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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레리트는 손에서 힘을 빼지 않는 릭셀리언에 자신의 손을 다시 잡아당겨 냄새를 맡았다. 아주 은은하게 퍼지는 비누 향. 역시 신들의 선택을 받은 인간들에게는 이렇게 잔잔하고 편안한 향이 가장 좋았다. 높아진 신체 능력에는 당연히 후각 역시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하긴 인공적인 향보다는 비누 향이 제일 좋지?”
“……그래.”
방 안 가득 꾸며 둔 꽃들과 향초들이 아깝기는 했으나 그래도 주인이 싫다니 치워야 했다.
“그래, 저거는 쓸데없이 비싸기만 했어. 그래도 부인께서 즐거워하셨으니 제값은 한 거지.”
이 방을 꾸미는 동안 브리엔이 매우 즐거워했으니 그래도 가치 있던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치울 것들을 눈으로 훑던 레리트가 아무 말도 없는 릭셀리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씻을 거야?”
“네가 하게?”
새삼스러웠다. 그가 떠나기 전까지도 릭셀리언의 고집으로 원래 레리트가 하던 일이었다.
“왜 원래 내 일이었잖아?”
릭셀리언의 얼굴에서 황당함이 읽혔다.
“……하녀장이라며?”
“하녀장이어도 네가 하라면 하는 거지. 바꿔 줘?”
잠시 망설이던 릭셀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네가 해.”
“그래.”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손을 놓고 그의 상의에 손을 댔다.
오랜만이라 어색한 모양인지 릭셀리언이 몸을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레리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레리트의 신경은 모두 릭셀리언의 단추에 몰려 있었다.
레리트는 뻑뻑한 단추에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레리트가 굉장히 오랜만에 남의 시중을 드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단추를 못 풀 정도로 손이 굳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건 새로운 옷의 단추가 너무 빡빡한 거였다.
“단추는 또 왜 이렇게 많아?”
역시 제도 인간들은 다들 사기꾼이었다. 비싸기만 더럽게 비싸지 옷이 형편없었다. 비싼 옷이라 잡아 뜯기에도 아까워 이렇게 꾸역꾸역 단추를 풀어 젖히고 있는 스스로의 행동도 짜증 났다.
투덜거리는 레리트의 말에 릭셀리언이 엷은 웃음을 지었지만, 단추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레리트는 그의 그런 웃음을 보지 못했다.
레리트가 릭셀리언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 단추를 풀다가 번뜩 고개를 들고 외쳤다.
“참, 여신님 아무런 사심이 없습니다.”
릭셀리언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뭐 하는 거야?”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상의를 벗기면서 답했다
“혹시 나 까먹으셨으면 안 되잖아.”
릭셀리언의 여신 헤라는 그녀의 것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릭셀리언과 함께 자란 레리트에게는 관대한 분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혹시 몰랐다.
“……까먹기는.”
“그분이 얼마나 무서운데.”
레리트가 코웃음을 치며 릭셀리언의 바지에 손을 댔다. 그러자 릭셀리언이 레리트의 손을 쳐 냈다.
레리트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털어 내며 릭셀리언에게 줄 가운을 가지러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옷을 모두 벗은 그에게 가운을 입혀 줬다.
“이리로 와.”
레리트가 그를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레리트는 그를 욕조의 앞으로 데려와 손을 붙잡고 물건을 하나하나 집어 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자, 너도 알겠지만, 여기가 욕조, 여기는 찬물이 나오는…….”
설명을 마친 레리트가 간단한 브리프만 걸친 릭셀리언이 가운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데 릭셀리언이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 미끈거리고 뭉글거리는 건 또 뭐야?”
레리트는 욕조에 가득 차 있는 거품을 바라보며 답했다.
“요즘 유행. 부인이 신이 나셔서 잔뜩 뿌리셨지. 거품이 오래간다고 했어.”
잠시 입을 다물고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이던 릭셀리언이 포기했다는 듯 욕조에 몸을 담갔다.
“새로운 유행은 다 이상하군.”
“너도 곧 익숙해질 거야.”
