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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뭐……?”
루퍼스의 인상이 단번에 찌그러졌다.
저를 아느냐, 라니.
이건 또 무슨 질문인가.
“넌 내가 누군지 모르나?”
“당연히 알죠. 마왕 아우디서스를 죽인 영웅님이잖아요.”
그게 아니었다.
마왕을 죽인 영웅이 아니었다. 그렇게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 외에는?”
“그것 외에 제가 또 알아야 할 것이 있나요?”
이에 루퍼스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하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내가 정말로 기억나지 않느냐.”
더듬거리는 루퍼스의 말에 하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희가 만난 적이 있어요?”
“그래. 3년 전에 널 여기서 만났다.”
“소르디드 공주님 궁전에 찾아오는 손님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그걸 다 기억할 수 없죠.”
“너…….”
한숨을 내쉰 루퍼스는 하녀를 향해 고개 숙였다.
“그럼 너는…… 공주 전하의 궁전에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입을 맞춰 달라고 요청했나?”
루퍼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라. 제발.
“아! 당신!”
루퍼스의 말에 하녀는 능청스레 외쳤다.
“당신은 그때 그 남자군요!”
그때 그 남자라.
그 성의 없는 호칭에 조금 씁쓸해졌다. 그러나 확실히 하녀는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었지.
“은혜 갚으러 오신 거예요? 하하, 저 조금 감동할 것 같아요.”
하녀는 살짝 윙크를 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역시나.
루퍼스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웃는 얼굴만 유지하는 모습.
이상한 여자였다.
“사실 다시 부탁하러 왔다. 잠시 나와 함께 가 줄 수 있는가?”
루퍼스는 대뜸 물었다.
할머니의 미래가 궁금했다.
동생 에델은 할머니가 올해를 넘기지 못하실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믿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아주 작은 희망에.
그녀에게 다시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저 지금 일하는 중인데요.”
“잠깐이면 된다.”
“그럼 하녀장님에게 허락받고 올게요.”
“그럴 필요 없다.”
루퍼스는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소르디드 공주의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루비아 양은 내가 잠시 데리고 가겠다. 그렇게 알도록.”
“예, 예에!”
기사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작위는 남작에 불과하지만, 루퍼스는 헤브니아 왕국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루퍼스는 자신이 지내고 있는 귀빈용 궁전으로 하녀를 이끌었다.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모두 루퍼스와 그가 대동한 이름 모를 하녀를 이상한 눈으로 번갈아 훑어보았다.
그들은 루퍼스가 왕궁에 돌아오자마자 소르디드 공주가 아닌 그녀의 하녀를 찾아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몇몇은 아예 머리를 맞대고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퍼스는 그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아마 이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죽음을 예언하는 성녀.’
사람의 죽음을 보는 고유 마법을 가진 하녀.
그녀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
루퍼스는 자신의 옆에 선 하녀를 빤히 주시했다.
3년이란 세월은 어린 소녀를 아리따운 여인으로 탈바꿈시켰다.
키도 조금 컸고 볼에 젖살이 빠졌다. 어째선지 조금 더 핼쑥해진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건강해 보인다.
다행이다.
“더…….”
“네? 뭐예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충동처럼 올라오는 한마디에 입을 열었던 루퍼스는 이내 입을 꾹 닫았다.
—더 예뻐졌네.
하마터면 그렇게 말해 버릴 뻔했다.
루퍼스는 그 말을 애써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사실, 다시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네가 내게 다시 소중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는데.
네 예언 덕분에 그 잔혹한 전쟁에서 제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는데.
매일 죽음의 경계에서 헐떡이면서도, 네 목소리를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용기를 얻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는데.
그런데 왜 정작 입에서는.
“그동안 잘 지냈나.”
이런 멍청한 말만 튀어나오는 것일까.
“음, 일단 봉급은 꼬박꼬박 나오고, 대충 잘 먹고 잘 살았죠.”
하녀가 경쾌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먼저 말문을 뗐다.
