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입조심합시다
Sub Title。입조심
《01》 살았다! 그런데 빙의라니……?!
수많은 관중 가운데에 있는 것은 외로이 자리한 처형대였다. 그 처형대 위로 붉은 머리를 한 서늘한 얼굴의 여인이 올라왔다.
허름한 옷, 관중이 던지는 더러운 오물을 맞고 있으면서도 여인의 형형한 눈빛은 죽지 않았다.
“엘리네시아 아이샤르!”
그녀의 이름은 엘리네시아 아이샤르.
“황태자 데페르 로우렌스와 함께 역모를 꾀한 죄! 제2황자 아렌트 로우렌스, 그리고 황자비 앨리샤를 죽이려한 살인 미수죄! 더러운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한 죄! 그 모든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한다!”
황태자와 함께 모반 계획을 세우며 황가의 적통 혈통인 제2황자를 살해하려 했다. 급기야 성녀라고 불리는 황자비도 죽이려 한 것으로도 모자라 반역을 꾀하며 현 황제를 시해하려 하여 사람들은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희대의 악녀. 악마의 딸.
“엘리네시아 아이샤르의 사형을 집행한다!”
처형대의 칼날 아래 강제로 끌려가면서도 엘리네시아의 시선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있었다.
“너……!”
엘리네시아의 시선이 닿은 곳은 2황자 아렌트의 옆에 자리한 황자비이자 성녀인 앨리샤였다.
비슷한 이름, 하지만 전혀 다른 역할을 가졌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그 생명이 지금 이 자리에서 사라질 예정이었다.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었어!”
엘리네시아는 눈에 빨간 핏줄을 터뜨리면서 표독스럽게 외쳤다.
죽음의 순간이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엘리네시아는 자신과 다른 빛 아래에 있는 앨리샤를 보며 울부짖었다.
“……부디. 다음 생에는 진실로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하길 바랄게요.”
자신을 향해 무섭게 소리를 지르는 엘리네시아를 보며 앨리샤는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처형장 위에 서늘하게 빛나던 칼날은 엘리네시아의 목 위로 빠르게 떨어졌다.
희대의 악녀라 불리는 엘리네시아 아이샤르의 초라한 마지막이었다.
[<앨리샤> 2부 78화에서 발췌.]
* * *
“뭐, 그래. 나쁜 짓을 했으니 죽을 수도 있고. 처형당할 수도 있지.”
누구든 그렇지 않겠는가.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그것은 당연한 얘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왜 내가 그 악녀의 몸속에 들어온 건데?”
기가 막혔다.
몇 번, 아니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책이 닳도록 읽었던 소설 <앨리샤>. 그것도 모자라 웹툰으로 나온 것까지 모두 빠지지 않고 봤었다. 이 장면이 어디 나오냐고 묻는다면 단순히 몇 권인지뿐만 아니라 페이지, 심지어 줄 수까지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얘 몸속에 들어오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
홀로 방 안에서 붉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시현은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왜 이런 상황에 오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었다.
* * *
“드디어 끝……!”
점심을 먹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시현은 두 팔을 쭈욱, 펴며 찌뿌둥한 몸의 근육을 풀었다. 책상 위의 시계를 바라보니 시곗바늘이 저녁 7시 15분을 향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핸드폰의 불빛을 보며 시현은 조금 전까지 작업하던 업무 파일을 저장하고 껐다.
주섬주섬 어질러진 책상 위를 정리하고 짐을 챙긴 시현은 아직 업무가 덜 끝난 듯한 상사에게 말을 걸며 넌지시 퇴근을 하지 않냐는 것을 물어봤다.
“대리님, 많이 남으셨어요?”
“아아……. 이것만 마무리하면 다 끝나요. 시현 씨 먼저 퇴근해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퇴근하고 남은 사람은 대리와 시현, 바로 두 명뿐이었다. 평소라면 같이 퇴근하기 위해 기다렸겠지만, 오늘은 오랜 단짝 친구의 생일이었다. 미리 약속을 잡아 버려 시간을 미루기가 곤란했다.
“그럼……. 대리님 오늘은 먼저 가 볼게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슬쩍 다시 본 시계는 어느새 7시 20분을 향하여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친구 민아와 약속한 시각은 8시. 40분 정도 남았지만, 약속 장소까지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어머, 남자 친구?”
“아뇨, 아뇨! 제일 친한 친구예요. 여자 베프!”
여자 대리는 짓궂게 웃으며 놀리듯 물어 왔고 반사적으로 시현은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어떤 얼굴인지는 몰라도 바보 같은 얼굴인 건 확실할 거라고 생각한 시현이었지만 제 사정이야 어떻든 기다려 주지 않고 흘러가는 시곗바늘을 보며 급히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고생했어요, 친구랑 재밌게 시간 보내고, 내일 봐요.”
