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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날갯짓
프롤로그
여러 신화가 살아 숨 쉬는 시대였다. 신들의 싸움에 휘말린 가엾은 인간들의 피바람이 몰아치던 시대라고 해야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들에게 선택받은 인간들은 그들이 벌인 일들에 휘말렸고 강력한 힘에 휩쓸려 먼지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들의 힘은 엄청나고 사모할 만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신에게 선택받기를 간절히 바랐다.
대대로 거대한 신들의 선택을 받아 왔던 대귀족 티리엔의 먼 방계 가문에서 태어난 레리트가 첫울음을 터트린 순간.
레리트의 울음에 담긴 강력한 신성에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사망했다.
모든 가문의 사람이 죽고 홀로 남은 레리트는 울고 또 울었다. 배가 고파 울었고 추위에 고통받아 울었으며 낯선 세상이 무서워서 울었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져 저택의 주변 사람들까지 전부 죽어 나갈 때. 티리엔에서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신의 가호를 받는 휘하의 기사들을 데리고 레리트의 가문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죽은 그곳에서 홀로 살아 있는 레리트를 발견했다.
가문에 얼마나 많은 신이 함께하느냐가 그 가문의 힘을 결정했기에 그들은 강력한 신의 가호를 받는 레리트를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티리엔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그렇게 레리트는 강력한 힘 때문에 가족을 전부 잃었지만 동시에 그 힘 덕분에 대륙에서 제일가는 가문 중 하나라 여겨지는 티리엔 가문에서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어린 레리트는 힘을 조절할 줄 몰랐고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은 평범한 인간들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티리엔의 가주인 그레탄트 공작은 죽어 나가는 사용인들 때문에 고심했다. 강력한 신성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그와 같이 신을 품은 자들만이 돌볼 수가 있었는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신을 품은 귀중한 인력을 아이를 돌보는 데에 쓰기에는 다른 가문에서 벌어지는 전쟁들로 인해 마땅한 인력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고심하던 그레탄트는 결국 그의 아들 릭셀리언과 레리트를 함께 키우기로 했다. 릭셀리언 역시 레리트처럼 신의 가호를 받는 아이였기에 릭셀리언의 사용인들은 모두 신을 품은 자들이었다.
티리엔의 직계인 그의 아들과 먼 방계인 레리트를 함께 키운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만큼 당시에는 사람을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레리트의 릭셀리언의 소꿉친구이자 하녀로서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1화
레리트는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나 신들에게는 찰나였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게 된 티리엔 가문의 후계자 릭셀리언을 사용인들 틈에 서서 기다렸다.
자그마치 8년 만의 귀환이었다. 성격이 못났다고는 해도 레리트 역시 8년 만에 만나는 소꿉친구가 반갑기는 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레리트는 그의 승리 소식에 축배를 들었다. 정말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이 너무 대견했다.
신들이 그들의 싸움에 인간을 끌어들인 이후로 인간들은 신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그들 대신 전쟁을 벌이곤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들은 인간에게 그들의 신력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인간을 가호하고 그 가호를 받아 평범한 인간들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된 인간들은 그에게 힘을 빌려준 신을 받들고 그를 모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을 가호하는 대부분의 신은 신들끼리 분쟁이 생겼을 때 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들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곤 했다.
신의 힘이 아니라면 보잘것없는 인간일 뿐인 그들이 신의 뜻을 거절할 수 없었으니 신을 잘못 만난다면 릭셀리언처럼 이렇게 전쟁에 끌려가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레리트처럼 운 좋게 인간을 장난감으로 생각하지 않는 신을 만나는 이들도 있긴 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일생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보내는 것이다. 신의 사랑을 받으면서.
물론 레리트처럼 운이 좋은 이는 몇 없었으니 대부분의 이들은 릭셀리언처럼 신의 싸움에 휘말리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신의 싸움에 휘말리는 이들 중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때 대문 가장 앞에서 릭셀리언을 기다리고 있던 릭셀리언의 어머니이자 가문의 안주인인 브리엔이 레리트를 돌아보았다.