릭셀리언의 신 헤라 역시 이번 전쟁으로 힘을 많이 썼기에 한동안 다른 전쟁을 치르지 않을 테니 릭셀리언도 앞으로 꽤 오랜 시간 가문에서 평화로운 날을 보내게 될 거다.
그때 릭셀리언이 가운을 레리트에게 넘기며 명령했다.
“이것도 원래대로 돌려놔. 여기 있는 거 전부다.”
“고급으로 사다 줘도 난리야.”
레리트는 투덜거리면서도 그 외에 바꿀 것이 뭐가 있나 쭉 둘러봤다.
“너 또 오래 있을 거지?”
“……그래.”
레리트는 욕조에 늘어져 있는 그의 옆에 커다란 수건을 하나 놔두고는 당부했다.
“그래도 한 시간 내로 나와야 해. 저녁 식사 시간 얼마 안 남았거든.”
“…….”
레리트가 아무 말도 없는 릭셀리언에게 경고했다.
“안 먹는다는 소리는 안 받아. 내가 직접 키운 식물이란 말이야.”
“이제 식물도 키워? 하녀장이?”
“내 취미야.”
“정원사가 되기로 했어?”
“난나가 식물의 여신인데 내가 식물을 키우는 게 말이 안 돼?”
“너도 참…….”
레리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많이 변했지?”
“아니. 하나도 안 변했어.”
레리트는 코웃음을 쳤다.
“뭐래. 나 나간다. 다 씻으면 줄 잡아당겨. 줄은 이쪽.”
그녀를 부르는 줄의 위치까지 알려 준 레리트는 릭셀리언을 뒤로하고 문을 닫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릭셀리언의 방을 나서는 순간 레리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눈이 빨개졌다. 레리트는 울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계속 침착한 척했지만 사실 레리트는 침착하지 못했다.
‘이 개자식들, 남의 가문 후계자를 데려가서 자기들 전쟁에 이용했으면 몸은 무사히 돌려보내야 할 것 아니야!’
눈만 다친 것이 아니었다. 옷 밖으로 보이는 얼굴, 목, 손을 제외한 온몸의 모든 곳에 수많은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반쯤 잘렸던 것 같은 옆구리부터 배꼽을 가르는 상처와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커다란 흉터까지.
몸이 아주 만신창이였다. 그런 부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입술을 이로 잘근잘근 씹으면서도 레리트는 심장이 뛰지 않게, 숨이 고르게 나오게 몸 상태를 조절했다. 조금만 몸 상태가 달라져도 저 녀석이 바로 눈치챌 것이 틀림없으니까.
어느새 나타난 그녀의 여신 난나가 레리트의 볼에 볼을 비비적거리며 칭찬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우리 레리트는 참 다정하고 착해!」
「나는 난나를 제외한 모든 신이 싫어요.」
「나만 좋아하면 돼!」
레리트는 난나의 볼에 같이 얼굴을 한번 부벼 주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레리트의 애정 표현에 난나가 레리트를 향해 축복을 내려 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이니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난나가 쏟아부어 준 따뜻한 신력에 많이 지쳐 있었던 심신이 회복됐다.
어차피 다른 곳에 있어도 지금 레리트가 그녀의 방에서 울고 있는 브리엔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릭셀리언이 그녀를 부르는 종소리를 듣지 못하지는 않을 테니 지금은 잔뜩 놀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울고 있는 부인을 달래 주러 가야 할 것 같았다.
* * *
레리트는 옷을 갈아입은 릭셀리언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어때?”
레리트는 그레탄트의 품 안에 안겨 울고 있던 브리엔을 떠올렸다. 저 녀석이 그걸 듣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 자신의 의견을 묻는 모양이었다.
“뭐, 조금 그러시지.”
“네가 좀 도와드려.”
아무리 레리트가 자식 같은 존재라고 할지라도 진짜 자식은 레리트가 아닌 릭셀리언이었다.
“도련님이 하지 그래?”
릭셀리언이 코웃음을 쳤다.
“글쎄,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은데.”
레리트는 다시 어두운 빛을 띠기 시작하는 릭셀리언을 보곤 주위를 살폈다. 주의를 돌릴 만한 것이 필요했다.
