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1. 참전(1)

<1부>





아일라는 제 생에 가장 화려할 게 분명한 식탁을 몰래 손으로 쓸어 보았다. 차가운 대리석은 마치 보석처럼 매끄러웠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제 손이 너무도 볼품없어 보일 정도로. 딱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 식탁 위의 모든 식기와 그릇들은 순금으로 이루어져 영원할 것처럼 번쩍거렸으며, 담긴 음식들은 생전 처음 보는 윤기와 향을 뿜어냈다. 그 사이에 장식된 꽃들은 물을 잔뜩 머금어 몹시 싱그러웠다.

이 모든 것들은 단 한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 그분은 귀하고 귀한 분, 그리고 천하고 천한 것.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맨발을 보다가 그런 상념에 잠시 빠져들었다.

“아일라!”

아일라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식탁의 한 귀퉁이에서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고작 한 귀퉁이를 잠시 어루만진 것뿐이었으나 마치 못할 짓을 한 것마냥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아일라는 식탁을 등진 뒤 깊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자신을 부른 이는 테티스 님의 신임 받는 여종, 델레나였다.

“예. 델레나 님.”

델레나는 검은 머리의 볼품없는 여종을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니. 테티스 님께서 아킬레우스 님을 찾으신다.”

“예.”

그 말은 길고 길었던 성인식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차분히 대답하며 조금 더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시선 끝에는 오로지 델레나의 키톤 끝자락과 맨발만이 보일 뿐이었다.

“어서 가서 그분을 모시고 와.”

그 말을 뒤로한 채 아일라는 뒷걸음질로 걸음을 옮기다 이내 뒤돌아 빠르게 걸었다. 왕성 내부는 항상 보아 익숙했던 것들이 어색해 보일 정도로 오늘따라 더 화려하고 반들반들 빛이 났다.

미로 같은 복도에는 밤을 비춰 주는 횃불의 그림자가 바람 따라 넘실거리고, 복도의 중간중간 내어진 창문으로 여름밤의 짙은 풀향기가 들어찼다.

이 길고 긴 복도의 끝자락에 가장 귀한 분이 머무는 방이 있었다.

제 키를 훌쩍 넘는 크고 무거운 문, 그것에 조각된 것은 왕가의 문양과 무엇이든 뚫는 창, 무엇이든 막아 내는 방패, 그리고 강의 신의 얼굴.

위용을 뽐내는 문 앞에 선 아일라가 자신을 알렸다.

“아킬레우스 님. 아일라입니다.”

“…….”

“아킬레우스 님, 아일라…….”

“들어와라.”

단 두 번 만에 허락이 떨어지자 놀란 아일라는 눈을 크게 떴다. 웬일일까, 최소 다섯 번은 불러야 대답을 할까 말까 한 분이셨는데. 어쨌든 주인은 퍽 기분이 좋아 보였고, 주인의 기분이 좋은 것만큼 종들에게 다행인 것은 없었다. 아일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금으로 장식된 복도보다 넓고 화려한 방 안이었으나 내부는 몹시도 어두웠다. 걸음을 얼마 옮기지 않아 발치에 옷자락이 걸렸다. 아일라는 늘 있는 일인 양 허리를 숙여 옷자락을 주워 들었다. 얇은 촉감을 보니 여인들의 페플로스 같았다. 즉, 주인의 옷은 아니다.

‘또구나…….’

곧 드러날 광경이 훤한 탓에 아일라는 작은 주먹을 말아 쥐고는 조심스레 그의 침실로 다가갔다. 침실을 밝히는 어슴푸레한 등 때문에 사물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덕분에 아일라는 그의 침상에 늘어진 두 여인의 여체를 보고도 못 본 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끝에 감도는 냄새는 아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사람의 땀 냄새와 이제는 익숙해진 비릿하고 역한 냄새. 매번 반복되는 일상임에도 마주할 때마다 귓가와 볼에 열이 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킬레우스 님…… 테티스 님께서 찾으십니다.”

“알고 있어.”