“어머, 레리트. 왜 거기에 있니. 이리로 오렴.”
그다지 브리엔의 옆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기대에 찬 브리엔의 말을 거절하기는 힘들었기에 레리트는 천천히 브리엔의 옆으로 다가갔다.
브리엔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레리트를 바라봤다.
“오, 우리 릭셀리언이 드디어 돌아오는구나.”
여전히 소녀 같은 브리엔의 모습에 떨떠름하게 서 있던 레리트의 입가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그려졌다.
“공작님께서도 함께 돌아오신다고 하신 거죠?”
릭셀리언의 승리가 선언된 이후 그레탄트가 릭셀리언을 데리러 전장으로 떠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당연히 그레탄트와 릭셀리언이 함께 돌아오겠지만 생각보다 늦어지는 날짜에 걱정이 됐다.
“그래. 정말 다행이지 않니? 앞으로도 우리 티리엔 가문은 축복의 나날을 보내게 될 거야.”
물론 그리될 것이다. 레리트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대단하신 부부들이지.’
제우스와 헤라의 부부 싸움에 8년이라는 시간이 낭비됐다. 신의 가호를 받는 모든 인간이 그들의 신에게 헌신하는 것처럼 릭셀리언은 그를 수호하는 여신 헤라의 명령을 받아 전쟁터로 향했다.
그리고 제우스의 가호를 받는 인간과 각자의 신을 대변해 전쟁을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인간은 신들의 싸움에 이용당한 것이다. 그들의 체스 말로서. 다행히 기나긴 싸움의 승자는 릭셀리언이었다.
기쁜 일이었고 대단한 일이었다. 릭셀리언은 그 싸움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신을 죽여 신살자가 되었으니까.
‘뭐 실제로 죽였다기보다는 봉인을 한 거지만.’
한낱 인간이 신을 죽이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따라서 인간이 신을 죽였다고 해 봐야 고작 백여 년 남짓 지나면 다시 세상에 나타나곤 했다.
그렇게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신들은 다시 여러 이유를 만들어 그들을 대신할 인간을 앞세워 그 지긋지긋한 전쟁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였던 만큼 그래도 릭셀리언의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으니 앞으로 백 년은 자랑거리로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될 것이었다.
“그렇죠.”
“얼마나 컸을까?”
딱히 릭셀리언이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레리트 본인은 8년 전과 비교해서 바뀐 것이 이리도 많은데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애만은 전혀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많이 변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 기간 동안 함께하지 못했다는 게 참 슬퍼.”
슬픈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브리엔이 레리트의 손을 붙잡아 오며 작게 웃었다.
“그래도 우린 레리트 네가 있어서 참 좋았단다.”
릭셀리언이 전쟁을 위해 가문을 떠난 뒤, 그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레리트였다. 릭셀리언이 해야 할 가문의 일들을 돕고, 브리엔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그레탄트를 보좌했던 것도 모두 레리트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이 귀찮은 일에서 드디어 레리트는 해방될 것이다.
‘그 녀석이 돌아오는 게 반가운 이유가 하나 생겼네.’
물론 이제는 다시 그 녀석의 잔시중을 들어야 하겠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집안의 대소사를 돌보는 일 정도는 괜찮았지만 그레탄트를 따라다니며 노련한 귀족들과 머리싸움을 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지난 8년간 가문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좀 쉬고 싶었다.
‘그 녀석이 쉬게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정신적으로는 엇비슷하게 피곤할 거야.’
릭셀리언의 모난 성격을 떠올린 레리트는 한숨을 쉬고 싶었으나 옆에 있는 브리엔을 봐서 겨우 참아 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부인.”
한참 대화를 이어 나가던 브리엔이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도대체 언제쯤 올까?”
레리트는 한참 전부터 들려오던 마차 소리로 거리를 가늠해 보고 답했다.
“마차 소리가 들리고 있어요. 곧 도착할 거예요.”
“오, 그래?”
