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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레리트는 정말 도련님처럼 그녀를 칭찬하는 릭셀리언의 행동에 그를 노려봤다.
“말투가 그게 뭐야?”
“네 질문에 답을 했을 뿐이야.”
“그게 무…….”
릭셀리언에게 화를 내려던 레리트는 브리엔을 발견하고 말을 삼켜 냈다.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 레리트는 숨을 고르고는 브리엔을 향해 다가갔다.
“부인.”
“오, 레리트……, 릭셀리언!”
브리엔이 레리트의 뒤에 있던 릭셀리언을 발견하고 목소리가 커졌다.
“평소처럼 배웅하러 왔어요. 이 녀석도요.”
그레탄트와 브리엔의 시선이 모두 레리트의 뒤에 있는 릭셀리언에게로 향했다. 아마 볼 수는 없지만 릭셀리언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래. 잘 왔다.”
그레탄트의 말에 레리트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다녀오세요. 공작님.”
“그래, 다녀오마.”
레리트가 그녀의 뒤로 다가온 릭셀리언의 허리를 쿡 찔렀다. 릭셀리언이 머뭇거리며 그레탄트에게 인사했다.
“……다녀오세요.”
“그래. 쉬고 있으렴.”
그레탄트가 엷게 미소 지으며 저택을 나서자 그레탄트의 호위 기사 리안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레리트가 그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세요.”
리안이 얼굴을 붉히며 큰 소리로 답했다.
“네, 아가씨!”
리안이 다른 이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저택을 떠난 뒤, 레리트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릭셀리언에게 리안에 대해 소개했다.
“공작님 호위 기사 중 하나야. 너는 처음 보지? 그래도 꽤 오래 일했어.”
어느새 인사를 모두 마치고 돌아왔는지 브리엔이 그들에게 다가오며 덧붙였다.
“리안이 우리 레리트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레리트 역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리안은 안 됐다.
“너무 어려요.”
브리엔이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어머 어때? 잘생겼는걸.”
“안 돼요. 욕먹을걸요?”
“연하를 만난다고 욕을 왜 먹니? 리안도 성인인데.”
레리트와 대화를 이어 나가던 브리엔이 릭셀리언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뭘 할 거니?”
“다시 일을 돌려줘야죠.”
레리트의 말뜻을 알아들은 브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럼, 부탁한다.”
그때 사용인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평소처럼 티타임을 준비할까요?”
릭셀리언이 떠난 이후 레리트와 함께 오전에 잠깐 진행되던 티타임이었다. 그레탄트와 레리트가 바빠 혼자 있는 시간이 잦은 브리엔을 위해 바쁜 와중에도 항상 갖던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 준비해.”
레리트는 그녀의 말에 환하게 웃는 브리엔을 바라봤다.
“부인, 그럼 티타임 때 뵐게요.”
“그래, 레리트, 릭셀리언.”
브리엔을 뒤로하고 릭셀리언의 손을 붙잡고 다시 계단을 오르면서 레리트가 릭셀리언에게 핀잔을 줬다.
“공작 부인께 말 좀 붙여.”
정말 대화를 나누는 내내 단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릭셀리언 때문에 브리엔은 계속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내가 말 붙이면 더 눈치 보실걸? 어떻게 해야 상처를 덜 받을까. 어떤 말을 붙여야 할까 고민하실 텐데.”
“흥.”
동의는 하는 바였으나 그래도 너무했다.
“그나저나 보좌관을 뽑아야 하는데 누구로 할래?”
“네가 해.”
레리트가 황당한 눈으로 릭셀리언을 바라봤다.
“야, 나 바쁘거든?”
“원래는 다 네가 했다며. 조금 돕는 거는 쉽겠지.”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야?”
“새로운 사람 들여 다시 가르치기 귀찮아. 그리고 어차피 한동안은 네가 계속 붙어 있을 거 아니야?”
맞는 말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너무했다. 역시 릭셀리언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레리트가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아직 집무실은 제대로 정리를 하지 않아서 레리트의 물건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내가 썼던 거라 내 물건이 좀 있긴 한데 그냥 써.”
어차피 같이 일할 거라면 레리트의 물건을 굳이 치울 필요가 없었다.
