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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사람의 죽음을 예언한다……?”
“알아요, 엄청 께름칙하죠? 그런데 제 고유 마법은 정말 그거예요. 사람의 죽음을 엿보는 것.”
햇볕 아래 바싹 마른 걸레처럼 빳빳이 굳어 가는 루퍼스의 얼굴을 살피며, 하녀는 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당신을 위해 예언해 드릴게요. 당신은 전쟁터에서 죽지 않아요.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정말로…… 죽지 않는 것이냐?”
루퍼스가 말을 더듬거렸다.
한 줄기의 빛이 보이는 듯했다.
토벌군에 들어간 뒤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성녀는 전혀 상반되는 미래를 예견해 주었다.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쩌면…….
꿀꺽.
루퍼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네, 그러니까 힘내세요. 유서 쓰실 필요도 없고요.”
하녀는 장난스럽게 고했다.
루퍼스는 그런 하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자기보다도 어려 보이는 하녀였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몸집도 조그마한 것이 마치 인형처럼 보였다.
막 겨울을 이겨 낸 잔디와 같이 옅은 상아색을 띤 머리카락은 바람에 따라 한 올 한 올 형형히 빛나고 있었고, 배시시 웃는 입가를 따라 새겨진 미소는 봄보다 더 따스했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가 뭐지?”
루퍼스는 자신의 앞에 선 하녀를 똑바로 직시했다.
오늘 처음 만난 소녀다.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런데도 하녀는 스스럼없이 자신이 성녀라는 사실을 밝혔다.
성녀는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헤브니아 왕국에서 성녀로 태어난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수많은 귀족 가문들과 신전들, 그리고 왕실까지도 성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안달이었다.
그러나 이 하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성녀로 태어났음에도 이렇게 낮고 낮은 위치에서 하녀로 살아가고 있었다.
무슨 연유라도 있는 것일까.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지금까지 자신이 성녀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다니.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루퍼스가 국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녀의 정체를 찔러줄 수도 있다. 혹은 그녀를 납치해 어느 귀족에게 팔아넘길 수도 있는 법이다.
멍청한 건가, 아니면 맹랑한 건가?
“이유? 그야 당연히 당신 때문이에요.”
하녀는 루퍼스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나 때문이라고?”
“네.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소중한 사람?
루퍼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은 모르시겠죠? 하지만 당신은 저와 운명을 함께할 사람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요? 그럼 굳이 이해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당신은 내게 돌아올 거예요.”
하녀는 장난스럽게 빙긋 웃었다.
“그리고 다른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당신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요.”
“죽을 것 같은 표정이라니.”
“말 그대로예요. 당신, 실제로 죽을 것도 아니면서 마치 당장 죽을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잖아요.”
그렇게 보였던 건가.
치부를 들킨 것 같아 속마음이 달아오른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말해 준 거예요.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는 게 당연하잖아요?”
하녀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미소를 피워 냈다.
“…….”
루퍼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솟아났다.
머릿속에 할머니와 남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도감과 희망, 그리고 새로운 꿈.
만일 마족 토벌전에서 죽지 않는다면.
만일 사지가 멀쩡한 채로 귀환할 수 있다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럼 앞으로 힘내세요.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귀족이니까 마력도 강하실 것 아니에요?”
그 말을 마친 하녀는 다시 자신이 빗자루를 버려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잠깐.”
루퍼스는 급히 그녀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네 이름이 뭐지?”
“이름이요?”
루퍼스의 질문에 하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루비아예요.”
그녀는 이내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사루비아.”
“네, 사루비아라고 해요.”
그 자리에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선 하녀는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이름이죠? 사루비아는 분명히 붉은 꽃인데. 제 머리카락은 상아색이잖아요.”
“이상하지 않다. 꼭 기억하마.”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소르디드 공주님 궁전에서 일하는 하녀라고 기억하시면 돼요.”
“아니, 기필코 네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토벌전이 끝난 뒤 반드시 네게 은혜를 갚겠다.”
루퍼스가 굳건히 고집했다.
집요히 따라붙는 루퍼스의 말에 사루비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꼭 해 주시겠다면 막지는 않을게요. 대신에 지금 해 주실 수 있어요?”
“지금?”
“네, 원하는 게 있어요.”
이번에는 루퍼스가 난색을 표했다.
지금의 루퍼스는 빈털터리였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난뱅이에, 앞으로 물려받게 될 볼품없는 남작 작위를 빼면 남는 것 하나 없는 싸구려 귀족.
그런 그가 이 하녀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없다.
가진 것이 없다. 그러니 나누어 줄 것도 없다.
하녀가 무엇을 요구하든 최대한 공손히 사과할 준비를 하던 찰나였다.
“키스해 주세요.”
“뭐?”