브리엔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아직은 보이지도 않는 마차를 보려는 듯 목을 앞으로 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멀리서 마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브리엔이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레리트! 오는구나!”
레리트는 신나서 레리트를 돌아보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브리엔을 부드럽게 잡아당기며 답했다.
“부인, 조심하세요.”
평소 별거 아닌 일에도 잘 다치는 브리엔이 크게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 릭셀리언을 오랜만에 보는데 다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
레리트가 흥분한 브리엔을 진정시킬 때쯤 달려오던 마차가 저택의 대문 앞에 천천히 멈췄다.
레리트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 녀석이라면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독설을 내뱉을 것이다.
특히 지금 레리트의 꼴을 보자면 더더욱. 레리트는 스스로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하늘거리는 화려한 드레스와 곱게 화장한 얼굴. 브리엔이 원해서 치장을 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을 보고 비웃음을 날릴 그 녀석을 떠올리자니 벌써 피곤해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볼 생각 하니까 좋긴 하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레리트 역시 릭셀리언의 귀환을 반기고 있었다. 아무리 미운 녀석이라도 그 녀석은 레리트의 가족이었으니까.
천천히 마차의 문이 열렸다. 레리트는 옆에 서 있는 브리엔의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엷게 미소 지었다.
이윽고 문이 완전히 열리고 그레탄트 공작이 먼저 나타났다. 브리엔이 그레탄트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여보.”
“브리엔.”
그런데 공작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무언가 망설이는 듯 걱정스러운 눈으로 브리엔을 바라보는 그레탄트의 얼굴.
레리트는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설마 그 녀석이 죽은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레리트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마차 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니면 어디 한군데가 잘려 온 걸까?’
신들의 싸움에 인간이 말려들어 같이 전쟁을 치렀으니 사실 사지 멀쩡히 돌아오는 걸 기대하는 게 더 웃긴 일이기도 했다.
레리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여보?”
그레탄트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브리엔을 붙잡으며 답했다.
“살아 있는 것에, 크게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합시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미 8년이나 릭셀리언을 기다렸다. 레리트는 브리엔을 달래고 있는 그레탄트를 지나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차 안에 얌전히 앉아 있는 릭셀리언을 발견했다. 두 다리와 두 팔은 멀쩡했다. 레리트는 릭셀리언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도 열 개가 모두 있었다.
신발에 숨겨진 발가락이 몇 개 사라졌을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몸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저 반지르르한 얼굴 역시 멀쩡했고 짧게 자른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두 귀 역시 멀쩡했다.
‘뭐야, 크게 다친 곳은 없잖아.’
조금 삭막해진 표정과 선이 굵어진 것을 제외하면 예전과는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레리트가 브리엔을 달래기 위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려던 그때, 릭셀리언이 마차의 문 앞에 서 있는 레리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초점 없이 흐리멍덩한 그의 눈과 레리트의 청음을 머금은 눈이 마주쳤다.
레리트는 그녀의 귀에서 속삭이는 그녀의 여신 난나의 말이 아니더라도 릭셀리언의 상태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도련님이자 악우인 릭셀리언의 눈이 멀어 버렸다는 것을. 레리트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텅 빈 릭셀리언의 눈을 바라봤다. 그 릭셀리언이 눈이 멀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데 릭셀리언의 눈이 힘없이 앞으로 돌아갔다.
‘저게 뭐야.’
저 반응은 뭐란 말인가.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분위기.
거슬렸다. 릭셀리언은 언제나 사납고 냉정하며 못된 녀석이어야 했고 생명력이 넘치는 녀석이어야 했으며 떽떽거리며 시비를 걸어야 했다.
그래서일까. 레리트는 자신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뭐 하니? 도착했어. 내려.”
8년간의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예전과 똑같은 말투였다. 그리고 그런 레리트의 목소리를 들은 릭셀리언의 얼굴이 다시 레리트에게로 돌아왔다.
레리트가 그녀를 바라보는 릭셀리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누군지 설명해 줘야 해?”