“자, 여기 의자.”
레리트는 릭셀리언을 인도해 의자에 앉히고 책상에 기대 그를 바라봤다. 물을까 말까 망설였지만 이렇게 묻지 않으면 일을 어느 정도로 도와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야, 근데 나 일하기 전에 하나만 묻자.”
“뭔데.”
레리트가 앉아 있는 릭셀리언의 눈으로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이거 눈 말이야. 정말 이렇게 계속 안 보인대?”
“나도 몰라.”
“그럼, 일은 어떻게 해?”
릭셀리언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니까 한동안 네가 해야지.”
릭셀리언의 눈을 한참을 바라보던 레리트는 난나를 불렀다.
“난나!”
레리트의 부름에 난나가 나타났다.
「응?」
“눈 못 고쳐요?”
난나는 레리트의 앞에 있는 릭셀리언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르에게 물어볼게.」
“고마워요.”
난나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레리트를 축복해 주고는 사라졌다.
“여전히 사이가 좋네.”
난나의 말은 듣지 못했으나 난나의 신력이 레리트를 감싸는 것을 통해 난나가 축복을 내린 것은 느낀 릭셀리언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둘의 관계는 대부분의 신과 인간의 관계와는 달랐다.
“난나는 착한걸.”
릭셀리언의 신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말이다. 레리트는 뒷말을 삼켜 내며 물었다.
“계시니?”
헤라가 지금 그의 옆에 있냐는 물음이었다.
“없어.”
“이리 와 봐. 좀 보게.”
레리트가 코가 닿을 듯 릭셀리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눈을 살폈다. 여전히 그의 눈은 불투명하고 초점이 없었다.
“정말 하나도 안 보여?”
“…….”
답이 없었으나 상관없었다.
“괜찮아. 내가 해 주면 돼.”
레리트는 다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내가 이렇게 대하는 거 싫어?”
릭셀리언은 레리트가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걸 싫어할 수도 있었다.
레리트의 행동의 반은 척이 아니라 자연스레 나오는 행동이었지만 사실 레리트는 지금 자신의 행동이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예전과 똑같이 행동하고 그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게 과연 맞는지 헷갈렸다.
“원래 네 뒤처리를 하던 건 나였으니까. 자연스럽게 챙겨 주는 거긴 한데. 불편하면 말해.”
릭셀리언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답했다.
“됐어. 너답게 해.”
“너나 너답게 해.”
레리트는 책상으로 몸을 돌려 서류 몇장을 꺼내들었다.
“오늘은 그러니까 그냥 여태까지 있었던 일 위주로 설명해 줄게. 알았지?”
“그래.”
그 뒤로 집무실에는 레리트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무리 요약한다고 해도 8년의 세월은 길었고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모든 이야기를 해 주기에는 아직 좀 이르겠지.’
릭셀리언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해 주면서 레리트는 새삼 느꼈다. 정말 릭셀리언이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변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릭셀리언은 릭셀리언이었고, 그녀의 가족이자 못된 친구였다.
눈이 보이지 않고 몸에 상처가 많아졌고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보였지만 그럼에도 저 애는 릭셀리언이었기에 레리트는 미소 지었다.
‘눈 때문에 조금 복잡해지겠지만…….’
예상치 못한 부상 때문에 일이 힘들어지겠지만 그래도 살아 있으니 됐다. 이 녀석이 돌아왔으니 이제 멈춰 있던 티리엔 가문의 시간은 다시 흘러갈 것이다.
* * *
레리트는 온실에 있는 식물에 물을 주고 있었다. 시원한 물줄기에 답답하던 마음이 뻥 뚫렸다.
‘오길 잘했어.’
풀 냄새와 꽃 냄새, 단 과일의 냄새들이 온실 가득 퍼져 있었다. 커다란 유리 온실에 가득 찬 초록빛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레리트는 마음이 답답하거나 피곤해질 때마다 이 온실로 와 식물들의 싱그러운 기운을 잔뜩 받아 가곤 했다.
웬만한 귀족가의 저택만 한 크기의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이 온실이 바로 레리트가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받은 것이었다.