“은혜를 갚는다고 하셨죠? 저는 당신과 키스하고 싶어요.”
하녀가 장난스럽게 고했다.
“…….”
루퍼스는 눈을 치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국의 수도에 집을 사 달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키스라니, 이건 도대체.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겠나.”
“이유? 당신이 잘생겼으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 그런 이유라니요. 미남과 키스하는 특권이 얼마나 소중한데요.”
하녀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서, 은혜 갚으실 거예요 말 거예요?”
하녀가 장난스럽게 루퍼스를 재촉했다.
“이런 식의 부탁을 해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루퍼스가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저도예요. 방금 생각해 낸 거예요. 당신의 잘생긴 얼굴에 감사하세요.”
하녀는 방실방실 웃으며 루퍼스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어깨 위로 두 팔을 감았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루퍼스의 가슴팍에 부드러운 온기가 닿았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두 입술이 포개지며 숨결이 휘말리는 감각이 너무나 생경했다.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하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루퍼스는 혼란에 잠겼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채 감지 못한 눈동자에 두 눈을 감은 소녀의 얼굴이 와 박혔다.
그때 어떤 충동이 일었다.
그것은, 매우 사소하고도 치졸한 충동이었다.
어차피 전쟁터로 내몰리는 운명,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서 뜯겨져 나가 전장의 개로 구르게 될 처지.
루퍼스는 오늘부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마지막으로 조금 욕심을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 여자에게 매달려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생각 자체가 상대방에게 굉장한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루퍼스는 그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자신을 끌어안는 작은 몸이 지나치게 따스했기 때문이다.
그래.
이건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루퍼스는 하녀를 다짜고짜 끌어안았다. 그러곤 엇갈린 입맞춤을 쏟아부었다.
갑작스러운 루퍼스의 행동에 하녀는 당황한 듯이 잠시 굳어 있었지만, 이내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그에게 기대섰다.
그녀의 입술이 좀처럼 맞닿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서툴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싫었다.
이 하녀의 따스함을 이용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막무가내로 파고드는 뜨거운 숨결, 예의 없이 치열을 훑는 감각, 그리고 어설프게 애달픈 손짓.
이 모든 것을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받아 주었다.
루퍼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정말 못 하시네요.”
막 숨을 돌리고 있는데, 하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루퍼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놀리지 마라.”
“더 노력하셔야겠어요. 미래의 부인님이 실망하실 수 있잖아요.”
“…….”
루퍼스는 아무런 말 없이 하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다시 차분해지자 양심의 가책과 함께 책임감이 느껴졌다.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이 하녀를 이곳에 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일렁거렸다.
“혹시 입술 박치기 한 번 했다고 저와 결혼해야 하나 고민 중이신 건 아니죠?”
바보같이 서 있는 루퍼스를 향해 하녀가 정곡을 찔렀다.
“아, 아니다.”
뜨끔 찔린 루퍼스가 혀를 내둘렀지만, 하녀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네요. 순진하기까지 하시고. 몇 살이세요?”
“올해 열여덟이다.”
“흐음, 저보다 오빠네요.”
“그러는 너는?”
“저요? 글쎄요. 당신 눈에는 몇 살처럼 보이나요?”
“열다섯.”
루퍼스는 처음 가늠했던 그녀의 나이를 그대로 내뱉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요. 그럼 전 열다섯인 거예요.”
“그런 게 어디 있나.”
“제 마음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열다섯 맞아요.”
그렇게 고한 하녀는 느긋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만일 내가 죽으면
한 방울의 비가 될게요
당신의 눈물을 씻어 줄게요
음색과 가락은 청량하면서도 낭창했다. 그러나 가사가 너무나도 울적했다.
“무슨 노래인가.”
그녀의 노래를 잠자코 듣고 있던 루퍼스가 물었다.
“자장가예요.”
“이게?”
내가 죽으면, 이라니.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신의 아이에게 이런 노래를 들려줄까.
루퍼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하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전 이제 다시 일하러 갈게요. 만나서 즐거웠어요.”
노래를 마친 하녀는 루퍼스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끝까지 살아남으시길.”
하녀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루퍼스는 그녀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전장으로 내쫓기게 된 가난뱅이 귀족과, 공주의 궁전에서 일하는 평민 출신의 하녀.
두 사람의 관계를 이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었다.
홀로 남겨진 루퍼스는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공간을 주시했다.
—사루비아.
입 안에 그 이름을 한참 동안이나 머금었다.
이상하다.
이상한 여자다.
이상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이상하고도, 이상하고, 또 이상한 여자.
‘……그러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왜 그녀는 루퍼스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일까.
조금 서운하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 한구석이 톡톡 찔려 왔다.
쓸어 내지 못한 감정은 그곳에 뿌리를 박았다.
