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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헤브니아 왕국에는 소르디드 공주가 살고 있었다.
소르디드 공주는 절세가인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수려한 용모와 고혹한 풍채에 반하지 않는 남자는 없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소르디드 공주의 혼기가 다 찼다.
그에 맞춰 나라에 한바탕 소동이 빚어졌다. 아름다운 소르디드 공주를 두고 젊은 귀족 영식들이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가 소르디드 공주를 원했다.
구혼자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잦은 다툼을 벌였다.
소르디드 공주 때문에 내란이 벌어질 것이 두려워진 국왕은 급기야 이렇게 선포했다.
“내 딸 소르디드와 결혼하고자 하는 이는 누구든지 나를 찾아와라. 내가 직접 사위 될 자를 고르겠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남편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헤브니아 왕국의 국왕을 찾아갔다.
그중 루퍼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국왕 앞에 나타났다.
“국왕 폐하, 부디 소르디드 공주 전하를 제게 주십시오.”
국왕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루퍼스 인페르나.
왕국의 가장 구석진 변방에 위치한 인페르나 남작 가문의 장남.
수도에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 시골 촌뜨기.
올해 18세가 되도록 단 한 번도 사교계에 얼굴을 내비친 적 없이 고립된 반쪽짜리 귀족.
‘제 분수도 모르는 것.’
국왕은 루퍼스라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의 영식들도 번번이 퇴짜 맞았다.
하물며 지방의 이름 없는 남작 나부랭이에게 어찌 귀한 공주를 내어줄 수 있겠는가.
그 건방진 도전이 아니꼬웠다.
당장이라도 감옥에 처넣고 싶었지만, 일단 명색이 귀족이라 마음 내키는 대로 처리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국왕은 잔꾀를 냈다.
“좋다. 그렇다면 너를 마족 토벌군의 소대장으로 임명하겠다. 만일 마왕 아우디서스의 목을 가지고 온다면, 공주를 네 아내로 주겠다.”
마족 토벌군.
헤브니아 왕국의 변방에서는 마족들이 자주 출몰했다. 그들은 수시로 인간 마을에 쳐들어와 약탈과 노략을 일삼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귀족들은 마력을 타고난다는 것이다. 개인별로 능력 차가 있기는 하지만 귀족이라면 누구나 마력을 지녔다.
국왕은 그간 마족들을 물리치기 위해 대규모의 소탕 작전을 펼쳤다.
수많은 병사들이 변방으로 내몰렸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살상자가 부지기수인 난전(難戰)이었다.
투입된 이들 중 살아 돌아오는 이는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중 사지가 멀쩡한 이만 본다면 또 절반이 줄어들었다.
가문의 터전이 변방이기에 그 모든 사실을 빠삭히 알고 있는 루퍼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서 죽으란 소린가.’
루퍼스는 어렵지 않게 자신의 운명을 예상할 수 있었다.
죽거나, 혹은 불구가 되거나.
그럼에도 국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루퍼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국왕과의 짧은 대면을 마친 루퍼스는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앞이 깜깜했다. 막막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공포감에 몸이 떨렸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아직 정식으로 토벌군에 소속되지 않았다. 국왕의 칙서가 곧 내려오겠지만, 그 전까지는 자유의 몸이다.
토벌군에 강제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타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은 국왕의 명령을 어기는 행위이다.
왕명을 거역한 죗값은 그의 가족들이 고스란히 치르게 될 것이다.
루퍼스는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렸다.
부모님은 루퍼스와 그의 동생을 남겨 두고 일찍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작위를 잇기 너무 어린 루퍼스 대신 인페르나 남작이 되어 가문을 살핀 것은 유일한 어른인 할머니셨다.
한데 최근 할머니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다.
게다가 남동생은 아직 어렸다. 루퍼스 없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도망치면, 할머니와 남동생은.
‘도망칠 수 없겠구나.’
씁쓸했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려 해도 절망으로 굳은 입가가 펴지지 않았다.
심란한 마음에 무엇 하나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홀로 생각에 잠겨 거닐던 루퍼스는 문득 유난히 반짝이는 궁전 앞에 멈춰 섰다.