“그래서 저는 왜 찾아오신 거예요, 영웅님?”
“영웅님이라 부르지 마라.”
루퍼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 호칭이 괜히 거슬렸다.
가식적이고 명예롭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묻지 않는 하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영웅님이라고 부르니 저도 영웅님이라고 불러야지요.”
“루퍼스다.”
루퍼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루퍼스? 그게 당신 이름이에요?”
“그래.”
“입에 잘 붙는 이름이네요. 무슨 뜻이에요?”
그 가벼운 질문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어째선지 하녀가 자신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기뻤다. 그래서 루퍼스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 갔다.
“루퍼스는 푸크시아 꽃의 별명이다.”
“푸크시아 꽃?”
“내가 태어난 곳인 인페르나 영지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다. 요정처럼 생긴 빨간 꽃이지.”
“호오, 한 번 보고 싶네요.”
“그래, 정말 예쁜 꽃이다.”
“그런데 빨간 꽃이라…… 태어날 때 엉덩이가 많이 빨갰나 봐요?”
하녀의 실없는 말에 루퍼스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아니, 내 조모께서 푸크시아 꽃을 좋아하셔서 그렇게 지었다.”
“흐음, 저랑 비슷하네요. 사실 제 이름도 사루비아 꽃에서 따온 건데……”
“알고 있다.”
루퍼스는 하녀의 말을 끊었다.
“네가 전에 말했었지. 네 이름은 사루비아지만 정작 머리카락은 상아색이라고.”
멈칫.
하녀의 발걸음이 부자연스럽게 느려졌다.
“……그걸 기억하고 계셨어요?”
하녀는 루퍼스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루퍼스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네 이름을 말해 줄 때 했던 말이 아니더냐.”
“제 이름도…… 기억하고 계셨어요?”
“쓸데없는 질문을. 네 이름을 몰랐다면 내가 너를 어찌 찾았겠느냐.”
“…….”
하녀는 멍하니 루퍼스를 쳐다보았다. 마치 상상조차 못 한 무언가를 경험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왜요?”
“뭐가.”
“왜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세요?”
“기억한 게 아니라 못 잊은 거다.”
루퍼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전쟁터에 나가 있던 내내 네 이름을 생각했으니 잊어버릴 리가 없지.”
“제 이름을요?”
“그래. 네가 내게 해 준 말을 계속 생각했다.”
루퍼스는 걸음을 멈췄다.
아무도 없는 샛길이었다. 루퍼스와 그의 가족들이 지내고 있는 귀빈용 궁전 뒤편에 나 있는 작은 길.
루퍼스와 하녀의 말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루퍼스는 자신의 곁에 선 하녀를 내려다보았다.
‘끝까지 살아남으시길.’
몇 번이고, 수천 번 혹은 수만 번 머릿속으로 반복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지난 3년 동안 그녀의 한마디를 양분 삼아 살아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는 이미 그의 삶의 일부였다.
“사루비아.”
루퍼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에 하녀는 몸을 움찔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넌 성녀라고 했다. 그리고 넌 사람의 죽음을 예언할 수 있다고 했었지.”
“아…… 네, 잘 기억하셨네요.”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괜찮겠나.”
“뭔데요?”
“이곳에 내 조모가 계신다. 원래부터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 변방에서 수도로 무리해서 올라오시느라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 그러니까……”
“안 돼요.”
하녀는 루퍼스의 말을 잘랐다.
“가족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요? 죄송하지만 그건 조금 곤란해요.”
그의 뒷말을 듣지 않아도 하녀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알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조모가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
혈육으로서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신, 아마 감당하지 못할 거예요.”
죽음에 대해 알게 되는 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결국 끝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 순간 경험하게 될 아픔을 견딜 수 있을까.
“설령 죽음을 안다 해도 바꿀 수 없어요. 전 운명에 간섭할 수 없는 힘없는 인간이에요.”
하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루퍼스는 그녀의 시선을 좇았다.
“알고 있다. 아무리 성녀라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법이겠지.”