천천히 릭셀리언의 입이 열렸다.
“……레리트.”
더 낮아진 목소리. 어둡고 칙칙한 지금의 분위기와 굉장히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래 봐야 저건 릭셀리언이었다.
레리트가 마차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특별히 손을 빌려줄게.”
릭셀리언의 신력이 반사적으로 레리트의 손을 튕겨 내려 했지만 레리트는 쉽게 그 저항을 물리쳤다.
“필요 없어.”
그 말에 레리트는 예전과 똑같은 어조와 말투로 그를 보며 얄밉게 입을 열었다.
“전쟁터에서 네가 여자 손이나 잡아 봤겠니?”
“뭐?”
릭셀리언을 수호하는 여신 헤라는 질투로 유명한 여신이었고, 과거의 전력들을 떠올려 보자면 그 여신이 다른 여인과의 접촉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레리트는 잔뜩 거칠어진 릭셀리언의 손을 애써 무시하며 그를 잡아끌었다.
“영광으로 알아. 가자.”
할 말이 없다는 듯 레리트를 바라보던 릭셀리언이 결국 레리트의 이끌림에 마차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마차에서 내려선 레리트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레탄트와 눈물 젖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브리엔을 향해 물었다.
“제가 릭셀리언을 방으로 데려다줘도 괜찮을까요?”
“……그러렴.”
레리트는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사용인들에게 일갈했다.
“뭣들 하니. 도련님이 돌아오셨잖니. 움직여.”
“……네, 네!”
레리트의 말에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레리트는 헛웃음을 짓는 릭셀리언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언제부터 네가 사용인들을 이리 쉽게 부렸지?”
레리트는 일부러 뽐내듯 목소리를 높혔다.
“8년이나 시간이 지났는데 그럼 아무것도 안 변했겠니?”
“……안 변한 것 같은데.”
그리 말하는 릭셀리언의 어조에서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하지만 레리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양 더 새침하게 답했다.
“무슨 소리. 이제 이 몸이 이 집안의 실세인데.”
“실세?”
“부인께서 나를 좀 아끼셔야지.”
그리 말하면서 레리트는 그들의 앞에 있는 계단을 이야기했다.
“앞에 계단.”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며 그를 인도했다.
“이제 나는 그냥 하녀가 아니라 하녀장 정도로 여겨야 할걸?”
“하녀장?”
어이없다는 듯한 어조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레리트는 끝도 없는 계단을 올라가며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1층으로 방을 옮기는 게 편하려나? 방은 그대론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원래 쓰던 방이 편해.”
레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막 부릴 수 있고.”
“……그래.”
레리트가 복도를 지나 그녀의 방 옆에 있는 릭셀리언의 방문을 열었다.
“자, 네 방이야. 나름 열심히 꾸몄는데 말이야. 그래도 비싼 거니까 촉감은 좋지 않을까?”
레리트는 최신 유행으로 꾸며져 있는 그의 방을 바라봤다. 이걸 꾸미느라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이 녀석은 이걸 볼 수 없게 됐다.
“이 이상한 향은 뭐야?”
레리트도 딱히 마음에 드는 향은 아니었으나 브리엔이 마음에 들어 했기에 별수 없었다.
“나도 몰라. 요즘 제도에서 인기가 있는 향이라고 했어.”
릭셀리언이 코를 부여잡고 눈을 찌푸렸다.
“다 치워.”
처음으로 원래의 그의 모습이 얼핏 나온 것 같았다. 레리트는 안도를 하며 답했다.
“이거 비싼 거야.”
“마음에 안 들어. 다시 원래대로 바꿔 놔.”
역시 심술궂은 녀석이었다. 8년도 지난 옛날 향을 레리트가 지금에 와서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원래 향이 뭐였는데? 나도 몰라.”
릭셀리언이 레리트의 손을 들어 올리며 코를 가져다 댔다. 레리트의 손등이 그의 코에 닿았다. 살짝 멈칫했던 릭셀리언이 이내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이 냄새 정도로.”
