 뒤집어진 우산을 다시 접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우산대는 이미 부러진 상태라 원래대로 접는다 해도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리 줘.”
승재는 정원이 어떻게든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 낑낑대는 우산을 가져와 둘둘 말아 쥐었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정원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저리로 가자!”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두 사람은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정신없이 달렸다.
“저기!”
미처 비를 대비하지 못한 학생들이 많은지 조금이라도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아래면 갈 곳 잃은 발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런대로 여유가 좀 있어 보이는 곳을 찾아 두 사람이 다급하게 뛰어들자, 옹기종기 모여 하늘만 원망스럽게 쳐다보던 사람들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미 서로 다 젖어서 더 젖을 것도 없었지만 후덥지근하게 더운 날씨 속에서 축축하게 젖은 몸을 부대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정원은 경황이 없다가 숨을 고르고 나자 승재와 잡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제 손을 감싸 쥐고 있는 느낌은 굉장히 낯설고 어색했다.
정원은 슬그머니 손을 빼내 입고 있는 옷을 툭툭 치며 물기를 털어 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었지만 정원의 언변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택한 침묵.
“…….”
어색하긴 승재도 마찬가지. 하지만 승재에게는 융통성이라는 것이 있었다.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지?”
승재의 말에도 둘 사이엔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어.”
정원은 자신에게 한 질문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 그가 말을 걸 사람은 자기밖에 없음을 깨닫고 짧게 대답했다.
대화를 이어 가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던진 일상적인 질문이었지만 정원에게서 나온 대답은 마침표였다.
평소의 승재였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상대와 절대 대화를 이어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저를 닮은 정원의 가시 때문인지 자꾸만 그녀의 반응을 기대하게 됐다.
“집에 어떻게 갈 거야?”
언제부터 친했다고 이렇게 자꾸 질문을 해 대는지. 아까 우산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모른 척하고 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를 하기엔 조금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이 의미 없고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대충 그치면.”
정원의 대답은 결코 한 문장 이상 이어 가는 법이 없었다. 승재는 어떻게 하면 저를 떼어 낼까 노골적으로 궁리하는 정원의 모습에 전에 없던 장난기가 발동하는 중이었다.
“언제 그칠지 알고?”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아까부터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따라오던 민수가 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쳇! 눈치도 없는 바보랑은 안 놀아.”
“민수가 무슨 잘못이야. 내가 문제지.”
“아니야! 넌 아무 문제 없어. 없어! 저놈이 문제야. 무조건 문제야.”
자신의 호들갑에 정원이 싱겁게 웃자 언주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
“생각 같은 거 깊게 하지 말고, 생각은 얕고 짧은 시간에 하고 마는 거야. 길게 하는 거 그거 못 쓴다. 알겠지?”
“알겠으니까 얼른 가. 민수 목 빠지겠다.”
“나중에 전화할게!”
저를 향해 되돌아오는 언주를 발견한 민수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아마 언주도 같은 표정이겠지?
정원은 두 사람을 보며 씁쓸하게 웃다가 돌아서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
“승재야, 참고 목록에 있는 책은 다 찾았어?”
승재 앞에 쌓여 있는 책을 훑어보며 질문하던 석주가 머리를 북북 긁었다.
“대충.”
“언제 다 찾은 거야? 내 건 왜 없지? 다른 사람이 벌써 빌려 갔나?”
석주는 제가 가진 목록에서 빠진 세 권을 찾지 못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출판사 아들이 책을 못 구해서 이렇게 고생을 하다니…….”
석주는 말해 놓고도 어이없는지 한숨이 더 깊어졌다.
“1976년도에 발간된 책을 어디서 찾지? 이미 절판된 걸로 나오던데. 우리 학교에 있는 거 맞아?”
“리스트에 있는 거 보면 있겠지.”
“우리랑 같은 주제를 하는 조가 많나?”
“그거야 발표하는 날 봐야 아는 거지.”
기말고사를 대신하는 과제라 조끼리의 경쟁도 만만치 않았다. 네 개의 주제 중 한 가지를 고르는 거라 겹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조와는 자료를 공유하지도 않았고, 주제를 알려 주지도 않았다.
“괜히 오해받을까 봐 물어보지도 못하겠고.”
석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표 수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출판사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아. 거기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차 키 좀.”
석주가 손바닥을 내밀자 승재는 아무렇지 않게 차 키를 내밀었다.
“가서 보고, 있다 싶으면 문자 보낼게.”
“얼른 가기나 해.”
놀기 좋아하고, 실없는 농담을 입에 달고 사는 석주였지만 학업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욕심이 많은 편이었다.