시원치 않은 대답. 오늘은 절대 늦으시면 안 된다 전해야 하는데도 어쩐지 그의 앞에만 서면 발끝은 저절로 옴짝거렸고 말 한마디 내뱉기가 늘 어려웠다. 아일라는 널따란 침상에 누워 자연스럽게 여인들의 나체를 희롱하고 있는 남자를 흘긋거리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조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여자의 몸을 탐하는 데 여념이 없다. 도톰하게 달아오른 남자의 입술이 이름 모를 여인의 가슴에서 오목한 배꼽까지 흐르더니 은밀한 곳에 닿기 직전에서야 멈추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색정적인 광경. 아일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오늘은 이 나라의 왕자인 아킬레우스 님의 성인식 날이었다. 왕궁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고, 성안은 가깝게는 로크리스, 멀게는 이타카에서 온 손님들로 이미 북적였으나, 주인공인 제 주인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그런 와중에 아일라는 ‘그의 나이를 잘못 셈한 것은 아닐까.’라는 불경한 생각을 했다. 커다란 침상의 끝까지 닿는 큰 키, 움직일 때마다 불거지는 근육들과 단단하고 번들거리는 육체는 이제 막 성년을 맞는 남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성년이 되신 분께서 저리 난잡하게…….’

아일라는 제 주제넘은 생각을 깨닫고는 작게 머리를 털며 생각을 지웠다. 혹여라도 그럴 일은 없겠다마는 누군가 제 불경한 생각을 읽거나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분명 큰 벌을 받을 테다.

그런 그녀를 느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킬레우스는 이리저리 변하는 여종의 얼굴에 그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자니 더 놀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감겨 오는 여인들의 몸에서 나는 짙은 분내도 더 이상 참고 있기 어려웠다.

모든 게 다 귀찮아진 아킬레우스가 드디어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드러난 나신을 침상 위의 여인들이 진득한 눈으로 훑는다.

“머리가 더러워졌어. 빗겨라.”

“……예.”

어찌나 험하게 뒹군 것인지 아침에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던 침상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절로 분한 마음이 솟구치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 아킬레우스의 치장이 먼저였다. 아일라는 올라오는 한숨을 참으며 빗을 찾아 들고 와 그의 뒤에 섰다.

남성적인 목덜미에 닿는 금발은 매끄러웠으나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다. 아일라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머리를 빗어 내렸다. 마지막으로 금 왕관을 머리에 올리기 무섭게 아킬레우스의 표정이 굳었다.

“왕관은 치워라.”

검이라도 빼 들 것만 같은 서늘한 명령. 그럼에도 왕관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건 이 나라의 진정한 왕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리고 가져야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아킬레우스 님. 테티스 님께서……!”

“테티스 님, 테티스 님. 네 입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남성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에 날 선 빛이 어린다. 제 머리에 얹은 왕관을 직접 빼낸 그는 침상 쪽으로 왕관을 던져 버렸다. 그 행태에 놀라 신음 소리 한 번 낼 새도 없었다. 고귀한 것의 가치를 알 리 없는 여인들은 그저 번쩍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왕관을 갖기 위해 옥신각신했다. 그 모습을 아일라는 허망한 얼굴로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뭐하는 거지? 어서 옷을 가져와라.”

그의 신경질적인 명령에 아일라는 그저 조용히 화려한 키톤을 가져와 그의 남은 치장을 도왔다. 어느새 둘만 남은 방 안, 사브작거리는 천의 소음만이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정적을 채웠다.

마지막으로 그의 발을 향유로 씻어 내는 일이 끝나서야 이 숨 막히는 정적에서 몰래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그의 발치에서 막 몸을 일으킬 때였다.

“성인이 되면 지긋지긋한 네 눈동자를 피할 수 있는 건가?”

“그것 역시…… 테티스 님께서 정하실 일입니다.”

“안 그래도 그것부터 간청 드릴 생각이야.”

“…….”

“기대하는 게 좋을걸.”

불경하게도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떨쳐 내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기에. 테티스 님의 과보호, 아니 집착에 큰 반항심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모를 리 없었다. 아일라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를 떠나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킬레우스는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낮게 내려뜬 눈과 감정을 숨기려 노력하는 진땀 어린 표정이 어쩐지 그의 신경을 긁는다. 건들이지 마라, 다가오지 마라, 말을 걸지도 마라. 그런 억지를 부려도 그녀는 매번 그에게 순종적이었다. 그 탓일까, 그녀를 마주할 때면 이토록 신경질이 이는 이유가.

