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1. 참전(2)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아킬레우스!”

드물게 여유를 잃은 테티스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자 순식간에 연회장 안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객들은 곧 저들끼리 숙덕이기 시작했다.

“트로이 전쟁이라니……! 아가멤논이 그리스 전역에 요청한 전쟁 말인가?”

“아직 나이가…….”

“그런 것은 상관없다더군. 아가멤논 왕은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라며 젊은이들을 부추기고 있어.”

떠벌리는 귀족 옆에 선 여인이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끔찍한 전쟁이 될 텐데…….”

곧 일어날 커다란 전쟁과 해협을 감도는 전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겁이 없는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모를 트로이의 작은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를 납치한 사건은 이미 그리스 대륙에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전사의 명예에 죽고 산다는 스파르타가 트로이를 두고 볼 리 없었다. 평화는 금이 갔고, 단숨에 깨어졌다. 지금 그리스는 그런 상황이었다.



헬레네, 그 여자가 아프로디테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아킬레우스는 궁금하지도 않은 여자의 얼굴을 그려 보다가 저 멀리 종종거리는 여종을 발견하고 조소했다. 그래 봤자 여자. 거기서 거기 같건만. 고작 여자 하나에 눈에 불을 켜고 분해하는 이들이 우스웠다. 허나, 이 전쟁은 분명 기회였고 무엇보다 자신이 있었다. 날고 긴다는 영웅들이 참전한다는 전쟁에서 운명을 뒤집어 신들의 발치를 모욕할 자신이.

그러니 전쟁에서 약탈이나 즐기는 아가멤논과 구역질 나는 메넬라오스의 참전 명령에 따른 것 아닌가.

“……허락하지 않겠다.”

펠레우스 왕은 나지막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대답에 그 누구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모두가 대답을 기다리듯 아킬레우스를 바라보았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하셔도 가겠습니다.”

허락하지 않아도 가겠다. 그의 대답에 아킬레우스를 제외한 그곳의 모든 이들은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침통해졌다. 이제 아킬레우스는 성인이 되었고 그 누구도 그의 결정과 자유를 막을 수 없었기에.

어두운 정적과 가득한 한숨을 깨트린 이는 테티스였다. 어깨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키톤 자락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 테티스는 제 아들인 아킬레우스 앞에 섰다.

“네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네 안위를 걱정하는 부모를 위해 한 가지 청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어느새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진 장성한 아들을 올려다보며 이 순간 그저 어미일 뿐인 테티스는 그의 얼굴을 깨어질까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 나는 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것을 원했습니다.”

딱딱한 아들의 대답에 테티스는 아들에게 매달리며 연극조로 호소했다.

“마지막이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야. 그러니 이 어미의 청을 모른 척하지 말아 다오.”

아킬레우스는 제 얼굴을 어루만지며 간절히 애원하는 어머니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나이가 의심될 만큼 아름다운 여자의 모든 것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아킬레우스는 테티스의 손길을 얼굴을 돌려 피했다. 테티스는 허공의 빈손을 잠시 바라보더니 손을 내렸다.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무엇입니까?”

그가 그렇게 물었을 때 이미 악사들은 연주를 그만둔 지 오래였다. 종들은 음식과 술을 나르는 일을 멈춘 상태였으며, 각자 즐겁게 대화하던 객들 역시 무거운 분위기에 침통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아일라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고 서성거렸다.

술병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지긋지긋하군.’

그리 말하던 주인의 냉담한 얼굴도 떠오른다. 아일라는 초조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저 멀리 주인을 살피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혹, 감히 저 따위가 지긋지긋하다 하여 그가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까지 나갈 일은 없겠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의 존재가 그를 부채질한 것은 아닐까 싶어 두려웠다.

아닐 것이다. 그는 그저 이 왕국을, 왕자라는 자신의 출생을 거슬려 할 뿐이니까. 그는 한 나라의 왕보다도 전사이길, 영웅이길 원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자신을 옥죄는 모든 것들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뿐이니까.

‘전쟁이라니…….’

그럼에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절대 인자하고 좋은 주인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평생 모셔 온 주인이었다.