마침 식당이 가까워져 그 앞에서 릭셀리언과 레리트를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사용인 중 저택에서 오랜 시간 일한 시종 하나가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 도련님.”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손을 맞잡은 손으로 방정맞게 흔들며 릭셀리언에게 말했다.
“내가 너보다 먼저 불렸어. 도련님이 먼저가 아니라 아가씨가 먼저였다고.”
“좋겠네.”
비웃음 가득한 말이었으나 릭셀리언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좀 가라앉은 것이 보여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사용인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그, 그것이 아니라…….”
아마 릭셀리언이 은연중에 보이는 그 위험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손을 움켜쥐며 신력을 풀었다.
“농담한 거예요. 괜찮아요.”
릭셀리언이 신력을 갈무리하는 게 느껴졌다. 사용인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네. 그, 문을 열겠습니다.”
“그래요.”
문이 열리자 눈이 퉁퉁 붓고 코가 빨갛게 변한 브리엔과 무뚝뚝한 얼굴임에도 슬픈 기색이 완연한 그레탄트가 보였다.
브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리, 릭셀리언. 그리고 레리트. 왔니?”
하지만 잔뜩 떨리는 데다 코가 막힌 소리까지 더해진 브리엔의 목소리는 너무 처량하게 들렸다.
더군다나 점점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릭셀리언의 얼굴을 다시 마주한 브리엔이 감정이 복받친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릭셀리언이 레리트를 툭 치며 말했다.
“내 말이 맞지?”
확실히 릭셀리언 말처럼 한동안은 두 사람은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브리엔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레리트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릭셀리언과 함께 자리로 향했다. 레리트는 사용인이 빼 주는 의자에 앉으며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공작님, 부인.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늦긴.”
레리트와 릭셀리언이 자리에 앉자 공작이 사용인들에게 눈짓했다.
“식사를 시작하자.”
“네.”
레리트는 릭셀리언의 앞에 놓인 샐러드에 관해 설명했다.
“토마토랑 치즈, 새싹이 가득 들어간 샐러드야.”
레리트가 으스대는 척 목소리를 높이며 릭셀리언을 바라봤다.
“치즈보다 토마토랑 새싹을 먼저 먹어 봐.”
사실 이건 으스대는 척이 아니라 정말 으스대는 거였다. 난나의 축복을 받는 레리트가 키우는 식물들이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레리트는 샐러드를 한입 먹는 릭셀리언을 향해 기대에 가득 차 물었다.
“어때.”
릭셀리언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샐러드를 계속 먹을 뿐이었지만 레리트는 릭셀리언이 칭찬을 해 주기 부끄러울 때 침묵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맛있지? 그지? 그렇죠. 부인?”
멍하니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브리엔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그럼. 정말 언제나 싱싱하고 다른 것들보다 맛있지.”
역시 이 녀석도 맛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난 레리트가 이번에는 옆에 놓인 다른 과일들을 릭셀리언에게 밀어 줬다.
“이것도 먹어 봐.”
“뭔데.”
“그냥 먹어 봐.”
“싫어.”
점점 더 레리트와 릭셀리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둘을 바라보던 브리엔과 그레탄트가 서로를 마주 봤다. 그들도 느낀 것이다.
“먹어 보라니까.”
“싫다고.”
“왜?”
“신 냄새가 나.”
장난에 실패한 레리트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쳇.”
“레리트.”
레리트가 그녀를 부르는 브리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브리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가족들이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있으니 참 좋구나. 그렇죠. 여보?”
“그렇군.”
레리트는 한결 나아진 공작 부부의 얼굴에 안도했다.
“사람이 많으니 좋긴 하네요. 자, 이것도 맛있어. 먹어 봐.”
릭셀리언이 전장에서 다쳐서 왔지만 다행히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레리트는 릭셀리언을 향해 채소들을 밀어 줬다. 그런데 여전히 그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레리트가 릭셀리언을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왜?”
“……됐다.”
레리트가 다시 한번 채소가 있는 접시를 릭셀리언의 가까이에 밀어 주며 웃었다.
“이게 제일 좋은 거야.”
릭셀리언의 한숨 소리가 들렸으나 여전히 분위기는 괜찮았다.
