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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리안, 같이 가요?”
그레탄트의 호위 기사인 리안이었다. 그레탄트가 리안이 답을 하기 전에 먼저 답을 해 줬다.
“그래, 내가 넣었다.”
굳이 리안을 이 인원에 포함시킨 이유는 대충 짐작했지만, 레리트는 모른 척 웃어 보였다.
“어, 그래요? 잘 부탁해요. 리안.”
“네!”
리안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자리로 돌아간 뒤, 레리트는 브리엔에게 인사를 건네고 마차에 올라탔다.
레리트가 먼저 마차에 타고 있던 릭셀리언의 앞에 앉으며 그를 불렀다.
“야.”
“왜.”
레리트가 마차를 툭 두드리며 물었다.
“내가 해?”
“그래.”
레리트가 힘을 쓰는 게 당연하다는 듯 구는 릭셀리언의 모습에 괜히 짜증이 났지만, 확실히 헤라의 힘으로 마차를 움직여 카펠리넌으로 가는 건 좋은 선택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게 좋겠네.”
수긍하는 그 말과 함께 레리트의 신력이 마차를 감싸고 하늘 위로 마차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일행들이 탄 마차들 역시 하나둘 하늘 위로 올라왔다.
하늘로 올라가 안정적인 궤도를 찾고 난 뒤 레리트는 마차의 방향을 조정하는 기사가 준비가 됐다는 신호로 마차를 두드리자 편안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까 그 남자.”
레리트는 갑자기 말을 거는 릭셀리언을 바라봤다.
“남자?”
“아버지 호위 기사 말이야.”
“아, 리안?”
레리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릭셀리언에게 말하기엔 조금 곤란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왜 계속 그 애를 너한테 붙여?”
“어, 그 애가 나를 좋아해서?”
사실 두 분의 그런 행동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기에 슬슬 말을 하는 게 어떨까 싶기도 했다. 두 분은 리안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지만 레리트가 보기에는 리안은 아직 너무 어린아이 같았다.
“그게 너랑 붙여 주는 이유라고? 우리 부모님이 왜?”
레리트가 옆에 놓인 쿠션에 몸을 기대며 뭔가 못마땅해 보이는 릭셀리언에게 답했다. 아무래도 자기 부모님들이 레리트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게 별로인 모양이었다.
‘아직 어리네.’
아직도 부모님의 사랑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레리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나이가 있어서 그런가 보지.”
“네 나이?”
“나 결혼 적령기 지났거든. 뭐,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게 맞는 거겠지만 아무튼.”
하지만 그런 레리트의 말이 릭셀리언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통 신의 가호를 받는 경우 가문을 이어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결혼은 안 하지 않아?”
“그렇지 신께선 다들 소유욕이 강하시니까.”
확실히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공작님이나 부인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게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니었구나.’
하긴 그런 쪽으로 질투를 하기에는 릭셀리언은 나이를 좀 많이 먹긴 했다.
“그런데 너한테 왜 그러시는데?”
“난나는 딱히 나한테 간섭하지 않으니까.”
그 말에 릭셀리언이 코웃음을 쳤다.
“왜?”
이유를 묻는 레리트의 말에 릭셀리언이 고개를 휙 돌렸다.
“됐어.”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레리트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딱히 물어도 답을 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레리트는 마차의 창문을 열어젖혔다. 푸른 하늘이 보이자 눈이 즐거워졌다.
“아, 좋다.”
“추워.”
레리트는 삐딱하게 나오는 릭셀리언을 힐끗 바라봤다.
“춥긴. 왜 심술을 부려?”
신의 가호를 받는 레리트나 릭셀리언은 추위나 더위를 잘 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심술이 맞았다.
“그래도 이건 양보 못 해. 하루나 날아가야 하는데 갑갑해서라도 꼭 밖을 봐야겠다고.”
마차는 너무 빠르게 움직이면 망가졌기 때문에 그냥 맨몸으로 날아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품위와 예절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차를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지루한 것은 싫었다.
레리트의 불만에 릭셀리언이 결국 물러났다.