그런 그를 전쟁터로, 그것도 아주 위험한 전쟁터로 보내야 한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후련한 것일까, 걱정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가 안타까운 것일까.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아일라는 쿵쿵 뛰어 대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보잘것없는 자신이 주인을 불쌍히 여기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없겠지. 한숨을 폭 내쉬며 항상 그랬듯이 그의 뒷모습만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인간이란 그렇지 않은가, 단 한 치 앞에 일어날 일조차도 모르는 것이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잠시 동안이라도 안타깝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이리라.

“아일라, 네 여종을 데리고 가거라. 나 대신이라고 생각하며 제대로 아껴 주고, 무엇보다도…… 네 곁에서 떼어 놓지 말아 다오. 그것이 어미로서 마지막 부탁이란다. 혹, 이마저도 거부한다면.”

“…….”

“이 어미의 장례를 치르고 떠나야 할 거야.”

테티스의 단호한 부탁 아닌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아일라가 들고 있던 술병이 바닥에 곤두박질친 것은, 그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그러니까 생각해 보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좀처럼 이해 가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바람이 매섭던 겨울날 신전 앞에 버려진 고아를 한 나라의 왕비가 직접 거둬들인 것도, 게다가 그 어린 젖먹이를 제 아들과 함께 키우다시피 한 것도, 물론 아일라는 오롯이 여종으로서 자랐으나 그 모든 것들은 절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테티스 님을 거스를 수 있을 리 없어.’

아일라에게 테티스는 단순히 목숨을 살려 준 주인이 아니었다. 신들이 비루한 여종의 마음 따위를 읽는다면 노할지도 모르겠으나 아일라에게 테티스는 신,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였으니까.

“테티스 님…….”

“그래, 아일라. 이리 좀 더 다가오렴.”

테티스의 부름에 아일라는 늦은 밤 그녀의 방을 찾았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아일라는 엉거주춤한 태도로 멀찍이 서 있다가 그녀의 가벼운 손짓에 조금 더 다가섰다.

테티스의 방 안 좀 더 깊은 곳에 위치한 침실에서는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값을 치러야 할 것만 같은 고귀한 향기가 풍겼고, 반쯤 벗은 상태의 그녀는 침상 위에 엎드려 누운 채 여종의 안마를 받고 있었다.

아들이 성인식을 기점으로 성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드물게 여유를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처럼 테티스는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주인이었으나 주인이 종들의 이해를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아일라는 테티스의 가까이에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그 공손한 태도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테티스가 아일라의 거친 손끝을 살짝 잡았다.

“……내가 이상해 보일 테지. 안 그러니?”

“아, 아닙니다. 테티스 님. 제가 어찌…….”

“고개를 들렴.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고 싶은데.”

테티스의 말에 아일라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테티스는 비스듬히 누워 말없이 제 앞에 선 여종을 하나둘 뜯어보았다.

검은 머리칼은 구불거리며 허리에 닿았고, 좀처럼 타지 않는 하얀 살결과 마른 몸은 병약한 느낌이 들게 했다. 또래보다 작은 키와 몸집을 가진 아일라는 특출날 것 없는 이목구비였으나 딱히 거슬리는 부분도 없었다.

테티스는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이 여종의 어릴 적을 알았다. 아주 갓난아기일 적부터 이리 성숙한 여자가 되기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나의 보물.”

고작 여종 따위에게 던지는 말치고는 과했다. 어쩐지 온몸을 감싸는 섬뜩한 기운에 아일라가 한 걸음 그녀에게서 물러나자 일순, 당황한 그녀의 눈과 테티스의 새파란 눈동자가 마주쳤다. 제 생각을 모두 읽어 버릴 듯 깊은 눈. 테티스는 가끔 자신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허공으로 피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아일라는 날카롭게 변하는 테티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긴말할 필요 없을 것 같구나. 너는 아킬레우스를 따라 트로이에 가렴.”

방금 전의 부드러운 말투와는 완연히 다른 단호한 음성이었다. 단숨에 겁에 질린 아일라는 얼결에 음성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절대 아킬레우스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거부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 정도는. 혹여 전쟁터에서 죽게 된다 하더라도 테티스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니까.

그럼에도 한때는 어째서 테티스 님께서는 별 볼 일 없는 저를 붙들고 아킬레우스 님의 곁에서 한시라도 떠나지 말라 하시는 것인지 궁금했었다. 그 날이 있기 전까지는.