프롤로그
여러 신화가 살아 숨 쉬는 시대였다. 신들의 싸움에 휘말린 가엾은 인간들의 피바람이 몰아치던 시대라고 해야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들에게 선택받은 인간들은 그들이 벌인 일들에 휘말렸고 강력한 힘에 휩쓸려 먼지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들의 힘은 엄청나고 사모할 만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신에게 선택받기를 간절히 바랐다.
대대로 거대한 신들의 선택을 받아 왔던 대귀족 티리엔의 먼 방계 가문에서 태어난 레리트가 첫울음을 터트린 순간.
레리트의 울음에 담긴 강력한 신성에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사망했다.
모든 가문의 사람이 죽고 홀로 남은 레리트는 울고 또 울었다. 배가 고파 울었고 추위에 고통받아 울었으며 낯선 세상이 무서워서 울었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져 저택의 주변 사람들까지 전부 죽어 나갈 때. 티리엔에서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신의 가호를 받는 휘하의 기사들을 데리고 레리트의 가문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죽은 그곳에서 홀로 살아 있는 레리트를 발견했다.
가문에 얼마나 많은 신이 함께하느냐가 그 가문의 힘을 결정했기에 그들은 강력한 신의 가호를 받는 레리트를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티리엔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그렇게 레리트는 강력한 힘 때문에 가족을 전부 잃었지만 동시에 그 힘 덕분에 대륙에서 제일가는 가문 중 하나라 여겨지는 티리엔 가문에서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어린 레리트는 힘을 조절할 줄 몰랐고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은 평범한 인간들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티리엔의 가주인 그레탄트 공작은 죽어 나가는 사용인들 때문에 고심했다. 강력한 신성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그와 같이 신을 품은 자들만이 돌볼 수가 있었는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신을 품은 귀중한 인력을 아이를 돌보는 데에 쓰기에는 다른 가문에서 벌어지는 전쟁들로 인해 마땅한 인력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고심하던 그레탄트는 결국 그의 아들 릭셀리언과 레리트를 함께 키우기로 했다. 릭셀리언 역시 레리트처럼 신의 가호를 받는 아이였기에 릭셀리언의 사용인들은 모두 신을 품은 자들이었다.
티리엔의 직계인 그의 아들과 먼 방계인 레리트를 함께 키운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만큼 당시에는 사람을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레리트의 릭셀리언의 소꿉친구이자 하녀로서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1화
레리트는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나 신들에게는 찰나였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게 된 티리엔 가문의 후계자 릭셀리언을 사용인들 틈에 서서 기다렸다.
자그마치 8년 만의 귀환이었다. 성격이 못났다고는 해도 레리트 역시 8년 만에 만나는 소꿉친구가 반갑기는 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레리트는 그의 승리 소식에 축배를 들었다. 정말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이 너무 대견했다.
신들이 그들의 싸움에 인간을 끌어들인 이후로 인간들은 신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그들 대신 전쟁을 벌이곤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들은 인간에게 그들의 신력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인간을 가호하고 그 가호를 받아 평범한 인간들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된 인간들은 그에게 힘을 빌려준 신을 받들고 그를 모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을 가호하는 대부분의 신은 신들끼리 분쟁이 생겼을 때 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들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곤 했다.
신의 힘이 아니라면 보잘것없는 인간일 뿐인 그들이 신의 뜻을 거절할 수 없었으니 신을 잘못 만난다면 릭셀리언처럼 이렇게 전쟁에 끌려가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레리트처럼 운 좋게 인간을 장난감으로 생각하지 않는 신을 만나는 이들도 있긴 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일생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보내는 것이다. 신의 사랑을 받으면서.
물론 레리트처럼 운이 좋은 이는 몇 없었으니 대부분의 이들은 릭셀리언처럼 신의 싸움에 휘말리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신의 싸움에 휘말리는 이들 중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때 대문 가장 앞에서 릭셀리언을 기다리고 있던 릭셀리언의 어머니이자 가문의 안주인인 브리엔이 레리트를 돌아보았다.
