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5화.









절세미녀라고 말할 수 없지만, 하녀는 청초한 이목구비와 산뜻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여자였다. 게다가 에델은 평생 인페르나 영지에서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 한 명 만나 보지 못했다.

아마 한눈에 반해 버렸겠지.

그리고 에델은 루퍼스의 예상을 저버리지 않았다.

“어, 엄청 예쁘시네요. 혹시 소르디드 공주님이세요?”

에델의 말에 하녀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저는 공주님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녀예요. 부디 말을 편하게 하세요.”

“하녀, 예요? 아니, 하녀, 야?”

“그만.”

그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루퍼스는 동생의 추태를 이쯤에서 막아섰다.

“잠깐만 네 방에 들어가 있어. 할머니를 뵙고 올 테니.”

“하, 할머니를? 왜? 혹시 둘이 결혼해? 할머니한테 결혼 허락받는 거야?”

“너 오늘 밤 이불 걷어차고 싶지 않으면 당장 방까지 뛰어서 들어가라.”

루퍼스는 연신 헛소리를 내뱉는 에델을 위층으로 쫓아냈다.

“미안하다. 어린 녀석이라 아직 철이 덜 들었다.”

계단 위로 에델의 모습이 멀어지자 루퍼스는 하녀를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동생분 귀엽네요.”

하녀는 에델이 사라진 방향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귀엽다고?”

“네. 동생분은 이름이 뭐예요?”

“그게 왜 궁금하지?”

루퍼스가 무뚝뚝이 되물었다.

언짢았다. 자신의 이름은 물어보지도 않더니만.

그 반응에 하녀는 쿡쿡 웃기만 했다.

“할머니.”

루퍼스가 방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옅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자, 루퍼스의 할머니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모습이 보였다.

루퍼스는 급히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누워 계세요, 힘드신데.”

“괜찮다, 루퍼스.”

인페르나 남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반신을 침대머리에 기댔다.

“아직 볼 수 있을 때 너를 더 많이 보고 싶구나.”

“…….”

루퍼스는 이를 꽉 악물었다.

할머니도 분명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남은 나날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아니야, 아직 멀었어. 더 사셔야 해…….’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다.

거품 같은 희망이었지만, 그래도 그 작은 확률에 도박을 걸고 싶었다.

할머니가 부디 오래오래 살아갈 수 있기를.

“루퍼스 네 덕분에 내가 왕궁에 다 와 보는구나. 고맙다.”

인페르나 남작이 쿨럭, 하고 거친 기침을 했다.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보자 숨통이 턱 하니 막혀 왔다.

“무리하지 마시고 편히 쉬세요, 할머니.”

루퍼스는 인페르나 남작을 다시 눕히며 목 위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미안하다, 루퍼스. 네가 돌아왔는데 이렇게 골골 아파서야 원.”

“미안해하지 마세요.”

루퍼스는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할머니를 직시할 수 없었다. 시선을 마주치면 당장이라도 두 눈에서 무언가가 쏟아질 것 같았다.

루퍼스는 하녀와 함께 할머니의 방에서 걸어 나왔다.

바깥에는 듣는 귀가 많았다. 루퍼스는 하녀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할머니는.”

방문을 쾅 닫은 루퍼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사실 수 있느냐.”

“…….”

소파 위에 앉은 하녀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쉽게 답하지 못할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털썩.

루퍼스는 하녀의 곁에 주저앉았다.

힘없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새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 고통스럽게 기침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잔인한 잔상 같으니라고.

“……내년에.”

두 눈을 감은 루퍼스가 중얼거렸다.

“내년에, 내년 봄에 내 동생이 성인식을 치른다.”

네, 하고 하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 조모께서 그 모습을 보실 수 있느냐.”

“…….”

이번에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 침묵의 의미를, 루퍼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에델의 말이 맞았다.

이번이 할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해다.

“……일주일이에요.”

한동안 방 안을 메우던 싸늘한 침묵을 깨고, 하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더 사실 수 있어요.”

“짧네.”

일주일. 겨우 7일이 남은 것인가.

