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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공주는 매일 웃는 얼굴로 다니는 사루비아를 몹시 미워했다. 저 비천한 하녀 따위가 자신보다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공주는 화가 날 때마다 사루비아를 불러다 매질했다.

“잠시 심부름 나갔습니다.”

차마 루퍼스의 부름으로 나갔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하녀장이 이렇게 둘러댔다.

“뭐? 그 계집은 자기가 뭐라고 마음대로 싸돌아다녀?”

“……죄송합니다.”

“미안한 거 알면 네가 대신 맞아!”

공주는 씩씩거리며 하녀장을 향해 회초리를 들어 올렸다.

하녀장은 와들와들 떨며 공주의 앞으로 다가갔다.

짜악―!

공주는 하녀장의 등을 회초리로 세게 내려쳤다.

그 일격을 견디지 못한 하녀장이 몸을 비틀거렸다.

하녀장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만일 여기서 참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간, 공주의 화만 더 돋울 뿐이었다.

공주는 하녀장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때까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공주님, 그만 화를 거두시지요.”

공주가 그렇게 한참 동안 화풀이하고 있는데, 뒤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의 유모였다.

“지금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어? 내가, 이 왕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내가, 그까짓 마왕 하나 죽였다고 벼락출세한 촌놈이랑 결혼하게 생겼는데!”

“비록 출생 신분이 비천하오나, 지금의 루퍼스 님은 이 나라의 영웅입니다.”

유모가 참을성 있게 공주를 달랬다.

“유모까지 그놈 편드는 거야? 난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르는 그런 남자랑 절대 결혼 못해!”

“그래도 국왕 폐하께서 이미 하신 말씀이 있으니 혼인을 무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럼 어떡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그렇게 외친 공주는 억울한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유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님, 지금 공주님께서 하셔야 할 일은 목 놓아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 그 남자랑 결혼해서 인페르나 영지에 가서 썩을 준비나 하라고?”

“잘 들으십시오. 비록 국왕 폐하께서 마왕을 죽인 루퍼스 님에게 공주님과의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명하였으나, 최후의 선택을 하는 이는 루퍼스 님입니다.”

유모가 차분히 고했다.

“만일 공주님께서 루퍼스 님을 잘 설득하실 수 있다면, 이 결혼은 없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루퍼스 님을 만나실 채비를 하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당장 결혼하겠다고 달려들 텐데!”

“적당히 변명해 보십시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상황이 더 정리되면 결혼하고 싶다, 라든가. 적당한 핑곗거리를 만들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그리고 분위기를 봐서 파혼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유모의 말에 공주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귀가 솔깃한 묘책이었다.

“그 인간이 내 말을 들어줄까?”

“공주님처럼 아름다우신 분이 부탁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이가 어디 있습니까.”

유모는 공주를 다독였다.

“제가 사람을 보내어 루퍼스 님을 공주님의 궁전으로 초청하겠습니다.”



* * *



“다 됐어요.”

하녀가 빗을 내렸다.

그녀의 품에 정신없이 안긴 결과였다. 루퍼스의 머리카락은 덜 지어진 새 둥지처럼 난장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노릇이어서 빗을 잡았는데, 하녀가 돕겠다며 손수 정리해 주었다.

“고맙다.”

루퍼스는 짤막히 대꾸했다.

그 뒤로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추한 꼴을 보였다. 다 큰 남자가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흘리다니.

분명히 꼴불견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지.

“당신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한데 하녀의 입에서 전혀 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무엇이?”

“당신의 모든 것이요.”

하녀가 잠잠히 대답했다.

“지난 3년 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하녀는 루퍼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마족들이 많이 무서웠죠? 자신의 전우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슬펐죠?”

“…….”

“그런데도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끝내 살아 돌아왔어요.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가족을 먼저 걱정하고 있어요. 당신은 참으로 용감하고 상냥한 사람이에요.”

루퍼스의 뒤에 선 하녀가 속삭였다.

“그런 당신의 모든 것을 존경해요.”

“……네 예언 덕분이다.”

하녀가 없는 정면을 바라보며, 루퍼스가 중얼거렸다.

“네 예언이 있었기에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제 예언이 없어도 당신은 어차피 토벌전에서 살아남을 운명이었어요.”

“그래도.”

루퍼스는 천천히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있었기에 지난 3년이 외롭지 않았다.”

하녀의 얼굴이 바로 앞에 보였다.

머리카락이 뒤섞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당장이라도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

3년 전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녀는 루퍼스를 향해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곤 다시 그의 입술을 훔쳤다.

아주 짧은 찰나였다.

스치듯 지나가는 따스함에 루퍼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꿈 같았다.

