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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루퍼스는 왕명에 따라 토벌군에 합류했다.
루퍼스는 평생 기초적인 검술 대련 이외에 검을 잡아 본 적이 없는 시골 청년이었다. 게다가 타고난 마력도 귀족치고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는 마왕은커녕 마족을 대항할 힘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죽기 위해 나선 전장이었다.
실제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마족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뜯겨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퍼스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사루비아라는 하녀가 자신에게 들려준 말을 믿었다.
‘당신은 토벌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러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을 수 없다.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
살기 위해 못할 짓이 없었다.
남의 식량을 빼앗아 먹었다.
동료의 튼튼한 갑옷을 자신의 것으로 몰래 바꿔치기했다.
죽은 전우의 시신 아래 숨어 마족의 수색을 가까스로 피한 적도 있었다.
혹자는 그런 루퍼스를 두고 귀족의 긍지를 버린 이라고 욕했다.
루퍼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울만 좋은 남작 작위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죽지 않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오로지 그 생각만이 루퍼스의 머리를 장악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투박한 솜씨로 검을 쥐던 루퍼스의 손에 굳은살이 생겨났다.
마력 제어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던 애송이는 더 이상 없었다.
이제는 흉측한 이빨을 들이대며 포효하는 마족들을 보아도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피 한 방울에 벌벌 떨던 그의 몸은 어느새 혈향(血香)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루퍼스에게 남은 것은 원초적인 생존 본능뿐이었다.
마족 토벌군의 소대장으로 임명된 루퍼스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마족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는 더 이상 귀청을 따갑게 하지 않았다. 그들의 발톱에 할퀴어져도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휘두르고, 찌르고, 베고,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루퍼스는 마왕 아우디서스를 대면했다.
마왕 아우디서스는 건장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인간의 꼴을 하고 있었지만, 루퍼스는 속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이나 추격해 온 놈이다. 어찌 속아 넘어갈 수 있을까.
“인간이여,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루퍼스에게 자신의 변신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마왕 아우디서스가 급히 입을 열었다.
이제 마왕의 곁에 남은 마족들은 하나도 없었다. 지난 3년간 모조리 인간들에게 몰살당했다.
한때 인간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마왕 아우디서스.
그는 이제 한낱 인간 앞에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부귀영화이냐? 짐의 마왕성에 있는 보물들을 모두 주마. 그러니 부디 짐을 살려 다오.”
“필요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명성인가? 짐의 부하인 마녀들을 통해 얻을 수 있게 해 주마.”
“관심 없다.”
“아니면 바꾸고 싶은……”
“닥쳐라.”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루퍼스가 대꾸했다.
“네놈의 목이나 내놔라. 빨리 이 빌어먹을 전쟁터를 뜨고 싶다.”
루퍼스의 검이 날카롭게 내려쳤다.
콰쾅!
마왕 아우디서스의 몸이 썩은 고목처럼 쓰러졌다.
생명이 끊김과 동시에 마왕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혈액이 아직도 응고되지 않아 번들거리는 것처럼 새빨간 두 눈. 커다란 뿔과 흉악한 이빨을 가진 괴물.
보는 이로 하여금 구역질과 거부감을 절로 유발시키는 몰골이었다.
그러나 루퍼스는 그 흉측한 것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닳고 닳았다.
손상되고, 마모되고, 고장 나 버렸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의지로 개처럼 굴렀다.
그런 루퍼스에게 남은 것은 메말라 갈라진 눈물샘과 녹슬어 버린 감정과, 그저 살기 위해 죽이는 본능뿐.
“하하.”
허탈한 웃음과 함께, 루퍼스는 진득한 피로 얼룩진 검을 내려다보았다.
끝이다.
마왕이 죽었다. 마족 토벌전이 끝났다.
그 순간, 루퍼스는 문득 사루비아라는 이름을 가진 하녀를 떠올렸다.
‘끝까지 살아남으시길.’
그렇게 지독한 키스를 퍼부었건만, 끝까지 낯빛 하나 변하지 않던 그 하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자신을 실컷 놀리고는, 제 이름조차 묻지 않고 떠나간 바람 같은 소녀.
“제기랄.”
검을 쥔 루퍼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 순간 네 얼굴을 떠올리는 게 아니었는데.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던 것일까?