퍽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은 감정의 홍수를 피하려 아킬레우스는 항상 그랬듯 무심히 시선을 돌려 아일라를 외면했다. 아니, 사실 모든 것은 무관심해 보이기 위함이었다.



***



“아킬레우스, 너무 늦었구나. 여기 있는 많은 분들이 모두 너를 기다리고 계셨단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아킬레우스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테티스를 바라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사과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바라본다고 하기엔 너무도 얼음장 같은 표정이었기에, 그곳에 있는 누구라도 그 사과가 본심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들은 알면서도 모른 척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위용과 외관을 훔쳐보기에 바빴다.

“아니, 아니다. 원래 주인공은 늦는 법이잖니.”

“하하하! 그렇지요. 그렇고말고요.”

테티스의 말에 여러 장로들과 귀족들, 타국에서 온 이름 모를 손님들은 가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둘러싼 이들이 뭐라고 칭송하든 아킬레우스는 테티스의 귀에 달린 커다랗고 사치스러운 귀걸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바다를 담은 듯한 새파란 보석이 박힌 귀걸이는 밤중에도 빛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대리석 식탁 위에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음식과 빛나는 식기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의 매끈한 입가에 비웃음과 비슷한 웃음이 걸렸다. 그 웃음을 본 사람들은 그의 기분이 풀렸다 생각하고는 이때다 싶어 칭송 어린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펠레우스 님께서는 얼마나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이리도 아름답고 강건한 분을 아들로 두셨으니…… 세상을 다 가지신 것 아닙니까? 허허허!”

“그렇소. 소문으로만 듣고 상상했던 분을 이리 뵙게 되니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테티스 님, 얼마나 자랑스러우실지……!”

“전무후무할 영웅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방문객들의 끝없이 이어지는 아첨과 발밑에 쌓여 가는 선물함에 펠레우스 왕과 테티스는 그저 당연하다는 듯 여유롭게 웃음 지었다.

실제로 아킬레우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은 저들끼리 은밀히 귀엣말을 나누기까지 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프티아의 왕자는 상상보다, 소문보다 더 아름답고 늠름한 이구나.

한결같이 냉철함을 잃지 않는 표정은 마치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신처럼 고귀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런 그들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소문의 신탁이 정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테티스가 낳는 아들은 아비를 뛰어넘을 것이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 신탁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워 신들의 사랑을 받았던 테티스가 고작 인간들의 왕과 인연을 맺은 것이 그 발칙한 신탁 때문이라는 소문을.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향하는 호기심 어린, 경외하는, 또 누군가는 샅샅이 재단하는 수십 쌍의 눈동자들을 전부 베어 버리고 싶었다.

경멸을 채 숨기지 못한 아킬레우스의 눈동자가 이내 연회장 끝자락에 닿았다. 제 여종, 아일라였다. 천한 것은 배가 고프기라도 한 것인지 식탁 위의 음식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토록 화려한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하루 종일 뛰어다녔을 테니 배고플 만도 하지. 그는 알게 모르게 쯧, 혀를 찼다.

잠시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아킬레우스는 시선을 옮겨 춤을 추는 무희들을 바라보았다. 무심한 눈빛에 화려한 무희들이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온다. 역겨운 기분에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생에 한 번뿐인 성인식. 이제는 완연한 성인임에도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이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있는 게 고작인 상황에 아킬레우스는 이곳에 모인 모두를 경멸하다가 자신을 경멸했다.

무료한 시선은 돌고 돌아 다시 음식을 나르기 시작하는 아일라에게 닿았다. 그는 아일라의 손등을 끈적하게 어루만지는 한 귀족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제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아버지 간청이 있습니다.”

한참 객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왕, 펠레우스는 제 발밑에 무릎 꿇는 아들의 모습에 잠시 당황한 듯싶더니 이내 인자하게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보는 눈이 많았다. 그는 최대한 사랑을 듬뿍 담은 인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 그래 자랑스러운 아들아. 성인식을 맞이한 네 간청을 어찌 못 들은 체하겠느냐.”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킬레우스의 눈빛이 검게 빛났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은 눈동자 속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만큼 참아 주었으면 이제는 끝난 것이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제 운명을 쥐고 흔들게 놔두지는 않을 테니.

멀리서 귀족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테티스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듯 성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