“그런데도 알려고 하는 거예요? 왜요? 당신을 더 괴롭게 할 텐데…….”
“내 부모님은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
루퍼스가 덤덤히 고했다.
“그때 나는 부모님이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지 몰랐지.”
루퍼스의 부모님은 본래 대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루퍼스의 부모님이 변방의 인페르나 영지로 간 것은 남작 작위를 물려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루퍼스의 부모님은 남작 작위를 받기도 전 함께 죽었다.
인페르나 영지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이었다. 기후 환경도 좋지 않았고, 쓴물이 고인 늪을 중심으로 고약한 해충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루퍼스의 부모님은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천천히 죽어 갔다.
루퍼스의 동생인 에델이 태어난 이후, 부모님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부모님은 두 번 다시 두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조모님을 보내고 싶지 않다. 적어도 준비라도 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루퍼스가 중얼거렸다.
“그러니 부디 내 조모의 죽음을 보고 내게 알려 다오.”
그 말을 하면서도, 루퍼스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할머니가 이번 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알겠어요.”
한동안 말이 없던 하녀는 마침내 결심했는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당신의 할머니가 언제까지 살아 계실 건지만 알려 줄 거예요. 그 외의 다른 건 묻지 마세요.”
“그래. 고맙다.”
원하던 바였다. 그 외의 정보는 관심 없었다.
그저 할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하녀와 함께 별궁 안으로 들어가자, 문가에서 서성이고 있던 남동생 에델이 튀어나왔다.
“형! 어디 갔었어? 걱정했잖……아?”
루퍼스 곁에 선 하녀를 본 에델은 우두커니 멈춰 섰다.
하녀가 싱긋 미소를 짓자, 에델은 귀까지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동생이다.”
루퍼스가 하녀에게 에델을 짧게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하녀는 넉살 좋게 웃으며 에델에게 인사를 올렸다.
빨갛게 익은 에델의 얼굴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그, 저, 저는……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맛이 갔군.’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하녀를 빤히 주시하는 에델을 흘겨보며, 루퍼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뭐……?”
루퍼스의 인상이 단번에 찌그러졌다.
저를 아느냐, 라니.
이건 또 무슨 질문인가.
“넌 내가 누군지 모르나?”
“당연히 알죠. 마왕 아우디서스를 죽인 영웅님이잖아요.”
그게 아니었다.
마왕을 죽인 영웅이 아니었다. 그렇게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 외에는?”
“그것 외에 제가 또 알아야 할 것이 있나요?”
이에 루퍼스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하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내가 정말로 기억나지 않느냐.”
더듬거리는 루퍼스의 말에 하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희가 만난 적이 있어요?”
“그래. 3년 전에 널 여기서 만났다.”
“소르디드 공주님 궁전에 찾아오는 손님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그걸 다 기억할 수 없죠.”
“너…….”
한숨을 내쉰 루퍼스는 하녀를 향해 고개 숙였다.
“그럼 너는…… 공주 전하의 궁전에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입을 맞춰 달라고 요청했나?”
루퍼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라. 제발.
“아! 당신!”
루퍼스의 말에 하녀는 능청스레 외쳤다.
“당신은 그때 그 남자군요!”
그때 그 남자라.
그 성의 없는 호칭에 조금 씁쓸해졌다. 그러나 확실히 하녀는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었지.
“은혜 갚으러 오신 거예요? 하하, 저 조금 감동할 것 같아요.”
하녀는 살짝 윙크를 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역시나.
루퍼스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웃는 얼굴만 유지하는 모습.
이상한 여자였다.
“사실 다시 부탁하러 왔다. 잠시 나와 함께 가 줄 수 있는가?”
루퍼스는 대뜸 물었다.
할머니의 미래가 궁금했다.
동생 에델은 할머니가 올해를 넘기지 못하실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믿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아주 작은 희망에.
그녀에게 다시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저 지금 일하는 중인데요.”
“잠깐이면 된다.”
“그럼 하녀장님에게 허락받고 올게요.”
“그럴 필요 없다.”