변방의 병약한 할머니와 어린 남동생을 버려두고 이 피비린내 진동하는 지옥에 왔던 이유는 무엇인가?
소르디드 공주.
그녀를 차지하고 싶었기에.
처음에는 이룰 수 없는 원대한 목표라고 생각했건만, 이제는 아니었다.
마왕을 죽였다. 마족 토벌전을 끝냈다.
국왕의 약속대로 소르디드 공주는 이제 그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는 소르디드 공주가 아닌, 한낱 보잘것없는 하녀였다.
도대체.
왜.
“루퍼스 소대장님!”
“마왕을 처리하셨습니까!”
뒤에서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뒹구는 마왕의 사체를 본 부하들은 질겁했다. 몇몇은 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루퍼스는 덤덤히 명령을 내렸다.
“포대 자루를 가져와라.”
이제 정말 끝이다.
앞으로 수도로 돌아가 국왕에게 마왕을 처리했다는 것을 보고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장의 삶도 막을 내린다.
괴로워하는 부하들 대신 마왕의 목을 수습하고 있는데, 마왕의 옷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건 무엇인가.
루퍼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발로 그것을 굴렸다.
호두만 한 크기의 조각이었다.
처음에는 보석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광석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채를 띠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조각 안의 빛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루퍼스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마력석이군.’
마력석.
마족의 영혼이 깃든, 오직 마족들만이 만들 수 있는 신비한 돌.
지난 3년간 숱한 마족들을 상대했던 루퍼스는 많고 많은 마력석을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크고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마력석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마왕이 가지고 있던 마력석이라면, 분명 보통 물건이 아닐 것이다.
루퍼스는 마왕의 마력석을 집어 올렸다.
석양처럼 붉게 빛나는 마력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루비아예요.’
또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상한 이름이죠? 사루비아는 분명히 붉은 꽃인데. 제 머리카락은 상아색이잖아요.’
고운 붉은빛의 마력석이라.
그녀의 이름과 아주 잘 어울렸다.
‘선물로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순간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내리쳤다.
마왕의 시신에서 수습했다는 점만 빼면 외양이야 흠 하나 없는 아름다운 보석이다. 그 평민 출신의 하녀는 아마 지금껏 이런 보석을 가진 적이 없을 것이다.
마력석을 잠시 내려다보던 루퍼스는 그것을 따로 챙겼다.
그리고 그는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피가 채 마르지 않은 마왕의 머리를 포대 자루 안으로 쑤셔 넣었다.
이윽고 헤브니아 왕국에 종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승전 포고가 전파되던 그날, 국왕에게 마왕 아우디서스의 목을 바친 이는 루퍼스였다.
* * *
루퍼스는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수도로 입성했다.
“루퍼스 님 만세!”
“마왕을 죽인 용맹한 루퍼스 님 만세!”
“인페르나 남작 가문에 영광을!”
수도의 백성들이 금실로 장식된 백마 위에 올라탄 루퍼스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온 거리가 축제장이었다.
잘게 자른 색지들이 반짝거리며 휘날렸다. 루퍼스의 가문인 인페르나 남작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깃발이 곳곳에 나부꼈다.
곳곳에서 루퍼스의 활약을 노래하는 찬가가 흘러나왔다.
오랜 전쟁에 수많은 가족과 친구를 잃은 헤브니아 왕국의 백성들. 그들에게 루퍼스는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낸 구원자 같은 존재였다.
종전을 축하하는 잔치는 일주일 내내 이어질 것이다.
“형, 보고 싶었어!”
변방의 인페르나 영지에서 수도로 올라온 루퍼스의 남동생이 그를 꽉 껴안았다.
“에델.”
루퍼스는 자신의 남동생을 부둥켜안았다.
토벌군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코흘리개 꼬마였다. 그러나 지난 3년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성장했다.
전쟁에 나가는 형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던 나약한 소년은 이제 없었다.
남동생은 이제는 어엿한 남자였다.
“에델, 키가 많이 컸구나.”
“응. 이제 조만간 형보다 커질 거야.”
“웃기시네.”
