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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늦은 밤. 레리트가 방에 누워 눈을 깜빡였다. 저 녀석의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 조용히 넘어간다 했지.’
레리트가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가더니 이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레리트는 문 하나로 연결된 릭셀리언의 침실 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어린 시절, 레리트를 보기만 하면 울어 대던 릭셀리언 때문에 릭셀리언과 레리트를 한방에 둘 수 없게 되자 마련한 고안책이 바로 이것이었다.
두 개의 방을 연결하는 것.
유모와 사용인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으나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두 사람이 스물여섯이 된 지금까지도 이 방을 그대로 유지할 줄은.
물론 이것들도 모두 릭셀리언의 고집에 의한 것이었다.
‘뭐라고 했더라, 하녀는 도련님의 시중을 성실히 들어야 하니 가장 빨리 달려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방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레리트가 다른 이들보다 릭셀리언에게 달려가는 게 느릴 수는 없으니 이건 그냥 릭셀리언의 심술이었다.
‘뭐, 그 심술이 지금은 유용한 것 같지만.’
나름 신력으로 소리를 막아 두려고 한 것 같았지만 잠결에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그의 신력 탓에 레리트는 그에게서 나는 소리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레리트는 고통스럽다는 듯 식은땀을 흘리며 몸부림치는 릭셀리언을 내려다봤다.
함께하는 내내 릭셀리언은 멀쩡한 듯하면서도 모든 일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어두운 면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든 중간중간 위태롭다 싶어질 때면 그 기운을 멈추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릭셀리언의 상태가 호전됐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순간 어두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편법이었을 뿐이었다.
곁으로 다가온 난나가 레리트에게 속삭였다.
「원래 전쟁을 겪은 인간들은 대부분 이런 문제를 가지고 살아.」
「난나는 이런 전쟁을 해 본 적이 있어요?」
「아니, 나랑 내 남편은 사이가 좋은걸? 다른 신이랑도 사이가 좋고.」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까. 레리트는 그 말과 함께 남편 자랑을 시작한 난나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고민했다.
‘어떻게 깨워야 가장 우리다운 모습일까.’
복잡한 눈으로 릭셀리언을 바라보던 레리트가 결심을 하고는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침 몸부림을 치느라 흘러내린 이불로 인하여 그녀 앞에 바로 드러난 릭셀리언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퍽.
큰 소리와 함께 릭셀리언의 신력이 레리트를 공격했지만, 레리트는 신력을 가뿐하게 막아 내며 살기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릭셀리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내가 자면서 코 골지 말라고 했지?”
릭셀리언의 눈에서 살기는 사라졌으나 그의 얼굴은 더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뭐?”
표정이 너무 험악해 조금 겁이 났지만, 레리트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너 코 곤다고.”
“지금 뭐라고…….”
레리트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옆으로 고개 돌리고 자.”
“야.”
당연히 지금 레리트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릭셀리언이 모를 리는 없겠지만 레리트는 나름 배려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아는 예민한 릭셀리언은 그를 동정하는 걸 참지 못하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지금 레리트의 행동이 동정인 것은 아니었으나 이 녀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레리트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알았어? 한 번만 나 더 깨워 봐라.”
그래도 역시 엉덩이를 찬 것은 조금 심했다 싶어 레리트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괜히 한 대 맞기 전에 빨리 그녀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레리트는 순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릭셀리언은 레리트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지금 엉망인 것이다.
가슴이 조금 찌릿찌릿했지만 레리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왜.”
“나 땀났어. 물수건 좀 가져와.”
레리트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릭셀리언이 멍하니 서 있는 레리트를 재촉했다.
“빨리.”
역시 그럼 그렇지. 릭셀리언은 릭셀리언이었다. 아무리 레리트가 스스로를 하녀장 정도로 칭했다고 하지만 정말 지금까지도 레리트를 하녀처럼 부리려고 하다니. 다시 전쟁 전의 오만한 도련님을 보는 것 같았다.
“진짜 대단하다.”
“빨리 갔다 와.”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얼굴을 훑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알겠다고요. 도련님.”
레리트가 쿵쿵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릭셀리언은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레리트는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릭셀리언의 방으로 향했다. 잠기운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니 역시 릭셀리언은 새벽에 잠에서 깨고 난 뒤, 다시 잠이 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도련님, 부르셨나요?”
