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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꿈이 아니야……?
깊게 잠들었던 시현은 얼굴을 따갑게 비추는 햇살에 눈살을 찡그렸다. 조금 더 자고 싶은데 아침 햇살 때문에 더 잘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자고 싶어 뒤척이던 시현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살았어?”
진짜 살아 있는 건가 의심이 든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 위에 올렸다. 심장이 뛰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심장은 아무 이상 없이 정상적인 박동으로 뛰고 있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분명 자신은 임산부를 감싸고 육교에서 떨어졌었다.
“……그 높이가 떨어져도 살 수 있는 높이였나?”
그때 느꼈던 고통 역시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이상하게도 몸은 어디 다친 곳 하나 없이 말짱했다.
“하.”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에 안심이되었을까. 시현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죽은 줄만 알았는데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쁘게 다가왔다.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다, 정말.”
그때는 최선의 선택을 다한 것이지만,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살았다는 기쁨에 취해 있던 시현의 눈에 낯선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응? 머리가 빨간색이네. 하하…….”
손가락에 휘감겨 오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며 시현은 실성한 듯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염색이라도 된 건가……. 그래, 그럴 수도…… 있을 리가 없잖아!”
실없다 여기며 스스로에게 딴죽을 건 시현은 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살아 있다면 시현이 있어야 할 곳은 병실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시현이 있는 곳은 병원도, 그렇다고 시현이 살던 집도 아니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시현이 있는 곳은 처음 보는 낯선 방이었다. 아이보리 톤을 바탕으로 꾸며진 방은 중세 유럽에서나 볼 법한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시현이 누워 있는 침대는 성인 남자 4명은 거뜬히 누워 잘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내가 왜 여기 있어?! 여기가 어디야……!”
시현은 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몸에 힘이 빠져 삐끗해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 일어난 시현은 먼저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곳이 한국이고, 21세기 세계라면 적어도 아무리 없다 해도 한 개는 있어야 할 고층 빌딩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현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넓은 정원과 멀리 보이는 저층의 현대에서는 볼 수 없을 법한 건축 양식을 한 건물들이었다.
“엘리!”
당황한 시현에게 창밖에서 낮은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만 빼꼼 내밀어 아래를 본 시현은 어쩐지 낯익은 외모의 남자가 보였다.
“일어났니? 잘 잤어?”
훤칠하게 잘생긴 미남이 자신을 올려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시현은 기계적으로 웃음을 지으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무언가를 두리번 찾았다.
“거울……!”
찾는 것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전신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고 시현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인물을 확인한 시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어째서……!!”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진 평범한 외모의 한국인이었던 채시현이 아니었다.
타오를 듯한 강렬한 붉은색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흘러내려 오고, 청순하다기보다는 고양이같이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날카로운 눈매. 하지만 눈동자는 검은 보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영롱한 분위기를 가졌고 코는 오뚝 솟아 인상이 한층 날카로워 보이며 입술은 연분홍빛의 색을 하고 있었다.
당황하고 놀란 얼굴마저도 아름다운 외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의 여인. 그런 낯선 여자가 시현 대신 거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거짓말……!”
진짜 누가 거짓말이라고 해 줬으면……! 시현은 눈앞에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퇴근하고 집에 가서 매일같이 읽던 소설. 완결이 되어서는 몇 번의 정독을 하면서 그사이에 있던 삽화의 인물을 본 게 벌써 수십 번이 넘었다.
‘엘리네시아 아이샤르.’
<앨리샤>라는 소설에 나오는 희대의 악녀. 권력과 명예에 눈이 멀어 황태자와 모의하여 반역을 꾀하다가 결국 여자주인공과 적통 혈통인 제2황자와 괴물 공작으로 인해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여자였다.
“왜 내가……. 하필 악녀라니……!”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시현이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이유였다.
“거짓말이지?”
한순간의 꿈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결코 꿈이 아니었다.
꿈이 아니란 걸 더욱 절실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머리를 쥐어뜯으면 생생한 통증이 두피를 타고 올라왔고, 뺨을 때리면 알싸한 쓰라림이 느껴졌다.
“하, 참. 허, 참.”
기가 차고 말이 안 나왔다.