이제 열다섯 살이 된 자신의 남동생을 내려다보며, 루퍼스는 피식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짓는 웃음이었다. 그동안 죽음의 문턱에 너무 오랫동안 거한 나머지 웃는 법을 잊어버리는 줄 알았다.
“루퍼스.”
에델의 뒤로 한 노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할머니.”
한미한 집안의 유일한 어른이신 인페르나 남작이었다. 루퍼스가 장성했음에도 전장으로 떠난 뒤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르는지라 여전히 작위를 유지하고 계셨다.
루퍼스가 전장으로 내몰렸던 그날,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
‘루퍼스.’
손자의 손을 꼭 잡은 할머니는 그에게 고했다.
‘이걸 받아라.’
할머니는 루퍼스에게 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그 검은 인페르나 남작 가문의 정통 후계자만이 물려받을 수 있는 검이었다. 마족에게 매우 치명적이라고 알려진 순도 높은 은을 덧씌운 독특한 모양의 보검(寶劍)이었다.
‘가서 마왕의 목을 베어 오거라. 너라면 할 수 있다.’
그 검을 건네주는 할머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루퍼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너라면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할머니는 루퍼스의 손을 꽉 잡았다.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
루퍼스는 아무런 말 없이 할머니와 포옹을 나누었다.
앙상하게 마른 팔이 잡혔다. 할머니의 팔은 빗장보다 더 가늘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두 손자의 앞날을 항상 밝혀 주던 눈망울은 죽어 가듯 탁하게 변해 있었고, 두 손자를 위해 모아 기도하던 손은 더 이상 힘이 없었다.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늙어 버린 할머니.
루퍼스가 하루를 더 살아갈 때, 할머니는 하루를 더 죽어 가고 있었다.
“할머니…….”
그 이름을 부르자 가슴에 무언가가 턱 하니 막힌 것 같았다.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해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할머니와 함께할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할머니의 상태는 어때?”
인페르나 남작을 방으로 모신 뒤, 루퍼스는 동생 에델에게 조용히 물었다.
“…….”
에델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아마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 같아.”
한참 동안 망설이던 에델은 고개를 푹 숙였다.
“거짓말.”
거짓말, 이라고 가장 먼저 내뱉었다.
“미안해.”
에델은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사실, 루퍼스도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제 곧 돌아가신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제발 누군가가 말해 주길 원했다.
할머니는 아직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할머니는 오래오래 살아 계실 것이라고.
지옥 같은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자신과 함께 남은 생을 행복하게 보내실 것이라고…….
그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래.’
그녀라면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죽음을 예언할 수 있는 성녀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토벌전에서 살아 돌아올 것을 예언해 주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녀라면 분명히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루퍼스는 자신이 가족과 함께 머물게 된 별궁 밖으로 뛰쳐나갔다.
“형!”
복도에 홀로 남겨진 에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달리고 또 달렸다.
휘황찬란한 소르디드 공주의 궁전을 향해 달려갔다.
“아, 루퍼스 님! 여긴 어쩐 일로……”
소르디드 공주의 궁전을 지키던 기사들이 루퍼스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사루비아.”
“예?”
“이 궁에 사루비아라는 하녀가 있지 않느냐? 그녀를 내 앞으로 모셔 와라.”
“하, 하녀 말씀이십니까?”
“어서!”
루퍼스의 다그침에 놀란 기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잠시 뒤, 그들은 한 여자를 루퍼스 앞으로 데리고 왔다.
루퍼스의 기억 속 어린 소녀는 어느새 성숙한 여인으로 자라나 있었다. 그럼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상아 빛깔의 머리카락을 가진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녀.
틀림없었다.
“사루비아.”
루퍼스는 그 잊지 못할 이름을 다시 한번 입에 올렸다.
그날의 기억이 또다시 떠올랐다.
멋도 모르고 국왕에게 소르디드 공주를 달라고 말했다가 토벌군으로 끌려가게 된 그날, 곧 죽을 것이라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던 어린 그에게 속삭였던 한마디. 그리고 그 대가로 그의 입술을 훔쳤던 이상한 여자.
그 뒤로 마족들과 싸우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쟁의 참혹함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참한 땅에 묻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이대로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던 그 지옥 같은 순간들.
그때마다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그녀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어…….”
