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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릭셀리언이 어이가 없다는 듯 레리트를 바라봤지만, 레리트는 당당했다.
“왜.”
지금 릭셀리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믿고 괜한 오기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 욕한 것 정도는 충분히 난나가 막아 줄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
그리고 원래 인맥은 쓰라고 있는 거였다. 레리트는 릭셀리언에게 그녀가 터득한 삶의 지혜를 나눠 주기로 했다.
“야, 원래 인생은 인맥이 중요해.”
“시끄러워.”
전쟁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릭셀리언은 아직 세상을 잘 몰랐다. 레리트는 이제 곧 사회에 찌들게 될 릭셀리언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면 레리트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어린 녀석.’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팔을 토닥거렸다. 그러자 릭셀리언이 신경질적으로 레리트의 손을 쳐 냈다.
“사납기는.”
레리트는 다시 의자에 몸을 누이며 오래간만에 갖는 휴식 시간을 즐겼다.
“아, 무지개 예쁘다.”
레리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반짝이는 햇살도 예뻤고 물을 잔뜩 머금은 식물도 예뻤으며 물을 뿌린 후라 온실에 생긴 무지개도 예뻤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모든 것이 바로 레리트의 것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온실을 가졌어?”
“열심히 일한 대가지.”
“키우느라 고생 좀 했겠네.”
딱히 고생을 많이 하진 않았다.
“난나가 도와줬지.”
“매일 이렇게 물을 주러 오는 거야?”
레리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은 기분 내는 거야. 원래는 이렇게 신력만 둘러 주면……, 알아서 자라.”
레리트의 신력이 온실을 가득 메웠다. 식물들이 레리트의 신력을 듬뿍 빨아들여 더 활기차졌다.
“무슨 생고생이야?”
레리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몸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 주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나를 다스리는 거지.”
“도인이 다 됐네.”
레리트가 코웃음을 쳤다.
“시끄러워. 아무튼, 네가 그 가문에 가야 하는 것처럼 그 남자도 우리 가문으로 와야 하잖아.”
“……그렇겠지.”
사실 이게 더 어이없었다. 기도를 각자 가문에서 하면 되지 꼭 상대 가문으로 가 기도를 해야 했다.
‘배려라는 게 없다니까. 어떻게든 지네들만 편하려고.’
신들은 정말 이기적이었다. 아무리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죽고 죽임을 당한 것은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신들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체면이 상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게 그들 본연의 의지가 아니었을지라도, 적대 관계였던 인간의 집으로 찾아와 기도를 올리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다시 속으로 욕을 하던 레리트가 다시 그 남자를 떠올렸다. 릭셀리언이 헤라의 선택을 받은 것처럼 제우스의 선택을 받았던 이.
“괜찮아?”
자그마치 8년 동안을 서로 죽일 듯이 싸워 왔고 지금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릭셀리언의 흉터와 비슷한 상처가 그의 몸에도 가득할 터였다.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지.”
제우스의 가호를 받는 그 사내가 티리엔 저택으로 온다니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더는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싸우지 못할 것이다.
“신이 죽었으면 이제 그자는 신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거지?”
“그렇지.”
릭셀리언이 제우스를 죽인 이상 그 남자는 이제 신의 가호가 없는 평범한 인간일 테니까. 그 가문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아 있으면 됐지.”
릭셀리언의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레리트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옆에 있는 나무에서 블루베리를 하나 따서 릭셀리언의 입에 넣어 줬다.
“뭐야.”
“블루베리.”
“…….”
이해한다든가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레리트는 릭셀리언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런 위로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새콤달콤한 블루베리를 잔뜩 쥐여 주는 것과 같은 일.
레리트의 신력에 영향을 받은 블루베리 나무가 몸을 부풀리더니 릭셀리언의 몸 위로 블루베리를 잔뜩 떨어트렸다.
“야.”
“맛있지? 선물이야.”
레리트가 웃으며 그의 몸에 떨어진 블루베리를 하나 집어 먹었다.
“아, 달다.”
옆에서 릭셀리언이 포기한 듯 의자에 몸을 묻고 블루베리를 집어 먹었다. 레리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이번에는 뭐 먹어 볼래?”
“너 이거 먹으려고 키우는 거지?”
“들켰네?”
레리트의 밝은 웃음소리가 온실에 울려 퍼졌다.
* * *
레리트는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그레탄트 공작을 바라봤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공작은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늦은 저녁 레리트를 따로 불러냈다.
공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기도에 관한 이야기는?”
“해 줬어요. 생각보다 반응도 괜찮았고요.”
“다행이구나.”