레리트는 정말 하녀로 그녀를 부려 먹고 있는 릭셀리언을 향해 부러 존댓말을 했다. 릭셀리언이 레리트의 질문에 별다른 답을 하지 않고 고갯짓을 했다.
“준비해.”
레리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욕실에서 세숫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런 거 안 한 지 한참 됐는데.”
세수를 마친 릭셀리언이 레리트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어제는 네가 했잖아.”
레리트는 어제의 자신의 발등을 내리찍고 싶었다.
“그렇지. 내가 했지. 첫날이니까.”
릭셀리언이 수건을 던져 주며 답했다.
“앞으로도 네가 해.”
역시 뭐가 어찌 됐든 저건 릭셀리언이었다.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레리트가 한숨을 쉬며 옷장으로 다가갔다. 옷장 안에는 새로 산 옷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레리트가 옷장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무슨 색이 좋아? 나는……, 청록색이 좋아!”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 릭셀리언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대로 해.”
“그래.”
레리트가 옷을 가지고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뭐 할 거야?”
“……몰라.”
레리트가 자리에서 일어난 릭셀리언의 옷을 벗기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나한테 일 배우면 되겠다.”
“일?”
레리트가 상의의 옷깃에 각을 잡으며 답했다.
“원래 네가 하던 거.”
릭셀리언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걸 네가 하고 있었어?”
“공작님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셨으니까.”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릭셀리언만 바빴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전쟁을 뒤에서 보조하고 병사들을 모아 도와주던 것은 그레탄트였으니 그 역시 매우 바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쟁 동안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가문과 관련된 일은 대부분 레리트가 했다고 봐야 했다.
“사교계 활동도 했다며.”
레리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릭셀리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지만 그런 소문이 전쟁터까지 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아마 계속 보충되던 병사들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그걸 같이 했어?”
그러니 하루가 부족할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 레리트가 빨리 이 일을 다시 넘겨주려고 하는 것이고.
“부인 일도 돕고.”
“……바빴네.”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옷매무시를 점검하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날에도 느꼈지만 못 본 새 정말 엄청나게 키뿐 아니라 몸집도 컸다.
“내 말이. 그러니까 네 일은 빨리 다시 가져가.”
“이제는 사교계 활동만 하게?”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잠자리 옷을 정리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일도 이제는 너를 데려가지 않으실까?”
“어머니를 모르는군.”
하긴 레리트를 꾸며 주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브리엔의 성격상 앞으로도 그녀는 레리트를 데리고 다니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재미없는데.”
“왜.”
“왜긴? 사교계 활동 했다는 걸 들었으면 알 것 아니야?”
“…….”
입을 다무는 것을 보니 릭셀리언 역시 뭔가 들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레리트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래 봬도 내가 꽤 인기가 많다고.”
“다들 눈이 삐었지.”
레리트가 머리카락을 뒤로 휙 넘겼다. 그리고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얼마나 예쁜데.”
릭셀리언이 지금 레리트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그런 거지 그도 8년간 레리트가 변한 것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너도 알지? 어릴 때 못생겼던 애들이 크면 더 예쁜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단호한 릭셀리언의 반응에 레리트가 삐딱하게 서서 릭셀리언을 노려봤다.
“야, 너도 기억하잖아? 어릴 때 납작했던 코가 크면서 오뚝해진 거.”
“진화가 덜 돼서 태어났던 거야.”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크면서 점점 더 이목구비가 뚜렷해지는 레리트에게 릭셀리언이 늘 하던 말.
‘못된 자식.’
옛날 일이 기억났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릭셀리언도 레리트가 예뻐진다는 것에 동의는 했던 것이니까.
“그래, 태어나서 진화가 시작된 거니까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더 예뻐졌다니까?”
하지만 아무리 옆에서 이야기해도 릭셀리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레리트가 그럴 리가 없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레리트가 입을 삐죽거리다가 포기했다.
레리트는 릭셀리언을 향해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됐다. 그럼 가자.”
“어디를?”
늘 있는 일이었다. 저택을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는 것은.
“공작님이 오늘 제도에 가셔.”
“왜?”
레리트는 자연스럽게 릭셀리언의 손을 붙잡고 방을 나섰다. 꿈틀거리던 손이 조심스레 레리트의 손을 붙잡아 왔다.
“보고할 것도 있고. 원래 가시는 날이야.”
“원래 가는 날?”
“여태 전쟁터로 보내던 무구나 식량 같은 걸 다 우리 영지에서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이제 계약도 해지하시겠네.”