여자 대리는 초조해 보이는 시현의 모습에 다정하게 웃으며 조심히 가라고 인사를 건넸다. 금세 밝아지는 시현의 표정이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넵! 내일 뵙겠습니다, 대리님!”
씩씩하게 대답한 시현은 부랴부랴 회사에서 뛰어나갔다. 생일 축하를 위한 자리에 축하해 주는 사람이 늦어서야 쓰나. 시현은 약속 장소가 다행스럽게도 회사 근처라는 것을 위안 삼아 열심히 뛰었다.
“하아……. 아, 힘들어.”
육교를 건너서 조금만 가면 바로 친구의 생일 파티를 할 약속 장소가 있었다. 시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육교 밑에서 숨을 고르곤, 많은 수의 계단을 올려 보았다.
“……늦으면 날 죽이려 들겠지?”
육교만큼은 별로 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편히 걸어서 갔다가는 약속 시각에 늦을 거 같았기에 시현은 이를 악물고 서둘러 올라가기로 했다.
“……계단 한번 엄청 많네. 와, 너무 힘들어!!”
중간쯤 올라왔을까. 아직도 반 이상 남은 계단을 보며 오늘 같은 날 높지는 않아도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온 자신을 한없이 탓하고 싶었다. 누가 이렇게 야근을 할 줄 알았나. 시현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떠올리며 인상을 와그작, 일그러뜨렸다.
“이게 다 그 망할 부장 때문이지!”
이 건 마무리하고 퇴근해∼ 하며 얄밉게 말하고 자기는 유유자적 퇴근하던 부장을 떠올리며 시현은 이를 갈았다. 다시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올라가던 시현의 눈에 한 임산부가 띄었다.
“짐도 있는데 저런 몸으로 육교를 다니면 위험할 텐데…….”
만삭의 몸으로 장이라도 보고 돌아가는 것인지 한 손에는 짐을 들고 한 손에는 배를 받치고 위태롭게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던 시현의 핸드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을 확인한 시현이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 어디야! 왜 이렇게 안 와!?
받자마자 귀가 찌르르 울리는 앙칼지고 힘찬 목소리에 시현이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러워. 목소리 하나는 커서. 아, 귀 아파.
“다 와 가거든요∼ 조금만 더 기다려. 금방 갈게, 근처야.”
― 거짓말.
“사실이거든? 여기 사거리 앞 육교야. 여기만 건너면 금방인 거 알잖아.”
― 알겠어……. 5분 안에 튀어와! 알았지!
퉁명스러워도 보고 싶다는 뜻이 내포된 말에 푸스스 웃음을 지었다. 약속 시각까지는 조금 남았지만 그래도 재촉을 하는 모습이 밉지 않았다. 시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친구 민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리광 섞인 말에 웃으며 대답하던 순간.
“네네, 5분 안에 갈……”
임산부의 옆을 지나가려는 찰나, 위태롭게 보이던 임산부의 몸이 크게 휘청이는 것을 발견했다. 육교 밑으로 떨어질 것 같은 임산부를 향해 반사적으로 팔을 뻗으며 소리치는 시현의 목소리가 육교 위에 울려 퍼졌다.
“잠깐! 위험해요!!”
임산부의 팔을 잡았지만 넘어지는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시현은 임산부를 끌어안고 떨어지며 아스팔트 바닥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이 계단 위로 굴러떨어지는 충격으로 아파 왔지만, 품에 안겨 있는 임산부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아기가 있는걸.
‘아아……. 내가 원래 이런 착한 성격이 아닌데.’
남을 돕기 위해 죽을 걸 각오하다니 스스로도 황당하고 어이없는 선택에 실소를 짓던 그때 또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어떡하냐. 민아야.’
― 쿠웅!!
“꺄아아악!! 사람! 사람이 떨어졌어요!!”
“이, 임산부도 있어! 1, 119!! 119 불러요!”
“피…… 피!!”
겨우 뜬 눈으로 보이는 시야는 이미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임산부가 무사한지 무사하지 않은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이미 세상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판별할 수 없었다.
색색깔로 반짝이던 세상은 시현의 피로 인하여 붉은 세상으로 변했다.
― ……시현아? 시현아?!
“구급차부터 불러요!!”
사람들의 비명과 주변이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에서도 같이 떨어진 핸드폰에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전화로 인해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제 이름을 불리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말을 해 줄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생일 축하한다는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담아 떨어진 핸드폰으로 뻗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미안……. 네 생일, 축하해 주려고 했는데. 못 해 주겠다…….’
시현의 시야가 검게 물들어지며 세상과의 시간이 단절되었다.