레리트는 손에서 힘을 빼지 않는 릭셀리언에 자신의 손을 다시 잡아당겨 냄새를 맡았다. 아주 은은하게 퍼지는 비누 향. 역시 신들의 선택을 받은 인간들에게는 이렇게 잔잔하고 편안한 향이 가장 좋았다. 높아진 신체 능력에는 당연히 후각 역시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하긴 인공적인 향보다는 비누 향이 제일 좋지?”
“……그래.”
방 안 가득 꾸며 둔 꽃들과 향초들이 아깝기는 했으나 그래도 주인이 싫다니 치워야 했다.
“그래, 저거는 쓸데없이 비싸기만 했어. 그래도 부인께서 즐거워하셨으니 제값은 한 거지.”
이 방을 꾸미는 동안 브리엔이 매우 즐거워했으니 그래도 가치 있던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치울 것들을 눈으로 훑던 레리트가 아무 말도 없는 릭셀리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씻을 거야?”
“네가 하게?”
새삼스러웠다. 그가 떠나기 전까지도 릭셀리언의 고집으로 원래 레리트가 하던 일이었다.
“왜 원래 내 일이었잖아?”
릭셀리언의 얼굴에서 황당함이 읽혔다.
“……하녀장이라며?”
“하녀장이어도 네가 하라면 하는 거지. 바꿔 줘?”
잠시 망설이던 릭셀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네가 해.”
“그래.”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손을 놓고 그의 상의에 손을 댔다.
오랜만이라 어색한 모양인지 릭셀리언이 몸을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레리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레리트의 신경은 모두 릭셀리언의 단추에 몰려 있었다.
레리트는 뻑뻑한 단추에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레리트가 굉장히 오랜만에 남의 시중을 드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단추를 못 풀 정도로 손이 굳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건 새로운 옷의 단추가 너무 빡빡한 거였다.
“단추는 또 왜 이렇게 많아?”
역시 제도 인간들은 다들 사기꾼이었다. 비싸기만 더럽게 비싸지 옷이 형편없었다. 비싼 옷이라 잡아 뜯기에도 아까워 이렇게 꾸역꾸역 단추를 풀어 젖히고 있는 스스로의 행동도 짜증 났다.
투덜거리는 레리트의 말에 릭셀리언이 엷은 웃음을 지었지만, 단추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레리트는 그의 그런 웃음을 보지 못했다.
레리트가 릭셀리언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 단추를 풀다가 번뜩 고개를 들고 외쳤다.
“참, 여신님 아무런 사심이 없습니다.”
릭셀리언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뭐 하는 거야?”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상의를 벗기면서 답했다
“혹시 나 까먹으셨으면 안 되잖아.”
릭셀리언의 여신 헤라는 그녀의 것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릭셀리언과 함께 자란 레리트에게는 관대한 분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혹시 몰랐다.
“……까먹기는.”
“그분이 얼마나 무서운데.”
레리트가 코웃음을 치며 릭셀리언의 바지에 손을 댔다. 그러자 릭셀리언이 레리트의 손을 쳐 냈다.
레리트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털어 내며 릭셀리언에게 줄 가운을 가지러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옷을 모두 벗은 그에게 가운을 입혀 줬다.
“이리로 와.”
레리트가 그를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레리트는 그를 욕조의 앞으로 데려와 손을 붙잡고 물건을 하나하나 집어 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자, 너도 알겠지만, 여기가 욕조, 여기는 찬물이 나오는…….”
설명을 마친 레리트가 간단한 브리프만 걸친 릭셀리언이 가운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데 릭셀리언이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 미끈거리고 뭉글거리는 건 또 뭐야?”
레리트는 욕조에 가득 차 있는 거품을 바라보며 답했다.
“요즘 유행. 부인이 신이 나셔서 잔뜩 뿌리셨지. 거품이 오래간다고 했어.”
잠시 입을 다물고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이던 릭셀리언이 포기했다는 듯 욕조에 몸을 담갔다.
“새로운 유행은 다 이상하군.”
“너도 곧 익숙해질 거야.”