신의 힘을 버틸 만한 무구가 그리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만큼 그런 무구를 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 돈이 들어갔었다. 그레탄트가 집을 자주 비우던 것 역시 그런 맥락이었다.
“……그래?”
레리트가 계단을 발견하고 말했다.
“도련님, 계단……, 잠깐만.”
레리트는 고민했다. 내려갈 때까지 손을 잡고 가기에는 조금 위험할 것 같았다.
“어깨를 잡는 게 좋을까?”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 뒀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레리트의 어깨에 닿았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이게 안전할 것 같으니 별수 없었다.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키에 맞춰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이렇게 내가 조금 밑에서 걸으면서 내려가는 게 편할 것 같은데.”
잠시 침묵을 지키던 릭셀리언이 천천히 레리트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냈다.
“네 어깨에 잡을 데가 어디 있다고.”
레리트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 어깨가 넓은 거고, 자기 손이 큰 거지 레리트의 어깨가 작은 것이 아니었다.
“네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넓은 거거든?”
“어제 올라와 봤으니 내려가는 건 괜찮아.”
“그래?”
하긴 신의 가호를 받는 이들은 신체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편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럼 진작에 이야기하지. 손은 왜 잡고 움직였대?’
레리트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네가 너무 커져서 깜짝 놀랐잖아. 뭐 옷이나 이런 건 내가 보냈으니까 대충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다르잖아.”
“네가 직접 보냈다고?”
릭셀리언은 아까 레리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아까 그랬잖아. 내가 맡아 일했다고.”
1층에 도착한 레리트가 그녀를 뒤따라 내려오는 릭셀리언에게 웃으며 말했다.
“야, 어때. 네가 말한 대로 날 키워 준 값은 제대로 했지?”
릭셀리언이 떠나기 전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먹여 주고 재워 줬으니 그가 없는 동안 저택을 돌보라고.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릭셀리언은 그냥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저택이 걱정되었던 것 같았지만 릭셀리언의 명령조의 어투가 기분 나빴던 거로 기억한다.
‘그래도 다 옛날 일이지.’
레리트가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하려 하는데 릭셀리언이 오만하게 레리트를 내려다보며 툭 내뱉었다.
“그래, 수고했다.”
늦은 밤. 레리트가 방에 누워 눈을 깜빡였다. 저 녀석의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 조용히 넘어간다 했지.’
레리트가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가더니 이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레리트는 문 하나로 연결된 릭셀리언의 침실 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어린 시절, 레리트를 보기만 하면 울어 대던 릭셀리언 때문에 릭셀리언과 레리트를 한방에 둘 수 없게 되자 마련한 고안책이 바로 이것이었다.
두 개의 방을 연결하는 것.
유모와 사용인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으나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두 사람이 스물여섯이 된 지금까지도 이 방을 그대로 유지할 줄은.
물론 이것들도 모두 릭셀리언의 고집에 의한 것이었다.
‘뭐라고 했더라, 하녀는 도련님의 시중을 성실히 들어야 하니 가장 빨리 달려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방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레리트가 다른 이들보다 릭셀리언에게 달려가는 게 느릴 수는 없으니 이건 그냥 릭셀리언의 심술이었다.
‘뭐, 그 심술이 지금은 유용한 것 같지만.’
나름 신력으로 소리를 막아 두려고 한 것 같았지만 잠결에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그의 신력 탓에 레리트는 그에게서 나는 소리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레리트는 고통스럽다는 듯 식은땀을 흘리며 몸부림치는 릭셀리언을 내려다봤다.
함께하는 내내 릭셀리언은 멀쩡한 듯하면서도 모든 일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어두운 면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든 중간중간 위태롭다 싶어질 때면 그 기운을 멈추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릭셀리언의 상태가 호전됐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순간 어두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편법이었을 뿐이었다.
곁으로 다가온 난나가 레리트에게 속삭였다.
「원래 전쟁을 겪은 인간들은 대부분 이런 문제를 가지고 살아.」
「난나는 이런 전쟁을 해 본 적이 있어요?」
「아니, 나랑 내 남편은 사이가 좋은걸? 다른 신이랑도 사이가 좋고.」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까. 레리트는 그 말과 함께 남편 자랑을 시작한 난나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고민했다.
‘어떻게 깨워야 가장 우리다운 모습일까.’