하녀는 황금과 같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루퍼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저를 아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루퍼스는 왕명에 따라 토벌군에 합류했다.
루퍼스는 평생 기초적인 검술 대련 이외에 검을 잡아 본 적이 없는 시골 청년이었다. 게다가 타고난 마력도 귀족치고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는 마왕은커녕 마족을 대항할 힘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죽기 위해 나선 전장이었다.
실제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마족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뜯겨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퍼스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사루비아라는 하녀가 자신에게 들려준 말을 믿었다.
‘당신은 토벌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러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을 수 없다.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
살기 위해 못할 짓이 없었다.
남의 식량을 빼앗아 먹었다.
동료의 튼튼한 갑옷을 자신의 것으로 몰래 바꿔치기했다.
죽은 전우의 시신 아래 숨어 마족의 수색을 가까스로 피한 적도 있었다.
혹자는 그런 루퍼스를 두고 귀족의 긍지를 버린 이라고 욕했다.
루퍼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울만 좋은 남작 작위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죽지 않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오로지 그 생각만이 루퍼스의 머리를 장악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투박한 솜씨로 검을 쥐던 루퍼스의 손에 굳은살이 생겨났다.
마력 제어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던 애송이는 더 이상 없었다.
이제는 흉측한 이빨을 들이대며 포효하는 마족들을 보아도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피 한 방울에 벌벌 떨던 그의 몸은 어느새 혈향(血香)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루퍼스에게 남은 것은 원초적인 생존 본능뿐이었다.
마족 토벌군의 소대장으로 임명된 루퍼스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마족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는 더 이상 귀청을 따갑게 하지 않았다. 그들의 발톱에 할퀴어져도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휘두르고, 찌르고, 베고,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루퍼스는 마왕 아우디서스를 대면했다.
마왕 아우디서스는 건장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인간의 꼴을 하고 있었지만, 루퍼스는 속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이나 추격해 온 놈이다. 어찌 속아 넘어갈 수 있을까.
“인간이여,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루퍼스에게 자신의 변신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마왕 아우디서스가 급히 입을 열었다.
이제 마왕의 곁에 남은 마족들은 하나도 없었다. 지난 3년간 모조리 인간들에게 몰살당했다.
한때 인간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마왕 아우디서스.
그는 이제 한낱 인간 앞에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부귀영화이냐? 짐의 마왕성에 있는 보물들을 모두 주마. 그러니 부디 짐을 살려 다오.”
“필요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명성인가? 짐의 부하인 마녀들을 통해 얻을 수 있게 해 주마.”
“관심 없다.”
“아니면 바꾸고 싶은……”
“닥쳐라.”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루퍼스가 대꾸했다.
“네놈의 목이나 내놔라. 빨리 이 빌어먹을 전쟁터를 뜨고 싶다.”
루퍼스의 검이 날카롭게 내려쳤다.
콰쾅!
마왕 아우디서스의 몸이 썩은 고목처럼 쓰러졌다.
생명이 끊김과 동시에 마왕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혈액이 아직도 응고되지 않아 번들거리는 것처럼 새빨간 두 눈. 커다란 뿔과 흉악한 이빨을 가진 괴물.
보는 이로 하여금 구역질과 거부감을 절로 유발시키는 몰골이었다.
그러나 루퍼스는 그 흉측한 것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닳고 닳았다.
손상되고, 마모되고, 고장 나 버렸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의지로 개처럼 굴렀다.
그런 루퍼스에게 남은 것은 메말라 갈라진 눈물샘과 녹슬어 버린 감정과, 그저 살기 위해 죽이는 본능뿐.
“하하.”
허탈한 웃음과 함께, 루퍼스는 진득한 피로 얼룩진 검을 내려다보았다.
끝이다.
마왕이 죽었다. 마족 토벌전이 끝났다.
그 순간, 루퍼스는 문득 사루비아라는 이름을 가진 하녀를 떠올렸다.
‘끝까지 살아남으시길.’
그렇게 지독한 키스를 퍼부었건만, 끝까지 낯빛 하나 변하지 않던 그 하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자신을 실컷 놀리고는, 제 이름조차 묻지 않고 떠나간 바람 같은 소녀.
“제기랄.”
검을 쥔 루퍼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 순간 네 얼굴을 떠올리는 게 아니었는데.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던 것일까?