“맘대로 해.”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 레리트는 옆에 놓여 있던 담요 하나를 릭셀리언에게 덮어 주었다.
“자, 담요.”
릭셀리언이 별다른 말 없이 가만히 담요를 덮는 걸 확인한 레리트는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밖을 구경하던 레리트가 어느새 노을이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역시 별은 하늘에서 봐야 제일 예쁜 것 같아.”
레리트가 다시 릭셀리언을 돌아봤다.
“처음 이렇게 하늘에 올라왔을 때 기억해?”
레리트가 부연 설명을 했다.
“너랑 나랑 싸운 날 말하는 거야.”
“그래.”
어린 시절에는 참 별것도 아닌 걸로 많이 싸웠다. 아무리 신력의 사용이 자유로운 티리엔이라고 해도 언제나 이렇게 하늘을 날아서 이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이렇게 마차를 타고 하늘로 이동했을 때 정말 징글징글하게 싸웠었다. 서로 마차의 창문을 차지하겠다며 난리를 피웠던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덕분에 티리엔의 마차는 그때부터 항상 창문을 양옆에 모두 달아 두곤 했다.
“진짜 매일 싸웠는데.”
레리트가 추억에 잠겨 있다가 릭셀리언이 눈을 감는 걸 보며 물었다.
“잘 거야?”
“그래.”
레리트는 잠을 잔다면서 담요를 그녀에게 던져 주는 릭셀리언을 보곤 빤히 바라봤다.
“이건 왜?”
“더워.”
레리트가 황당해서 물었다.
“언제는 춥다며.”
릭셀리언은 답을 하지 않고 몸을 의자에 편하게 기댔다.
“제멋대로라니까.”
그래도 슬슬 밤이 돼서 추워지고 있었으니 레리트는 담요를 몸에 둘렀다.
* * *
레리트는 마차 바로 아래 위치한 거대한 저택을 바라봤다. 티리엔과 비슷한 거대한 크기 덕분이지 저택은 웅장해 보였다.
“릭셀리언. 다 왔어.”
“그래.”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눈을 보며 물었다.
“손잡을까? 아니면 그냥 신력을 조금 풀까?”
티리엔 저택은 익숙한 곳이기에 레리트가 도움을 주지 않아도 릭셀리언이 혼자 다닐 수 있었지만 이곳은 처음 오는 곳이었다.
그러니 릭셀리언은 레리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중 신력을 푸는 방법은 레리트의 신력에 따라 릭셀리언이 움직이면 되는 거니 행동에도 큰 무리가 없었다.
카펠리넌 저택에 도착하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이 릭셀리언이 눈이 멀었다는 걸 눈치채겠지만 그래도 직접적인 도움을 받는 것보다는 신력을 이용해 도움을 주는 것이 여러모로 괜찮아 보일 것이다.
눈이 멀어도 아직 신력은 건재하다는 걸 보여 줄 방법이기도 했으며 행동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걸 보일 수 있었으니까.
“신력을 조금 푸는 게 좋겠지?”
“그래.”
레리트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저택과 대문 앞에 서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남자. 펄론 카펠리넌 말이야. 나왔을까?”
“글쎄.”
레리트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막 공격하고 그러지는 않겠지?”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먼저 답했다.
“왜, 걱정된단 말이야.”
“자신만만하더니.”
물론 저쪽도 멍청이가 없다면 기도를 하러 온 이쪽을 건드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레리트가 그간 봐 온 카펠리넌 가문 사람 중 그런 멍청이는 없었다.
하지만 레리트가 봐 왔던 사람들이 카펠리넌 가문의 전부는 아니었다.
“저쪽에 또라이가 하나 있으면 어떡해.”
“너도 또라이니까 괜찮아.”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방법도 참 릭셀리언다웠다.
“뭐래.”
점점 더 가까워지는 저택에 레리트가 그녀의 복장을 점검하는데 릭셀리언이 툭 내뱉었다.
“잘할 거야.”
“……당연하지.”
레리트가 웃으며 릭셀리언의 살짝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했다.