난나의 도움으로 계절에 상관없이 식물 대부분을 키울 수 있었기에 온실에 있는 식물들은 모두 생기가 넘쳤다.
「너무 좋아. 식물들은 너무 예뻐!」
레리트가 신이 난 것처럼 난나 역시 신이 나서 온실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레리트, 식물들이 기뻐하고 있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레리트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평화로웠다. 그때 그런 그 둘의 평화로움을 깨는 불퉁한 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물 튀어.”
“알아서 막던가.”
그녀의 뒤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물이 튄다고 릭셀리언이 투덜거리자 그를 무시한 채 레리트가 퉁명스레 답했다.
자유 시간을 좀 가져 보려고 했더니 저 녀석이 물고기 몸에 붙은 똥처럼 따라다녔다. 레리트가 혀를 찼다.
‘뭐, 그래도 혼자서 땅 파고 있는 것보다야 났지만.’
잠시 릭셀리언을 바라보던 레리트는 다시 물을 주는 데 집중했다.
온실은 거대했고 물을 주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거의 세 시간가량을 소모한 뒤, 레리트는 남편이 부른다고 사라지는 난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주변을 정리했다.
“갔네.”
레리트는 릭셀리언의 옆에 있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응. 남편이 부른대.”
“사이좋네.”
신화 속 헤라나 제우스와는 다른 모습이기는 했다. 레리트가 쓰게 웃었다.
“너는 괜찮아? 여기도 냄새 심할 텐데.”
동물의 배설물을 이용해 퇴비를 주는 온실인지라 그 냄새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레리트는 이곳의 냄새들이 좋았지만 코가 예민한 릭셀리언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됐어, 머리 아플 정도는 아니니까.”
릭셀리언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곳이 꽤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레리트는 순간 자신만의 공간을 빼앗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포기한 듯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뭐, 어차피 옛날부터 다 공유하고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살면서 자기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릭셀리언과 대부분의 것을 공유하고 살았으니 별로 신경이 쓰이는 것도 아니었다.
의자에 몸을 누이고 멍하니 식물들을 바라보던 레리트는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마침 할 이야기도 생각난 김에 레리트는 지체하지 않고 릭셀리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할 이야기 있어.”
딱히 이야기해 주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뭔데.”
“이제 그거 하러 가야 해.”
“그거?”
신들끼리 싸움이 일어나 전쟁을 하고 나면 꼭 하는 일이었다.
“기도.”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바로 전쟁을 함께 한 상대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사죄의 일종이었다. 가호하는 신의 뜻에 따라 당신이 가호하는 인간과 전쟁을 벌였지만, 인간은 신의 위대함을 잊지 않고 있다는 걸 표현하기 위한 절차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도 신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한 일이었다.
레리트가 주변을 살폈다. 난나는 확실히 없었다.
“아무도 없는 거 맞지?”
“그래.”
릭셀리언이 헤라가 없다는 걸 확언해 주고 나자 절로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진짜 웃기지 않냐? 자기들끼리 싸우라고 난리 쳐 놓고 막상 이기면 잘못했다고 사과까지 시킨다니까?”
물론 져도 신들의 품위를 지켜 주기 위해 사죄를 해야 했기에 이러나저러나 전쟁이 나고 난 후 기도를 해야 하는 건 똑같았다. 레리트가 릭셀리언에게로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내가 대신 욕해 주니까 좋지?”
릭셀리언이 덤덤하게 답했다.
“들키면 벌받을걸.”
물론 레리트가 이렇게 욕을 하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레리트가 당당하게 외쳤다.
“우리 난나가 막아 줄 거야.”
릭셀리언이 레리트를 향해 경고했다.
“난나는 너를 보호해 줄 만큼 그렇게 강하지 않아.”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난나에게는 그녀를 매우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다.
“괜찮아. 난나 남편 발두르는 난나를 아끼고 신들의 아버지인 오딘은 그의 아들 발두르를 아끼니까.”
난나 자체는 그리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신이 아닐지는 몰라도 그녀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그녀의 남편은 대단한 신이었다. 세상 모든 만물의 사랑을 받는 신, 빛의 신이자 아름다움의 신 발두르가 있는 한 난나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난나의 사랑을 받는 레리트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레리트는 정말 도련님처럼 그녀를 칭찬하는 릭셀리언의 행동에 그를 노려봤다.