그곳은 국왕의 고명딸인 소르디드 공주가 거하는 궁전이었다.
과연 국왕이 총애하는 공주답게 소르디드의 궁전은 화려했다.
소문대로 궁전의 외벽은 금과 은가루로 도배되어 있었고, 지붕은 온갖 희귀한 보석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왕국의 가장 귀한 것들로 장식된 휘황찬란한 궁전이었다. 그야말로 사치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것은 황금도, 보옥도, 수정도 아니었다.
소르디드 공주.
모든 젊은이들의 마음을 격정으로 난도질한 그녀만큼이나 빛나는 보석은 없었다.
비록 얼굴 한 번 본 적 없으나, 루퍼스는 소르디드 공주에 대한 많은 소문을 들어 왔다.
그에게 소르디드 공주와의 결혼이란 단순히 미녀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
소르디드 공주는 그에게 없는 모든 것을 채워 줄 수 있는 존재였다.
“소르디드 공주님의 궁에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홀린 듯이 공주의 궁 근처를 맴돌고 있는데, 웬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하녀였다.
“아무 일도 아니다.”
퉁명스럽게 대꾸한 루퍼스는 다시 소르디드 공주의 궁전을 자신의 눈에 담았다.
지금쯤 공주는 자신의 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공주님은 지금 궁전에 없어요.”
루퍼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하녀가 곁에서 읊조렸다.
루퍼스는 하녀를 흘겨보았다.
묻지도 않는데 또박또박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조금 거슬렸다.
그러나 공주의 행방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주 전하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
“왕실 정원에서 제국의 황자 전하를 접견하고 계세요.”
“제국의 황자가 왕국에 어쩐 일로.”
“혼담이 들어왔거든요. 국왕 폐하께서는 공주님을 제국의 황자님과 맺어 주시려는 생각이셔요.”
혼담, 혼담이라.
하녀의 답을 들은 루퍼스는 그 짧고도 잔인한 말을 곱씹었다.
그래, 결국 나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구나.
공주의 곁을 지키는 이는 황자였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이름만 귀족인 그가 아니었다.
‘내가 허황된 꿈을 꿨구나.’
자꾸만 입술 사이로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치기 어린 야심을 품고 공주를 넘보았다. 그 결과 이제 마족 토벌군에 강제로 끌려가 죽을 운명이었다.
하녀는 루퍼스를 주시했다.
“마족 토벌에 나가게 되셨군요.”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국왕 폐하를 뵙고 오셨잖아요.”
“그런데?”
“국왕 폐하는 소르디드 공주님에게 청혼한 남자들 중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남자들을 마족 토벌에 보내셨어요.”
나에게만 그 수법을 써먹은 것이 아니었구나.
‘이 못돼 처먹은 국왕 같으니라고.’
루퍼스는 치를 떨며 이를 아드득 갈았다.
차라리 무안을 주고 내쳐 버릴 것이지, 마족 토벌에 보내다니. 정말로 죽으라는 것인가.
“그래도 다행이네요.”
“무엇이 말이냐?”
하녀의 발언에 루퍼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열린 입이라고 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곧 죽게 될 사람에게 다행이라고 지껄이다니.
“당신은 토벌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을 거예요.”
루퍼스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음, 전 그냥 알 수 있어요.”
하녀는 배시시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루퍼스는 하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위로해 주려는 것인가.
하지만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도리어 불쾌했다.
명색이 귀족임에도 일면식도 없는 이 하녀에게 빈말보다 못한 위로를 들어야 할 처지라니, 스스로가 너무나도 비참해졌다.
“우습지도 않는군. 나를 놀리는 것이냐?”
가시 돋친 어투로 내뱉은 루퍼스는 하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하녀는 무안함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노, 놀리는 거 아니에요. 전 사실…….”
말꼬리가 점점 흐려졌다.
하녀는 급히 주변을 살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이 두려운 듯이.
이 근방에 자신과 루퍼스밖에 없는 것을 확인한 하녀는 루퍼스에게 살짝 손짓했다.
“죄송하지만, 당신 귀 좀 빌려주세요.”
“하.”
루퍼스는 얼이 빠진 탄식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정식 시녀도 아닌, 일개 하녀 주제에 지금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인가.