루퍼스는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소르디드 공주의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루비아 양은 내가 잠시 데리고 가겠다. 그렇게 알도록.”
“예, 예에!”
기사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작위는 남작에 불과하지만, 루퍼스는 헤브니아 왕국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루퍼스는 자신이 지내고 있는 귀빈용 궁전으로 하녀를 이끌었다.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모두 루퍼스와 그가 대동한 이름 모를 하녀를 이상한 눈으로 번갈아 훑어보았다.
그들은 루퍼스가 왕궁에 돌아오자마자 소르디드 공주가 아닌 그녀의 하녀를 찾아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몇몇은 아예 머리를 맞대고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퍼스는 그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아마 이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죽음을 예언하는 성녀.’
사람의 죽음을 보는 고유 마법을 가진 하녀.
그녀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
루퍼스는 자신의 옆에 선 하녀를 빤히 주시했다.
3년이란 세월은 어린 소녀를 아리따운 여인으로 탈바꿈시켰다.
키도 조금 컸고 볼에 젖살이 빠졌다. 어째선지 조금 더 핼쑥해진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건강해 보인다.
다행이다.
“더…….”
“네? 뭐예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충동처럼 올라오는 한마디에 입을 열었던 루퍼스는 이내 입을 꾹 닫았다.
—더 예뻐졌네.
하마터면 그렇게 말해 버릴 뻔했다.
루퍼스는 그 말을 애써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사실, 다시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네가 내게 다시 소중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는데.
네 예언 덕분에 그 잔혹한 전쟁에서 제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는데.
매일 죽음의 경계에서 헐떡이면서도, 네 목소리를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용기를 얻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는데.
그런데 왜 정작 입에서는.
“그동안 잘 지냈나.”
이런 멍청한 말만 튀어나오는 것일까.
“음, 일단 봉급은 꼬박꼬박 나오고, 대충 잘 먹고 잘 살았죠.”
하녀가 경쾌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먼저 말문을 뗐다.
“그래서 저는 왜 찾아오신 거예요, 영웅님?”
“영웅님이라 부르지 마라.”
루퍼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 호칭이 괜히 거슬렸다.
가식적이고 명예롭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묻지 않는 하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영웅님이라고 부르니 저도 영웅님이라고 불러야지요.”
“루퍼스다.”
루퍼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루퍼스? 그게 당신 이름이에요?”
“그래.”
“입에 잘 붙는 이름이네요. 무슨 뜻이에요?”
그 가벼운 질문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어째선지 하녀가 자신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기뻤다. 그래서 루퍼스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 갔다.
“루퍼스는 푸크시아 꽃의 별명이다.”
“푸크시아 꽃?”
“내가 태어난 곳인 인페르나 영지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다. 요정처럼 생긴 빨간 꽃이지.”
“호오, 한 번 보고 싶네요.”
“그래, 정말 예쁜 꽃이다.”
“그런데 빨간 꽃이라…… 태어날 때 엉덩이가 많이 빨갰나 봐요?”
하녀의 실없는 말에 루퍼스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아니, 내 조모께서 푸크시아 꽃을 좋아하셔서 그렇게 지었다.”
“흐음, 저랑 비슷하네요. 사실 제 이름도 사루비아 꽃에서 따온 건데……”
“알고 있다.”
루퍼스는 하녀의 말을 끊었다.
“네가 전에 말했었지. 네 이름은 사루비아지만 정작 머리카락은 상아색이라고.”
멈칫.
하녀의 발걸음이 부자연스럽게 느려졌다.
“……그걸 기억하고 계셨어요?”
하녀는 루퍼스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루퍼스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네 이름을 말해 줄 때 했던 말이 아니더냐.”
“제 이름도…… 기억하고 계셨어요?”
“쓸데없는 질문을. 네 이름을 몰랐다면 내가 너를 어찌 찾았겠느냐.”
“…….”
하녀는 멍하니 루퍼스를 쳐다보았다. 마치 상상조차 못 한 무언가를 경험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왜요?”