릭셀리언의 신 헤라 역시 이번 전쟁으로 힘을 많이 썼기에 한동안 다른 전쟁을 치르지 않을 테니 릭셀리언도 앞으로 꽤 오랜 시간 가문에서 평화로운 날을 보내게 될 거다.
그때 릭셀리언이 가운을 레리트에게 넘기며 명령했다.
“이것도 원래대로 돌려놔. 여기 있는 거 전부다.”
“고급으로 사다 줘도 난리야.”
레리트는 투덜거리면서도 그 외에 바꿀 것이 뭐가 있나 쭉 둘러봤다.
“너 또 오래 있을 거지?”
“……그래.”
레리트는 욕조에 늘어져 있는 그의 옆에 커다란 수건을 하나 놔두고는 당부했다.
“그래도 한 시간 내로 나와야 해. 저녁 식사 시간 얼마 안 남았거든.”
“…….”
레리트가 아무 말도 없는 릭셀리언에게 경고했다.
“안 먹는다는 소리는 안 받아. 내가 직접 키운 식물이란 말이야.”
“이제 식물도 키워? 하녀장이?”
“내 취미야.”
“정원사가 되기로 했어?”
“난나가 식물의 여신인데 내가 식물을 키우는 게 말이 안 돼?”
“너도 참…….”
레리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많이 변했지?”
“아니. 하나도 안 변했어.”
레리트는 코웃음을 쳤다.
“뭐래. 나 나간다. 다 씻으면 줄 잡아당겨. 줄은 이쪽.”
그녀를 부르는 줄의 위치까지 알려 준 레리트는 릭셀리언을 뒤로하고 문을 닫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릭셀리언의 방을 나서는 순간 레리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눈이 빨개졌다. 레리트는 울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계속 침착한 척했지만 사실 레리트는 침착하지 못했다.
‘이 개자식들, 남의 가문 후계자를 데려가서 자기들 전쟁에 이용했으면 몸은 무사히 돌려보내야 할 것 아니야!’
눈만 다친 것이 아니었다. 옷 밖으로 보이는 얼굴, 목, 손을 제외한 온몸의 모든 곳에 수많은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반쯤 잘렸던 것 같은 옆구리부터 배꼽을 가르는 상처와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커다란 흉터까지.
몸이 아주 만신창이였다. 그런 부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입술을 이로 잘근잘근 씹으면서도 레리트는 심장이 뛰지 않게, 숨이 고르게 나오게 몸 상태를 조절했다. 조금만 몸 상태가 달라져도 저 녀석이 바로 눈치챌 것이 틀림없으니까.
어느새 나타난 그녀의 여신 난나가 레리트의 볼에 볼을 비비적거리며 칭찬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우리 레리트는 참 다정하고 착해!」
「나는 난나를 제외한 모든 신이 싫어요.」
「나만 좋아하면 돼!」
레리트는 난나의 볼에 같이 얼굴을 한번 부벼 주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레리트의 애정 표현에 난나가 레리트를 향해 축복을 내려 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이니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난나가 쏟아부어 준 따뜻한 신력에 많이 지쳐 있었던 심신이 회복됐다.
어차피 다른 곳에 있어도 지금 레리트가 그녀의 방에서 울고 있는 브리엔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릭셀리언이 그녀를 부르는 종소리를 듣지 못하지는 않을 테니 지금은 잔뜩 놀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울고 있는 부인을 달래 주러 가야 할 것 같았다.
* * *
레리트는 옷을 갈아입은 릭셀리언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어때?”
레리트는 그레탄트의 품 안에 안겨 울고 있던 브리엔을 떠올렸다. 저 녀석이 그걸 듣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 자신의 의견을 묻는 모양이었다.
“뭐, 조금 그러시지.”
“네가 좀 도와드려.”
아무리 레리트가 자식 같은 존재라고 할지라도 진짜 자식은 레리트가 아닌 릭셀리언이었다.
“도련님이 하지 그래?”
릭셀리언이 코웃음을 쳤다.
“글쎄,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은데.”
레리트는 다시 어두운 빛을 띠기 시작하는 릭셀리언을 보곤 주위를 살폈다. 주의를 돌릴 만한 것이 필요했다.