“말투가 그게 뭐야?”
“네 질문에 답을 했을 뿐이야.”
“그게 무…….”
릭셀리언에게 화를 내려던 레리트는 브리엔을 발견하고 말을 삼켜 냈다.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 레리트는 숨을 고르고는 브리엔을 향해 다가갔다.
“부인.”
“오, 레리트……, 릭셀리언!”
브리엔이 레리트의 뒤에 있던 릭셀리언을 발견하고 목소리가 커졌다.
“평소처럼 배웅하러 왔어요. 이 녀석도요.”
그레탄트와 브리엔의 시선이 모두 레리트의 뒤에 있는 릭셀리언에게로 향했다. 아마 볼 수는 없지만 릭셀리언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래. 잘 왔다.”
그레탄트의 말에 레리트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다녀오세요. 공작님.”
“그래, 다녀오마.”
레리트가 그녀의 뒤로 다가온 릭셀리언의 허리를 쿡 찔렀다. 릭셀리언이 머뭇거리며 그레탄트에게 인사했다.
“……다녀오세요.”
“그래. 쉬고 있으렴.”
그레탄트가 엷게 미소 지으며 저택을 나서자 그레탄트의 호위 기사 리안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레리트가 그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세요.”
리안이 얼굴을 붉히며 큰 소리로 답했다.
“네, 아가씨!”
리안이 다른 이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저택을 떠난 뒤, 레리트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릭셀리언에게 리안에 대해 소개했다.
“공작님 호위 기사 중 하나야. 너는 처음 보지? 그래도 꽤 오래 일했어.”
어느새 인사를 모두 마치고 돌아왔는지 브리엔이 그들에게 다가오며 덧붙였다.
“리안이 우리 레리트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레리트 역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리안은 안 됐다.
“너무 어려요.”
브리엔이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어머 어때? 잘생겼는걸.”
“안 돼요. 욕먹을걸요?”
“연하를 만난다고 욕을 왜 먹니? 리안도 성인인데.”
레리트와 대화를 이어 나가던 브리엔이 릭셀리언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뭘 할 거니?”
“다시 일을 돌려줘야죠.”
레리트의 말뜻을 알아들은 브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럼, 부탁한다.”
그때 사용인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평소처럼 티타임을 준비할까요?”
릭셀리언이 떠난 이후 레리트와 함께 오전에 잠깐 진행되던 티타임이었다. 그레탄트와 레리트가 바빠 혼자 있는 시간이 잦은 브리엔을 위해 바쁜 와중에도 항상 갖던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 준비해.”
레리트는 그녀의 말에 환하게 웃는 브리엔을 바라봤다.
“부인, 그럼 티타임 때 뵐게요.”
“그래, 레리트, 릭셀리언.”
브리엔을 뒤로하고 릭셀리언의 손을 붙잡고 다시 계단을 오르면서 레리트가 릭셀리언에게 핀잔을 줬다.
“공작 부인께 말 좀 붙여.”
정말 대화를 나누는 내내 단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릭셀리언 때문에 브리엔은 계속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내가 말 붙이면 더 눈치 보실걸? 어떻게 해야 상처를 덜 받을까. 어떤 말을 붙여야 할까 고민하실 텐데.”
“흥.”
동의는 하는 바였으나 그래도 너무했다.
“그나저나 보좌관을 뽑아야 하는데 누구로 할래?”
“네가 해.”
레리트가 황당한 눈으로 릭셀리언을 바라봤다.
“야, 나 바쁘거든?”
“원래는 다 네가 했다며. 조금 돕는 거는 쉽겠지.”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야?”
“새로운 사람 들여 다시 가르치기 귀찮아. 그리고 어차피 한동안은 네가 계속 붙어 있을 거 아니야?”
맞는 말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너무했다. 역시 릭셀리언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레리트가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아직 집무실은 제대로 정리를 하지 않아서 레리트의 물건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내가 썼던 거라 내 물건이 좀 있긴 한데 그냥 써.”
어차피 같이 일할 거라면 레리트의 물건을 굳이 치울 필요가 없었다.