적어도 올해 겨울까지는 계시길 빌었는데.

“어떻게 돌아가시나?”

두 눈을 감은 채로, 루퍼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몸이 안 좋으니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실까. 아니면 잠든 뒤 영영 깨어나지 못하실까.

“혹시나 막을 수 있는 죽음인가?”

몸이 좋지 않다면 귀한 보약을 구해다가 드리면 되지 않을까. 어쩌면 기력이 다시 좋아지실지도 모른다.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아직은, 아직은 안 돼.

지금껏 홀몸으로 자신과 남동생을 키우느라 고생만 하시던 분인데.

열 손가락이 퉁퉁 부어 금반지 하나 끼지 못하시고, 몸에는 앙상한 뼈대만 남고.

맛있는 것 하나 먹어 본 적 없고 예쁜 옷 하나 걸쳐 본 적 없는데.

“그 외의 다른 건 묻지 않기로 했잖아요.”

하녀가 조용히 고했다.

“……그래.”

루퍼스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약속은 약속이다. 더 이상 귀찮게 할 수 없다.

“가족의 예견된 죽음이 슬프신가요.”

“…….”

하녀의 그 간단한 질문에, 루퍼스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아요.”

하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시간이 있어요.”

소파에서 일어난 하녀는 루퍼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작은 손이 루퍼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루퍼스는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여 있는 투박한 손에서 피어나는 그 온기를 거부할 수 없었다.

차라리,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었다.

째깍, 째깍.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가슴이 먹먹했다.

쓰라린 아픔이었다. 이러다가 심장이 조각조각 찢어질 것 같았다.

“울어도 괜찮아요.”

하녀는 자신의 품에 머리를 기댄 루퍼스에게 속삭였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하녀는 상처로 굳은 그의 몸을 쓸어 주었다.

자신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하녀의 손에 의지하자, 일렁이는 이 눈물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그것이 싫어 차라리 눈을 감았다.

불완전한 어둠 속에서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강인하고도 인자하시던 할머니.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도 당당히 인페르나 영지를 다스리시던 할머니.

잠들기 전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이야기를 읽어 주시던 할머니.

처음으로 마력을 사용한 루퍼스의 머리를 아무런 말 없이 쓰다듬으시던 할머니.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어린 루퍼스를 붙들고 강하게 서야 한다고 당부하시던 할머니.

마족 토벌군에 강제로 합류하게 된 루퍼스의 두 손을 꽉 쥐어 주시던 할머니.

그리고, 마왕을 죽이고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루퍼스를 보며.

‘너라면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덤덤히 말씀하시던 할머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루퍼스는 하녀를 세게 껴안았다. 이윽고 그녀의 품에서 끅끅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녀는 조용히 남자의 몸뚱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하녀는 웃지 않았다.



* * *



‘설마 진짜 마왕의 목을 대령할 줄이야.’

루퍼스가 가져다 바친 마왕 아우디서스의 목을 내려다보며, 국왕은 혀를 찼다.

국왕은 루퍼스라는 남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리가 없었다. 소르디드 공주에게 청혼한 남자 중 가장 지위가 낮고 보잘것없던 이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일부러 루퍼스를 마족 토벌군으로 내보냈다.

그가 전쟁터에서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하고 콱 죽어 버리기를 희망하며.

그런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정말로 마왕의 목을 가지고 오다니.

국왕은 축제 때 백성들이 지껄이던 말을 기억했다.

‘국왕 폐하께서는 분명히 마왕의 목을 가지고 오는 사람을 소르디드 공주님과 결혼시킨다고 했지?’

‘그렇다면 영웅 루퍼스 님께서 소르디드 공주님과 결혼하게 되는 거겠네!’

3년 전, 본래 소르디드 공주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던 제국의 황자는 반란을 일으키고 도망쳤고, 그 혼담은 무산되었다.

국왕은 한 번 파혼을 당한 자신의 고명딸에게 더 좋은 신랑감을 구해 주기 위해 급급했다.

