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6화









레리트는 막무가내로 릭셀리언의 방으로 들어섰다. 릭셀리언이 못마땅한 얼굴을 하는 걸 알았지만 레리트는 그런 릭셀리언의 반응을 무시했다.

레리트는 의자에 앉아 릭셀리언이 맞은편에 앉기를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릭셀리언이 레리트의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뭐야? 무례하게.”

“우리 사이에 무례는 무슨.”

레리트는 술병을 따고 잔에 술을 가득 담아 릭셀리언을 향해 넘겨줬다.

“술?”

레리트가 그녀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달콤한 냄새가 방 안에 가득 퍼졌다.

“응. 너 다디단 술 좋아하잖아.”

레리트는 릭셀리언이 술을 한 모금 마시는 걸 보며 으스대며 물었다.

“맛있지?”

“그래.”

그 뒤로 레리트는 별말 없이 술을 반병 정도 비워 냈다. 슬슬 술기운이 올라올 때쯤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며 물었다.

“기도하러 가는 거 말이야. 정말 괜찮아?”

“…….”

항상 느끼지만, 릭셀리언의 저 침묵하는 버릇은 정말 나쁜 버릇이었다. 말을 하고 싶지 않을 때. 진실을 숨기고 싶을 때. 고집을 부릴 때. 저 녀석은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다행히 레리트는 릭셀리언의 표정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네가 변했다는 거. 변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 알아.”

말을 막 하고 싹수없게 굴기는 했으나 언제나 생기가 넘치던 녀석이었다. 지금처럼 다 죽어 가는 말라비틀어진 고목 같은 녀석이 아니었다.

말수가 줄고 예전처럼 시비를 걸거나 사납게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으나 동시에 그는 감정적으로 메말라 있었다.

제우스를 받았던 그 사내를 죽이지는 않았으나 그 사내와 함께 온 많은 병사가 죽어 나갔다. 그리고 티리엔에서 보냈던 병사들도.

그런 전쟁 통에서 살아왔던 릭셀리언이 예전과 완전히 같은 척 굴었다면 레리트는 아마 지금보다도 더 릭셀리언을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그런 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네가 너라는 건 변하지 않는 거고.”

릭셀리언이 바뀐 듯 바뀌지 않은 것처럼 레리트 역시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레리트였다.

“너도 느끼지? 내가 변했지만 그래도 예전의 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거.”

릭셀리언이 무기력한 눈으로 레리트를 바라봤다.

“그래서?”

레리트는 다시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네가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넌 지기 싫어하는 녀석이야. 무기력해진 지금 네 모습이 네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지.”

릭셀리언의 기세가 서서히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너도 언제까지 이렇게 가문 내에서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알 거야.”

지금은 이렇게 평화롭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문에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잠시일 뿐이었다.

“넌 티리엔의 후계자니까.”

“…….”

릭셀리언의 위치는 그가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고 있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신살자라는 이름을 릭셀리언이 가지게 된 순간 그는 이렇게 평화롭게 지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문제는 지금의 릭셀리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기에는 릭셀리언은 너무 많이 지쳐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릭셀리언에게는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레리트였다. 레리트가 잔을 내려놓고 릭셀리언을 바라봤다.

“내가 도와줄게.”

“……왜?”

“가족이니까.”

“네가?”

저 비웃음 어린 표정이 여린 속을 가리기 위한 가시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레리트는 덤덤하게 답했다.

“서류로 엮여 있지 않다 해서 너와 내가 가족이 아닌 건 아니야.”

그리고 그런 식으로 끈끈하게 엮이지 않더라도 레리트는 티리엔의 방계였다.

“그리고 난 방계잖아? 아예 피가 안 섞여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싫으면 하녀가 도련님을 돕는다고 생각하던가.”

레리트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릭셀리언을 향해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물을게. 기도하러 그 가문으로 가는 거, 괜찮아?”

잔을 움켜쥔 릭셀리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네가 괜찮지 않다고 하면 내가 같이 가고.”

릭셀리언이 매서운 기운을 내뿜으며 더는 제 속을 보려 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를 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도와 달라고 이야기해. 릭셀리언.”

그냥, 깊은 어둠에 빠진 친구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내가 말했지. 인맥은 이용하라고 있는 거야. 그리고 네가 가진 가장 큰 인맥은 나야.”

“네가?”

레리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 생각보다 나는 꽤 효용 가치가 높아.”

레리트의 지난 8년은 헛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긴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하지만 레리트는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도와줘.”

레리트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였으나 레리트는 만족했다.

“그래.”

레리트가 환하게 웃으며 릭셀리언의 잔에 다시 술을 따라 줬다.

“그런데 진짜 세월이 지나긴 했나 보다.”

레리트가 8년간 변한 것처럼 릭셀리언 역시 많이 변했다. 그러니까 좋은 쪽으로.

“네가 정말 도와 달라고 하다니.”

레리트가 날카롭게 그녀를 바라보는 릭셀리언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릭셀리언은 레리트의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놀리는 게 아니라, 그냥 네가 이제 자존심만 세우는 애는 아니구나 싶어서.”

잠시 레리트를 노려보던 릭셀리언이 잔을 한 번에 비워 냈다. 레리트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카펠리넌 가문은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아.”

릭셀리언의 적이었던 펄론 카펠리넌 가문 역시 티리엔 못지않게 커다란 대귀족 중 하나였다.

가문 간의 거리는 일반인이 움직인다면 대략 일주일이 걸릴 거리였으나 이번 기도에 참여하는 인원들은 모두 신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었으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이틀 뒤에 출발할 거고, 절차는 알지? 전쟁의 승리자가 먼저 상대 가문을 찾아가서 신께 기도를 올리고 올 때는 그 남자랑 같이 돌아오는 거야.”