“뭐가.”
“왜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세요?”
“기억한 게 아니라 못 잊은 거다.”
루퍼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전쟁터에 나가 있던 내내 네 이름을 생각했으니 잊어버릴 리가 없지.”
“제 이름을요?”
“그래. 네가 내게 해 준 말을 계속 생각했다.”
루퍼스는 걸음을 멈췄다.
아무도 없는 샛길이었다. 루퍼스와 그의 가족들이 지내고 있는 귀빈용 궁전 뒤편에 나 있는 작은 길.
루퍼스와 하녀의 말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루퍼스는 자신의 곁에 선 하녀를 내려다보았다.
‘끝까지 살아남으시길.’
몇 번이고, 수천 번 혹은 수만 번 머릿속으로 반복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지난 3년 동안 그녀의 한마디를 양분 삼아 살아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는 이미 그의 삶의 일부였다.
“사루비아.”
루퍼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에 하녀는 몸을 움찔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넌 성녀라고 했다. 그리고 넌 사람의 죽음을 예언할 수 있다고 했었지.”
“아…… 네, 잘 기억하셨네요.”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괜찮겠나.”
“뭔데요?”
“이곳에 내 조모가 계신다. 원래부터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 변방에서 수도로 무리해서 올라오시느라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 그러니까……”
“안 돼요.”
하녀는 루퍼스의 말을 잘랐다.
“가족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요? 죄송하지만 그건 조금 곤란해요.”
그의 뒷말을 듣지 않아도 하녀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알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조모가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
혈육으로서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신, 아마 감당하지 못할 거예요.”
죽음에 대해 알게 되는 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결국 끝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 순간 경험하게 될 아픔을 견딜 수 있을까.
“설령 죽음을 안다 해도 바꿀 수 없어요. 전 운명에 간섭할 수 없는 힘없는 인간이에요.”
하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루퍼스는 그녀의 시선을 좇았다.
“알고 있다. 아무리 성녀라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법이겠지.”
“그런데도 알려고 하는 거예요? 왜요? 당신을 더 괴롭게 할 텐데…….”
“내 부모님은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
루퍼스가 덤덤히 고했다.
“그때 나는 부모님이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지 몰랐지.”
루퍼스의 부모님은 본래 대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루퍼스의 부모님이 변방의 인페르나 영지로 간 것은 남작 작위를 물려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루퍼스의 부모님은 남작 작위를 받기도 전 함께 죽었다.
인페르나 영지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이었다. 기후 환경도 좋지 않았고, 쓴물이 고인 늪을 중심으로 고약한 해충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루퍼스의 부모님은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천천히 죽어 갔다.
루퍼스의 동생인 에델이 태어난 이후, 부모님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부모님은 두 번 다시 두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조모님을 보내고 싶지 않다. 적어도 준비라도 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루퍼스가 중얼거렸다.
“그러니 부디 내 조모의 죽음을 보고 내게 알려 다오.”
그 말을 하면서도, 루퍼스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할머니가 이번 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알겠어요.”
한동안 말이 없던 하녀는 마침내 결심했는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당신의 할머니가 언제까지 살아 계실 건지만 알려 줄 거예요. 그 외의 다른 건 묻지 마세요.”
“그래. 고맙다.”
원하던 바였다. 그 외의 정보는 관심 없었다.
그저 할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하녀와 함께 별궁 안으로 들어가자, 문가에서 서성이고 있던 남동생 에델이 튀어나왔다.
“형! 어디 갔었어? 걱정했잖……아?”
루퍼스 곁에 선 하녀를 본 에델은 우두커니 멈춰 섰다.
하녀가 싱긋 미소를 짓자, 에델은 귀까지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동생이다.”
루퍼스가 하녀에게 에델을 짧게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하녀는 넉살 좋게 웃으며 에델에게 인사를 올렸다.
빨갛게 익은 에델의 얼굴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그, 저, 저는……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맛이 갔군.’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하녀를 빤히 주시하는 에델을 흘겨보며, 루퍼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