Sub Title。입조심
《01》 살았다! 그런데 빙의라니……?!
수많은 관중 가운데에 있는 것은 외로이 자리한 처형대였다. 그 처형대 위로 붉은 머리를 한 서늘한 얼굴의 여인이 올라왔다.
허름한 옷, 관중이 던지는 더러운 오물을 맞고 있으면서도 여인의 형형한 눈빛은 죽지 않았다.
“엘리네시아 아이샤르!”
그녀의 이름은 엘리네시아 아이샤르.
“황태자 데페르 로우렌스와 함께 역모를 꾀한 죄! 제2황자 아렌트 로우렌스, 그리고 황자비 앨리샤를 죽이려한 살인 미수죄! 더러운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한 죄! 그 모든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한다!”
황태자와 함께 모반 계획을 세우며 황가의 적통 혈통인 제2황자를 살해하려 했다. 급기야 성녀라고 불리는 황자비도 죽이려 한 것으로도 모자라 반역을 꾀하며 현 황제를 시해하려 하여 사람들은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희대의 악녀. 악마의 딸.
“엘리네시아 아이샤르의 사형을 집행한다!”
처형대의 칼날 아래 강제로 끌려가면서도 엘리네시아의 시선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있었다.
“너……!”
엘리네시아의 시선이 닿은 곳은 2황자 아렌트의 옆에 자리한 황자비이자 성녀인 앨리샤였다.
비슷한 이름, 하지만 전혀 다른 역할을 가졌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그 생명이 지금 이 자리에서 사라질 예정이었다.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었어!”
엘리네시아는 눈에 빨간 핏줄을 터뜨리면서 표독스럽게 외쳤다.
죽음의 순간이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엘리네시아는 자신과 다른 빛 아래에 있는 앨리샤를 보며 울부짖었다.
“……부디. 다음 생에는 진실로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하길 바랄게요.”
자신을 향해 무섭게 소리를 지르는 엘리네시아를 보며 앨리샤는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처형장 위에 서늘하게 빛나던 칼날은 엘리네시아의 목 위로 빠르게 떨어졌다.
희대의 악녀라 불리는 엘리네시아 아이샤르의 초라한 마지막이었다.
[<앨리샤> 2부 78화에서 발췌.]
* * *
“뭐, 그래. 나쁜 짓을 했으니 죽을 수도 있고. 처형당할 수도 있지.”
누구든 그렇지 않겠는가.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그것은 당연한 얘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왜 내가 그 악녀의 몸속에 들어온 건데?”
기가 막혔다.
몇 번, 아니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책이 닳도록 읽었던 소설 <앨리샤>. 그것도 모자라 웹툰으로 나온 것까지 모두 빠지지 않고 봤었다. 이 장면이 어디 나오냐고 묻는다면 단순히 몇 권인지뿐만 아니라 페이지, 심지어 줄 수까지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얘 몸속에 들어오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
홀로 방 안에서 붉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시현은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왜 이런 상황에 오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었다.
* * *
“드디어 끝……!”
점심을 먹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시현은 두 팔을 쭈욱, 펴며 찌뿌둥한 몸의 근육을 풀었다. 책상 위의 시계를 바라보니 시곗바늘이 저녁 7시 15분을 향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핸드폰의 불빛을 보며 시현은 조금 전까지 작업하던 업무 파일을 저장하고 껐다.
주섬주섬 어질러진 책상 위를 정리하고 짐을 챙긴 시현은 아직 업무가 덜 끝난 듯한 상사에게 말을 걸며 넌지시 퇴근을 하지 않냐는 것을 물어봤다.
“대리님, 많이 남으셨어요?”
“아아……. 이것만 마무리하면 다 끝나요. 시현 씨 먼저 퇴근해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퇴근하고 남은 사람은 대리와 시현, 바로 두 명뿐이었다. 평소라면 같이 퇴근하기 위해 기다렸겠지만, 오늘은 오랜 단짝 친구의 생일이었다. 미리 약속을 잡아 버려 시간을 미루기가 곤란했다.
“그럼……. 대리님 오늘은 먼저 가 볼게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슬쩍 다시 본 시계는 어느새 7시 20분을 향하여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친구 민아와 약속한 시각은 8시. 40분 정도 남았지만, 약속 장소까지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어머, 남자 친구?”
“아뇨, 아뇨! 제일 친한 친구예요. 여자 베프!”
여자 대리는 짓궂게 웃으며 놀리듯 물어 왔고 반사적으로 시현은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어떤 얼굴인지는 몰라도 바보 같은 얼굴인 건 확실할 거라고 생각한 시현이었지만 제 사정이야 어떻든 기다려 주지 않고 흘러가는 시곗바늘을 보며 급히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고생했어요, 친구랑 재밌게 시간 보내고, 내일 봐요.”