그러나 소르디드 공주에게 청혼하는 이는 더 이상 없었다. 국왕에게 잘못 밉보였다가 토벌군에 끌려간다는 소문이 퍼진 지 오래였다.

결국 3년 동안 소르디드 공주는 약혼자도 없이 홀로 지냈다.

‘그 알거지 귀족 놈에게 내 귀한 딸을 내줘야 한다니.’

국왕은 이를 아드득 갈았다.

루퍼스의 고향은 인페르나 영지.

그곳은 왕국의 가장 구석진 곳에 처박힌, 무엇 하나 나지 않는 황무지가 아니던가.

게다가 그는 이름도 없는 남작 가문 출신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고아다.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인페르나 남작—그 빌어먹을 노인네—의 밑에서 자라났다고 했다.

‘가난한 데다, 집안도 별 볼일 없고, 그것도 모자라 조모 밑에서 자란 고아라니.’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자신의 고명딸인 소르디드 공주가 무엇이 아쉬워 그런 놈에게 시집을 가야 하는가?

도대체 그놈은 왜 죽어 버리지 않은 것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서기관들에게 마왕의 목을 치우라고 막 명령을 내리던 찰나였다.

“아버지!”

쾅,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터지듯 열렸다.

“오, 소르디드!”

국왕의 집무실에 난폭히 침입한 이는 소르디드 공주였다.

“아버지, 저는 그 루퍼스라는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건가요?”

국왕에게 매달린 공주가 우는소리를 냈다.

“다른 귀족 영애들이 저를 보며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졸지에 남작 가문의 촌놈이랑 결혼하게 되었다고 비웃고 있어요! 다 아버지 탓이에요!”

소르디드는 빽 하고 소리쳤다.

“아버지는 마왕을 죽이는 남자에게 저를 아내로 주겠다고 했잖아요! 이제 어쩔 거예요!”

그러면서 소르디드는 엉엉 눈물을 터뜨렸다. 어지간히도 루퍼스와의 결혼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사랑하는 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국왕은 속이 뒤집혔다.

“아니다, 소르디드. 네가 원치 않는다면 이 아비가 어떻게든 막아 보마.”

“어떻게 하시려고요? 지금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이 제가 루퍼스란 촌놈과 결혼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걸요! 그런데 갑자기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저희 왕실의 명예가 어떻게 되겠어요?”

“…….”

확실히 그랬다.

3년 전, 국왕은 분명히 모든 백성들이 듣는 앞에서 마왕을 죽인 남자에게 자신의 딸을 내어주겠다고 했다.

지금 와서 그 발언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

왕실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은 물론이요, 백성들의 불만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가뜩이나 길고 질겼던 전쟁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고, 많은 가족들이 소중한 이를 잃었다.

그들에게 루퍼스는 혜성의 별과 같은 구세주였다.

그런 루퍼스에게 공주와의 결혼을 불허한다면, 백성들이 왕실로부터 등을 돌려 버릴 것이 분명했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왕은 큰 고심에 빠졌다.

당장 묘안이 나오지 않았다.

“소르디드, 이 아비가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당장이요! 전 그 남자가 정말 싫어요! 그런 촌놈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어요!”

공주는 비명을 내지르며 집무실에서 뛰쳐나갔다.



“아아아아악!”

방으로 돌아온 공주는 비명을 내지르며 물건들을 마구 던졌다.

와장창!

값비싼 화분들이 깨졌다. 접시를 비롯한 사기그릇이 조각조각 나뒹굴었다.

“그 하녀 어디 갔어?”

공주가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누, 누구 말씀이십니까?”

“그 상아색 머리카락을 가진 하녀 있잖아! 기분 나쁘게 웃는 계집!”

하녀장은 난색을 표했다.

공주가 찾는 하녀는 아마 사루비아라는 이름을 가진 하녀일 테다.

소르디드 공주는 아름다운 용모와 달리 고약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욱하는 성격을 억누르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자주 손찌검을 했다.

공주의 난폭한 성질은 제국 황자와의 혼담이 깨진 이후 더 악화됐다.

그때 공주가 본 것이 사루비아라는 하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