하도 황당하여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도 치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요! 진짜 중요한 이야기예요!”
빗자루를 붙든 하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 얼마나 대단한 말을 지껄이는지, 어디 들어 보기나 하자.
자포자기 상태의 루퍼스는 하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요……”
까치발을 들어 올린 하녀는 루퍼스의 귓가에 입술을 맞댔다.
“……전 사실 성녀예요.”
성녀?
그 한마디에 루퍼스는 얼어붙었다.
성녀, 혹은 기적을 일으키는 성스러운 여인.
성녀는 고귀한 존재였다.
대다수의 성녀들은 어릴 적부터 능력이 나타난다. 그 뒤 성녀들은 일찌감치 명문가에 입적되거나 성전에서 추앙받게 된다. 더러는 왕실 가문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루퍼스가 아는 선에서 성녀들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일개 하녀가 성녀라니?
“나를 농락하는 건가?”
“네? 아닌데요.”
“넌 하녀이지 않느냐? 네가 진짜 성녀라면 이런 허드렛일을 하고 있지 않겠지. 그런데 어떻게 네가 성녀라고 주장하는 것이냐?”
“그건 말해 줄 수 없어요.”
하녀는 고개를 획 돌렸다.
“그렇다면 나도 네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루퍼스는 코웃음을 쳤다.
하녀는 좀처럼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루퍼스 때문에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정말이지 의심이 많은 분이시네요. 좋아요, 제가 성녀라는 증거를 보여 드리겠어요.”
하녀는 급기야 들고 있던 빗자루를 버려두고 루퍼스의 소매를 잡아 이끌었다.
소르디드 공주의 궁전에서 조금 멀어진 곳에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작은 창고가 있었다.
마침 소르디드 공주가 궁을 비운 탓에 창고를 사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잘 보세요.”
루퍼스를 창고 뒤편으로 이끈 하녀는 입고 있던 앞치마를 끌어 내렸다. 그것도 모자라 뒤이어 겉옷의 단추를 풀어 헤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뭐, 뭐 하는 게냐.”
갑자기 옷을 벗는 하녀의 행동에 당황한 루퍼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하녀는 뺨 하나 붉히지 않았다.
“제가 성녀라는 걸 못 믿겠다면서요? 자, 보세요.”
윗옷을 살짝 끌어 내린 하녀는 루퍼스에게 자신의 어깨를 슬쩍 내보였다.
하녀의 어깨에는 특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성녀를 만나 본 적 없는 루퍼스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도서를 통해 수백 번이나 지긋지긋하게 본 문양이었다.
성녀의 표식.
그것은 성녀에게 나타나는 고유의 징표였다.
“넌…… 정말 성녀구나.”
루퍼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하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성녀가, 왕국에서 가장 성스럽고 고귀하다 일컬어지는 존재가, 겨우 왕궁에서 빗자루로 먼지나 쓸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하녀는 그 질문에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성녀라고 말했잖아요. 애초에 제 말을 믿었으면 얼마나 좋아요. 제가 굳이 옷을 벗을 필요가 없었잖아요.”
하녀는 툴툴거리며 다시 옷차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퍼스는 그녀의 투정을 제대로 귀담아들을 수 없었다.
“네 고유 마법은?”
“네?”
“네가 사용하는 고유 마법은 뭐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너는 무슨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가?”
루퍼스가 급히 하녀를 취조했다.
각 성녀들은 각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가졌다.
예를 들어,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라든가.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능력이라든가.
혹은 거짓말을 절대적으로 간파하는 능력이라든가.
이러한 특별한 능력을 성녀가 가진 ‘고유 마법’이라 지칭했다.
그렇다면 이 하녀가 가진 고유 마법은 무엇인가?
하녀가 가진 고유 마법이 행여나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루퍼스는 그녀에게 매달렸다.
하녀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말했잖아요. 당신은 토벌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을 거라고.”
아.
하녀의 말에 루퍼스는 우뚝 멈춰 섰다.
설마.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어머, 모든 미래를 알 수 있으면 정말 좋겠네요. 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하녀는 경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사람의 죽음을 예언할 수 있어요.”