석주는 승재에게 차 키를 받아 도서관을 나오다 정원과 마주쳤다.
“엇! 한정원 안뇽? 과제 준비하러 가는 거야? 안에 승재 있어. 같이 하고 있으면 되겠다.”
“어.”
반갑게 인사하는 석주를 발견한 정원은 대답하기 귀찮아서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대꾸했다. 하지만 석주는 정원이 자신의 말에 반응해 준 것이 좋아서 신나게 승재에게 문자를 보냈다.
[승재야. 한정원이 너랑 조별 과제 같이 하러 도서관에 들어갔다.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라. 괜히 정원 형님 노엽게 하지 말고. 매사에 순종하도록!]
“자, 그럼 한번 달려 볼까?”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석주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한편, 석주의 문자를 확인한 승재는 여간 난감하지가 않았다. 처음처럼 한정원이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승재는 괜히 집중이 되지 않아 도서관 입구를 보며 한정원이 언제 들어오나 살폈다.
곧이어 정원이 나타나자 몇몇 남학생의 시선이 정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야, 야! 한정원!”
“대박! 가까이서는 처음 봐.”
“쉿! 조용히 말해. 쪽팔려.”
하지만 정원은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건 신경 쓰지 않고 두리번거리다 가까운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석주 말대로라면 정원은 저를 찾으려는 노력을 더 해야 했다.
승재는 정원이 있는 곳으로 가 볼까 하다가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꾸만 정원이 앉은 쪽으로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원은 한 시간이 넘도록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뭘 읽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가서 물어볼 명분이 없었다.
집중력이 흐려진 승재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덩치 큰 남학생 하나가 정원의 옆에 앉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턱을 괴고 정원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던 정원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흠칫 놀랐다.
“뭐야?”
다행히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도서관 내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우람한 근육 때문에 입고 있는 티셔츠가 타이즈처럼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정원은 그가 보내오는 불편한 시선을 무시하고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한정원 맞지?”
남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좀 하죠?”
같은 테이블에 앉아 큰 목소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던 학생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가지 않아 정원이 앉은 테이블에는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기태웅. 나 알지?”
정원은 앞에 앉은 남학생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
정원은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그는 정원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이름은 들어 봤지?”
“아니.”
무표정한 정원을 지그시 바라보던 태웅이 정원이 보고 있던 책을 잡아 슬그머니 제 앞으로 가지고 왔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그렇게 재미있게 읽는 거야?”
조용한 도서관에 태웅의 목소리만 낮게 퍼졌다. 태웅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학생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지만 태웅은 여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이야기하려면 나가서 하세요!”
참다못한 여학생 하나가 태웅과 정원을 향해 못마땅한 듯 말하자 정원은 가방을 싸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태웅이 가져갔던 책도 빼앗아 가방에 욱여넣었다.
“그래. 나가자. 나가서 이야기하자.”
태웅이 일어서자 주변의 시선이 그의 큰 키를 따라 저절로 움직였다. 적어도 195센티미터는 훨씬 넘어 보였다.
정원은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태웅의 느물거리는 시선을 못 본 척하며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승재는 정원이 도서관을 나가자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승재는 책을 덮고 가방을 챙겨 열람실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밖에는 태웅만 멍청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디로 간 거야?”
태웅은 덩치와는 달리 인내심은 매우 짧은지 잠시 정원을 찾다 머리를 긁적이며 로비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진짜 어디로 간 거지?’
정원은 그사이 어디로 간 건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승재가 잠시 머뭇대는 사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정원이 도서관 로비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일부러 피해 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별일이 없었으므로 승재는 석주를 찾아가기로 했다.
“어?”
밖에 나가려던 승재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차 안에 우산을 두고 온 승재는 비가 떨어지는 하늘만 멍하게 보고 있었다.
“아……. 차도 석주가 가져갔지.”
비는 금세 그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석주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내 드는데 누군가 알은척을 하며 다가왔다.
“선배, 우산이 없으세요?”
얼마 전 보았던 단발머리 여학생이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승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은영의 인사를 받았다.
“저랑 같이 쓰고 가실래요?”
양 볼이 발그레 물든 은영이 수줍게 우산을 내밀었다. 하지만 승재는 그녀와 우산을 같이 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친구가 올 거야.”
“아……. 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할 은영이 아니었다.
“선배 친구 올 때까지 같이 있어 드릴게요. 혼자 심심하잖아요.”