“잘하자.”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의자에 앉자마자 마차가 살짝 흔들리며 땅에 내려앉았다.
잠시 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레리트가 그녀를 바라보는 리안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카펠리넌 가문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익숙한 이들도 보였고 익숙지 않은 이들도 보였다. 레리트가 그들을 탐색하고 있는 것처럼 저들 역시 레리트를 탐색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지금 저들은 레리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리트는 지금 은은하게 신력을 뿌려 대고 있었으니까. 카펠리넌 가문의 사람 중 하나가 그런 레리트의 행동을 지적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는데 릭셀리언이 마차에서 내려 레리트의 뒤로 나타났다.
순간 앞으로 나서려던 사람을 포함해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차올랐다.
릭셀리언의 눈을 보는 순간 저들도 모두 느꼈을 것이다. 흐릿하게 변한 색과 함께 초점 없는 눈.
그리고 릭셀리언 쪽으로 향하는 레리트의 신력까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던 사람 중 가문의 가주인 앤더슨 카펠리넌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레리트와 릭셀리언을 향해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레리트가 엷게 웃으며 후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후작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이쪽이…….”
레리트가 운을 떼자 릭셀리언이 레리트의 옆으로 한 걸음 나오며 그를 소개했다.
“릭셀리언 티리엔입니다.”
후작이 웃으며 릭셀리언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리 만나게 되었군. 눈이 그리됐을 줄은 몰랐지만.”
릭셀리언이 아무렇지 않게,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 답했다.
“이 정도면 신살자라는 이름치고는 가벼운 처벌 아니겠습니까.”
눈을 잃었어도 승리자는 릭셀리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말이었다. 그리고 헛손질 없이 한 번에 후작이 내민 손을 잡아 낸 릭셀리언에 후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후작이 단단하게 그의 손을 잡은 릭셀리언의 손을 내려다보다 릭셀리언이 손을 놓자 다시 레리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우선 사용인들이 머물 곳을 안내할걸세.”
“네.”
“여독을 풀고 내일 다시 만나도록 하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후작이 릭셀리언을 힐끗 바라보며 레리트에게 물었다.
“공자는 따로 도움이 필요하나?”
레리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후작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레리트의 신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래, 그대가 알아서 하겠지. 다만 이리 직접 움직일 줄 몰랐는데.”
레리트가 눈을 곱게 접으며 답했다.
“당연히 제가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작이 레리트의 속내를 모두 파헤치겠다는 듯 레리트와 눈을 마주했다.
“그대는 이제 앞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관계를 정리하지 않았나.”
레리트는 후작이 보내는 끈질긴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관계를 정리했어도 가문의 일에는 나서야죠.”
“그런가.”
후작이 엷게 웃음 지으며 사용인들을 불렀다. 후작의 손짓에 사용인들이 레리트의 일행들에게 다가왔다.
“내일 보지.”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 * *
레리트는 저택에 배정된 릭셀리언의 방으로 들어섰다. 딱히 어떤 위험 요소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괜찮은 것 같네. 내 방은 바로 네 옆방이야.”
레리트는 별다른 답이 없는 릭셀리언을 돌아봤다. 사실 아까부터 아무 말이 없기는 했다.
“릭셀리언?”
별생각 없이 릭셀리언을 돌아봤던 레리트는 냉기를 풍기고 있는 릭셀리언의 얼굴에 몸을 흠칫 떨었다.
침대 끝자락에 앉아 있던 릭셀리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 무슨 말이야?”
“뭐, 뭐가?”
“관계를 정리했다는 말.”
레리트가 속으로 후작을 욕했다. 일이 완벽히 해결되지 않아 아직 릭셀리언에게는 이야기해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레리트가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네가 돌아오기 전에 내가 너 대신 일을 처리했다는 건 알고 있지?”
“그런데.”
“황실 쪽과 문제가 생겼어.”
레리트는 항상 뜻 모를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황태자 카신을 떠올렸다.
“제대로 설명해.”
잠시 망설이던 레리트가 결국 상황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가장 자극적인 말을 꺼냈다.
“치정?”
“치정?”