헤브니아 왕국에는 소르디드 공주가 살고 있었다.
소르디드 공주는 절세가인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수려한 용모와 고혹한 풍채에 반하지 않는 남자는 없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소르디드 공주의 혼기가 다 찼다.
그에 맞춰 나라에 한바탕 소동이 빚어졌다. 아름다운 소르디드 공주를 두고 젊은 귀족 영식들이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가 소르디드 공주를 원했다.
구혼자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잦은 다툼을 벌였다.
소르디드 공주 때문에 내란이 벌어질 것이 두려워진 국왕은 급기야 이렇게 선포했다.
“내 딸 소르디드와 결혼하고자 하는 이는 누구든지 나를 찾아와라. 내가 직접 사위 될 자를 고르겠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남편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헤브니아 왕국의 국왕을 찾아갔다.
그중 루퍼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국왕 앞에 나타났다.
“국왕 폐하, 부디 소르디드 공주 전하를 제게 주십시오.”
국왕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루퍼스 인페르나.
왕국의 가장 구석진 변방에 위치한 인페르나 남작 가문의 장남.
수도에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 시골 촌뜨기.
올해 18세가 되도록 단 한 번도 사교계에 얼굴을 내비친 적 없이 고립된 반쪽짜리 귀족.
‘제 분수도 모르는 것.’
국왕은 루퍼스라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의 영식들도 번번이 퇴짜 맞았다.
하물며 지방의 이름 없는 남작 나부랭이에게 어찌 귀한 공주를 내어줄 수 있겠는가.
그 건방진 도전이 아니꼬웠다.
당장이라도 감옥에 처넣고 싶었지만, 일단 명색이 귀족이라 마음 내키는 대로 처리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국왕은 잔꾀를 냈다.
“좋다. 그렇다면 너를 마족 토벌군의 소대장으로 임명하겠다. 만일 마왕 아우디서스의 목을 가지고 온다면, 공주를 네 아내로 주겠다.”
마족 토벌군.
헤브니아 왕국의 변방에서는 마족들이 자주 출몰했다. 그들은 수시로 인간 마을에 쳐들어와 약탈과 노략을 일삼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귀족들은 마력을 타고난다는 것이다. 개인별로 능력 차가 있기는 하지만 귀족이라면 누구나 마력을 지녔다.
국왕은 그간 마족들을 물리치기 위해 대규모의 소탕 작전을 펼쳤다.
수많은 병사들이 변방으로 내몰렸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살상자가 부지기수인 난전(難戰)이었다.
투입된 이들 중 살아 돌아오는 이는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중 사지가 멀쩡한 이만 본다면 또 절반이 줄어들었다.
가문의 터전이 변방이기에 그 모든 사실을 빠삭히 알고 있는 루퍼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서 죽으란 소린가.’
루퍼스는 어렵지 않게 자신의 운명을 예상할 수 있었다.
죽거나, 혹은 불구가 되거나.
그럼에도 국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루퍼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국왕과의 짧은 대면을 마친 루퍼스는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앞이 깜깜했다. 막막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공포감에 몸이 떨렸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아직 정식으로 토벌군에 소속되지 않았다. 국왕의 칙서가 곧 내려오겠지만, 그 전까지는 자유의 몸이다.
토벌군에 강제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타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은 국왕의 명령을 어기는 행위이다.
왕명을 거역한 죗값은 그의 가족들이 고스란히 치르게 될 것이다.
루퍼스는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렸다.
부모님은 루퍼스와 그의 동생을 남겨 두고 일찍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작위를 잇기 너무 어린 루퍼스 대신 인페르나 남작이 되어 가문을 살핀 것은 유일한 어른인 할머니셨다.
한데 최근 할머니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다.
게다가 남동생은 아직 어렸다. 루퍼스 없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도망치면, 할머니와 남동생은.
‘도망칠 수 없겠구나.’
씁쓸했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려 해도 절망으로 굳은 입가가 펴지지 않았다.
심란한 마음에 무엇 하나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홀로 생각에 잠겨 거닐던 루퍼스는 문득 유난히 반짝이는 궁전 앞에 멈춰 섰다.