“진짜 소설에서나 볼 법한 일이 나한테 일어났다면 누가 믿어?”
죽은 줄 알았더니 깨어나 보니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갔다? 그것도 소설 악역에?
누가 보면 정신병자라고 하며 당장 정신병원에 끌고 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
시현은 다시 창가로 다가가 창밖 밑을 내려 보았다. 조금 전에 있던 남자. 엘리네시아의 친오빠인 에셀레드가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다.
“엘리? 잘 잤니?”
“아……. 네, 음……. 뭐. 일단은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창문을 닫은 시현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엘리네시아의 몸에 들어온 것이고,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도 원래 몸을 찾을 방법도 모른다는 것이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게 빠를까, 체념하는 게 빠를까.”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 모습을 확인하던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 당황해서 잊고 있던 사실을 시현은 떠올릴 수 있었다.
“……뭐가 됐든 일단 살아남아야 가든 말든 하지.”
소설 내용대로라면 엘리네시아는 죽는다. 반드시 죽게 되어 있었다. 일단 돌아가든지, 여기서 버텨 내든지 하려면 살아야 했다.
“일단 살 방법부터 궁리를 해 보자.”
혼자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소심한 노크 소리에 시현은 고민하던 것을 멈추고 문 쪽을 보며 말했다.
“들어와요.”
“저어……. 아가씨,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주인님과 도련님도 기다리고 계세요.”
“아아…….”
시현은 레너드 백작과 에셀레드와의 아침 만찬이 준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이 세계 사람들과의 접촉이라니.
이미 아까 에셀레드와 인사 아닌 인사까지 나눈 터라 아프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그럼, 준비 좀 도와줄래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만찬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네, 네?”
말을 전하러 온 시녀가 어쩐지 겁을 먹고 시현을 보며 울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시현은 갑자기 왜 저러나 싶다가도 곧 시녀의 그런 태도가 이해가 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원래 몸의 주인이 좀 사납긴 했지.’
돈으로 부리는 사람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또 날카로운 성격 덕에 고용인들은 항상 몸을 사리고 있어야 했다.
그런 상대가 갑자기 존댓말을 하며 다정하게 말을 거니 이건 또 무슨 새로운 괴롭힘인가 하고 두려워할 만했다.
“곤란하면 다른 사람을 불러 줄래요?”
싫다는 사람 붙잡고 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이 몸의 주인을 도와주려고 자진하여 나서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지.
“도, 도와드릴게요!”
“그럼 부탁할게요.”
시현은 나긋하게 웃으며 시녀의 도움을 받았다.
시녀에게 하대하는 것이 맞겠지만 지금 엘리네시아의 몸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귀족인 엘리네시아가 아니라 평범한 한국인인 채시현이었다.
그런 그녀가 하루아침에 쉽게 사람에게 하대하며 막 부릴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엘리네시아 아이샤르라는 여인은 백작의 여식. 게다가 사치가 심하고 욕심이 많으며,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엘리네시아가 갑자기 태도가 이렇듯 정중하게 돌변하면 주변인은 두렵기 마련이리라.
폭풍 전야 속의 고요처럼.
“다, 다 되셨습니다.”
“고마워요.”
그나마 가장 심플해 보이는 연보랏빛의 드레스를 입은 엘리네시아는 거울을 한 번 보고는 결연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맺었다.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웃는 모습으로.’
어색하지 않고, 단정하게. 그리고 보는 사람이 불쾌하지 않을 미소로.
‘지금의 난 엘리네시아니까.’
지금부터는 엘리네시아로서 행동해야 함을 명심하며 시현, 아니 엘리네시아는 미소 지었다.
귀족으로서 살아가던 여자와 평범한 일생을 살아오던 자신의 몸짓에 차이가 드러날까 걱정했지만, 몸에 밴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모양인지 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익숙해져 갔다. 복도에 조용히 자신의 발소리가 울렸지만, 그 또한 곧 자연스럽게 공중으로 스며 들어갔다.
“아버지랑 오라버니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내려왔는데.”
1층으로 내려가니 집사 복장을 한 노년의 남성이 보였다. 엘리네시아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에셀레드와 레너드의 위치를 물었다.