복잡한 눈으로 릭셀리언을 바라보던 레리트가 결심을 하고는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침 몸부림을 치느라 흘러내린 이불로 인하여 그녀 앞에 바로 드러난 릭셀리언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퍽.
큰 소리와 함께 릭셀리언의 신력이 레리트를 공격했지만, 레리트는 신력을 가뿐하게 막아 내며 살기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릭셀리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내가 자면서 코 골지 말라고 했지?”
릭셀리언의 눈에서 살기는 사라졌으나 그의 얼굴은 더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뭐?”
표정이 너무 험악해 조금 겁이 났지만, 레리트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너 코 곤다고.”
“지금 뭐라고…….”
레리트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옆으로 고개 돌리고 자.”
“야.”
당연히 지금 레리트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릭셀리언이 모를 리는 없겠지만 레리트는 나름 배려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아는 예민한 릭셀리언은 그를 동정하는 걸 참지 못하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지금 레리트의 행동이 동정인 것은 아니었으나 이 녀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레리트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알았어? 한 번만 나 더 깨워 봐라.”
그래도 역시 엉덩이를 찬 것은 조금 심했다 싶어 레리트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괜히 한 대 맞기 전에 빨리 그녀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레리트는 순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릭셀리언은 레리트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지금 엉망인 것이다.
가슴이 조금 찌릿찌릿했지만 레리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왜.”
“나 땀났어. 물수건 좀 가져와.”
레리트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릭셀리언이 멍하니 서 있는 레리트를 재촉했다.
“빨리.”
역시 그럼 그렇지. 릭셀리언은 릭셀리언이었다. 아무리 레리트가 스스로를 하녀장 정도로 칭했다고 하지만 정말 지금까지도 레리트를 하녀처럼 부리려고 하다니. 다시 전쟁 전의 오만한 도련님을 보는 것 같았다.
“진짜 대단하다.”
“빨리 갔다 와.”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얼굴을 훑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알겠다고요. 도련님.”
레리트가 쿵쿵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릭셀리언은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레리트는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릭셀리언의 방으로 향했다. 잠기운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니 역시 릭셀리언은 새벽에 잠에서 깨고 난 뒤, 다시 잠이 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도련님, 부르셨나요?”
레리트는 정말 하녀로 그녀를 부려 먹고 있는 릭셀리언을 향해 부러 존댓말을 했다. 릭셀리언이 레리트의 질문에 별다른 답을 하지 않고 고갯짓을 했다.
“준비해.”
레리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욕실에서 세숫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런 거 안 한 지 한참 됐는데.”
세수를 마친 릭셀리언이 레리트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어제는 네가 했잖아.”
레리트는 어제의 자신의 발등을 내리찍고 싶었다.
“그렇지. 내가 했지. 첫날이니까.”
릭셀리언이 수건을 던져 주며 답했다.
“앞으로도 네가 해.”
역시 뭐가 어찌 됐든 저건 릭셀리언이었다.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레리트가 한숨을 쉬며 옷장으로 다가갔다. 옷장 안에는 새로 산 옷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레리트가 옷장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무슨 색이 좋아? 나는……, 청록색이 좋아!”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 릭셀리언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대로 해.”
“그래.”
레리트가 옷을 가지고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뭐 할 거야?”
“……몰라.”
레리트가 자리에서 일어난 릭셀리언의 옷을 벗기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나한테 일 배우면 되겠다.”
“일?”
레리트가 상의의 옷깃에 각을 잡으며 답했다.
“원래 네가 하던 거.”
릭셀리언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걸 네가 하고 있었어?”
“공작님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셨으니까.”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릭셀리언만 바빴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전쟁을 뒤에서 보조하고 병사들을 모아 도와주던 것은 그레탄트였으니 그 역시 매우 바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쟁 동안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가문과 관련된 일은 대부분 레리트가 했다고 봐야 했다.
“사교계 활동도 했다며.”
레리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릭셀리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지만 그런 소문이 전쟁터까지 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아마 계속 보충되던 병사들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그걸 같이 했어?”
그러니 하루가 부족할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 레리트가 빨리 이 일을 다시 넘겨주려고 하는 것이고.
“부인 일도 돕고.”
“……바빴네.”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옷매무시를 점검하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날에도 느꼈지만 못 본 새 정말 엄청나게 키뿐 아니라 몸집도 컸다.
“내 말이. 그러니까 네 일은 빨리 다시 가져가.”
“이제는 사교계 활동만 하게?”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잠자리 옷을 정리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일도 이제는 너를 데려가지 않으실까?”