변방의 병약한 할머니와 어린 남동생을 버려두고 이 피비린내 진동하는 지옥에 왔던 이유는 무엇인가?
소르디드 공주.
그녀를 차지하고 싶었기에.
처음에는 이룰 수 없는 원대한 목표라고 생각했건만, 이제는 아니었다.
마왕을 죽였다. 마족 토벌전을 끝냈다.
국왕의 약속대로 소르디드 공주는 이제 그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는 소르디드 공주가 아닌, 한낱 보잘것없는 하녀였다.
도대체.
왜.
“루퍼스 소대장님!”
“마왕을 처리하셨습니까!”
뒤에서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뒹구는 마왕의 사체를 본 부하들은 질겁했다. 몇몇은 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루퍼스는 덤덤히 명령을 내렸다.
“포대 자루를 가져와라.”
이제 정말 끝이다.
앞으로 수도로 돌아가 국왕에게 마왕을 처리했다는 것을 보고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장의 삶도 막을 내린다.
괴로워하는 부하들 대신 마왕의 목을 수습하고 있는데, 마왕의 옷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건 무엇인가.
루퍼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발로 그것을 굴렸다.
호두만 한 크기의 조각이었다.
처음에는 보석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광석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채를 띠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조각 안의 빛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루퍼스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마력석이군.’
마력석.
마족의 영혼이 깃든, 오직 마족들만이 만들 수 있는 신비한 돌.
지난 3년간 숱한 마족들을 상대했던 루퍼스는 많고 많은 마력석을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크고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마력석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마왕이 가지고 있던 마력석이라면, 분명 보통 물건이 아닐 것이다.
루퍼스는 마왕의 마력석을 집어 올렸다.
석양처럼 붉게 빛나는 마력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루비아예요.’
또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상한 이름이죠? 사루비아는 분명히 붉은 꽃인데. 제 머리카락은 상아색이잖아요.’
고운 붉은빛의 마력석이라.
그녀의 이름과 아주 잘 어울렸다.
‘선물로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순간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내리쳤다.
마왕의 시신에서 수습했다는 점만 빼면 외양이야 흠 하나 없는 아름다운 보석이다. 그 평민 출신의 하녀는 아마 지금껏 이런 보석을 가진 적이 없을 것이다.
마력석을 잠시 내려다보던 루퍼스는 그것을 따로 챙겼다.
그리고 그는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피가 채 마르지 않은 마왕의 머리를 포대 자루 안으로 쑤셔 넣었다.
이윽고 헤브니아 왕국에 종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승전 포고가 전파되던 그날, 국왕에게 마왕 아우디서스의 목을 바친 이는 루퍼스였다.
* * *
루퍼스는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수도로 입성했다.
“루퍼스 님 만세!”
“마왕을 죽인 용맹한 루퍼스 님 만세!”
“인페르나 남작 가문에 영광을!”
수도의 백성들이 금실로 장식된 백마 위에 올라탄 루퍼스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온 거리가 축제장이었다.
잘게 자른 색지들이 반짝거리며 휘날렸다. 루퍼스의 가문인 인페르나 남작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깃발이 곳곳에 나부꼈다.
곳곳에서 루퍼스의 활약을 노래하는 찬가가 흘러나왔다.
오랜 전쟁에 수많은 가족과 친구를 잃은 헤브니아 왕국의 백성들. 그들에게 루퍼스는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낸 구원자 같은 존재였다.
종전을 축하하는 잔치는 일주일 내내 이어질 것이다.
“형, 보고 싶었어!”
변방의 인페르나 영지에서 수도로 올라온 루퍼스의 남동생이 그를 꽉 껴안았다.
“에델.”
루퍼스는 자신의 남동생을 부둥켜안았다.
토벌군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코흘리개 꼬마였다. 그러나 지난 3년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성장했다.
전쟁에 나가는 형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던 나약한 소년은 이제 없었다.
남동생은 이제는 어엿한 남자였다.
“에델, 키가 많이 컸구나.”
“응. 이제 조만간 형보다 커질 거야.”
“웃기시네.”