“백작님과 도련님은 현재 홀에 모여 계십니다.”
홀에 모여 있다는 말에 걸음을 옮기려던 엘리네시아는 자신이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했다. 몸은 엘리네시아라고 할지라도 그 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채시현이라는 한국인이었다. 당연히 살던 집과 구조가 다른 곳인데 홀이 어디에 있는지 알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떡하지? 길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랬다가는 기억상실이니, 이상한 얘기를 하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반갑지 않았다. 자다가 일어났는데 기억상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머리를 굴리던 엘리네시아는 집사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따라가면…… 되겠지?’
집사의 뒤를 따라 몇 걸음 걸어 도착한 곳에는 심플하면서도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이 있었다. 집사가 직접 문을 열어 주고, 엘리네시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여기구나. 가족들이 모여 있는 홀이라는 곳이 여기라는 건가. 조금 전 걸어왔던 길을 슬쩍 돌아본 엘리네시아는 집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마디 건넨 후 홀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네시아가 홀로 들어가자 문 앞에 혼자 남은 노년의 집사는 놀란 얼굴을 하고 그녀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신 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집사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아이샤르 백작가에서 집사가 된 지도 벌써 30년. 아이샤르 백작가의 자제들이 태어나고 지금까지 자라오는 모습까지 모두 지켜봐 왔었다.
어렸을 적의 엘리네시아는 마음이 여리고, 착한 심성의 아이였다. 하지만 사교계에 데뷔한 이후 갑자기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더니 평민들이나 저택의 하인들을 같은 사람으로서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배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누구보다 욕심이 많아지고 탐욕스러워졌다.
그런 엘리네시아가 하룻밤 사이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집사인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며 아이샤르 백작가의 총괄 집사인 헤롤은 나쁘지 않은 기분에 입가에 설핏 웃음을 지으며 저택의 하인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홀에 들어서며 잠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린 엘리네시아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자리로 추정되는 빈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채 마음을 다스리기도 전에 엘리네시아에게 건네져 오는 다정한 목소리가 있었다.
“좋은 아침이구나.”
백작의 인사에 엘리네시아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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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꿈이 아니야……?
깊게 잠들었던 시현은 얼굴을 따갑게 비추는 햇살에 눈살을 찡그렸다. 조금 더 자고 싶은데 아침 햇살 때문에 더 잘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자고 싶어 뒤척이던 시현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살았어?”
진짜 살아 있는 건가 의심이 든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 위에 올렸다. 심장이 뛰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심장은 아무 이상 없이 정상적인 박동으로 뛰고 있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분명 자신은 임산부를 감싸고 육교에서 떨어졌었다.
“……그 높이가 떨어져도 살 수 있는 높이였나?”
그때 느꼈던 고통 역시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이상하게도 몸은 어디 다친 곳 하나 없이 말짱했다.
“하.”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에 안심이되었을까. 시현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죽은 줄만 알았는데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쁘게 다가왔다.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다, 정말.”
그때는 최선의 선택을 다한 것이지만,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살았다는 기쁨에 취해 있던 시현의 눈에 낯선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응? 머리가 빨간색이네. 하하…….”
손가락에 휘감겨 오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며 시현은 실성한 듯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염색이라도 된 건가……. 그래, 그럴 수도…… 있을 리가 없잖아!”
실없다 여기며 스스로에게 딴죽을 건 시현은 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살아 있다면 시현이 있어야 할 곳은 병실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시현이 있는 곳은 병원도, 그렇다고 시현이 살던 집도 아니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시현이 있는 곳은 처음 보는 낯선 방이었다. 아이보리 톤을 바탕으로 꾸며진 방은 중세 유럽에서나 볼 법한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시현이 누워 있는 침대는 성인 남자 4명은 거뜬히 누워 잘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내가 왜 여기 있어?! 여기가 어디야……!”
시현은 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몸에 힘이 빠져 삐끗해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 일어난 시현은 먼저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곳이 한국이고, 21세기 세계라면 적어도 아무리 없다 해도 한 개는 있어야 할 고층 빌딩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현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넓은 정원과 멀리 보이는 저층의 현대에서는 볼 수 없을 법한 건축 양식을 한 건물들이었다.