“사람의 죽음을 예언한다……?”
“알아요, 엄청 께름칙하죠? 그런데 제 고유 마법은 정말 그거예요. 사람의 죽음을 엿보는 것.”
햇볕 아래 바싹 마른 걸레처럼 빳빳이 굳어 가는 루퍼스의 얼굴을 살피며, 하녀는 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당신을 위해 예언해 드릴게요. 당신은 전쟁터에서 죽지 않아요.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정말로…… 죽지 않는 것이냐?”
루퍼스가 말을 더듬거렸다.
한 줄기의 빛이 보이는 듯했다.
토벌군에 들어간 뒤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성녀는 전혀 상반되는 미래를 예견해 주었다.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쩌면…….
꿀꺽.
루퍼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네, 그러니까 힘내세요. 유서 쓰실 필요도 없고요.”
하녀는 장난스럽게 고했다.
루퍼스는 그런 하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자기보다도 어려 보이는 하녀였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몸집도 조그마한 것이 마치 인형처럼 보였다.
막 겨울을 이겨 낸 잔디와 같이 옅은 상아색을 띤 머리카락은 바람에 따라 한 올 한 올 형형히 빛나고 있었고, 배시시 웃는 입가를 따라 새겨진 미소는 봄보다 더 따스했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가 뭐지?”
루퍼스는 자신의 앞에 선 하녀를 똑바로 직시했다.
오늘 처음 만난 소녀다.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런데도 하녀는 스스럼없이 자신이 성녀라는 사실을 밝혔다.
성녀는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헤브니아 왕국에서 성녀로 태어난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수많은 귀족 가문들과 신전들, 그리고 왕실까지도 성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안달이었다.
그러나 이 하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성녀로 태어났음에도 이렇게 낮고 낮은 위치에서 하녀로 살아가고 있었다.
무슨 연유라도 있는 것일까.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지금까지 자신이 성녀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다니.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루퍼스가 국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녀의 정체를 찔러줄 수도 있다. 혹은 그녀를 납치해 어느 귀족에게 팔아넘길 수도 있는 법이다.
멍청한 건가, 아니면 맹랑한 건가?
“이유? 그야 당연히 당신 때문이에요.”
하녀는 루퍼스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나 때문이라고?”
“네.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소중한 사람?
루퍼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은 모르시겠죠? 하지만 당신은 저와 운명을 함께할 사람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요? 그럼 굳이 이해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당신은 내게 돌아올 거예요.”
하녀는 장난스럽게 빙긋 웃었다.
“그리고 다른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당신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요.”
“죽을 것 같은 표정이라니.”
“말 그대로예요. 당신, 실제로 죽을 것도 아니면서 마치 당장 죽을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잖아요.”
그렇게 보였던 건가.
치부를 들킨 것 같아 속마음이 달아오른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말해 준 거예요.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는 게 당연하잖아요?”
하녀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미소를 피워 냈다.
“…….”
루퍼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솟아났다.
머릿속에 할머니와 남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도감과 희망, 그리고 새로운 꿈.
만일 마족 토벌전에서 죽지 않는다면.
만일 사지가 멀쩡한 채로 귀환할 수 있다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럼 앞으로 힘내세요.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귀족이니까 마력도 강하실 것 아니에요?”
그 말을 마친 하녀는 다시 자신이 빗자루를 버려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잠깐.”
루퍼스는 급히 그녀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네 이름이 뭐지?”
“이름이요?”
루퍼스의 질문에 하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루비아예요.”
그녀는 이내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사루비아.”
“네, 사루비아라고 해요.”
그 자리에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선 하녀는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이름이죠? 사루비아는 분명히 붉은 꽃인데. 제 머리카락은 상아색이잖아요.”
“이상하지 않다. 꼭 기억하마.”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소르디드 공주님 궁전에서 일하는 하녀라고 기억하시면 돼요.”
“아니, 기필코 네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토벌전이 끝난 뒤 반드시 네게 은혜를 갚겠다.”
루퍼스가 굳건히 고집했다.
집요히 따라붙는 루퍼스의 말에 사루비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꼭 해 주시겠다면 막지는 않을게요. 대신에 지금 해 주실 수 있어요?”
“지금?”
“네, 원하는 게 있어요.”
이번에는 루퍼스가 난색을 표했다.
지금의 루퍼스는 빈털터리였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난뱅이에, 앞으로 물려받게 될 볼품없는 남작 작위를 빼면 남는 것 하나 없는 싸구려 귀족.
그런 그가 이 하녀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없다.
가진 것이 없다. 그러니 나누어 줄 것도 없다.
하녀가 무엇을 요구하든 최대한 공손히 사과할 준비를 하던 찰나였다.
“키스해 주세요.”
“뭐?”