이제 열다섯 살이 된 자신의 남동생을 내려다보며, 루퍼스는 피식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짓는 웃음이었다. 그동안 죽음의 문턱에 너무 오랫동안 거한 나머지 웃는 법을 잊어버리는 줄 알았다.
“루퍼스.”
에델의 뒤로 한 노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할머니.”
한미한 집안의 유일한 어른이신 인페르나 남작이었다. 루퍼스가 장성했음에도 전장으로 떠난 뒤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르는지라 여전히 작위를 유지하고 계셨다.
루퍼스가 전장으로 내몰렸던 그날,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
‘루퍼스.’
손자의 손을 꼭 잡은 할머니는 그에게 고했다.
‘이걸 받아라.’
할머니는 루퍼스에게 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그 검은 인페르나 남작 가문의 정통 후계자만이 물려받을 수 있는 검이었다. 마족에게 매우 치명적이라고 알려진 순도 높은 은을 덧씌운 독특한 모양의 보검(寶劍)이었다.
‘가서 마왕의 목을 베어 오거라. 너라면 할 수 있다.’
그 검을 건네주는 할머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루퍼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너라면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할머니는 루퍼스의 손을 꽉 잡았다.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
루퍼스는 아무런 말 없이 할머니와 포옹을 나누었다.
앙상하게 마른 팔이 잡혔다. 할머니의 팔은 빗장보다 더 가늘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두 손자의 앞날을 항상 밝혀 주던 눈망울은 죽어 가듯 탁하게 변해 있었고, 두 손자를 위해 모아 기도하던 손은 더 이상 힘이 없었다.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늙어 버린 할머니.
루퍼스가 하루를 더 살아갈 때, 할머니는 하루를 더 죽어 가고 있었다.
“할머니…….”
그 이름을 부르자 가슴에 무언가가 턱 하니 막힌 것 같았다.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해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할머니와 함께할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할머니의 상태는 어때?”
인페르나 남작을 방으로 모신 뒤, 루퍼스는 동생 에델에게 조용히 물었다.
“…….”
에델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아마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 같아.”
한참 동안 망설이던 에델은 고개를 푹 숙였다.
“거짓말.”
거짓말, 이라고 가장 먼저 내뱉었다.
“미안해.”
에델은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사실, 루퍼스도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제 곧 돌아가신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제발 누군가가 말해 주길 원했다.
할머니는 아직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할머니는 오래오래 살아 계실 것이라고.
지옥 같은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자신과 함께 남은 생을 행복하게 보내실 것이라고…….
그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래.’
그녀라면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죽음을 예언할 수 있는 성녀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토벌전에서 살아 돌아올 것을 예언해 주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녀라면 분명히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루퍼스는 자신이 가족과 함께 머물게 된 별궁 밖으로 뛰쳐나갔다.
“형!”
복도에 홀로 남겨진 에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달리고 또 달렸다.
휘황찬란한 소르디드 공주의 궁전을 향해 달려갔다.
“아, 루퍼스 님! 여긴 어쩐 일로……”
소르디드 공주의 궁전을 지키던 기사들이 루퍼스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사루비아.”
“예?”
“이 궁에 사루비아라는 하녀가 있지 않느냐? 그녀를 내 앞으로 모셔 와라.”
“하, 하녀 말씀이십니까?”
“어서!”
루퍼스의 다그침에 놀란 기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잠시 뒤, 그들은 한 여자를 루퍼스 앞으로 데리고 왔다.
루퍼스의 기억 속 어린 소녀는 어느새 성숙한 여인으로 자라나 있었다. 그럼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상아 빛깔의 머리카락을 가진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녀.
틀림없었다.
“사루비아.”
루퍼스는 그 잊지 못할 이름을 다시 한번 입에 올렸다.
그날의 기억이 또다시 떠올랐다.
멋도 모르고 국왕에게 소르디드 공주를 달라고 말했다가 토벌군으로 끌려가게 된 그날, 곧 죽을 것이라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던 어린 그에게 속삭였던 한마디. 그리고 그 대가로 그의 입술을 훔쳤던 이상한 여자.
그 뒤로 마족들과 싸우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쟁의 참혹함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참한 땅에 묻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이대로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던 그 지옥 같은 순간들.
그때마다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그녀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어…….”
하녀는 황금과 같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루퍼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저를 아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