전장에서 8년 동안 싸워 온 그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온건했다. 레리트 역시 놀랐던 부분이었다.
잠시 온실에서의 릭셀리언을 생각하던 레리트가 공작에게 물었다.
“수도에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그래.”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질 공작의 질문들을 예상하고 먼저 답을 해 줬다.
“공작님께서 안 계시는 동안 부인께서도 많이 괜찮아지셨어요.”
“고맙다.”
“뭘요.”
그레탄트는 레리트를 볼 때면 언제나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곳에 종종 쏟아지던 제우스의 분노를 네가 막아 주던 것을 안다.”
“부탁받은 것도 있으니까요.”
별일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하지만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들의 전쟁 중 자신에게 속한 인간이 싸움에서 크게 다칠 때마다 상대 가문을 괴롭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제우스였다. 그레탄트는 지난 8년간 제우스의 신력을 버틸 만한 무구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장인들을 찾아 헤매며 제도와 대륙 전체를 돌아다녀야 했다.
어떻게든 그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장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돈을 밀어 주며 그렇게 무구를 모아 전쟁터로 보냈다.
그리고 그레탄트가 그렇게 모든 정성을 무구를 모으는 데 쏟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레리트의 덕분이었다.
집 안에 쏟아지던 제우스의 분노를 막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약해진 가문의 위세를 틈타 공격해 오던 다른 가문들을 막고, 아들과 남편이 동시에 사라지자 힘들어하던 브리엔을 돌봤으며 무구를 사느라 드는 막대한 재정을 보충하고 집안을 관리했다.
그리고 지금은 돌아온 릭셀리언을 돌봐 주고 있었다. 부모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것을 그들보다 어린 레리트가 해 주고 있었다.
“지금 저 아이를 돌봐 주는 것도.”
계속되는 공작의 말에 레리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어쩌겠어요. 도련님인데.”
그러면서 그의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렇게 저를 도와주고 계시잖아요.”
황실의 문장이 찍힌 서류였다. 그레탄트는 서류를 레리트가 볼 수 없게 옆으로 밀어 넣었다. 보여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용을 확인했는지 레리트가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그레탄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괜찮다.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야.”
“그래도요. 죄송해요.”
“네 잘못도 아니지 않니.”
물론 레리트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어도 그레탄트는 레리트를 도와줬을 것이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자그마치 26년을 함께했다. 키운 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리라.
그리고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서로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부터가 서로가 가족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릭셀리언에 관한 이야기가 다른 가문에 곧 퍼지겠지.”
“그렇겠죠.”
가문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로 이야기가 퍼져 나갈 것이다.
지금은 간신히 릭셀리언에 관한 이야기를 막아 두고 있었지만, 기도가 시작되면 더 이상 릭셀리언의 눈 상태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잠깐의 평화는 곧 사라질 것이다. 권력과 힘을 노리는 승냥이들이 다시 티리엔을 노릴 테니까.
그때를 대비해야 했다.
“우리 예상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잘할 수 있을 거다.”
“그럼요. 여태까지 잘해 왔잖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레리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네.”
그레탄트가 그런 레리트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내 딸.”
“그리 여겨 주셔서 감사해요.”
“여전히 그러고 싶지 않으냐.”
레리트에게 몇 번이고 권유했던 일이었다. 그와 브리엔의 양딸이 되라고. 정말 우리 가족이 되자고. 하지만 단 한 번도 레리트는 그 권유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레탄트는 레리트의 부드러운 미소에서 거절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레리트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릭셀리언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았던 거고. 지금은 그냥 이대로도 나쁘지 않아서요. 꼭 서류로 엮여 있어야만 가족인 건 아니잖아요?”
그레탄트는 처음 레리트에게 이 말을 했을 때 그 어렸던 꼬마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릭셀리언은 소유욕이 강하고 질투심이 많아요.’
처음에는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괴롭힘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그레탄트와 브리엔이 막아 주려고는 했지만, 언제나 릭셀리언과 레리트를 보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들이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리트의 설명을 들을수록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레리트는 왜 헤라가 릭셀리언의 신인지 알 수 있다고도 말했다. 갓난아이 때부터 릭셀리언은 그에게 쏟아지던 관심을 레리트와 나누는 것이 싫어 목이 쉬도록 울음을 터트리던 아이였다.
그리고 그 후로도 릭셀리언은 계속 레리트를 견제했었다. 그러니까 릭셀리언이 부모의 사랑을 최고라고 여기던,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물론 그렇다고 릭셀리언이 레리트를 싫어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레리트를 건드리면 절대 가만두는 녀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레리트를 좋아하지만 그건 레리트가 그의 것을 건드리지 않을 때에 한해서였다는 말이었다.