“엘리!”
당황한 시현에게 창밖에서 낮은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만 빼꼼 내밀어 아래를 본 시현은 어쩐지 낯익은 외모의 남자가 보였다.
“일어났니? 잘 잤어?”
훤칠하게 잘생긴 미남이 자신을 올려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시현은 기계적으로 웃음을 지으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무언가를 두리번 찾았다.
“거울……!”
찾는 것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전신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고 시현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인물을 확인한 시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어째서……!!”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진 평범한 외모의 한국인이었던 채시현이 아니었다.
타오를 듯한 강렬한 붉은색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흘러내려 오고, 청순하다기보다는 고양이같이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날카로운 눈매. 하지만 눈동자는 검은 보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영롱한 분위기를 가졌고 코는 오뚝 솟아 인상이 한층 날카로워 보이며 입술은 연분홍빛의 색을 하고 있었다.
당황하고 놀란 얼굴마저도 아름다운 외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의 여인. 그런 낯선 여자가 시현 대신 거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거짓말……!”
진짜 누가 거짓말이라고 해 줬으면……! 시현은 눈앞에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퇴근하고 집에 가서 매일같이 읽던 소설. 완결이 되어서는 몇 번의 정독을 하면서 그사이에 있던 삽화의 인물을 본 게 벌써 수십 번이 넘었다.
‘엘리네시아 아이샤르.’
<앨리샤>라는 소설에 나오는 희대의 악녀. 권력과 명예에 눈이 멀어 황태자와 모의하여 반역을 꾀하다가 결국 여자주인공과 적통 혈통인 제2황자와 괴물 공작으로 인해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여자였다.
“왜 내가……. 하필 악녀라니……!”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시현이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이유였다.
“거짓말이지?”
한순간의 꿈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결코 꿈이 아니었다.
꿈이 아니란 걸 더욱 절실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머리를 쥐어뜯으면 생생한 통증이 두피를 타고 올라왔고, 뺨을 때리면 알싸한 쓰라림이 느껴졌다.
“하, 참. 허, 참.”
기가 차고 말이 안 나왔다.
“진짜 소설에서나 볼 법한 일이 나한테 일어났다면 누가 믿어?”
죽은 줄 알았더니 깨어나 보니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갔다? 그것도 소설 악역에?
누가 보면 정신병자라고 하며 당장 정신병원에 끌고 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
시현은 다시 창가로 다가가 창밖 밑을 내려 보았다. 조금 전에 있던 남자. 엘리네시아의 친오빠인 에셀레드가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다.
“엘리? 잘 잤니?”
“아……. 네, 음……. 뭐. 일단은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창문을 닫은 시현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엘리네시아의 몸에 들어온 것이고,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도 원래 몸을 찾을 방법도 모른다는 것이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게 빠를까, 체념하는 게 빠를까.”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 모습을 확인하던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 당황해서 잊고 있던 사실을 시현은 떠올릴 수 있었다.
“……뭐가 됐든 일단 살아남아야 가든 말든 하지.”
소설 내용대로라면 엘리네시아는 죽는다. 반드시 죽게 되어 있었다. 일단 돌아가든지, 여기서 버텨 내든지 하려면 살아야 했다.
“일단 살 방법부터 궁리를 해 보자.”
혼자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소심한 노크 소리에 시현은 고민하던 것을 멈추고 문 쪽을 보며 말했다.
“들어와요.”
“저어……. 아가씨,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주인님과 도련님도 기다리고 계세요.”
“아아…….”
시현은 레너드 백작과 에셀레드와의 아침 만찬이 준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이 세계 사람들과의 접촉이라니.
이미 아까 에셀레드와 인사 아닌 인사까지 나눈 터라 아프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그럼, 준비 좀 도와줄래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만찬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네, 네?”
말을 전하러 온 시녀가 어쩐지 겁을 먹고 시현을 보며 울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시현은 갑자기 왜 저러나 싶다가도 곧 시녀의 그런 태도가 이해가 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원래 몸의 주인이 좀 사납긴 했지.’
돈으로 부리는 사람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또 날카로운 성격 덕에 고용인들은 항상 몸을 사리고 있어야 했다.