“자, 여기 의자.”
레리트는 릭셀리언을 인도해 의자에 앉히고 책상에 기대 그를 바라봤다. 물을까 말까 망설였지만 이렇게 묻지 않으면 일을 어느 정도로 도와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야, 근데 나 일하기 전에 하나만 묻자.”
“뭔데.”
레리트가 앉아 있는 릭셀리언의 눈으로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이거 눈 말이야. 정말 이렇게 계속 안 보인대?”
“나도 몰라.”
“그럼, 일은 어떻게 해?”
릭셀리언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니까 한동안 네가 해야지.”
릭셀리언의 눈을 한참을 바라보던 레리트는 난나를 불렀다.
“난나!”
레리트의 부름에 난나가 나타났다.
「응?」
“눈 못 고쳐요?”
난나는 레리트의 앞에 있는 릭셀리언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르에게 물어볼게.」
“고마워요.”
난나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레리트를 축복해 주고는 사라졌다.
“여전히 사이가 좋네.”
난나의 말은 듣지 못했으나 난나의 신력이 레리트를 감싸는 것을 통해 난나가 축복을 내린 것은 느낀 릭셀리언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둘의 관계는 대부분의 신과 인간의 관계와는 달랐다.
“난나는 착한걸.”
릭셀리언의 신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말이다. 레리트는 뒷말을 삼켜 내며 물었다.
“계시니?”
헤라가 지금 그의 옆에 있냐는 물음이었다.
“없어.”
“이리 와 봐. 좀 보게.”
레리트가 코가 닿을 듯 릭셀리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눈을 살폈다. 여전히 그의 눈은 불투명하고 초점이 없었다.
“정말 하나도 안 보여?”
“…….”
답이 없었으나 상관없었다.
“괜찮아. 내가 해 주면 돼.”
레리트는 다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내가 이렇게 대하는 거 싫어?”
릭셀리언은 레리트가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걸 싫어할 수도 있었다.
레리트의 행동의 반은 척이 아니라 자연스레 나오는 행동이었지만 사실 레리트는 지금 자신의 행동이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예전과 똑같이 행동하고 그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게 과연 맞는지 헷갈렸다.
“원래 네 뒤처리를 하던 건 나였으니까. 자연스럽게 챙겨 주는 거긴 한데. 불편하면 말해.”
릭셀리언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답했다.
“됐어. 너답게 해.”
“너나 너답게 해.”
레리트는 책상으로 몸을 돌려 서류 몇장을 꺼내들었다.
“오늘은 그러니까 그냥 여태까지 있었던 일 위주로 설명해 줄게. 알았지?”
“그래.”
그 뒤로 집무실에는 레리트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무리 요약한다고 해도 8년의 세월은 길었고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모든 이야기를 해 주기에는 아직 좀 이르겠지.’
릭셀리언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해 주면서 레리트는 새삼 느꼈다. 정말 릭셀리언이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변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릭셀리언은 릭셀리언이었고, 그녀의 가족이자 못된 친구였다.
눈이 보이지 않고 몸에 상처가 많아졌고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보였지만 그럼에도 저 애는 릭셀리언이었기에 레리트는 미소 지었다.
‘눈 때문에 조금 복잡해지겠지만…….’
예상치 못한 부상 때문에 일이 힘들어지겠지만 그래도 살아 있으니 됐다. 이 녀석이 돌아왔으니 이제 멈춰 있던 티리엔 가문의 시간은 다시 흘러갈 것이다.
* * *
레리트는 온실에 있는 식물에 물을 주고 있었다. 시원한 물줄기에 답답하던 마음이 뻥 뚫렸다.
‘오길 잘했어.’
풀 냄새와 꽃 냄새, 단 과일의 냄새들이 온실 가득 퍼져 있었다. 커다란 유리 온실에 가득 찬 초록빛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레리트는 마음이 답답하거나 피곤해질 때마다 이 온실로 와 식물들의 싱그러운 기운을 잔뜩 받아 가곤 했다.
웬만한 귀족가의 저택만 한 크기의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이 온실이 바로 레리트가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받은 것이었다.