그곳은 국왕의 고명딸인 소르디드 공주가 거하는 궁전이었다.
과연 국왕이 총애하는 공주답게 소르디드의 궁전은 화려했다.
소문대로 궁전의 외벽은 금과 은가루로 도배되어 있었고, 지붕은 온갖 희귀한 보석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왕국의 가장 귀한 것들로 장식된 휘황찬란한 궁전이었다. 그야말로 사치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것은 황금도, 보옥도, 수정도 아니었다.
소르디드 공주.
모든 젊은이들의 마음을 격정으로 난도질한 그녀만큼이나 빛나는 보석은 없었다.
비록 얼굴 한 번 본 적 없으나, 루퍼스는 소르디드 공주에 대한 많은 소문을 들어 왔다.
그에게 소르디드 공주와의 결혼이란 단순히 미녀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
소르디드 공주는 그에게 없는 모든 것을 채워 줄 수 있는 존재였다.
“소르디드 공주님의 궁에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홀린 듯이 공주의 궁 근처를 맴돌고 있는데, 웬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하녀였다.
“아무 일도 아니다.”
퉁명스럽게 대꾸한 루퍼스는 다시 소르디드 공주의 궁전을 자신의 눈에 담았다.
지금쯤 공주는 자신의 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공주님은 지금 궁전에 없어요.”
루퍼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하녀가 곁에서 읊조렸다.
루퍼스는 하녀를 흘겨보았다.
묻지도 않는데 또박또박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조금 거슬렸다.
그러나 공주의 행방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주 전하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
“왕실 정원에서 제국의 황자 전하를 접견하고 계세요.”
“제국의 황자가 왕국에 어쩐 일로.”
“혼담이 들어왔거든요. 국왕 폐하께서는 공주님을 제국의 황자님과 맺어 주시려는 생각이셔요.”
혼담, 혼담이라.
하녀의 답을 들은 루퍼스는 그 짧고도 잔인한 말을 곱씹었다.
그래, 결국 나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구나.
공주의 곁을 지키는 이는 황자였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이름만 귀족인 그가 아니었다.
‘내가 허황된 꿈을 꿨구나.’
자꾸만 입술 사이로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치기 어린 야심을 품고 공주를 넘보았다. 그 결과 이제 마족 토벌군에 강제로 끌려가 죽을 운명이었다.
하녀는 루퍼스를 주시했다.
“마족 토벌에 나가게 되셨군요.”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국왕 폐하를 뵙고 오셨잖아요.”
“그런데?”
“국왕 폐하는 소르디드 공주님에게 청혼한 남자들 중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남자들을 마족 토벌에 보내셨어요.”
나에게만 그 수법을 써먹은 것이 아니었구나.
‘이 못돼 처먹은 국왕 같으니라고.’
루퍼스는 치를 떨며 이를 아드득 갈았다.
차라리 무안을 주고 내쳐 버릴 것이지, 마족 토벌에 보내다니. 정말로 죽으라는 것인가.
“그래도 다행이네요.”
“무엇이 말이냐?”
하녀의 발언에 루퍼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열린 입이라고 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곧 죽게 될 사람에게 다행이라고 지껄이다니.
“당신은 토벌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을 거예요.”
루퍼스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음, 전 그냥 알 수 있어요.”
하녀는 배시시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루퍼스는 하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위로해 주려는 것인가.
하지만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도리어 불쾌했다.
명색이 귀족임에도 일면식도 없는 이 하녀에게 빈말보다 못한 위로를 들어야 할 처지라니, 스스로가 너무나도 비참해졌다.
“우습지도 않는군. 나를 놀리는 것이냐?”
가시 돋친 어투로 내뱉은 루퍼스는 하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하녀는 무안함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노, 놀리는 거 아니에요. 전 사실…….”
말꼬리가 점점 흐려졌다.
하녀는 급히 주변을 살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이 두려운 듯이.
이 근방에 자신과 루퍼스밖에 없는 것을 확인한 하녀는 루퍼스에게 살짝 손짓했다.
“죄송하지만, 당신 귀 좀 빌려주세요.”
“하.”
루퍼스는 얼이 빠진 탄식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정식 시녀도 아닌, 일개 하녀 주제에 지금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인가.