그런 상대가 갑자기 존댓말을 하며 다정하게 말을 거니 이건 또 무슨 새로운 괴롭힘인가 하고 두려워할 만했다.
“곤란하면 다른 사람을 불러 줄래요?”
싫다는 사람 붙잡고 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이 몸의 주인을 도와주려고 자진하여 나서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지.
“도, 도와드릴게요!”
“그럼 부탁할게요.”
시현은 나긋하게 웃으며 시녀의 도움을 받았다.
시녀에게 하대하는 것이 맞겠지만 지금 엘리네시아의 몸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귀족인 엘리네시아가 아니라 평범한 한국인인 채시현이었다.
그런 그녀가 하루아침에 쉽게 사람에게 하대하며 막 부릴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엘리네시아 아이샤르라는 여인은 백작의 여식. 게다가 사치가 심하고 욕심이 많으며,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엘리네시아가 갑자기 태도가 이렇듯 정중하게 돌변하면 주변인은 두렵기 마련이리라.
폭풍 전야 속의 고요처럼.
“다, 다 되셨습니다.”
“고마워요.”
그나마 가장 심플해 보이는 연보랏빛의 드레스를 입은 엘리네시아는 거울을 한 번 보고는 결연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맺었다.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웃는 모습으로.’
어색하지 않고, 단정하게. 그리고 보는 사람이 불쾌하지 않을 미소로.
‘지금의 난 엘리네시아니까.’
지금부터는 엘리네시아로서 행동해야 함을 명심하며 시현, 아니 엘리네시아는 미소 지었다.
귀족으로서 살아가던 여자와 평범한 일생을 살아오던 자신의 몸짓에 차이가 드러날까 걱정했지만, 몸에 밴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모양인지 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익숙해져 갔다. 복도에 조용히 자신의 발소리가 울렸지만, 그 또한 곧 자연스럽게 공중으로 스며 들어갔다.
“아버지랑 오라버니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내려왔는데.”
1층으로 내려가니 집사 복장을 한 노년의 남성이 보였다. 엘리네시아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에셀레드와 레너드의 위치를 물었다.
“백작님과 도련님은 현재 홀에 모여 계십니다.”
홀에 모여 있다는 말에 걸음을 옮기려던 엘리네시아는 자신이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했다. 몸은 엘리네시아라고 할지라도 그 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채시현이라는 한국인이었다. 당연히 살던 집과 구조가 다른 곳인데 홀이 어디에 있는지 알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떡하지? 길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랬다가는 기억상실이니, 이상한 얘기를 하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반갑지 않았다. 자다가 일어났는데 기억상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머리를 굴리던 엘리네시아는 집사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따라가면…… 되겠지?’
집사의 뒤를 따라 몇 걸음 걸어 도착한 곳에는 심플하면서도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이 있었다. 집사가 직접 문을 열어 주고, 엘리네시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여기구나. 가족들이 모여 있는 홀이라는 곳이 여기라는 건가. 조금 전 걸어왔던 길을 슬쩍 돌아본 엘리네시아는 집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마디 건넨 후 홀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네시아가 홀로 들어가자 문 앞에 혼자 남은 노년의 집사는 놀란 얼굴을 하고 그녀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신 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집사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아이샤르 백작가에서 집사가 된 지도 벌써 30년. 아이샤르 백작가의 자제들이 태어나고 지금까지 자라오는 모습까지 모두 지켜봐 왔었다.
어렸을 적의 엘리네시아는 마음이 여리고, 착한 심성의 아이였다. 하지만 사교계에 데뷔한 이후 갑자기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더니 평민들이나 저택의 하인들을 같은 사람으로서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배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누구보다 욕심이 많아지고 탐욕스러워졌다.
그런 엘리네시아가 하룻밤 사이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집사인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며 아이샤르 백작가의 총괄 집사인 헤롤은 나쁘지 않은 기분에 입가에 설핏 웃음을 지으며 저택의 하인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홀에 들어서며 잠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린 엘리네시아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자리로 추정되는 빈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채 마음을 다스리기도 전에 엘리네시아에게 건네져 오는 다정한 목소리가 있었다.
“좋은 아침이구나.”
백작의 인사에 엘리네시아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입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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