“은혜를 갚는다고 하셨죠? 저는 당신과 키스하고 싶어요.”
하녀가 장난스럽게 고했다.
“…….”
루퍼스는 눈을 치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국의 수도에 집을 사 달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키스라니, 이건 도대체.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겠나.”
“이유? 당신이 잘생겼으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 그런 이유라니요. 미남과 키스하는 특권이 얼마나 소중한데요.”
하녀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서, 은혜 갚으실 거예요 말 거예요?”
하녀가 장난스럽게 루퍼스를 재촉했다.
“이런 식의 부탁을 해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루퍼스가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저도예요. 방금 생각해 낸 거예요. 당신의 잘생긴 얼굴에 감사하세요.”
하녀는 방실방실 웃으며 루퍼스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어깨 위로 두 팔을 감았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루퍼스의 가슴팍에 부드러운 온기가 닿았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두 입술이 포개지며 숨결이 휘말리는 감각이 너무나 생경했다.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하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루퍼스는 혼란에 잠겼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채 감지 못한 눈동자에 두 눈을 감은 소녀의 얼굴이 와 박혔다.
그때 어떤 충동이 일었다.
그것은, 매우 사소하고도 치졸한 충동이었다.
어차피 전쟁터로 내몰리는 운명,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서 뜯겨져 나가 전장의 개로 구르게 될 처지.
루퍼스는 오늘부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마지막으로 조금 욕심을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 여자에게 매달려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생각 자체가 상대방에게 굉장한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루퍼스는 그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자신을 끌어안는 작은 몸이 지나치게 따스했기 때문이다.
그래.
이건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루퍼스는 하녀를 다짜고짜 끌어안았다. 그러곤 엇갈린 입맞춤을 쏟아부었다.
갑작스러운 루퍼스의 행동에 하녀는 당황한 듯이 잠시 굳어 있었지만, 이내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그에게 기대섰다.
그녀의 입술이 좀처럼 맞닿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서툴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싫었다.
이 하녀의 따스함을 이용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막무가내로 파고드는 뜨거운 숨결, 예의 없이 치열을 훑는 감각, 그리고 어설프게 애달픈 손짓.
이 모든 것을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받아 주었다.
루퍼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정말 못 하시네요.”
막 숨을 돌리고 있는데, 하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루퍼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놀리지 마라.”
“더 노력하셔야겠어요. 미래의 부인님이 실망하실 수 있잖아요.”
“…….”
루퍼스는 아무런 말 없이 하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다시 차분해지자 양심의 가책과 함께 책임감이 느껴졌다.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이 하녀를 이곳에 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일렁거렸다.
“혹시 입술 박치기 한 번 했다고 저와 결혼해야 하나 고민 중이신 건 아니죠?”
바보같이 서 있는 루퍼스를 향해 하녀가 정곡을 찔렀다.
“아, 아니다.”
뜨끔 찔린 루퍼스가 혀를 내둘렀지만, 하녀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네요. 순진하기까지 하시고. 몇 살이세요?”
“올해 열여덟이다.”
“흐음, 저보다 오빠네요.”
“그러는 너는?”
“저요? 글쎄요. 당신 눈에는 몇 살처럼 보이나요?”
“열다섯.”
루퍼스는 처음 가늠했던 그녀의 나이를 그대로 내뱉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요. 그럼 전 열다섯인 거예요.”
“그런 게 어디 있나.”
“제 마음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열다섯 맞아요.”
그렇게 고한 하녀는 느긋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만일 내가 죽으면
한 방울의 비가 될게요
당신의 눈물을 씻어 줄게요
음색과 가락은 청량하면서도 낭창했다. 그러나 가사가 너무나도 울적했다.
“무슨 노래인가.”
그녀의 노래를 잠자코 듣고 있던 루퍼스가 물었다.
“자장가예요.”
“이게?”
내가 죽으면, 이라니.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신의 아이에게 이런 노래를 들려줄까.
루퍼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하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전 이제 다시 일하러 갈게요. 만나서 즐거웠어요.”
노래를 마친 하녀는 루퍼스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끝까지 살아남으시길.”
하녀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루퍼스는 그녀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전장으로 내쫓기게 된 가난뱅이 귀족과, 공주의 궁전에서 일하는 평민 출신의 하녀.
두 사람의 관계를 이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었다.
홀로 남겨진 루퍼스는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공간을 주시했다.
—사루비아.
입 안에 그 이름을 한참 동안이나 머금었다.
이상하다.
이상한 여자다.
이상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이상하고도, 이상하고, 또 이상한 여자.
‘……그러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왜 그녀는 루퍼스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일까.
조금 서운하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 한구석이 톡톡 찔려 왔다.
쓸어 내지 못한 감정은 그곳에 뿌리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