“괜찮아.”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승재가 야속했지만 그것 또한 승재의 매력이었으므로 싫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매번 거절을 당해도 계속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영은 승재의 옆모습을 흘끔거리며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했다. 멋있어서 보고만 있어도 하루 종일 행복할 것 같았다.
“석주 선배가 오기로 하셨나 봐요.”
승재는 자꾸 말을 거는 은영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친하지도 않으면서 선뜻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다른 목적이 있기 마련이었다.
석주가 올 거라고 말하려는데 까만색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정원이 보였다. 승재는 잠시 망설인 끝에
“친구 왔어. 갈게.”
하고 말한 후 정원의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뭐 하는 짓이야?”
정원이 승재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나도 도왔으니 지금 날 좀 돕지?”
승재가 로비 앞에 울상을 하며 서 있는 여학생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대충 눈치를 챈 정원이 못마땅한 듯 눈을 찌푸렸다.
승재는 이 와중에도 정원이 예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날 이용하겠다고?”
“아니, 우산을 이용하겠다고.”
비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갇혀 점점 사라졌다. 정원은 우산을 쓰고 있으면서도 등이 다 젖고 있는 승재가 신경 쓰였다.
‘돈도 많다면서 왜 우산을 안 가지고 다니는 거야?’
동석에게 지난번 일을 듣지 않았다면 모른 척하고 갈 텐데. 정원은 잠시 고민하다 승재 쪽으로 우산을 내밀었다.
“이걸로 퉁.”
“오케이.”
“친한 척 말고.”
“오케이.”
승재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우산을 들고 있는 정원을 쳐다봤다. 승재 쪽으로 우산을 기울인 정원의 어깨가 다 젖어 있었다.
승재는 우산을 슬그머니 정원이 있는 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정원의 팔에 힘이 들어가 우산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승재가 다시 우산을 미는데 순간 바람이 강하게 불더니 정원이 들고 있던 우산이 훌렁 뒤집어졌다.
휘이이잉!
쏴아아아아아!
두 사람은 순식간에 쫄딱 젖었고 뒤집어진 우산을 들고 멍하게 서 있는 정원을 본 승재가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크큭, 크크크 하하하하!”
승재는 뒤집어진 우산을 꿋꿋하게 잡고 서 있는 고집스런 정원의 모습이 우스워 쿡쿡 웃다가 짜증으로 가득한 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재밌냐고 으르렁대는 정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원은 바람을 등지고 뒤집어진 우산을 다시 접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우산대는 이미 부러진 상태라 원래대로 접는다 해도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리 줘.”
승재는 정원이 어떻게든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 낑낑대는 우산을 가져와 둘둘 말아 쥐었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정원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저리로 가자!”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두 사람은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정신없이 달렸다.
“저기!”
미처 비를 대비하지 못한 학생들이 많은지 조금이라도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아래면 갈 곳 잃은 발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런대로 여유가 좀 있어 보이는 곳을 찾아 두 사람이 다급하게 뛰어들자, 옹기종기 모여 하늘만 원망스럽게 쳐다보던 사람들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미 서로 다 젖어서 더 젖을 것도 없었지만 후덥지근하게 더운 날씨 속에서 축축하게 젖은 몸을 부대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정원은 경황이 없다가 숨을 고르고 나자 승재와 잡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제 손을 감싸 쥐고 있는 느낌은 굉장히 낯설고 어색했다.
정원은 슬그머니 손을 빼내 입고 있는 옷을 툭툭 치며 물기를 털어 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었지만 정원의 언변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택한 침묵.
“…….”
어색하긴 승재도 마찬가지. 하지만 승재에게는 융통성이라는 것이 있었다.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지?”
승재의 말에도 둘 사이엔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어.”
정원은 자신에게 한 질문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 그가 말을 걸 사람은 자기밖에 없음을 깨닫고 짧게 대답했다.
대화를 이어 가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던진 일상적인 질문이었지만 정원에게서 나온 대답은 마침표였다.
평소의 승재였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상대와 절대 대화를 이어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저를 닮은 정원의 가시 때문인지 자꾸만 그녀의 반응을 기대하게 됐다.
“집에 어떻게 갈 거야?”
언제부터 친했다고 이렇게 자꾸 질문을 해 대는지. 아까 우산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모른 척하고 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를 하기엔 조금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이 의미 없고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대충 그치면.”
정원의 대답은 결코 한 문장 이상 이어 가는 법이 없었다. 승재는 어떻게 하면 저를 떼어 낼까 노골적으로 궁리하는 정원의 모습에 전에 없던 장난기가 발동하는 중이었다.
“언제 그칠지 알고?”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