레리트를 챙기고, 아끼면서도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빼앗길까 봐 레리트를 견제했다. 그리고 그런 릭셀리언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이 바로 레리트였다.
그래서 레리트는 그레탄트의 첫 번째 입양 권유를 거절했다. 그 뒤로 이어진 그레탄트 대신 온 힘을 다해 가문을 지키던 레리트에게 했던 두 번째 권유. 그때 레리트는 릭셀리언이 없는 사이 그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그 아이가 돌아올 자리를 남겨 두고 싶다고. 그 삐딱한 성격이라면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걸 알자마자 본인이 버려졌다고 생각할 거라고 말했다.
사실 그런 식으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레탄트가 아는 릭셀리언이라면 레리트의 말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던가.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게 그 녀석을 흔들 수 있을 만한 일들은 만들지 말자고 이야기했다.
그 뒤 레리트는 릭셀리언에게 보급품을 보낼 때마다 누구보다도 신경을 썼다. 여전히 릭셀리언을 기다리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며 그레탄트에게 편지를 쓰길 강요하기도 하고 선물을 고르라고 하기도 했었다.
속이 깊은 아이였다.
“……그래. 언제나 똑똑하고 현명하지.”
칭찬을 받으면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항상 그런 건 아니고요.”
레리트가 부끄러움에 볼을 붉히다가 손에 들린 병 하나를 그레탄트에게 넘겨줬다.
“이건 저 때문에 고생하신 것에 대한 선물이에요.”
그레탄트가 병을 바라보며 물었다.
“술이니?”
“과일주예요. 산딸기를 가득 넣어서 달아요.”
레리트가 시간을 확인하며 답했다.
“단거 좋아하시잖아요. 부인이랑 대화를 좀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괜찮아지시긴 하셨는데 여전히 불안해하시니까요.”
그레탄트가 웃으며 레리트의 반대 손에 들린 같은 모양의 병을 가리켰다.
“그래. 그럼 그 손에 있는 건 네가 마실 술이니?”
“네, 저도 릭셀리언하고 대화를 좀 해 볼까 해서요. 이제 좀 안정된 것도 같고.”
말을 마친 레리트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이제 물러가겠다는 뜻이었다.
“잘 자렴.”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사랑으로 맺어진 두 부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릭셀리언이 어이가 없다는 듯 레리트를 바라봤지만, 레리트는 당당했다.
“왜.”
지금 릭셀리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믿고 괜한 오기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 욕한 것 정도는 충분히 난나가 막아 줄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
그리고 원래 인맥은 쓰라고 있는 거였다. 레리트는 릭셀리언에게 그녀가 터득한 삶의 지혜를 나눠 주기로 했다.
“야, 원래 인생은 인맥이 중요해.”
“시끄러워.”
전쟁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릭셀리언은 아직 세상을 잘 몰랐다. 레리트는 이제 곧 사회에 찌들게 될 릭셀리언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면 레리트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어린 녀석.’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팔을 토닥거렸다. 그러자 릭셀리언이 신경질적으로 레리트의 손을 쳐 냈다.
“사납기는.”
레리트는 다시 의자에 몸을 누이며 오래간만에 갖는 휴식 시간을 즐겼다.
“아, 무지개 예쁘다.”
레리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반짝이는 햇살도 예뻤고 물을 잔뜩 머금은 식물도 예뻤으며 물을 뿌린 후라 온실에 생긴 무지개도 예뻤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모든 것이 바로 레리트의 것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온실을 가졌어?”
“열심히 일한 대가지.”
“키우느라 고생 좀 했겠네.”
딱히 고생을 많이 하진 않았다.
“난나가 도와줬지.”
“매일 이렇게 물을 주러 오는 거야?”
레리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은 기분 내는 거야. 원래는 이렇게 신력만 둘러 주면……, 알아서 자라.”
레리트의 신력이 온실을 가득 메웠다. 식물들이 레리트의 신력을 듬뿍 빨아들여 더 활기차졌다.
“무슨 생고생이야?”
레리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몸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 주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나를 다스리는 거지.”
“도인이 다 됐네.”
레리트가 코웃음을 쳤다.
“시끄러워. 아무튼, 네가 그 가문에 가야 하는 것처럼 그 남자도 우리 가문으로 와야 하잖아.”
“……그렇겠지.”
사실 이게 더 어이없었다. 기도를 각자 가문에서 하면 되지 꼭 상대 가문으로 가 기도를 해야 했다.
‘배려라는 게 없다니까. 어떻게든 지네들만 편하려고.’