짓궂은 장난처럼 맞닿았던 피부 너머로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피어났다.

그때 쓸어 내지 못한 감정의 뿌리가 어느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너는.”

하녀를 자신의 시선에 오롯이 담은 루퍼스가 간신히 말을 자아냈다.

“너는 왜 자꾸만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도대체.

도대체 왜 이렇게 상냥하게 대하는 것이냐.

도대체 왜 자꾸만 나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것이냐.

도대체 왜 나에게 너의 온기를 나누어 주는 것이냐.

그 재촉하는 질문에, 하녀는 다정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그러곤.

“왜냐하면 당신은 내 이름을 기억해 줬으니까.”

이름.

사루비아, 라는 그녀의 이름.

맞다.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그 이름을 루퍼스는 늘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성녀이기 때문에 잊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토벌전이 끝날 때까지 반드시 살아 있을 것이라는 그녀의 확언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지난 3년 동안 그가 무수히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재밌는 이야기 들려드릴까요?”

하녀는 루퍼스를 슬쩍 찔렀다.

“사실 아까 당신이 공주님의 궁전 앞에 나타났을 때, 난 당신이 3년 전의 그 남자라는 걸 한 번에 알아봤어요.”

“……정말로?”

“네. 그냥 모른 척한 것뿐이에요. 미안해요.”

“왜 그랬지?”

“당신의 반응이 궁금해서요.”

반응?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할 때,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어요.”

그러면서 하녀는 혀를 날름 내민다.

“너…….”

맹랑한 여자 같으니라고.

괘씸하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난 어떤 표정을 지었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모르세요? 당장 울고 싶은 표정을 짓고 계셨잖아요.”

“내가?”

“네.”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한 게 그렇게도 슬펐나요? 일개 하녀를 그렇게나 아끼실 줄은 몰랐네요.”

“그래.”

하녀로서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장난스럽게 던진 말이었지만, 루퍼스는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놓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군.”

이제야 말이 된다.

“네? 뭐가 맞아요?”

“네 말대로 나는 너를 아끼는 것 같다.”

“그게 무슨…….”

“사루비아.”

루퍼스가 하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리 와.”

그 부름에 하녀는 루퍼스에게로 다가갔다.

그것은 모든 것의 도화선이었다.

자신의 앞으로 걸어온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끌어당겼다. 자신을 향해 넘어진 그녀를 소파 위로 눕혔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를 붙들었다. 그대로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참을성 없이 입을 맞추었다.

사루비아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약한 신음 소리와 함께 숨을 뱉어 내자, 그 틈을 노려 더 밀어붙였다.

배려라곤 없었다. 그저 그녀와 이어지는 데만 급했다.

도대체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취하는지, 루퍼스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무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대방에게 실례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그저 지금 당장 이 여자의 온기에 닿고 싶다.

이 작은 몸에 파고들어 위로받고 싶다.

공허하게 비어 버린 심장을 그녀로 메우고 싶다는, 그런 아주 이기적이고 원초적인 욕구였다.

눈에도, 볼에도, 귓가에도, 목덜미에도, 닿을 수 있는 모든 부분에 흔적을 남겼다.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그녀의 온기를 빈틈없이 훔쳤다.

“당신, 진짜…….”

사루비아는 기어코 루퍼스를 밀쳐 냈다.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생리적인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퍼스는 멈칫거렸다.

너무 덤벼들었나.

“뭐가 문제지?”

“진짜 못 해서요.”

“…….”

그 말에 상처받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테지.

“뭐가 그리 급해요? 좀 천천히 해요.”

“너는 내가 그리 여유 있어 보이나?”

“네?”

“사루비아.”

루퍼스는 사루비아의 턱을 꾹 눌렀다.

“입 벌려.”

키스를 못 한다는 그녀의 놀림에 얼굴 붉히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전장에서 수십 달 동안 이어진 긴장과 불안감,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 것이라는 그 박탈감.

이 모든 것이 그를 조각조각 갈라놓았다.

이제는 정말 맹목적으로 그녀를 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죽어 버릴 것 같으니까.

루퍼스는 사루비아의 고개를 자신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의 입술이 사루비아의 위를 내리눌렀다.

입 안으로 자꾸만 뜨거운 감각이 무차별적으로 침입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안을 구석구석 누비고 있었다.

“흐…….”

사루비아의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몸이 더 달아올랐다.

더 보고 싶어.

더 만지고 싶어.

계속 키스를 이어 가며, 루퍼스는 사루비아의 등 뒤에 달린 옷끈을 풀어 헤쳤다.

자신의 등 뒤를 유영하는 손짓에 사루비아는 움찔거렸다.

“자, 잠깐만요!”

이미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