여자 대리는 초조해 보이는 시현의 모습에 다정하게 웃으며 조심히 가라고 인사를 건넸다. 금세 밝아지는 시현의 표정이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넵! 내일 뵙겠습니다, 대리님!”
씩씩하게 대답한 시현은 부랴부랴 회사에서 뛰어나갔다. 생일 축하를 위한 자리에 축하해 주는 사람이 늦어서야 쓰나. 시현은 약속 장소가 다행스럽게도 회사 근처라는 것을 위안 삼아 열심히 뛰었다.
“하아……. 아, 힘들어.”
육교를 건너서 조금만 가면 바로 친구의 생일 파티를 할 약속 장소가 있었다. 시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육교 밑에서 숨을 고르곤, 많은 수의 계단을 올려 보았다.
“……늦으면 날 죽이려 들겠지?”
육교만큼은 별로 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편히 걸어서 갔다가는 약속 시각에 늦을 거 같았기에 시현은 이를 악물고 서둘러 올라가기로 했다.
“……계단 한번 엄청 많네. 와, 너무 힘들어!!”
중간쯤 올라왔을까. 아직도 반 이상 남은 계단을 보며 오늘 같은 날 높지는 않아도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온 자신을 한없이 탓하고 싶었다. 누가 이렇게 야근을 할 줄 알았나. 시현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떠올리며 인상을 와그작, 일그러뜨렸다.
“이게 다 그 망할 부장 때문이지!”
이 건 마무리하고 퇴근해∼ 하며 얄밉게 말하고 자기는 유유자적 퇴근하던 부장을 떠올리며 시현은 이를 갈았다. 다시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올라가던 시현의 눈에 한 임산부가 띄었다.
“짐도 있는데 저런 몸으로 육교를 다니면 위험할 텐데…….”
만삭의 몸으로 장이라도 보고 돌아가는 것인지 한 손에는 짐을 들고 한 손에는 배를 받치고 위태롭게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던 시현의 핸드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을 확인한 시현이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 어디야! 왜 이렇게 안 와!?
받자마자 귀가 찌르르 울리는 앙칼지고 힘찬 목소리에 시현이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러워. 목소리 하나는 커서. 아, 귀 아파.
“다 와 가거든요∼ 조금만 더 기다려. 금방 갈게, 근처야.”
― 거짓말.
“사실이거든? 여기 사거리 앞 육교야. 여기만 건너면 금방인 거 알잖아.”
― 알겠어……. 5분 안에 튀어와! 알았지!
퉁명스러워도 보고 싶다는 뜻이 내포된 말에 푸스스 웃음을 지었다. 약속 시각까지는 조금 남았지만 그래도 재촉을 하는 모습이 밉지 않았다. 시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친구 민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리광 섞인 말에 웃으며 대답하던 순간.
“네네, 5분 안에 갈……”
임산부의 옆을 지나가려는 찰나, 위태롭게 보이던 임산부의 몸이 크게 휘청이는 것을 발견했다. 육교 밑으로 떨어질 것 같은 임산부를 향해 반사적으로 팔을 뻗으며 소리치는 시현의 목소리가 육교 위에 울려 퍼졌다.
“잠깐! 위험해요!!”
임산부의 팔을 잡았지만 넘어지는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시현은 임산부를 끌어안고 떨어지며 아스팔트 바닥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이 계단 위로 굴러떨어지는 충격으로 아파 왔지만, 품에 안겨 있는 임산부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아기가 있는걸.
‘아아……. 내가 원래 이런 착한 성격이 아닌데.’
남을 돕기 위해 죽을 걸 각오하다니 스스로도 황당하고 어이없는 선택에 실소를 짓던 그때 또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어떡하냐. 민아야.’
― 쿠웅!!
“꺄아아악!! 사람! 사람이 떨어졌어요!!”
“이, 임산부도 있어! 1, 119!! 119 불러요!”
“피…… 피!!”
겨우 뜬 눈으로 보이는 시야는 이미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임산부가 무사한지 무사하지 않은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이미 세상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판별할 수 없었다.
색색깔로 반짝이던 세상은 시현의 피로 인하여 붉은 세상으로 변했다.
― ……시현아? 시현아?!
“구급차부터 불러요!!”
사람들의 비명과 주변이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에서도 같이 떨어진 핸드폰에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전화로 인해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제 이름을 불리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말을 해 줄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생일 축하한다는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담아 떨어진 핸드폰으로 뻗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미안……. 네 생일, 축하해 주려고 했는데. 못 해 주겠다…….’
시현의 시야가 검게 물들어지며 세상과의 시간이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