신들은 정말 이기적이었다. 아무리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죽고 죽임을 당한 것은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신들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체면이 상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게 그들 본연의 의지가 아니었을지라도, 적대 관계였던 인간의 집으로 찾아와 기도를 올리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다시 속으로 욕을 하던 레리트가 다시 그 남자를 떠올렸다. 릭셀리언이 헤라의 선택을 받은 것처럼 제우스의 선택을 받았던 이.
“괜찮아?”
자그마치 8년 동안을 서로 죽일 듯이 싸워 왔고 지금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릭셀리언의 흉터와 비슷한 상처가 그의 몸에도 가득할 터였다.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지.”
제우스의 가호를 받는 그 사내가 티리엔 저택으로 온다니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더는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싸우지 못할 것이다.
“신이 죽었으면 이제 그자는 신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거지?”
“그렇지.”
릭셀리언이 제우스를 죽인 이상 그 남자는 이제 신의 가호가 없는 평범한 인간일 테니까. 그 가문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아 있으면 됐지.”
릭셀리언의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레리트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옆에 있는 나무에서 블루베리를 하나 따서 릭셀리언의 입에 넣어 줬다.
“뭐야.”
“블루베리.”
“…….”
이해한다든가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레리트는 릭셀리언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런 위로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새콤달콤한 블루베리를 잔뜩 쥐여 주는 것과 같은 일.
레리트의 신력에 영향을 받은 블루베리 나무가 몸을 부풀리더니 릭셀리언의 몸 위로 블루베리를 잔뜩 떨어트렸다.
“야.”
“맛있지? 선물이야.”
레리트가 웃으며 그의 몸에 떨어진 블루베리를 하나 집어 먹었다.
“아, 달다.”
옆에서 릭셀리언이 포기한 듯 의자에 몸을 묻고 블루베리를 집어 먹었다. 레리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이번에는 뭐 먹어 볼래?”
“너 이거 먹으려고 키우는 거지?”
“들켰네?”
레리트의 밝은 웃음소리가 온실에 울려 퍼졌다.
* * *
레리트는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그레탄트 공작을 바라봤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공작은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늦은 저녁 레리트를 따로 불러냈다.
공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기도에 관한 이야기는?”
“해 줬어요. 생각보다 반응도 괜찮았고요.”
“다행이구나.”
전장에서 8년 동안 싸워 온 그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온건했다. 레리트 역시 놀랐던 부분이었다.
잠시 온실에서의 릭셀리언을 생각하던 레리트가 공작에게 물었다.
“수도에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그래.”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질 공작의 질문들을 예상하고 먼저 답을 해 줬다.
“공작님께서 안 계시는 동안 부인께서도 많이 괜찮아지셨어요.”
“고맙다.”
“뭘요.”
그레탄트는 레리트를 볼 때면 언제나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곳에 종종 쏟아지던 제우스의 분노를 네가 막아 주던 것을 안다.”
“부탁받은 것도 있으니까요.”
별일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하지만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들의 전쟁 중 자신에게 속한 인간이 싸움에서 크게 다칠 때마다 상대 가문을 괴롭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제우스였다. 그레탄트는 지난 8년간 제우스의 신력을 버틸 만한 무구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장인들을 찾아 헤매며 제도와 대륙 전체를 돌아다녀야 했다.
어떻게든 그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장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돈을 밀어 주며 그렇게 무구를 모아 전쟁터로 보냈다.
그리고 그레탄트가 그렇게 모든 정성을 무구를 모으는 데 쏟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레리트의 덕분이었다.
집 안에 쏟아지던 제우스의 분노를 막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약해진 가문의 위세를 틈타 공격해 오던 다른 가문들을 막고, 아들과 남편이 동시에 사라지자 힘들어하던 브리엔을 돌봤으며 무구를 사느라 드는 막대한 재정을 보충하고 집안을 관리했다.
그리고 지금은 돌아온 릭셀리언을 돌봐 주고 있었다. 부모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것을 그들보다 어린 레리트가 해 주고 있었다.
“지금 저 아이를 돌봐 주는 것도.”
계속되는 공작의 말에 레리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어쩌겠어요. 도련님인데.”
그러면서 그의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렇게 저를 도와주고 계시잖아요.”
황실의 문장이 찍힌 서류였다. 그레탄트는 서류를 레리트가 볼 수 없게 옆으로 밀어 넣었다. 보여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용을 확인했는지 레리트가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그레탄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괜찮다.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야.”
“그래도요. 죄송해요.”
“네 잘못도 아니지 않니.”
물론 레리트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어도 그레탄트는 레리트를 도와줬을 것이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자그마치 26년을 함께했다. 키운 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리라.