“리안, 같이 가요?”
그레탄트의 호위 기사인 리안이었다. 그레탄트가 리안이 답을 하기 전에 먼저 답을 해 줬다.
“그래, 내가 넣었다.”
굳이 리안을 이 인원에 포함시킨 이유는 대충 짐작했지만, 레리트는 모른 척 웃어 보였다.
“어, 그래요? 잘 부탁해요. 리안.”
“네!”
리안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자리로 돌아간 뒤, 레리트는 브리엔에게 인사를 건네고 마차에 올라탔다.
레리트가 먼저 마차에 타고 있던 릭셀리언의 앞에 앉으며 그를 불렀다.
“야.”
“왜.”
레리트가 마차를 툭 두드리며 물었다.
“내가 해?”
“그래.”
레리트가 힘을 쓰는 게 당연하다는 듯 구는 릭셀리언의 모습에 괜히 짜증이 났지만, 확실히 헤라의 힘으로 마차를 움직여 카펠리넌으로 가는 건 좋은 선택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게 좋겠네.”
수긍하는 그 말과 함께 레리트의 신력이 마차를 감싸고 하늘 위로 마차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일행들이 탄 마차들 역시 하나둘 하늘 위로 올라왔다.
하늘로 올라가 안정적인 궤도를 찾고 난 뒤 레리트는 마차의 방향을 조정하는 기사가 준비가 됐다는 신호로 마차를 두드리자 편안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까 그 남자.”
레리트는 갑자기 말을 거는 릭셀리언을 바라봤다.
“남자?”
“아버지 호위 기사 말이야.”
“아, 리안?”
레리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릭셀리언에게 말하기엔 조금 곤란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왜 계속 그 애를 너한테 붙여?”
“어, 그 애가 나를 좋아해서?”
사실 두 분의 그런 행동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기에 슬슬 말을 하는 게 어떨까 싶기도 했다. 두 분은 리안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지만 레리트가 보기에는 리안은 아직 너무 어린아이 같았다.
“그게 너랑 붙여 주는 이유라고? 우리 부모님이 왜?”
레리트가 옆에 놓인 쿠션에 몸을 기대며 뭔가 못마땅해 보이는 릭셀리언에게 답했다. 아무래도 자기 부모님들이 레리트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게 별로인 모양이었다.
‘아직 어리네.’
아직도 부모님의 사랑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레리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나이가 있어서 그런가 보지.”
“네 나이?”
“나 결혼 적령기 지났거든. 뭐,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게 맞는 거겠지만 아무튼.”
하지만 그런 레리트의 말이 릭셀리언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통 신의 가호를 받는 경우 가문을 이어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결혼은 안 하지 않아?”
“그렇지 신께선 다들 소유욕이 강하시니까.”
확실히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공작님이나 부인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게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니었구나.’
하긴 그런 쪽으로 질투를 하기에는 릭셀리언은 나이를 좀 많이 먹긴 했다.
“그런데 너한테 왜 그러시는데?”
“난나는 딱히 나한테 간섭하지 않으니까.”
그 말에 릭셀리언이 코웃음을 쳤다.
“왜?”
이유를 묻는 레리트의 말에 릭셀리언이 고개를 휙 돌렸다.
“됐어.”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레리트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딱히 물어도 답을 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레리트는 마차의 창문을 열어젖혔다. 푸른 하늘이 보이자 눈이 즐거워졌다.
“아, 좋다.”
“추워.”
레리트는 삐딱하게 나오는 릭셀리언을 힐끗 바라봤다.
“춥긴. 왜 심술을 부려?”
신의 가호를 받는 레리트나 릭셀리언은 추위나 더위를 잘 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심술이 맞았다.
“그래도 이건 양보 못 해. 하루나 날아가야 하는데 갑갑해서라도 꼭 밖을 봐야겠다고.”
마차는 너무 빠르게 움직이면 망가졌기 때문에 그냥 맨몸으로 날아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품위와 예절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차를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지루한 것은 싫었다.
레리트의 불만에 릭셀리언이 결국 물러났다.