하도 황당하여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도 치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요! 진짜 중요한 이야기예요!”
빗자루를 붙든 하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 얼마나 대단한 말을 지껄이는지, 어디 들어 보기나 하자.
자포자기 상태의 루퍼스는 하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요……”
까치발을 들어 올린 하녀는 루퍼스의 귓가에 입술을 맞댔다.
“……전 사실 성녀예요.”
성녀?
그 한마디에 루퍼스는 얼어붙었다.
성녀, 혹은 기적을 일으키는 성스러운 여인.
성녀는 고귀한 존재였다.
대다수의 성녀들은 어릴 적부터 능력이 나타난다. 그 뒤 성녀들은 일찌감치 명문가에 입적되거나 성전에서 추앙받게 된다. 더러는 왕실 가문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루퍼스가 아는 선에서 성녀들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일개 하녀가 성녀라니?
“나를 농락하는 건가?”
“네? 아닌데요.”
“넌 하녀이지 않느냐? 네가 진짜 성녀라면 이런 허드렛일을 하고 있지 않겠지. 그런데 어떻게 네가 성녀라고 주장하는 것이냐?”
“그건 말해 줄 수 없어요.”
하녀는 고개를 획 돌렸다.
“그렇다면 나도 네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루퍼스는 코웃음을 쳤다.
하녀는 좀처럼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루퍼스 때문에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정말이지 의심이 많은 분이시네요. 좋아요, 제가 성녀라는 증거를 보여 드리겠어요.”
하녀는 급기야 들고 있던 빗자루를 버려두고 루퍼스의 소매를 잡아 이끌었다.
소르디드 공주의 궁전에서 조금 멀어진 곳에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작은 창고가 있었다.
마침 소르디드 공주가 궁을 비운 탓에 창고를 사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잘 보세요.”
루퍼스를 창고 뒤편으로 이끈 하녀는 입고 있던 앞치마를 끌어 내렸다. 그것도 모자라 뒤이어 겉옷의 단추를 풀어 헤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뭐, 뭐 하는 게냐.”
갑자기 옷을 벗는 하녀의 행동에 당황한 루퍼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하녀는 뺨 하나 붉히지 않았다.
“제가 성녀라는 걸 못 믿겠다면서요? 자, 보세요.”
윗옷을 살짝 끌어 내린 하녀는 루퍼스에게 자신의 어깨를 슬쩍 내보였다.
하녀의 어깨에는 특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성녀를 만나 본 적 없는 루퍼스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도서를 통해 수백 번이나 지긋지긋하게 본 문양이었다.
성녀의 표식.
그것은 성녀에게 나타나는 고유의 징표였다.
“넌…… 정말 성녀구나.”
루퍼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하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성녀가, 왕국에서 가장 성스럽고 고귀하다 일컬어지는 존재가, 겨우 왕궁에서 빗자루로 먼지나 쓸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하녀는 그 질문에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성녀라고 말했잖아요. 애초에 제 말을 믿었으면 얼마나 좋아요. 제가 굳이 옷을 벗을 필요가 없었잖아요.”
하녀는 툴툴거리며 다시 옷차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퍼스는 그녀의 투정을 제대로 귀담아들을 수 없었다.
“네 고유 마법은?”
“네?”
“네가 사용하는 고유 마법은 뭐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너는 무슨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가?”
루퍼스가 급히 하녀를 취조했다.
각 성녀들은 각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가졌다.
예를 들어,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라든가.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능력이라든가.
혹은 거짓말을 절대적으로 간파하는 능력이라든가.
이러한 특별한 능력을 성녀가 가진 ‘고유 마법’이라 지칭했다.
그렇다면 이 하녀가 가진 고유 마법은 무엇인가?
하녀가 가진 고유 마법이 행여나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루퍼스는 그녀에게 매달렸다.
하녀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말했잖아요. 당신은 토벌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을 거라고.”
아.
하녀의 말에 루퍼스는 우뚝 멈춰 섰다.
설마.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어머, 모든 미래를 알 수 있으면 정말 좋겠네요. 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하녀는 경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사람의 죽음을 예언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