“어머니를 모르는군.”
하긴 레리트를 꾸며 주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브리엔의 성격상 앞으로도 그녀는 레리트를 데리고 다니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재미없는데.”
“왜.”
“왜긴? 사교계 활동 했다는 걸 들었으면 알 것 아니야?”
“…….”
입을 다무는 것을 보니 릭셀리언 역시 뭔가 들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레리트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래 봬도 내가 꽤 인기가 많다고.”
“다들 눈이 삐었지.”
레리트가 머리카락을 뒤로 휙 넘겼다. 그리고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얼마나 예쁜데.”
릭셀리언이 지금 레리트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그런 거지 그도 8년간 레리트가 변한 것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너도 알지? 어릴 때 못생겼던 애들이 크면 더 예쁜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단호한 릭셀리언의 반응에 레리트가 삐딱하게 서서 릭셀리언을 노려봤다.
“야, 너도 기억하잖아? 어릴 때 납작했던 코가 크면서 오뚝해진 거.”
“진화가 덜 돼서 태어났던 거야.”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크면서 점점 더 이목구비가 뚜렷해지는 레리트에게 릭셀리언이 늘 하던 말.
‘못된 자식.’
옛날 일이 기억났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릭셀리언도 레리트가 예뻐진다는 것에 동의는 했던 것이니까.
“그래, 태어나서 진화가 시작된 거니까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더 예뻐졌다니까?”
하지만 아무리 옆에서 이야기해도 릭셀리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레리트가 그럴 리가 없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레리트가 입을 삐죽거리다가 포기했다.
레리트는 릭셀리언을 향해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됐다. 그럼 가자.”
“어디를?”
늘 있는 일이었다. 저택을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는 것은.
“공작님이 오늘 제도에 가셔.”
“왜?”
레리트는 자연스럽게 릭셀리언의 손을 붙잡고 방을 나섰다. 꿈틀거리던 손이 조심스레 레리트의 손을 붙잡아 왔다.
“보고할 것도 있고. 원래 가시는 날이야.”
“원래 가는 날?”
“여태 전쟁터로 보내던 무구나 식량 같은 걸 다 우리 영지에서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이제 계약도 해지하시겠네.”
신의 힘을 버틸 만한 무구가 그리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만큼 그런 무구를 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 돈이 들어갔었다. 그레탄트가 집을 자주 비우던 것 역시 그런 맥락이었다.
“……그래?”
레리트가 계단을 발견하고 말했다.
“도련님, 계단……, 잠깐만.”
레리트는 고민했다. 내려갈 때까지 손을 잡고 가기에는 조금 위험할 것 같았다.
“어깨를 잡는 게 좋을까?”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 뒀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레리트의 어깨에 닿았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이게 안전할 것 같으니 별수 없었다.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키에 맞춰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이렇게 내가 조금 밑에서 걸으면서 내려가는 게 편할 것 같은데.”
잠시 침묵을 지키던 릭셀리언이 천천히 레리트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냈다.
“네 어깨에 잡을 데가 어디 있다고.”
레리트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 어깨가 넓은 거고, 자기 손이 큰 거지 레리트의 어깨가 작은 것이 아니었다.
“네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넓은 거거든?”
“어제 올라와 봤으니 내려가는 건 괜찮아.”
“그래?”
하긴 신의 가호를 받는 이들은 신체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편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럼 진작에 이야기하지. 손은 왜 잡고 움직였대?’
레리트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네가 너무 커져서 깜짝 놀랐잖아. 뭐 옷이나 이런 건 내가 보냈으니까 대충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다르잖아.”
“네가 직접 보냈다고?”
릭셀리언은 아까 레리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아까 그랬잖아. 내가 맡아 일했다고.”
1층에 도착한 레리트가 그녀를 뒤따라 내려오는 릭셀리언에게 웃으며 말했다.
“야, 어때. 네가 말한 대로 날 키워 준 값은 제대로 했지?”
릭셀리언이 떠나기 전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먹여 주고 재워 줬으니 그가 없는 동안 저택을 돌보라고.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릭셀리언은 그냥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저택이 걱정되었던 것 같았지만 릭셀리언의 명령조의 어투가 기분 나빴던 거로 기억한다.
‘그래도 다 옛날 일이지.’
레리트가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하려 하는데 릭셀리언이 오만하게 레리트를 내려다보며 툭 내뱉었다.
“그래,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