“어머, 레리트. 왜 거기에 있니. 이리로 오렴.”
그다지 브리엔의 옆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기대에 찬 브리엔의 말을 거절하기는 힘들었기에 레리트는 천천히 브리엔의 옆으로 다가갔다.
브리엔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레리트를 바라봤다.
“오, 우리 릭셀리언이 드디어 돌아오는구나.”
여전히 소녀 같은 브리엔의 모습에 떨떠름하게 서 있던 레리트의 입가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그려졌다.
“공작님께서도 함께 돌아오신다고 하신 거죠?”
릭셀리언의 승리가 선언된 이후 그레탄트가 릭셀리언을 데리러 전장으로 떠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당연히 그레탄트와 릭셀리언이 함께 돌아오겠지만 생각보다 늦어지는 날짜에 걱정이 됐다.
“그래. 정말 다행이지 않니? 앞으로도 우리 티리엔 가문은 축복의 나날을 보내게 될 거야.”
물론 그리될 것이다. 레리트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대단하신 부부들이지.’
제우스와 헤라의 부부 싸움에 8년이라는 시간이 낭비됐다. 신의 가호를 받는 모든 인간이 그들의 신에게 헌신하는 것처럼 릭셀리언은 그를 수호하는 여신 헤라의 명령을 받아 전쟁터로 향했다.
그리고 제우스의 가호를 받는 인간과 각자의 신을 대변해 전쟁을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인간은 신들의 싸움에 이용당한 것이다. 그들의 체스 말로서. 다행히 기나긴 싸움의 승자는 릭셀리언이었다.
기쁜 일이었고 대단한 일이었다. 릭셀리언은 그 싸움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신을 죽여 신살자가 되었으니까.
‘뭐 실제로 죽였다기보다는 봉인을 한 거지만.’
한낱 인간이 신을 죽이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따라서 인간이 신을 죽였다고 해 봐야 고작 백여 년 남짓 지나면 다시 세상에 나타나곤 했다.
그렇게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신들은 다시 여러 이유를 만들어 그들을 대신할 인간을 앞세워 그 지긋지긋한 전쟁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였던 만큼 그래도 릭셀리언의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으니 앞으로 백 년은 자랑거리로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될 것이었다.
“그렇죠.”
“얼마나 컸을까?”
딱히 릭셀리언이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레리트 본인은 8년 전과 비교해서 바뀐 것이 이리도 많은데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애만은 전혀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많이 변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 기간 동안 함께하지 못했다는 게 참 슬퍼.”
슬픈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브리엔이 레리트의 손을 붙잡아 오며 작게 웃었다.
“그래도 우린 레리트 네가 있어서 참 좋았단다.”
릭셀리언이 전쟁을 위해 가문을 떠난 뒤, 그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레리트였다. 릭셀리언이 해야 할 가문의 일들을 돕고, 브리엔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그레탄트를 보좌했던 것도 모두 레리트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이 귀찮은 일에서 드디어 레리트는 해방될 것이다.
‘그 녀석이 돌아오는 게 반가운 이유가 하나 생겼네.’
물론 이제는 다시 그 녀석의 잔시중을 들어야 하겠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집안의 대소사를 돌보는 일 정도는 괜찮았지만 그레탄트를 따라다니며 노련한 귀족들과 머리싸움을 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지난 8년간 가문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좀 쉬고 싶었다.
‘그 녀석이 쉬게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정신적으로는 엇비슷하게 피곤할 거야.’
릭셀리언의 모난 성격을 떠올린 레리트는 한숨을 쉬고 싶었으나 옆에 있는 브리엔을 봐서 겨우 참아 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부인.”
한참 대화를 이어 나가던 브리엔이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도대체 언제쯤 올까?”
레리트는 한참 전부터 들려오던 마차 소리로 거리를 가늠해 보고 답했다.
“마차 소리가 들리고 있어요. 곧 도착할 거예요.”
“오, 그래?”