싸움에서 패배했으니 화가 많이 났을 신에게 미리 가서 사죄하는 거였다. 그리고 이때 상대 가문으로 기도하러 가는 이유는 이번 전쟁은 신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니 가문끼리 원한을 갖지는 말자는 의미였다. 일단 겉으로는 그랬다. 물론 실제는 신들의 체면을 위해서였고.

레리트가 차게 웃었다.

후자의 경우에 이 제도가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그쪽으로는 유명무실한 제도였다. 가문들끼리 사이가 나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대귀족들의 힘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어떤 연유로 황실이 아직도 그 힘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레리트가 가식적인 미소를 짓던 한 사내를 떠올리는데 릭셀리언이 레리트에게 물었다.

“이쪽 준비는?”

그러니까 레리트가 릭셀리언과 함께 카펠리넌 가문으로 간다면 손님을 맞을 준비는 누가 하는 거냐고 묻는 거였다. 레리트는 미리 준비해 둔 펄론 카펠리넌이 입을 옷과 그가 묶을 방과 그를 감시할 인원들의 배치를 떠올렸다.

“내가 너 오기 전에 미리 해 놨어. 나머지는 부인께서 하실 거야.”

“왜 어머니를 그렇게 불러?”

레리트는 이번 질문은 문맥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뭐가?”

“호칭.”

레리트가 피식 웃음 지었다.

“네가 싫어했을 테니까.”

릭셀리언은 전과 달라진 부인을 부르는 호칭이 이상했던 것 같다. 전에는 릭셀리언을 약올리기 위해서라도 종종 부인을 어머니라고 부르곤 했으니까.

레리트는 아무 말이 없는 릭셀리언에게 코웃음을 쳤다.

“왜? 너를 너무 잘 아는 것 같아?”

꿈틀거리는 눈썹을 보자니 지금까지 속을 모두 보인 것 같은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억울해할 필요는 없었다.

“너도 그만큼 날 잘 아는 거 아니야?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내가 괜찮은 척하는 걸 받아 주는 걸 테고.”

아마 녀석도 눈치챘을 것이다. 레리트가 괜찮은 척하고 있다는 걸.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녀석을 위로해 주려고 하는 걸.

“우리가 8년간 떨어져 있었다고 해도 우린 18년을 함께 지냈어.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지만 그건 함께한 시간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레리트는 괴상하게 일그러지는 릭셀리언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또 얼굴 일그러트리는 거 봐라. 오글거려?”

레리트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피부에 닭살이 잔뜩 돋아 있었다.

“나도 오글거려.”

레리트가 테이블에 놓인 거의 텅 빈 술병을 바라봤다.

“그래도 오늘은 술의 힘을 빌리는 거지.”

레리트는 이왕 말을 꺼낸 김에 그냥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내뱉기로 했다. 앞으로 한동안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물론 술을 마셨다고 해서 부끄러움이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레리트의 얼굴도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네 전부를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많이 알고 있으니까 나한테 조금은 의지해도 괜찮다는 거야.”

그래도 한 번쯤 이렇게 진심을 이야기해 주는 게 릭셀리언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았으니까 용기를 내는 거였다.

“나 봐 봐. 너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네가 돌아왔다고 이렇게 늘어지고 있잖아.”

실제로 레리트는 지난 8년간 이렇게 여유롭게 지낸 적이 거의 없었다. 레리트가 말을 끝내고 릭셀리언을 바라봤다.

“……너는 부끄러움이 너무 없어.”

릭셀리언의 말에 레리트가 코웃음을 치며 남은 술을 들이켰다.

“웃기시네. 나 지금 얼굴 엄청 빨갛거든?”

“웃지 마.”

레리트가 웃음을 터트리는 릭셀리언에게 눈을 부라렸다. 동시에 잔을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으며 외쳤다.

“너도 얼굴 빨갛거든?”

릭셀리언이 술잔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

“난 술 마셔서 그런 거야.”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장난을 치는 그 모습이 나쁘지 않아서 레리트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렇게 한동안 릭셀리언의 방 안에서는 그의 웃음소리가 가끔 들려왔다.



* * *



레리트는 짐을 옮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레탄트와 브리엔을 향해 미소 지었다.

“조심해서 다녀오렴.”

“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말이 없는 릭셀리언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레탄트가 엷게 웃음 짓다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행렬을 바라봤다.

“그래. 그런데 이 정도 인원으로 정말 괜찮겠니?”

레리트가 미소 지었다. 승리자가 패배자의 저택으로 가면서 너무 많은 수의 호위를 데려가는 건 여러모로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첫 번째로는 승리자가 너무 패배자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고 두 번째로는 패배자를 핍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 스무 명 내외의 수가 가장 적당했다. 더군다나 오래전부터 손발을 맞췄던 사람들이니 더욱 완벽했다.

“너무 많이 데려가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니까요. 대신 제가 가잖아요?”

자신만만한 레리트의 태도에 모여 있던 이들 중 아무도 레리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래.”

레리트가 이것 보라는 듯 릭셀리언의 옆구리를 또 찔러 댔다. 릭셀리언이 귀찮다는 듯 레리트의 팔뚝을 붙잡았다.

레리트는 릭셀리언에 대한 장난을 멈추고는 그레탄트를 다시 돌아봤다.

“공작님도 조심하세요.”

“그래. 준비는 완벽하게 해 두마.”

“네. 알겠습니다.”

그때 함께 움직이는 기사 중 하나가 그레탄트에게 다가와 떠날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 왔다.

그 말을 전한 기사의 얼굴을 본 레리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