난나의 도움으로 계절에 상관없이 식물 대부분을 키울 수 있었기에 온실에 있는 식물들은 모두 생기가 넘쳤다.
「너무 좋아. 식물들은 너무 예뻐!」
레리트가 신이 난 것처럼 난나 역시 신이 나서 온실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레리트, 식물들이 기뻐하고 있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레리트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평화로웠다. 그때 그런 그 둘의 평화로움을 깨는 불퉁한 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물 튀어.”
“알아서 막던가.”
그녀의 뒤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물이 튄다고 릭셀리언이 투덜거리자 그를 무시한 채 레리트가 퉁명스레 답했다.
자유 시간을 좀 가져 보려고 했더니 저 녀석이 물고기 몸에 붙은 똥처럼 따라다녔다. 레리트가 혀를 찼다.
‘뭐, 그래도 혼자서 땅 파고 있는 것보다야 났지만.’
잠시 릭셀리언을 바라보던 레리트는 다시 물을 주는 데 집중했다.
온실은 거대했고 물을 주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거의 세 시간가량을 소모한 뒤, 레리트는 남편이 부른다고 사라지는 난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주변을 정리했다.
“갔네.”
레리트는 릭셀리언의 옆에 있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응. 남편이 부른대.”
“사이좋네.”
신화 속 헤라나 제우스와는 다른 모습이기는 했다. 레리트가 쓰게 웃었다.
“너는 괜찮아? 여기도 냄새 심할 텐데.”
동물의 배설물을 이용해 퇴비를 주는 온실인지라 그 냄새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레리트는 이곳의 냄새들이 좋았지만 코가 예민한 릭셀리언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됐어, 머리 아플 정도는 아니니까.”
릭셀리언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곳이 꽤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레리트는 순간 자신만의 공간을 빼앗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포기한 듯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뭐, 어차피 옛날부터 다 공유하고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살면서 자기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릭셀리언과 대부분의 것을 공유하고 살았으니 별로 신경이 쓰이는 것도 아니었다.
의자에 몸을 누이고 멍하니 식물들을 바라보던 레리트는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마침 할 이야기도 생각난 김에 레리트는 지체하지 않고 릭셀리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할 이야기 있어.”
딱히 이야기해 주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뭔데.”
“이제 그거 하러 가야 해.”
“그거?”
신들끼리 싸움이 일어나 전쟁을 하고 나면 꼭 하는 일이었다.
“기도.”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바로 전쟁을 함께 한 상대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사죄의 일종이었다. 가호하는 신의 뜻에 따라 당신이 가호하는 인간과 전쟁을 벌였지만, 인간은 신의 위대함을 잊지 않고 있다는 걸 표현하기 위한 절차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도 신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한 일이었다.
레리트가 주변을 살폈다. 난나는 확실히 없었다.
“아무도 없는 거 맞지?”
“그래.”
릭셀리언이 헤라가 없다는 걸 확언해 주고 나자 절로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진짜 웃기지 않냐? 자기들끼리 싸우라고 난리 쳐 놓고 막상 이기면 잘못했다고 사과까지 시킨다니까?”
물론 져도 신들의 품위를 지켜 주기 위해 사죄를 해야 했기에 이러나저러나 전쟁이 나고 난 후 기도를 해야 하는 건 똑같았다. 레리트가 릭셀리언에게로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내가 대신 욕해 주니까 좋지?”
릭셀리언이 덤덤하게 답했다.
“들키면 벌받을걸.”
물론 레리트가 이렇게 욕을 하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레리트가 당당하게 외쳤다.
“우리 난나가 막아 줄 거야.”
릭셀리언이 레리트를 향해 경고했다.
“난나는 너를 보호해 줄 만큼 그렇게 강하지 않아.”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난나에게는 그녀를 매우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다.
“괜찮아. 난나 남편 발두르는 난나를 아끼고 신들의 아버지인 오딘은 그의 아들 발두르를 아끼니까.”
난나 자체는 그리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신이 아닐지는 몰라도 그녀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그녀의 남편은 대단한 신이었다. 세상 모든 만물의 사랑을 받는 신, 빛의 신이자 아름다움의 신 발두르가 있는 한 난나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난나의 사랑을 받는 레리트 역시 마찬가지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