마침 식당이 가까워져 그 앞에서 릭셀리언과 레리트를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사용인 중 저택에서 오랜 시간 일한 시종 하나가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 도련님.”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손을 맞잡은 손으로 방정맞게 흔들며 릭셀리언에게 말했다.
“내가 너보다 먼저 불렸어. 도련님이 먼저가 아니라 아가씨가 먼저였다고.”
“좋겠네.”
비웃음 가득한 말이었으나 릭셀리언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좀 가라앉은 것이 보여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사용인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그, 그것이 아니라…….”
아마 릭셀리언이 은연중에 보이는 그 위험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손을 움켜쥐며 신력을 풀었다.
“농담한 거예요. 괜찮아요.”
릭셀리언이 신력을 갈무리하는 게 느껴졌다. 사용인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네. 그, 문을 열겠습니다.”
“그래요.”
문이 열리자 눈이 퉁퉁 붓고 코가 빨갛게 변한 브리엔과 무뚝뚝한 얼굴임에도 슬픈 기색이 완연한 그레탄트가 보였다.
브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리, 릭셀리언. 그리고 레리트. 왔니?”
하지만 잔뜩 떨리는 데다 코가 막힌 소리까지 더해진 브리엔의 목소리는 너무 처량하게 들렸다.
더군다나 점점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릭셀리언의 얼굴을 다시 마주한 브리엔이 감정이 복받친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릭셀리언이 레리트를 툭 치며 말했다.
“내 말이 맞지?”
확실히 릭셀리언 말처럼 한동안은 두 사람은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브리엔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레리트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릭셀리언과 함께 자리로 향했다. 레리트는 사용인이 빼 주는 의자에 앉으며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공작님, 부인.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늦긴.”
레리트와 릭셀리언이 자리에 앉자 공작이 사용인들에게 눈짓했다.
“식사를 시작하자.”
“네.”
레리트는 릭셀리언의 앞에 놓인 샐러드에 관해 설명했다.
“토마토랑 치즈, 새싹이 가득 들어간 샐러드야.”
레리트가 으스대는 척 목소리를 높이며 릭셀리언을 바라봤다.
“치즈보다 토마토랑 새싹을 먼저 먹어 봐.”
사실 이건 으스대는 척이 아니라 정말 으스대는 거였다. 난나의 축복을 받는 레리트가 키우는 식물들이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레리트는 샐러드를 한입 먹는 릭셀리언을 향해 기대에 가득 차 물었다.
“어때.”
릭셀리언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샐러드를 계속 먹을 뿐이었지만 레리트는 릭셀리언이 칭찬을 해 주기 부끄러울 때 침묵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맛있지? 그지? 그렇죠. 부인?”
멍하니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브리엔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그럼. 정말 언제나 싱싱하고 다른 것들보다 맛있지.”
역시 이 녀석도 맛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난 레리트가 이번에는 옆에 놓인 다른 과일들을 릭셀리언에게 밀어 줬다.
“이것도 먹어 봐.”
“뭔데.”
“그냥 먹어 봐.”
“싫어.”
점점 더 레리트와 릭셀리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둘을 바라보던 브리엔과 그레탄트가 서로를 마주 봤다. 그들도 느낀 것이다.
“먹어 보라니까.”
“싫다고.”
“왜?”
“신 냄새가 나.”
장난에 실패한 레리트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쳇.”
“레리트.”
레리트가 그녀를 부르는 브리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브리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가족들이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있으니 참 좋구나. 그렇죠. 여보?”
“그렇군.”
레리트는 한결 나아진 공작 부부의 얼굴에 안도했다.
“사람이 많으니 좋긴 하네요. 자, 이것도 맛있어. 먹어 봐.”
릭셀리언이 전장에서 다쳐서 왔지만 다행히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레리트는 릭셀리언을 향해 채소들을 밀어 줬다. 그런데 여전히 그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레리트가 릭셀리언을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왜?”
“……됐다.”
레리트가 다시 한번 채소가 있는 접시를 릭셀리언의 가까이에 밀어 주며 웃었다.
“이게 제일 좋은 거야.”
릭셀리언의 한숨 소리가 들렸으나 여전히 분위기는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