“맘대로 해.”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 레리트는 옆에 놓여 있던 담요 하나를 릭셀리언에게 덮어 주었다.
“자, 담요.”
릭셀리언이 별다른 말 없이 가만히 담요를 덮는 걸 확인한 레리트는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밖을 구경하던 레리트가 어느새 노을이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역시 별은 하늘에서 봐야 제일 예쁜 것 같아.”
레리트가 다시 릭셀리언을 돌아봤다.
“처음 이렇게 하늘에 올라왔을 때 기억해?”
레리트가 부연 설명을 했다.
“너랑 나랑 싸운 날 말하는 거야.”
“그래.”
어린 시절에는 참 별것도 아닌 걸로 많이 싸웠다. 아무리 신력의 사용이 자유로운 티리엔이라고 해도 언제나 이렇게 하늘을 날아서 이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이렇게 마차를 타고 하늘로 이동했을 때 정말 징글징글하게 싸웠었다. 서로 마차의 창문을 차지하겠다며 난리를 피웠던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덕분에 티리엔의 마차는 그때부터 항상 창문을 양옆에 모두 달아 두곤 했다.
“진짜 매일 싸웠는데.”
레리트가 추억에 잠겨 있다가 릭셀리언이 눈을 감는 걸 보며 물었다.
“잘 거야?”
“그래.”
레리트는 잠을 잔다면서 담요를 그녀에게 던져 주는 릭셀리언을 보곤 빤히 바라봤다.
“이건 왜?”
“더워.”
레리트가 황당해서 물었다.
“언제는 춥다며.”
릭셀리언은 답을 하지 않고 몸을 의자에 편하게 기댔다.
“제멋대로라니까.”
그래도 슬슬 밤이 돼서 추워지고 있었으니 레리트는 담요를 몸에 둘렀다.
* * *
레리트는 마차 바로 아래 위치한 거대한 저택을 바라봤다. 티리엔과 비슷한 거대한 크기 덕분이지 저택은 웅장해 보였다.
“릭셀리언. 다 왔어.”
“그래.”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눈을 보며 물었다.
“손잡을까? 아니면 그냥 신력을 조금 풀까?”
티리엔 저택은 익숙한 곳이기에 레리트가 도움을 주지 않아도 릭셀리언이 혼자 다닐 수 있었지만 이곳은 처음 오는 곳이었다.
그러니 릭셀리언은 레리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중 신력을 푸는 방법은 레리트의 신력에 따라 릭셀리언이 움직이면 되는 거니 행동에도 큰 무리가 없었다.
카펠리넌 저택에 도착하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이 릭셀리언이 눈이 멀었다는 걸 눈치채겠지만 그래도 직접적인 도움을 받는 것보다는 신력을 이용해 도움을 주는 것이 여러모로 괜찮아 보일 것이다.
눈이 멀어도 아직 신력은 건재하다는 걸 보여 줄 방법이기도 했으며 행동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걸 보일 수 있었으니까.
“신력을 조금 푸는 게 좋겠지?”
“그래.”
레리트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저택과 대문 앞에 서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남자. 펄론 카펠리넌 말이야. 나왔을까?”
“글쎄.”
레리트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막 공격하고 그러지는 않겠지?”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먼저 답했다.
“왜, 걱정된단 말이야.”
“자신만만하더니.”
물론 저쪽도 멍청이가 없다면 기도를 하러 온 이쪽을 건드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레리트가 그간 봐 온 카펠리넌 가문 사람 중 그런 멍청이는 없었다.
하지만 레리트가 봐 왔던 사람들이 카펠리넌 가문의 전부는 아니었다.
“저쪽에 또라이가 하나 있으면 어떡해.”
“너도 또라이니까 괜찮아.”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방법도 참 릭셀리언다웠다.
“뭐래.”
점점 더 가까워지는 저택에 레리트가 그녀의 복장을 점검하는데 릭셀리언이 툭 내뱉었다.
“잘할 거야.”
“……당연하지.”
레리트가 웃으며 릭셀리언의 살짝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했다.
“잘하자.”