브리엔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아직은 보이지도 않는 마차를 보려는 듯 목을 앞으로 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멀리서 마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브리엔이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레리트! 오는구나!”
레리트는 신나서 레리트를 돌아보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브리엔을 부드럽게 잡아당기며 답했다.
“부인, 조심하세요.”
평소 별거 아닌 일에도 잘 다치는 브리엔이 크게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 릭셀리언을 오랜만에 보는데 다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
레리트가 흥분한 브리엔을 진정시킬 때쯤 달려오던 마차가 저택의 대문 앞에 천천히 멈췄다.
레리트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 녀석이라면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독설을 내뱉을 것이다.
특히 지금 레리트의 꼴을 보자면 더더욱. 레리트는 스스로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하늘거리는 화려한 드레스와 곱게 화장한 얼굴. 브리엔이 원해서 치장을 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을 보고 비웃음을 날릴 그 녀석을 떠올리자니 벌써 피곤해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볼 생각 하니까 좋긴 하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레리트 역시 릭셀리언의 귀환을 반기고 있었다. 아무리 미운 녀석이라도 그 녀석은 레리트의 가족이었으니까.
천천히 마차의 문이 열렸다. 레리트는 옆에 서 있는 브리엔의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엷게 미소 지었다.
이윽고 문이 완전히 열리고 그레탄트 공작이 먼저 나타났다. 브리엔이 그레탄트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여보.”
“브리엔.”
그런데 공작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무언가 망설이는 듯 걱정스러운 눈으로 브리엔을 바라보는 그레탄트의 얼굴.
레리트는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설마 그 녀석이 죽은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레리트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마차 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니면 어디 한군데가 잘려 온 걸까?’
신들의 싸움에 인간이 말려들어 같이 전쟁을 치렀으니 사실 사지 멀쩡히 돌아오는 걸 기대하는 게 더 웃긴 일이기도 했다.
레리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여보?”
그레탄트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브리엔을 붙잡으며 답했다.
“살아 있는 것에, 크게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합시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미 8년이나 릭셀리언을 기다렸다. 레리트는 브리엔을 달래고 있는 그레탄트를 지나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차 안에 얌전히 앉아 있는 릭셀리언을 발견했다. 두 다리와 두 팔은 멀쩡했다. 레리트는 릭셀리언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도 열 개가 모두 있었다.
신발에 숨겨진 발가락이 몇 개 사라졌을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몸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저 반지르르한 얼굴 역시 멀쩡했고 짧게 자른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두 귀 역시 멀쩡했다.
‘뭐야, 크게 다친 곳은 없잖아.’
조금 삭막해진 표정과 선이 굵어진 것을 제외하면 예전과는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레리트가 브리엔을 달래기 위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려던 그때, 릭셀리언이 마차의 문 앞에 서 있는 레리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초점 없이 흐리멍덩한 그의 눈과 레리트의 청음을 머금은 눈이 마주쳤다.
레리트는 그녀의 귀에서 속삭이는 그녀의 여신 난나의 말이 아니더라도 릭셀리언의 상태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도련님이자 악우인 릭셀리언의 눈이 멀어 버렸다는 것을. 레리트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텅 빈 릭셀리언의 눈을 바라봤다. 그 릭셀리언이 눈이 멀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데 릭셀리언의 눈이 힘없이 앞으로 돌아갔다.
‘저게 뭐야.’
저 반응은 뭐란 말인가.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분위기.
거슬렸다. 릭셀리언은 언제나 사납고 냉정하며 못된 녀석이어야 했고 생명력이 넘치는 녀석이어야 했으며 떽떽거리며 시비를 걸어야 했다.
그래서일까. 레리트는 자신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뭐 하니? 도착했어. 내려.”
8년간의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예전과 똑같은 말투였다. 그리고 그런 레리트의 목소리를 들은 릭셀리언의 얼굴이 다시 레리트에게로 돌아왔다.
레리트가 그녀를 바라보는 릭셀리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누군지 설명해 줘야 해?”