그리고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서로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부터가 서로가 가족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릭셀리언에 관한 이야기가 다른 가문에 곧 퍼지겠지.”
“그렇겠죠.”
가문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로 이야기가 퍼져 나갈 것이다.
지금은 간신히 릭셀리언에 관한 이야기를 막아 두고 있었지만, 기도가 시작되면 더 이상 릭셀리언의 눈 상태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잠깐의 평화는 곧 사라질 것이다. 권력과 힘을 노리는 승냥이들이 다시 티리엔을 노릴 테니까.
그때를 대비해야 했다.
“우리 예상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잘할 수 있을 거다.”
“그럼요. 여태까지 잘해 왔잖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레리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네.”
그레탄트가 그런 레리트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내 딸.”
“그리 여겨 주셔서 감사해요.”
“여전히 그러고 싶지 않으냐.”
레리트에게 몇 번이고 권유했던 일이었다. 그와 브리엔의 양딸이 되라고. 정말 우리 가족이 되자고. 하지만 단 한 번도 레리트는 그 권유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레탄트는 레리트의 부드러운 미소에서 거절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레리트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릭셀리언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았던 거고. 지금은 그냥 이대로도 나쁘지 않아서요. 꼭 서류로 엮여 있어야만 가족인 건 아니잖아요?”
그레탄트는 처음 레리트에게 이 말을 했을 때 그 어렸던 꼬마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릭셀리언은 소유욕이 강하고 질투심이 많아요.’
처음에는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괴롭힘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그레탄트와 브리엔이 막아 주려고는 했지만, 언제나 릭셀리언과 레리트를 보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들이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리트의 설명을 들을수록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레리트는 왜 헤라가 릭셀리언의 신인지 알 수 있다고도 말했다. 갓난아이 때부터 릭셀리언은 그에게 쏟아지던 관심을 레리트와 나누는 것이 싫어 목이 쉬도록 울음을 터트리던 아이였다.
그리고 그 후로도 릭셀리언은 계속 레리트를 견제했었다. 그러니까 릭셀리언이 부모의 사랑을 최고라고 여기던,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물론 그렇다고 릭셀리언이 레리트를 싫어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레리트를 건드리면 절대 가만두는 녀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레리트를 좋아하지만 그건 레리트가 그의 것을 건드리지 않을 때에 한해서였다는 말이었다.
레리트를 챙기고, 아끼면서도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빼앗길까 봐 레리트를 견제했다. 그리고 그런 릭셀리언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이 바로 레리트였다.
그래서 레리트는 그레탄트의 첫 번째 입양 권유를 거절했다. 그 뒤로 이어진 그레탄트 대신 온 힘을 다해 가문을 지키던 레리트에게 했던 두 번째 권유. 그때 레리트는 릭셀리언이 없는 사이 그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그 아이가 돌아올 자리를 남겨 두고 싶다고. 그 삐딱한 성격이라면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걸 알자마자 본인이 버려졌다고 생각할 거라고 말했다.
사실 그런 식으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레탄트가 아는 릭셀리언이라면 레리트의 말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던가.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게 그 녀석을 흔들 수 있을 만한 일들은 만들지 말자고 이야기했다.
그 뒤 레리트는 릭셀리언에게 보급품을 보낼 때마다 누구보다도 신경을 썼다. 여전히 릭셀리언을 기다리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며 그레탄트에게 편지를 쓰길 강요하기도 하고 선물을 고르라고 하기도 했었다.
속이 깊은 아이였다.
“……그래. 언제나 똑똑하고 현명하지.”
칭찬을 받으면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항상 그런 건 아니고요.”
레리트가 부끄러움에 볼을 붉히다가 손에 들린 병 하나를 그레탄트에게 넘겨줬다.
“이건 저 때문에 고생하신 것에 대한 선물이에요.”
그레탄트가 병을 바라보며 물었다.
“술이니?”
“과일주예요. 산딸기를 가득 넣어서 달아요.”
레리트가 시간을 확인하며 답했다.
“단거 좋아하시잖아요. 부인이랑 대화를 좀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괜찮아지시긴 하셨는데 여전히 불안해하시니까요.”
그레탄트가 웃으며 레리트의 반대 손에 들린 같은 모양의 병을 가리켰다.
“그래. 그럼 그 손에 있는 건 네가 마실 술이니?”
“네, 저도 릭셀리언하고 대화를 좀 해 볼까 해서요. 이제 좀 안정된 것도 같고.”
말을 마친 레리트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이제 물러가겠다는 뜻이었다.
“잘 자렴.”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사랑으로 맺어진 두 부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