레리트가 릭셀리언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의자에 앉자마자 마차가 살짝 흔들리며 땅에 내려앉았다.
잠시 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레리트가 그녀를 바라보는 리안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카펠리넌 가문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익숙한 이들도 보였고 익숙지 않은 이들도 보였다. 레리트가 그들을 탐색하고 있는 것처럼 저들 역시 레리트를 탐색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지금 저들은 레리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리트는 지금 은은하게 신력을 뿌려 대고 있었으니까. 카펠리넌 가문의 사람 중 하나가 그런 레리트의 행동을 지적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는데 릭셀리언이 마차에서 내려 레리트의 뒤로 나타났다.
순간 앞으로 나서려던 사람을 포함해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차올랐다.
릭셀리언의 눈을 보는 순간 저들도 모두 느꼈을 것이다. 흐릿하게 변한 색과 함께 초점 없는 눈.
그리고 릭셀리언 쪽으로 향하는 레리트의 신력까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던 사람 중 가문의 가주인 앤더슨 카펠리넌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레리트와 릭셀리언을 향해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레리트가 엷게 웃으며 후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후작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이쪽이…….”
레리트가 운을 떼자 릭셀리언이 레리트의 옆으로 한 걸음 나오며 그를 소개했다.
“릭셀리언 티리엔입니다.”
후작이 웃으며 릭셀리언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리 만나게 되었군. 눈이 그리됐을 줄은 몰랐지만.”
릭셀리언이 아무렇지 않게,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 답했다.
“이 정도면 신살자라는 이름치고는 가벼운 처벌 아니겠습니까.”
눈을 잃었어도 승리자는 릭셀리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말이었다. 그리고 헛손질 없이 한 번에 후작이 내민 손을 잡아 낸 릭셀리언에 후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후작이 단단하게 그의 손을 잡은 릭셀리언의 손을 내려다보다 릭셀리언이 손을 놓자 다시 레리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우선 사용인들이 머물 곳을 안내할걸세.”
“네.”
“여독을 풀고 내일 다시 만나도록 하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후작이 릭셀리언을 힐끗 바라보며 레리트에게 물었다.
“공자는 따로 도움이 필요하나?”
레리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후작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레리트의 신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래, 그대가 알아서 하겠지. 다만 이리 직접 움직일 줄 몰랐는데.”
레리트가 눈을 곱게 접으며 답했다.
“당연히 제가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작이 레리트의 속내를 모두 파헤치겠다는 듯 레리트와 눈을 마주했다.
“그대는 이제 앞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관계를 정리하지 않았나.”
레리트는 후작이 보내는 끈질긴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관계를 정리했어도 가문의 일에는 나서야죠.”
“그런가.”
후작이 엷게 웃음 지으며 사용인들을 불렀다. 후작의 손짓에 사용인들이 레리트의 일행들에게 다가왔다.
“내일 보지.”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 * *
레리트는 저택에 배정된 릭셀리언의 방으로 들어섰다. 딱히 어떤 위험 요소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괜찮은 것 같네. 내 방은 바로 네 옆방이야.”
레리트는 별다른 답이 없는 릭셀리언을 돌아봤다. 사실 아까부터 아무 말이 없기는 했다.
“릭셀리언?”
별생각 없이 릭셀리언을 돌아봤던 레리트는 냉기를 풍기고 있는 릭셀리언의 얼굴에 몸을 흠칫 떨었다.
침대 끝자락에 앉아 있던 릭셀리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 무슨 말이야?”
“뭐, 뭐가?”
“관계를 정리했다는 말.”
레리트가 속으로 후작을 욕했다. 일이 완벽히 해결되지 않아 아직 릭셀리언에게는 이야기해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레리트가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네가 돌아오기 전에 내가 너 대신 일을 처리했다는 건 알고 있지?”
“그런데.”
“황실 쪽과 문제가 생겼어.”
레리트는 항상 뜻 모를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황태자 카신을 떠올렸다.
“제대로 설명해.”
잠시 망설이던 레리트가 결국 상황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가장 자극적인 말을 꺼냈다.
“치정?”
“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