천천히 릭셀리언의 입이 열렸다.
“……레리트.”
더 낮아진 목소리. 어둡고 칙칙한 지금의 분위기와 굉장히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래 봐야 저건 릭셀리언이었다.
레리트가 마차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특별히 손을 빌려줄게.”
릭셀리언의 신력이 반사적으로 레리트의 손을 튕겨 내려 했지만 레리트는 쉽게 그 저항을 물리쳤다.
“필요 없어.”
그 말에 레리트는 예전과 똑같은 어조와 말투로 그를 보며 얄밉게 입을 열었다.
“전쟁터에서 네가 여자 손이나 잡아 봤겠니?”
“뭐?”
릭셀리언을 수호하는 여신 헤라는 질투로 유명한 여신이었고, 과거의 전력들을 떠올려 보자면 그 여신이 다른 여인과의 접촉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레리트는 잔뜩 거칠어진 릭셀리언의 손을 애써 무시하며 그를 잡아끌었다.
“영광으로 알아. 가자.”
할 말이 없다는 듯 레리트를 바라보던 릭셀리언이 결국 레리트의 이끌림에 마차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마차에서 내려선 레리트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레탄트와 눈물 젖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브리엔을 향해 물었다.
“제가 릭셀리언을 방으로 데려다줘도 괜찮을까요?”
“……그러렴.”
레리트는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사용인들에게 일갈했다.
“뭣들 하니. 도련님이 돌아오셨잖니. 움직여.”
“……네, 네!”
레리트의 말에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레리트는 헛웃음을 짓는 릭셀리언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언제부터 네가 사용인들을 이리 쉽게 부렸지?”
레리트는 일부러 뽐내듯 목소리를 높혔다.
“8년이나 시간이 지났는데 그럼 아무것도 안 변했겠니?”
“……안 변한 것 같은데.”
그리 말하는 릭셀리언의 어조에서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하지만 레리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양 더 새침하게 답했다.
“무슨 소리. 이제 이 몸이 이 집안의 실세인데.”
“실세?”
“부인께서 나를 좀 아끼셔야지.”
그리 말하면서 레리트는 그들의 앞에 있는 계단을 이야기했다.
“앞에 계단.”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며 그를 인도했다.
“이제 나는 그냥 하녀가 아니라 하녀장 정도로 여겨야 할걸?”
“하녀장?”
어이없다는 듯한 어조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레리트는 끝도 없는 계단을 올라가며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1층으로 방을 옮기는 게 편하려나? 방은 그대론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원래 쓰던 방이 편해.”
레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막 부릴 수 있고.”
“……그래.”
레리트가 복도를 지나 그녀의 방 옆에 있는 릭셀리언의 방문을 열었다.
“자, 네 방이야. 나름 열심히 꾸몄는데 말이야. 그래도 비싼 거니까 촉감은 좋지 않을까?”
레리트는 최신 유행으로 꾸며져 있는 그의 방을 바라봤다. 이걸 꾸미느라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이 녀석은 이걸 볼 수 없게 됐다.
“이 이상한 향은 뭐야?”
레리트도 딱히 마음에 드는 향은 아니었으나 브리엔이 마음에 들어 했기에 별수 없었다.
“나도 몰라. 요즘 제도에서 인기가 있는 향이라고 했어.”
릭셀리언이 코를 부여잡고 눈을 찌푸렸다.
“다 치워.”
처음으로 원래의 그의 모습이 얼핏 나온 것 같았다. 레리트는 안도를 하며 답했다.
“이거 비싼 거야.”
“마음에 안 들어. 다시 원래대로 바꿔 놔.”
역시 심술궂은 녀석이었다. 8년도 지난 옛날 향을 레리트가 지금에 와서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원래 향이 뭐였는데? 나도 몰라.”
릭셀리언이 레리트의 손을 들어 올리며 코를 가져다 댔다. 레리트의 손등이 그의 코에 닿았다. 살짝 멈칫했던 릭셀리언이 이내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이 냄새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